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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전】 14 형벌을 신중히 하고 빈곤을 구제해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다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쿠빌라이는 사람됨이 관후(寬厚)하고, 게다가 유가의 인서(仁恕) 사상의 영향을 받아 전쟁 중에 살생을 즐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정한 국책도 대부분 백성을 근본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제왕(諸王), 후비, 공주, 부마가 관가의 물건을 마음대로 취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포로로 잡은 부녀자를 창기로 삼는 것을 금지”해, 무릇 양가 집안의 부녀자를 매매하는 자는 파는 자와 사는 자를 모두 처벌했다. 왕조(王朝)를 다스릴 때 그는 형벌을 신중하게 사용했고, 또한 빈곤하고 고통받는 백성을 진휼하고, 혜민약국(惠民藥局)을 설치하며, 길가에 나무를 심고, 도박을 금지하는 등 여러 가지 혜민 정책을 채택했다.

인명을 중시하고 형벌을 삼가는 정책 추진

1271년, 쿠빌라이는 국호를 “대몽골국”에서 “대원(大元)”으로 고친 바로 그날 조서를 내려 금나라의 《태화율(泰和律)》 시행을 금지했으나, 원나라는 당시에 아직 자신들의 율법이 없었다. 1291년(지원 28년), 쿠빌라이는 중서참지정사(中書參知政事) 하영조(何榮祖)에게 원나라 정부가 이전에 반포한 모든 법률 조항에 근거하여 천하 통일 후 국가의 실제 상황에 부합하는 일부분의 법률 조항을 가려내게 했다. “공공 규칙, 백성 다스림, 도적 막기, 이재(理財) 등 열 가지 일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지원신격(至元新格)》을 편찬하고 천하에 반포하여 소송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게 했다.

이것은 원조에서 가장 일찍 실시된 법전이었다. 《원사·형법지(刑法志)》에서는 그것이 “대개 한때 시행되던 사례를 취해 조격(條格)으로 엮은 것일 뿐, 옛 율령을 끌어다 맞춘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사용된 지 32년 만에 비로소 《대원통제(大元通制)》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율서가 만들어지기 전에, 쿠빌라이는 형벌에 있어서 중원 왕조의 태(笞), 장(杖), 도(徒), 류(流), 사(死)의 오형(五刑) 제도를 가져다 썼으나, 동시에 태와 장의 두 형벌에 대해 일부를 수정했다. 즉 “말하기를 하늘이 그를 한 번 용서하고, 땅이 그를 한 번 용서하고, 내가 그를 한 번 용서하니, 본래 태형 50대에 해당하면 47대에서 멈추고, 장형 110대에 해당하면 단지 107대만 때린다”고 했다. 즉, 태형 10대부터 장형 110대까지 균등하게 세 대씩 줄여준 것이다.

사형에 대해서 쿠빌라이는 매우 신중했다. 그는 사천택 등의 대신들에게 “짐이 혹여 화가 나서 죄 있는 자를 죽이게 하더라도 너희는 바로 죽이지 말고, 반드시 하루 이틀 시간을 지체하며 고심한 후에 다시 상주하라”고 말했다. 그는 또 원에 항복한 남인(南人) 장령 관여덕(管如德)에게 “내가 천하를 다스림에 인명을 중시하니, 무릇 죄가 있는 자는 반드시 몇 번이고 대면하여 심문하고 과연 사실임이 밝혀진 후에 죄를 주며, 송의 권세를 쥔 간신들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며 종이 조각에 글자 몇 개 적어 사람을 죽이던 것과 같지 않다. 너는 오직 일심으로 직무에 봉사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입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중급 내지 고위 관료가 연루된 소송을 해결할 때, 쿠빌라이는 ‘정대(廷對)’, ‘정변(廷辯)’ 방식을 여러 차례 운용했다. 즉 대신들과 연루된 관원을 여러 차례 소집해 변론하게 하여 여러 일들이 명확해진 후에야 그들을 처분했다. 진남원수(鎮南帥) 당올태(唐兀台)가 하북하남도제형안찰사(河北河南道提刑按察司) 부사(副使) 왕침을 무고한 사건, 왕문통과 이단의 모반 사건, 바얀이 남송의 옥도잔(玉桃盞)을 사사로이 감추었다고 무고당한 사건, 그리고 아합마(阿合馬)와 상가(桑哥)의 탐오 부패 사건 등이 모두 그러했다.

죄책을 확정하고 처벌을 내릴 때도 쿠빌라이는 최대한 범위를 축소했다. 아릭부케가 귀순한 후 그를 옹호하던 천 여 명도 체포되었으나, 쿠빌라이는 최종적으로 우두머리 10명만 처형했다. 또 이단(李璮)의 반란이 평정된 후 쿠빌라이는 이단의 막료인 왕문통(王文統)만 죽였을 뿐, 사사로이 그들과 연락을 가졌던 일부 한인(漢人)들은 처벌하지 않아 사태를 확대하지 않았다. 이 밖에 남대어사(南台禦史)가 상소하여 그에게 태자 진금(真金)에게 선위할 것을 청한 일에 대해서도 쿠빌라이는 깊이 추궁하지 않았다.

元世祖忽必烈像。(公有领域)

원세조 쿠빌라이 상. (공유 영역)

백성들이 죄를 범했을 때 처벌할 때도 쿠빌라이는 똑같이 매우 신중했으며, 특히 사형 판결에 있어서 그러했다. 1272년, 섬서행성 관원 야속질(也速迭)이 상소해 “근래 기근으로 인해 도적이 매우 횡행하니, 한둘을 공개적으로 처형하지 않으면 징계할 방도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쿠빌라이는 중서성에서 이런 의견을 들은 후 승인하지 않았다.

이해 봄, 쿠빌라이는 감옥에 갇힌 죄수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을 알고 조령을 내려 각지에 사형수 외의 죄수들을 일시적으로 집으로 돌려보냈다가 가을에 다시 수감하도록 했다. 가을이 되자 집으로 돌아갔던 모든 죄수가 기일 대로 돌아왔고, 쿠빌라이는 가련한 마음이 들어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1274년, 전국에서 조정에 올려 처형하려던 사형수가 50명이었는데, 쿠빌라이는 중서성으로 하여금 그중 싸움으로 사람을 죽인 13례를 골라 사형을 면제하고 군대에 복무하도록 고치게 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쿠빌라이 재위 기간 중 사형 기록이 없는 해가 4년 있었다. 사형 인원이 가장 많았던 해는 1283년으로 총 278명이 처형되었고, 가장 적었던 해는 1263년으로 단 7명에 불과했다. 30여 년 동안 겨우 2500명 미만의 죄수가 처형되었는데, 이는 현대의 많은 국가보다 대단히 낮은 수치이다. 이것은 쿠빌라이가 인명 문제에 얼마나 신중했는지를 충분히 보게 해 준다.

또한 원군이 남송을 공격할 때, 대신 요추가 상소해 남송에서는 ‘등을 채찍질하고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것’이 성행한다고 말하자, 쿠빌라이는 즉시 “등을 채찍질하고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것 및 여러 남형(濫刑, 혹형)을 시급히 폐지하라”고 명령했다. 훗날 등을 채찍질하는 것과 깨진 기와나 항아리 조각 위에 무릎을 꿇리는 등 법 외의 혹형을 금지하는 내용을 원조의 형률(刑律)에 포함시켰다. 남송의 형벌과 비교하면 원조의 형벌은 가벼워지는 경향을 보였다.

1291년 《지원신격(至元新格)》에서는 특히 관원이 “먼저 이성적으로 사건의 정황을 분석하고 추단해야 하며, 혹형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상술한 금령들은 모두 쿠빌라이의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을 체현한 것이다.

남송이 멸망한 후 강남의 일부 도관(道觀)에 여전히 송조 황제의 초상화가 보존되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이를 전해 듣고 처음에 강남 백성들이 여전히 반란을 도모하려는 마음이 있는 줄 알고 곁에 있던 대신 석천린(石天麟)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 석천린은 “요나라가 멸망한 후 요나라 황제와 황후의 동상이 지금까지 서경(西京)에 보존되어 있으나, 어떤 금지령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쿠빌라이는 한 번 듣고 바로 깨달아 그 후로는 더 이상 이 일을 묻지 않았다.

또 한 번은 한 목동이 낙타 혹을 몰래 베어내자 쿠빌라이가 그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테게가 간하기를 “살아있는 낙타의 혹을 베어낸 것이 실로 잔인하긴 하오나, 이로 인해 목동을 처형한다면 폐하의 어진 마음에 상처가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했다. 쿠빌라이는 테게의 간언을 받아들여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벌로 목동을 처분했다.

그렇다면 하급 관원이 법을 엄격하게 집행해 형벌을 가볍고 신중하게 하려는 쿠빌라이의 생각과 차이가 있었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 한번은 형부시랑(刑部侍郎) 조병(趙炳)이 관원이 기생을 데리고 용선(龍船)에 오른 사건을 처리했는데, 조병은 법에 따라 그 관원을 징벌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 쿠빌라이의 수레 앞에 와서 고소장을 올렸다.

이에 쿠빌라이가 성지를 내려 조병을 책망했으나, 조병은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여기며 “신이 법을 집행하여 임금을 존중한 것은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쿠빌라이는 당시 매우 화가 나서 그를 황궁 밖으로 쫓아냈으나, 사후에 그를 처벌하지 않고 주변의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조병이 법을 쓰는 것이 너무 엄격하긴 하나, 사사로운 정을 따르는 자는 아니다”라고 했다. 이는 쿠빌라이가 신하의 공평무사한 법 집행을 여전히 깊이 인정하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이와 유사한 예가 적지 않다. 쿠빌라이가 형벌을 신중히 사용한 것은 당연히 유가의 관인(寬仁)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또한, 일정 부분 그가 귀의했던 티베트 불교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일찍이 “천하의 일은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맞추는 것(圓枘方鑿)과 같으니, 조금만 너그럽게 대하면 어디서든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쿠빌라이에게 큰 영향을 준 국사 파스파 등 라마들도 그에게 “매년 반드시 좋은 일로 가볍고 무거운 죄수들을 석방해 복과 이익으로 삼으소서”라고 권했다.

秋天所有被放回家的犯人都如期归来,忽必烈心生怜悯,大赦天下。(shutterstock)

가을이 되자 집으로 돌아갔던 모든 죄수가 기일 대로 돌아왔고, 쿠빌라이는 가련한 마음이 들어 천하에 대사면을 내렸다. (shutterstock)

빈곤한 이재민을 구제하고 의창을 설치

중국 역대 왕조에서 빈곤을 구제하고 특히 재민을 돕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는데, 쿠빌라이는 재위 기간에 이 방면에서도 매우 훌륭하게 일을 해냈다.

원사(元史)에서는 “구황(救荒)의 정치는 진휼(賑恤)보다 큰 것이 없다”라고 했는데, 쿠빌라이와 원조 전체의 진휼은 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첫째는 차세(差稅)를 면제해 주는 것이고, 둘째는 쌀과 곡식을 주는 것이었다.

차세 면제는 “은혜로 면제해 주는 은면(恩免)과 재해로 면제해 주는 것(災免)”이 있었고, 진대는 “환과고독(鰥寡孤獨)과 장애가 있어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자를 진휼하는 것과 홍수나 가뭄 및 역려(疫癘 돌림병)로 진휼하는 것, 그리고 경사(京師 수도)에 인구가 몰려 매년 값을 낮추어 쌀을 파는 것”이 있었다.

황제의 명으로 차세를 면제하는 ‘은면’은 1260년 중통(中統) 원년에 사료(絲料 실의 원료가 되는 원사)와 포은(包銀)의 수량을 감면해 준 것을 시작으로 거의 매년 있었다. 예를 들어 중통 2년에는 서경, 북경, 연경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하고 진정, 대명, 하남, 섬서, 동평, 익도, 평양 등 로(路)의 부역을 줄여주었다. 중통 3년에는 북경 등 로(路)의 사료와 포은을 면제해 주었다.

이 외에도 각지에서 도적의 공격과 약탈, 가을 가뭄과 서리 피해, 누에 피해, 황충(메뚜기) 피해, 홍수나 가뭄 재해, 지진 등의 재난을 만나면 부세와 요역, 사료, 포은, 세량(稅糧) 등이 모두 그에 맞게 감면되었다. 이재민을 위해 관부에서는 돈, 곡식, 비단 등을 지급해 진휼했으니, 예를 들어 1266년에는 양식 3만 석으로 제남의 굶주린 백성을 진휼했고, 과은(課銀) 150정을 지급해 감주(甘州)의 빈민을 구제했다.

그리고 환과고독, 장애인 및 고아 등에 대해서는, 1260년 쿠빌라이가 막 대칸의 자리에 올랐을 때 조서를 내려 천하에 알리기를 “환과고독과 장애가 있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은 하늘 백성 중에서도 호소할 곳이 없는 자들이니, 소재지 관사에 명하여 양식으로 그들을 부양하게 하라”고 했다.

1264년, 쿠빌라이는 다시 조서를 내려 “병든 자에게는 약을 주고, 가난한 자에게는 양식을 주라”고 했다.

1269년에는 상평창(常平倉)과 의창(義倉)을 설치했다. 상평창은 한대의 경수창(耿壽昌)에서 시작되었고, 의창은 당대의 대주(戴胄)이 시작했는데 모두 구황의 좋은 법이었다. 상평창의 법은 풍년에 쌀값이 저렴하면 관부에서 값을 올려 사들이고, 흉년에 쌀값이 비싸지면 관부에서 값을 내려 파는 것이었다. 의창은 매 사(社)마다 창고 하나를 두고 사장(社長)이 관장하게 하여, 풍년에 매 정(丁)마다 조 5말을 내고 구정(驅丁)은 조 2말을 내게 했다가 재해가 있는 년도에 사의 대중에게 공급했다. 예를 들어 1284년 신성현(新城縣)의 수해와 1292년의 기근 때 모두 의창의 비축 식량으로 진휼했다.

원조 사가 중국을 유람한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도 그의 여행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대칸은 오곡이 풍성하여 가격이 낮을 때 사람을 시켜 거두어 저장하게 했다. 각 성에는 곡식을 전담하여 저장하는 식량 창고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세심하게 돌보게 하여 3~4년 내에 부패하지 않도록 했다. 재해를 입은 백성은 그해의 부세를 면제해 주고 조정에서 곡식과 종자를 주었으니 이것이 대칸의 덕정이다.”

1271년, 각 로에 제중원(濟眾院)을 설치해 가난하고 고통스런 사람들을 수용하게 하고 양식을 제공하는 외에 땔나무도 제공하게 했다. 1282년, 제중원은 양제원(養濟院) 한 곳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년 후, 관부는 경사 남성의 고령 노인들에게 의복과 양식, 숙소를 제공했다. 이후 과부에게 겨울과 여름 옷을 주고, 가난한 집에 매일 5근의 땔나무를 주는 등 복지 조치를 추진했다.

마르코 폴로 역시 이 광경을 똑같이 눈여겨보았다. 그는 쿠빌라이가 가난한 집안에 양식과 의복을 제공해 생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이 등록한 후 양제원에 거주하는 것을 보았다. 담당 관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3만여 접시의 쌀이나 기장, 혹은 조를 베풀어주었다.

사적(史籍)에는 매년 면제해 준 요역과 부세, 그리고 이재민을 진휼한 기나긴 목록이 열거되어 있다. 쿠빌라이의 이러한 조치들은 “굶주려도 백성이 손해를 보지 않고, 풍년이 들어도 농민이 상하지 않게 했으며, 곡식 가격이 높고 낮게 요동치지 않아 백성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없게 했다.” 《원사》에서는 이에 대해 “진정으로 한당(漢唐)을 잘 본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고 찬탄했다.

常平仓之法是丰年米价便宜,官府就增价购买;荒年米贵,官府就减价出售。图为清焦秉贞《耕织图》册局部。(公有领域)

상평창의 법은 풍년에 쌀값이 저렴하면 관부(官府)에서 값을 올려 사들이고, 흉년에 쌀값이 비싸지면 관부에서 값을 내려 파는 것이었다. 그림은 청 초병정(焦秉貞)의 《경직도(耕織圖)》 일부. (공유 영역)

혜민약국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다

빈곤하고 재해를 입은 백성들이 따뜻하고 배를 곯지 않게 했다면, 그들이 병에 걸렸을 때는 또 어떻게 해야 했을까? 원조는 혜민약국을 설치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일찍이 오구데이 시기에 연경(燕京) 등 10로에 혜민약국을 설치하고 봉어(奉御 관직 이름) 전확확(田闊闊) 및 태의 왕벽(王璧), 제집(齊楫) 등을 약국의 관원으로 삼아 운영하게 했으며, 조정에서 은 500정을 운영 자본으로 제공했다.

혜민약국은 북송의 숙약소(熟藥所)와 화제국(和劑局)에서 유래한 것으로, 주로 일반 민중을 겨냥했으며 조정에서 보조금을 주어 그곳에서 판매하는 약물이 시장 가격보다 훨씬 낮게 했다. 약을 파는 것 외에 혜민약국에는 의관(醫官)이 배치되어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으니, 원조 당시에 가장 주요한 자선(慈善) 의료 기관이었다.

쿠빌라이 시기에 이르러 1261년, 쿠빌라이는 왕우(王祐)에게 명하여 성도로(成都路)에 혜민약국을 개설하게 했고, 또 그를 서천(西川) 등 로(路)에 파견하여 약국을 위한 의학 인재를 찾아보게 했다. 훗날 상도(上都)에도 혜민약국을 설치했다. 원 성종 때에 이르러 전국에 보편적으로 혜민국을 설치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경비 조달 방식에 있어서 쿠빌라이 시기에는 송조의 경영 방식을 바꾸었다. 경영자가 먼저 정부로부터 일정 금액의 자금을 밑천으로 받아 가는데, 이는 중통초(中統鈔) 100량이었으며, 경영을 통해 이윤을 얻은 후 다시 그 돈으로 도움이 필요한 민중을 도왔다. 정부는 더 이상 약물 판매를 직접 경영하지 않아, 민간에 관련 업종에 종사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부여했다.

길가에 나무를 심고 도박을 금지

쿠빌라이가 대칸의 자리에 올랐을 때 일찍이 조서를 내려 천하에 알리기를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음식을 하늘로 삼으며, 의식(衣食)은 농상(農桑)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1270년에 《농상지제(農桑之制)》를 반포하여, 모든 남정(男丁 성인 남자)이 매년 뽕나무와 대추나무 20그루를 심도록 규정했고, 만약 토양이 적당하지 않으면 느릅나무나 버드나무로 바꾸어 심을 수 있게 하되 모두 살려내어 자라나게 한 것을 수량으로 셈했으며, 각급 관리가 독촉하여 실시하게 했다.

1272년, 쿠빌라이는 다시 성지를 내려 대도(大都)에서 각지로 통하는 길목의 주현 관부와 백성들에게 성곽 주변과 길가에 느릅나무, 회화나무를 심도록 명령했고, 관부에서 심은 나무는 민가에서 가져다 쓰도록 규정하되 관부가 재목으로 자라나도록 보호할 책임을 지게 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하남부 및 관할 각 현의 도로변에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는데, 길가의 나무를 “이치에 맞지 않게 함부로 벌채하는” 자가 있으면 “각 로(路)의 다루가치와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가 조항에 따라 죄로 다스렸다.” 도로변에 나무를 심는 제도는 이렇게 연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 역시 쿠빌라이 시기의 식수 상황을 증명한다.

“대칸은 큰 도로 양옆에 나무를 심도록 명령했는데, 나무 사이의 거리가 두세 걸음 정도였다. 도로는 흠차, 상인, 그리고 백성이 통행하는 곳이었다. 이 나무들은 모두 높고 커서 아주 먼 곳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대칸이 이렇게 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로를 분명히 보게 하여 길을 잃지 않게 하려는 것으로, 보행자에게 아주 유리했다. 심지어 사막 도로변에서도 이러한 나무들을 찾을 수 있어 상인과 먼 길을 여행하는 자들을 매우 편안하게 해 주었다.” 이것은 아마도 마르코 폴로가 이로 인해 혜택을 입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성에게 이로운 나무를 심는 것 외에도, 쿠빌라이는 경제가 발전하고 백성의 생활이 개선됨에 따라 도박꾼이 늘어나고 도박이 커다란 위해를 가져온다는 점을 의식했다. 그리하여 1286년 2월 성지를 반포해 “여러 사람은 돈과 재물을 걸고 도박하지 말라… 만약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 붙잡아 관부에 넘기는 것을 허용하며, 범인은 북쪽 변방의 전지(田地)로 유배 보내어 농사를 짓게 하겠다”고 했다. 훗날 절강도안찰사가 평강로(平江路) 상숙현(常熟縣) 요천륙(姚千六)의 도박 사건을 심리한 것과 회서강북도안찰사가 황매현(黃梅縣) 왕양아(王佯兒)의 도박 사건을 심리한 것 등은 모두 이 성지에 의거해 행해진 일이었다.

앞서 서술한 가벼운 형벌, 진휼, 혜민약국 설치 등의 혜민 정책은 원대(元代)의 사회 안정과 발전, 그리고 민심의 안정에 중대한 작용을 했다.

또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 따르면 쿠빌라이는 점성술을 믿었으며, 대도 안에서 천상을 보고 점을 치는 데 능한 사람이 한인과 기독교 선교사를 포함해 대략 5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사서에 기재된 일식, 월식, 혜성, 지진 등은 모두 쿠빌라이에 의해 하늘이 내리는 경고로 여겨져 그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했다. 분명 제왕의 신분이었음에도 쿠빌라이는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도리를 깊이 알고 있었기에, 백성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며 하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명군(明君)이 해야 할 바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元史》
《忽必烈傳》
《忽必烈和他的世界帝國》
《馬可波羅行記》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7/2/n1306382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