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칭기스칸이 건립한 몽골국은 세 차례의 서정(西征)을 거쳐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다. 칭기스칸은 일찍이 정복한 토지를 그의 세 아들에게 분봉해 주었으므로,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세 종족을 가리켜 ‘서도제왕(西道諸王)’이라 불렀다. 막내아들 툴루이는 아버지가 직접 지배하던 영지, 즉 오논 강 및 케룰렌 강 유역 일대의 몽골 본토 지방을 물려받았으며, 이는 훗날 원조(元朝)의 강역이 되었다.
그 후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세 후손은 각각 킵차크 칸국(欽察汗國), 차가타이 칸국(察合台汗國), 우구데이 칸국(窩闊台汗國)을 건립했고, 툴루이 계통의 훌라구(旭烈兀)는 쿠빌라이의 셋째 동생으로서 일칸국(伊兒汗國)을 건립했다. 4대 칸국의 칸은 중앙과 번속(藩屬) 관계에 있었으며 대칸에게 직접 책임을 졌다.
쿠빌라이 통치 시기에 이르러 칸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킵차크 칸국과 일칸국이 독립의 길로 나아갔으나, 이 독립된 칸국들은 여전히 원조 황제를 대칸으로 존봉하며 그를 ‘모든 몽골 군주의 군주’라 칭했고, 원조 황제를 자신들의 종주로 인정했으니 이들은 원조의 ‘종번지국(宗藩之國)’이었다. 따라서 이들 칸국의 칸이 즉위할 때는 원 황제의 인가를 받아야 했으며, 이 외에도 이들과 원조 상호 간에 사절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킵차크 칸국과의 관계
칭기스칸 시기, 장남인 주치는 킵차크, 호라즘 및 캉리국의 옛 땅에 분봉되었는데, 여기에는 지금의 아랄해 이서, 카스피해 이북의 돈 강과 볼가 강 일대의 킵차크 초원이 포함되었다. 주치가 칭기스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봉지는 그의 아들 바투(拔都)에게 돌아갔다.
1243년 초, 바투는 볼가 강 하류 지역에 도착하여 사라이 성(薩萊城 지금의 아스트라한 부근)을 수도로 삼고 킵차크 칸국을 정식으로 건립했으니, 그 영토 범위는 동쪽으로 이르티시 강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다뉴브 강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크림반도와 북카스카스를 관할했다. 이 칸국은 몽골의 도성에서 수만 리 떨어져 있어 파발마가 급히 달려도 200여 일이 걸렸다. 바투가 머물던 천막이 금빛 지붕을 사용했기 때문에 ‘킵차크 칸국’은 ‘금장 칸국(金帳汗國)’이라고도 불렸다.
바투는 툴루이 후손들과 친하게 지내며 뭉케가 대칸의 자리를 계승하는 것을 지지했다. 1255년 바투가 사망한 후 그의 동생 베르케(別兒哥)가 킵차크 칸국의 칸이 되었다. 1266년 베르케가 사망하자 바투의 손자 몽케테무르(忙哥帖木兒)가 즉위해 쿠빌라이의 책봉을 정식으로 받았다. 1276년, 뭉케의 넷째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쿠빌라이의 황자인 노무간(那木罕), 코코추(闊闊出)를 인질로 붙잡아 원래는 카이두에게 보내려 했으나 카이두가 접수를 거부하자 시리기는 이들을 몽케테무르에게 보냈고, 몽케테무르는 다시 쿠빌라이에게 돌려보냈다.

1243년 초, 바투가 볼가 강 하류 지역에 도착하여 사라이 성을 수도로 삼고 킵차크 칸국을 정식으로 건립했다. (fotolia)
일칸국과의 관계
우구데이 집권 시기, 일찍이 군대를 파견해 페르시아 서부에서 다시 회복한 호라즘 제국을 소멸시키고 페르시아의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고 투항시켰으며, 그 후 조지아, 아르메니아, 루미 등도 차례로 몽골에 귀부했다. 우구데이는 이를 위해 아무다리야 강 서쪽 페르시아 각 성을 관할하는 행정 기구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해 지키게 했다.
1251년 뭉케가 대칸으로 즉위한 후 아무다리야 등처행중서성(阿姆河等處行中書省)을 두고 아르군(阿兒渾)을 행성 장관으로 삼아 호라산 투스 성(지금의 이란 마슈하드 부근)에 치소를 두었다. 1256년, 뭉케 칸은 동생 훌라구를 파견해 서정(西征)을 단행해 마자다르(지금의 이란 마잔다란 주)의 여러 산악 국가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바그다드를 함락해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으며, 그 후 1259년에는 시리아를 침공했다.
시리아에서 차례차례 승리를 거두던 즈음, 훌라구는 갑자기 뭉케 칸이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로 돌아와 일칸국을 건립했으나, 장수 키트부카(怯的不花)를 남겨두어 계속 공격하게 했다. 키트부카의 군대는 그 후 이집트 지원군의 반격에 부딪혀 궤멸되었고, 몽골이 점령했던 시리아의 여러 성을 모두 상실했다.
이때 훌라구는 쿠빌라이가 이미 대칸의 자리를 계승했고 막내 동생 아릭부케와 대칸 지위 다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동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멈추고 양측에 사신을 파견하여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옹호한다고 표시하고 아릭부케에게 포기할 것을 권유했다. 쿠빌라이는 지시를 내려 아무다리야 강 서쪽에서 이집트 국경에 이르는 페르시아 국토와 그 지역의 몽골, 아랍 군민을 훌라구의 통치에 귀속시켰다.
훌라구의 일칸국은 그 영토가 동쪽으로 아무다리야 강과 인더스 강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소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고, 남쪽으로 페르시아만에 이르며 북쪽으로 코카서스산에 달했고 수도는 메라게(지금의 이란 동아제르바이잔 주 마라게)였으며, 장남 아바카(阿八哈)에게 칸국 동부의 호라산 등 성지를 다스리게 했다.
1264년, 쿠빌라이는 사신을 보내 훌라구를 일칸으로 책봉하고 그에게 군대 3만 명을 증파해 주었다. 이듬해 훌라구가 사망하자 아바카가 자리를 이어받았고 사신을 보내 부고를 알리니, 쿠빌라이는 사신을 보내 조서를 내려 그를 칸으로 세웠다. 아바카는 즉위한 후 타브리즈에 도읍을 정하고 메라게를 배도(陪都 부도읍)로 삼았다. 그후 쿠빌라이가 남송을 공격할 때 아바카에게 회회 장인을 구하니, 회회포(回回炮 아라비아 대포) 기술이 이로 인해 중원에 전해지게 되었다.
아바카는 재위 기간 동안 원조와 줄곧 우호적인 번속 관계를 유지했다. 1282년 아바카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 아흐마드 테쿠데르(台古塔兒)가 즉위했는데, 그는 이슬람교를 믿었기 때문에 즉위한 후 자신을 ‘칸’이라 칭하지 않고 ‘술탄’으로 고쳐 불렀으며, 소속 백성들에게 일률적으로 이슬람교를 믿으라고 명령했다. 원조는 종교의 자유를 추진했으므로 쿠빌라이는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슬람교를 믿고 싶지 않았던 아바카의 아들 아르군(阿魯渾)이 1284년 일부 귀족들과 연합하여 테쿠데르를 살해하고 이를 쿠빌라이에게 보고했다. 쿠빌라이는 그에게 칸의 자리를 계승하게 하고 권신 부카(不花)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말하자면 킵차크 칸국과 일칸국은 비록 점차 독립해 나갔으나 여전히 자신들이 원조의 ‘종번지국’임을 인정하며 원조와 정치, 경제, 문화적 연계를 유지했고, 상인, 성직자와 사절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졌으며 이 두 나라의 일부 도시들은 동서양이 왕래하는 교통 허브가 되었다.
원조는 상도(上都 개평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통하는 역로(驛路)를 통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 간의 교통을 연결했으니, 유명한 ‘초원 실크로드’의 기점이 바로 원 상도였으며 매년 봄이 되면 많은 상인이 유럽과 아시아 각지에서 달려와 각종 기이한 물품과 보물로 원나라 사람들과 거래했다. 원조의 역로 위에는 로마 교황의 사자, 고려 국왕, 페르시아, 미얀마, 네팔의 사신 및 이탈리아 상인, 인도 승려 등이 왕래하여 중화 문명과 유럽·아시아의 교류 범위가 전례 없이 확대되었다.

유명한 ‘초원 실크로드’의 기점이 바로 원 상도였다. 그림은 몽골 초원. (에포크타임스 제작)
1240년부터 1340년에 이르는 100년 동안은 중국과 유럽이 직접 접촉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기회였는데, 이는 이 전후로 아랍인과 터키인들이 동서양의 교류를 다소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쿠빌라이 시기 유럽과의 교류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단연 이탈리아 여행가이자 상인인 마르코 폴로로, 그는 원조에서 십여 년간 거주한 후 유럽으로 돌아가 《마르코 폴로 여행기(馬可‧波羅行紀)–동방견문록》를 저술하여 중국 각지(서역, 남해 등 포함)에서 보고 들은 바를 기록했으니, 그 안에는 원조 초기의 정사, 전쟁, 궁중 비사, 축제, 사냥 등이 서술되어 있었고 특히 원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의 경제, 문화, 민정, 풍속 및 서안, 개봉, 남경, 진강(鎭江), 양주(揚州), 소주(蘇州), 항주(杭州), 복주(福州), 천주(泉州) 등 각 대도시와 상업 항구의 번영상을 상세히 기록했다. 말하자면 이것은 처음으로 유럽인들에게 발달한 중화 문명을 비교적 전면적으로 소개해 주었으며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며 문화와 교육이 발달한 중국의 이미지를 세계에 보여준 것이다.
《여행기》 속의 쿠빌라이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마르코의 아버지 니콜로와 숙부 마페오는 일찍이 킵차크 칸국을 지나며 베르케 칸을 배알하고 열정적인 대접을 받았으며 이곳에서 1년간 머물렀고, 그 후 훌라구의 사신을 따라 대도에 가서 쿠빌라이를 배알하고 예우를 받았다. 이 때가 1266년이었다. 쿠빌라이는 그들에게 많은 일에 관해 물었는데, 예컨대 그들의 군주가 어떻게 국토를 다스리는지, 어떻게 재판을 하는지, 어떻게 전쟁을 치르는지, 어떻게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지, 그리고 국내의 귀족 등급, 교황과 교회 및 사회 풍속 등에 관한 것이었다.
쿠빌라이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들에게 원조 사신 한 명과 동행하여 로마로 갈 것을 청했고, 쿠빌라이는 또한 로마 교황에게 편지를 써서 교황이 사람을 원조로 보내 기독교와 유럽의 문학 예술을 소개해 줄 것을 청했다. 대칸은 또한 그들에게 금패(金牌)를 하사했는데, 그 위에는 세 사람이 지나가는 곳의 현지에서는 마필과 호위 등 필요한 물품을 반드시 공급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세 사람이 로마에 도착한 후에야 원래의 교황이 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고, 복명하기 위해서는 신임 교황이 즉위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신임 교황 그레고리오의 서신을 받은 후, 폴로 형제는 니콜로의 17세 된 아들 마르코를 데리고 1271년 중국으로 향했다. 그들은 베네치아에서 배를 타고 흑해 남안에 상륙한 뒤, 육로를 통해 우여곡절 끝에 1275년 원 상도에 도착했고 이어 대도에 도착하여 모두 쿠빌라이의 열정적인 대접을 받았다.
마르코는 총명하고 영리하여 새로운 것을 매우 빨리 받아들였는데, 몽골어를 빨리 익혔을 뿐만 아니라 몽골 문자, 몽골인의 전술에 대해서도 매우 잘 이해했고, 그가 한어(漢語)도 배웠다는 설도 있어 쿠빌라이는 그를 매우 총애하여 원 관직에 봉하고 각지로 파견했다. 그는 선후로 지금의 신강, 감숙, 내몽골, 산서(山西), 섬서(陝西), 사천, 운남, 산동, 강소, 절강, 복건 및 북경 등지를 다녔고 베트남, 미얀마, 수마트라에도 파견나갔다. 그는 이로 인해 중국의 많은 곳을 다녔고 유럽보다 선진적인 많은 문화적 성취들을 보았다.
마르코는 한 곳에 도착할 때마다 항상 현지의 풍속, 지리, 인정을 상세히 고찰했다. 그는 사명을 완수한 후 봉사(奉使)의 일을 보고했을 뿐만 아니라, 각지의 풍토와 인정을 알고 싶어 하던 쿠빌라이에게 도중에 겪은 견문을 이야기해 주었다. 쿠빌라이와 좌우 대신들은 모두 그를 가리켜 장차 “반드시 박식하고 큰 재능을 지닌 사람이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마르코의 눈에 비친 위대한 군주 쿠빌라이의 이미지는 이러했다. “대칸은 풍채가 당당하여 보기만 해도 사람들의 마음에 호감을 주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중간 체구에 근육과 사지의 배치가 적당하고, 얼굴은 붉고 흰빛이 분명하며 눈은 검고 코는 바르다.” 그에게는 네 명의 정처가 있었는데 모두 황후라 불렸다. 그리고 쿠빌라이의 왕조 통치 및 백성들에 대한 사랑, 예컨대 농작물이 흉년이 들거나 재해가 발생했을 때 백성들을 진휼(賑恤)한 것은 마르코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매년 음력 8월 28일은 쿠빌라이 대칸의 생일이었는데, 이 날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대칸에게 공물을 바쳤고 모든 종교도들도 함께 대칸을 위해 복을 빌었다.

《마르코 폴로 여행기》 삽화: 마르코 폴로가 대도 왕정에서 쿠빌라이를 만나는 모습. (공유 영역)
《여행기》 속 원 도성의 번성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서는 당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던 상도(上道)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내부에 대리석 궁전이 하나 있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그 방 안에는 모두 금칠이 되어 있고 온갖 조수와 화목이 그려져 있어 교묘함이 극에 달하니 기술의 훌륭함이 보는 이의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하기에 족하다.” “이 궁전은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데 광대함이 16마일에 달하며, 내부에는 샘과 도랑, 강물이 흐르는 초원이 매우 많고 온갖 야생동물도 보이나 맹수는 없으니, 이는 대개 군주가 울 안의 송골매, 매에게 먹일 먹이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영국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는 1797년 《여행기》를 읽은 후 〈쿠블라 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안락한 궁전의 거꾸로 된 그림자가 있으니, 마치 물결의 중앙에 떠서 움직이는 듯하구나. 여기서는 조화로운 음운을 들을 수 있으니, 저 땅속 샘과 암굴에서 흘러나오는도다.”
궁전, 초원, 숲, 시내로 구성된 꿈속의 상도는 당시 서양 국가들에서 재너두(Xanadu)라고 불렸으며, 《웹스터 영어 대사전》에 단독 어휘로 등재되기도 했다. 유 천문학자들은 심지어 이를 토성의 여섯 번째 위성의 이름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수백 년 동안 재너두는 유럽과 미국인들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장소를 묘사하는 형용사가 되었으며 신선들이 사는 선경(仙境)과 같은 뜻을 갖게 되었다.
《여행기》는 또한 ‘광대하고 장엄한’ 칸발리크(汗八裏) 성, 즉 대도 무역의 발달과 호구의 번성함을 묘사했다. 대도 성내와 성외에는 많은 ‘화려하고 거대한 집’이 있어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외국인들도 있었으니 이들은 공물을 바치러 왔거나 장사를 하러 온 자들이었다. 따라서 도성 안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온갖 물품들이 모여들었으니 이는 세계의 다른 도시들이 필적할 수 없는 바였다. 실크 한 가지만 해도 매일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천 수레가 넘었고 매 수레당 거의 500킬로그램에 육박했으니, 이는 매일 거의 50만 킬로그램의 실크가 대도로 들어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실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또 당시 ‘행재(行在)’라 불렸던 항주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상업이 흥륭했으며 12가지 업종이 있었고 각 업종마다 12,000호가 있었다고 한다.
마르코의 필치 아래 원조는 발달한 공업과 상업, 번화하고 시끌벅적한 시장, 화려하고 저렴한 실크, 그리고 웅장하고 장관인 도성, 완비되고 편리한 역도 교통, 보편적으로 유통되는 지폐 등을 갖추고 있었으니 어찌 당시 사람들이 동경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마르코 폴로 여행기》 사본, 제123—124장. (공유 영역)
폴로 일가의 유럽 귀환
중국에 십여 년간 머문 후 마르코의 아버지와 숙부는 고향을 매우 그리워하여 쿠빌라이에게 하직하고 귀국할 것을 청했으나, 쿠빌라이는 마르코를 매우 아꼈으므로 동의하지 않았다. 마침 일칸국의 칸 아르군이 사신을 보내 쿠빌라이에게 몽골 공주 코코친(闊闊真)을 아내로 맞이하기를 청했다. 사신들이 보기에 마르코 세 사람은 라틴 사람이고 인도 해안 경로의 사정에 정통했으므로 쿠빌라이에게 그들이 동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쿠빌라이는 마르코 폴로를 아끼는 마음을 누르고 이 요청에 동의했다.
1292년, 마르코와 아버지, 숙부는 쿠빌라이의 부탁을 받아 천주에서 출발해 해로를 통해 공주를 일칸국까지 호송하는 혼인을 성사시켰다. 쿠빌라이는 또한 그들에게 사명을 완수한 후 길을 돌려 귀국해도 좋다고 약속했다. 길을 떠나기 전 쿠빌라이는 그들에게 금패 두 개를 하사했는데 이를 지니고 있으면 연도(沿道)에서 많은 편의를 얻을 수 있게 했고, 교황, 프랑스 국왕, 영국 국왕, 스페인 국왕 등 여러 국왕에게 보내는 서신을 전하게 했다.
1295년 폴로 일가는 유럽으로 돌아왔다. 유럽으로 돌아온 폴로 일가는 베네치아에 정착했다. 현지 사람들은 그들이 동방에서 겪은 경험담을 듣기를 매우 좋아했다. 1296년,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의 해전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감옥 안에서 그는 중국에서의 경험을 같은 감옥 동료이자 작가인 루스티켈로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이로 인해 마르코 폴로가 구술하고 루스티켈로가 기록한 《마르코 폴로 여행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현지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몇 달 후에는 이탈리아 전역을 풍미했다. 1324년 마르코 폴로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이 책은 이미 여러 유럽 문자로 번역되어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마르코 폴로 여행기》는 이미 119종의 각종 문자 판본이 존재한다.
서양의 마르코 폴로 연구 학자인 모리스 콜리스(Maurice Collis)는 이것이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계몽 작품으로, 폐쇄적이었던 유럽인들에게는 귀를 열고 눈을 뜨게 하는 것과 같았으며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지식 영역과 시야를 보여주었다. 이 책의 의의는 그것이 유럽 인문주의의 광범위한 부흥을 이끌었다는 점에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동시에 유럽인들의 동방에 대한 열렬한 동경을 자극하여 ‘동방(東方) 열풍’을 일으켰고, 이후 신항로 개척에도 거대한 영향을 미쳤으므로 ‘세계 제1의 기서(奇書)’로 간주된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 소개가 서양인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킨 것은, 근본적으로 쿠빌라이가 동서양의 우호 왕래를 추진하고 넓은 흉금으로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받아들여 중화(華)에 오게 한 것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가 있다.
참고자료:
《元史》
《忽必烈傳》
《忽必烈和他的世界帝國》
《馬可波羅行記》
《成吉思汗忽必烈評傳》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7/9/n13079158.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