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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연소 전기】 정사에 나오는 ‘양무적(楊無敵)’

앙악

【정견뉴스】

‘양가장(楊家將)’은 북송(北宋)의 유명한 영웅 양업(楊業)의 가문이 5대에 걸쳐 나라를 지킨 충렬(忠烈)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중국에서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와 집집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역대로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평서(評書), 연극, 소설은 수백 수천에 달하며, 양가장과 관련된 유적과 지명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정사에 기록된 양가장에는 어떤 감동적인 사적들이 있을까?

이번 편에서는 양연소(楊延昭)의 부친인 양업(楊業 양계업)이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긴 영웅적인기록을 살펴본다.

정사 속 양가장, 양업의 위엄 거란을 두렵게 해

양업, 양연소, 양문광(楊文廣) 3대는 모두 북송의 명장으로, 이들을 아울러 ‘양가장(楊家將)’이라 한다. 왼쪽: 양업(923년~986년), 일명 계업(繼業), 북송의 항요(抗遼) 장수. 중간: 양연소(958년~1014년), 양육랑(楊六郞)이라 불리는 북송의 항요 명장. 오른쪽: 북송 대장 양문광( ?~1074년). (공유 영역)

양연소의 부친 양업 (923년~986년)은 병주(幷州) 태원(太原) 사람이다. 젊은 시절 북한(北漢)에서 관리로 지내며 용맹하고 전투에 능해 무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안문관(雁門關) 일대에서 요나라(983년~1066년 사이에 국호를 거란으로 바꿈)와 수십 년간 교전하며 거의 백전백승하여 ‘태원효장(太原驍將)’, ‘양무적(楊無敵)’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나중에 대송(大宋)에 귀순했다.

양업은 장수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 양신(楊信)은 북한에서 인주자사(麟州刺史)를 지냈다. 양업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호방하고 기도(氣度)가 범상치 않았으며, 임협(任俠)을 중시하고 말 타기와 활쏘기가 뛰어났다. 사냥을 몹시 좋아했는데 잡은 짐승이 늘 남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는 일찍이 주변 수하들에게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장차 장수가 되어 출정한다면, 병사를 조련하고 장수를 부리는 일은 매나 개를 부려 꿩과 토끼를 잡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했다. 약관의 나이에 북한의 유숭(劉崇)에게 투항해 보위지휘사(保衛指揮使)를 맡아 여러 번 공을 세웠고, 건웅군절도사(建雄軍節度使)로 승진했다. 가는 곳마다 거침이 없어 백전백승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무적(無敵)’이라 찬양했다.

송태종(宋太宗)이 태원을 친정(親征)할 때 이미 양업의 위명(威名)을 듣고 남몰래 여러 차례 두터운 상을 주어 그를 포섭하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의 형세가 날로 위태로워지고 고립된 성이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양업은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임금인 유계원(劉繼元)에게 간언하여 조기에 송나라에 귀순함으로써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막으라고 권했다. 결국 유계원은 송나라에 항복했다.

송태종은 보고를 받은 후 즉시 중사(中使)를 보내 양업을 만났고, 그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우령군위대장군(右領軍衛大將軍)이란 직위를 내렸다. 군대를 이끌고 조정으로 돌아온 후 다시 정주자사(鄭州刺史)로 승진시켰다. 양업이 오랫동안 변방의 일을 맡아 적의 정세에 정통했으므로, 태종은 그를 대주지주(代州知州)에 임명하고 삼교주박병마부서(三交駐泊兵馬部署)를 겸하게 했다. 길을 떠나기 전 태종은 특별히 밀봉한 중한 선물을 내리며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얼마 후 거란군이 대거 변방을 침범하여 안문관을 넘어 남하하니 기세가 매우 흉흉했다.

양업은 휘하의 수천 기병만을 거느리고 서쪽 산줄기에서 조용히 움직여 좁은 길로 우회해 안문 북구(北口)에 다다랐다. 그리고 갑자기 적군의 배후를 습격해 거란의 주력 부대를 단번에 격파했다. 이 전투의 대승은 변방 너머까지 진동시켰고, 송 조정은 그 공훈을 가상히 여겨 그에게 운주관찰사(雲州觀察使)를 더해주었다.

이후로 거란군은 멀리서 양업의 군기(軍旗)만 보여도 싸우지 않고 퇴각했다. 양업의 위명은 많은 변방의 주장들이 그를 시기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암암리에 그를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는 이도 있었다. 태종은 이를 읽고 모두 무시한 채 오히려 그 상소문들을 밀봉하여 양업에게 보내 처리하게 함으로써 그를 깊이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양업의 마지막 전투, 충혼(忠魂)이 영원히 역사에 남다

북송 옹희(雍熙) 3년(986년), 송태종은 다시 거란을 북벌해 잃어버린 연계(燕薊 연운 16주)의 옛 땅을 수복하기로 결정하고 세 갈래로 나누어 출격했다. 충무군절도사(忠武軍節度使) 반미(潘美)를 주장으로 삼고, 왕선(王侁)과 유문유(劉文裕)를 호군(護軍)으로, 운주관찰사 양업을 부장으로 삼아 서로군(西路軍)을 이끌고 안문관에서 출발하게 했다.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운(雲), 응(應), 삭(朔), 환(寰) 4개 주를 연이어 함락하고 상간하(桑幹河) 가에 다다랐다. 그러나 조빈(曹彬)이 이끄는 동로군(東路軍)이 패배하자, 송태종은 즉시 세 갈래 군대 모두 철수하라는 명을 내렸고, 서로군이 점령한 4개 주의 백성들을 북송 경내로 이주시키도록 하며 반미가 이끄는 군대가 이들을 보호하게 했다.

반미와 양업이 군대를 철수하여 삭주 남쪽의 낭아촌(狼牙村)에 이르렀을 때, 거란의 소태후와 수하의 대장들이 10여 만 대군을 이끌고 이미 환주를 함락한 상태였다. 양업은 적군의 기세가 성한 것을 보고 길을 돌아가며 백성들의 철수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가곡구(陳家穀口)에 강노병(強弩兵)을 배치해 거란군을 매복 습격하고, 기병으로 중로(中路)를 지원하여 철수하는 군민들이 안전하게 경내로 돌아오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반미와 감군(監軍) 왕선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왕선은 비꼬며 말했다. “수만 정병을 거느리고도 이제 와서 적을 호랑이처럼 무서워하며 이토록 겁을 내다니! 내가 보기에 구태여 돌아갈 것 없이 안문 북천(北川)에서 곧장 나아가 북을 치며 진격하면 될 일인데, 무엇 때문에 이리도 우려하는가?”

이때 유문유도 찬성하는 뜻을 표했다.

양업이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절대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패합니다!”

왕선이 냉소하며 말했다.

“군후(君侯)는 평소 ‘무적’이라 불리셨는데, 이제 적을 보고도 쭈뼛거리며 싸우기를 주저하시니, 설마 마음속에 딴 뜻이라도 품고 계신 것이오?”

양업이 대답했다.

“나 양업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시세가 불리하여 사졸들을 헛되이 죽게 하면서 공도 세우지 못할까 염려할 뿐입니다. 그대들이 나더러 죽으러 가지 않는다고 비난하니, 내가 먼저 여러 공들 앞에서 죽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병사를 거느리고 석협로(石峽路)를 통해 삭주로 출발했다.

길을 떠나기 전 그는 눈물을 흘리며 반미에게 말했다.

“제가 이번에 가면 반드시 전세가 불리할 것입니다. 나 양업은 본래 북한에서 투항한 장수라 이치상 벌써 죽었어야 마땅하나, 폐하께서 나를 죽이지 않으시고 도리어 관직을 내려 군대를 이끌게 하셨습니다. 내가 고의로 적군을 보고도 출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려 전공을 세워 국은(國恩)에 보답하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 공들이 나를 의도적으로 적을 피한다고 비난하니, 나 양업이 마땅히 앞장서서 죽음으로 적을 치겠습니다!”

그러면서 진가곡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청컨대 이곳에 보병과 강노를 배치하고 좌우 양익으로 나뉘어 구원할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 양업이 이곳까지 전전(轉戰)해 오거든 양면에서 적군을 협공해서 구해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군은 전멸하고 말 것입니다.”

판미는 양업의 청을 승낙하고 진가곡구에 병력을 배치해 구원 준비를 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왕선은 사람을 시켜 높은 곳에서 적을 살피게 했는데, 양업이 돌아오지 않자 양업이 이미 거란군을 격파했다고 생각했다. 공을 다투기 위해 그는 멋대로 곡구를 떠나 군대를 이끌고 나갔고, 주장 반미는 이를 제지하지 못한 채 교하(交河)를 따라 서남쪽으로 20리를 행군했다. 얼마 후 그들은 양업이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이때 그들은 구원하러 가기는커녕 오히려 병사를 이끌고 전장을 도망쳐 버렸다.

양업은 부하들과 함께 거란군과 온종일 사투를 벌였고, 정오부터 저물녘까지 마침내 진가곡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반미와 왕선의 원군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양업은 텅 빈 곡구를 보고 비통함이 극에 달해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그는 계속해서 장수들을 이끌고 힘써 싸웠으나, 결국 마지막에는 전군이 장렬히 순국했다. 이때 수십 군데 상처를 입은 양업은 여전히 분투하며 적군 수십 백 명을 직접 베었으나, 타고 있던 말이 중상을 입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서야 거란병에게 포로로 잡혔다. 양업의 아들 양연옥(楊延玉)도 이번 전투에서 전사했다.

양업은 탄식하며 말했다. “황제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하시어 적을 토벌하고 나라에 보답할 기회를 주셨거늘, 간신에게 해를 입어 군대가 패배했으니 나는 참으로 다시 살 면목이 없구나.” 그리하여 그는 사흘간 음식을 끊고 세상을 떠났다.

태종 황제는 양업의 부고를 듣고 몹시 애석해하며 즉시 조서를 내려 그의 공적을 표창하고 그를 태위(太尉), 대동군절도사(大同軍節度使)로 추봉했다. 이후 양씨 가문에 천 필의 비단과 천 석의 쌀을 하사하며 두터운 상을 내렸다. 주장 반미에게는 관직을 3급 강등하는 처분을 내렸고, 호군 왕선과 유문유는 면직시키고 제명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훗날 왕선은 특사로 풀려났으나 도중에 병사했고, 유문유는 주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다시 불러들였다.)

북송 《양가장전전(楊家將全傳)》 삽화, 1892년 광서(光緖) 임진년 판본. (공유 영역)

충렬과 무용으로 나라에 헌신하니 여러 사람이 감동해 청사에 남다

양업은 비록 경서에 통달하지는 못했으나 시종 조정에 충성을 다했다. 그의 위인은 용맹하고 두려움이 없었으며, 지모가 뛰어나고 책략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를 훈련하고 전투하는 데 탁월하여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했다. 대주(代州) 땅은 몹시 추워 사람마다 털옷을 걸치고 추위를 막았으나, 양업은 단지 무명옷 한 벌만 입고 영중(營中)에 앉아 군무를 처리했다. 주변에 불을 피워 온기를 더하지도 않으니 모시던 자들이 추위를 견디지 못할 정도였으나, 양업은 시종 미소를 지으며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관병을 다스리는 법도가 있었고 하급자들을 은혜로 대했기에 장수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를 위해 힘을 다했다.

삭주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양업은 곁에 남은 100여 명의 장수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에게는 모두 부모와 처자식이 있으니, 나와 함께 죽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대들은 자유롭게 도망쳐 돌아가서 황제께 복명하라.” 그러나 단 한 사람도 떠나지 않았고, 수행하던 치주자사(淄州刺史) 왕귀(王貴)도 분전하며 적 수십 명을 베고 결국 모두 전장해서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양업이 죽은 후 조정에서는 그의 용맹함과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연소(延昭)를 숭의부사(崇儀副使)에 임명하고, 다른 아들들에게도 각각 관직을 내렸다.

참고자료:
《宋史‧列傳第三十一》
《隆平集》宋 曾鞏
《楊家將故事考信錄》餘嘉錫 1945年出版
《楊家府世代忠勇通俗演義》明朝 佚名 秦淮墨客校閱
《兩宋志傳》明朝 熊大木 秦淮墨客校閱
《楊家將(穆桂英)傳說》北京美術攝影出版社 2015年出版 高雪松整理
《楊家將外傳》河北少年兒童出版社 1986年出版 趙雲雁搜集整理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78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