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상하오천년〗 불법(佛法)이 흥성했던 양진남북조 시대 (11)

(265년—588년)

심연(心緣)

【정견망】

문화편 ─ 음악과 복식

*음악

음악은 남북조 때 특별히 번영하였으며, 특히 불교의 전래는 불교 음악이 널리 유포되게 만들었다.

북조 북위(北魏) 때 음악이 번영했던 정경에 대해 후인들은 용문석굴에 남아 있는 일부 당시 낙양 음악의 자료들 속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기악 연주자(伎樂人)는 176명이며 악기는 17종에 달해 사(絲), 죽(竹), 관(管), 현(弦) 등 없는 것이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남조에서도 부처에게 예배하는 의식에 수반해 불교 음악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점차 중국 본토의 음악 형식과 결합하였다.

불교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한 음악은 주로 찬패(贊唄) 혹은 범패(梵唄)라 칭합니다. 일반적으로 경전을 외우는 ‘전독(轉讀)’과 부처님을 찬양해 노래하는 ‘범패’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주로 7자, 5자, 4자 구절식의 짧은 게송(偈頌) 형식을 채택한다. 이러한 부처와 보살을 찬송하고 경문과 찬송시을 외우는 독창, 제창(齊唱 모두 같은 선율을 부르는 것), 합창(合唱 여러 선율을 나눠서 같이 부르는 것)은 경전을 강의하여 도(道)를 선양할 때나 아침저녁의 염불, 도량 참법, 무차재회(無遮齋會) 등의 의식에 자주 사용되었다. 중국인들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찬패는 중국 본토 음악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산스크리트어(梵語)와 한어(漢語)는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범음으로 한어를 읊조리든 한어로 범성(梵聲)을 노래하든 서로 통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번역된 경문은 비록 많았으나 번역하여 곡을 배정한 찬패는 매우 드물었다.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진사왕(陳思王) 조식(曹植)이 중국의 곡조를 사용해 불교 찬패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는 언어와 음악 양면에서 모두 깊은 조예가 있었기 때문에 이 과정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불교 경전과 중국 음악 문화의 결합을 추진한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양무제 소연이었다. 그는 친히 불곡(佛曲)을 만들어 불교 의식 음악과 당시에 유행하던 청상악(清商樂)을 하나로 융합시켰다.

물론 불교 음악을 진정으로 중국화하고 통속화한 것은 역시 수많은 사찰 속의 예승(藝僧, 예술가 승려)들이었다. 육조(六朝) 시대에 많은 유명한 불교 사찰에서는 불교 명절에 중국 전통의 악무(樂舞)와 백희(百戲, 여러 가지 잡기)를 이용하여 불법(佛法)을 널리 알렸고, 이 활동에 참여한 유명한 예승들이 많았다.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는 당시의 수도 낙양시의 경락사(景樂寺)에 대해 “육재일(六齋)에 이르면 항상 여악(女樂)을 베푸니, 노랫소리가 들보를 휘감고 춤추는 소맷자락은 서서히 구르며, 관현악 소리가 맑게 울려퍼져 기묘함이 신의 경지에 들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경명사(景明寺)의 천여 구 불상(佛像)이 거리를 순행할 때는 “향 연기가 안개와 같고 범악(梵樂)과 법음(法音)이 천지를 흔들었으며, 백희(百戲)가 날뛰어 솟구치니 늘어선 구경꾼들이 빽빽이 맞닿았다”라고 했다.

*복식

삼국 양진(兩晉) 시기의 복식은 기본적으로 진한(秦漢)의 옛 제도를 계승했다. 남북조 시기의 복식은 각 민족 간에 상호 흡수하고 점차 융합하는 추세가 출현했다. 한편으로는 일부 소수민족이 한족의 옷을 입을 것을 제창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비족의 복장이 몸에 붙고 짧고 작으며 아래에는 가랑이가 막힌 바지를 입어 활동하기 편리했기에 중원에서 광범위하게 유행하여 전통적인 심의(深衣) 제도가 점차 소실되었다.

이 시기의 복식은 주로 두 가지 형식이 있었다. 하나는 한족(漢族)의 복식으로 진한의 유제를 계승한 것이고, 하나는 소수민족의 복식으로 북방의 풍습을 따른 것이다. 한족 남자의 복식은 주로 적삼(衫, 홑옷)이 있었다. 적삼과 도포(袍)는 양식상 명확한 구별이 있었는데, 한대의 풍습에 따르면 도포라고 일컫는 것은 소매 끝을 수렴하여 거구(祛口, 소매 부리)를 달아야 했다. 그러나 적삼은 거구를 만들 필요가 없어서 소매 끝이 넓고 시원했다. 적삼은 소매 부리 등의 구속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위진의 복장은 날로 넓고 커지는 것이 풍속이 되었고, 남북조 복식에까지 계속 영향을 미쳐 위로는 왕공(王公) 명사(名士)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넓은 적삼과 큰 소매, 도포를 헐렁하게 입고 느슨한 띠를 매는 것을 숭상했다. 전해지는 회화 작품 및 출토된 인물 도상 속에서 모두 이러한 정황을 볼 수 있다. 적삼 이외에 남자의 복장에는 포유(袍襦, 저고리)가 있었고 아래에는 바지나 치마를 많이 입었다.

북방 소수민족의 남자 복식은 주로 고습(袴褶 바지)과 양당(裲襠)이 있었다. 고습은 전국시대에 유행하던 호복(胡服)을 개량한 것으로, 한위 시기에는 주로 군대에서 사용되었으나 위진 이후에는 비록 군복으로 쓰이면서도 이미 민간에서 보편적으로 입는 일상복이 되었다. 특징은 주로 옷이 타이트하고 좁으며 길이는 무릎과 가지런하고, 바지관은 느슨하며 아래로 발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양당은 가슴과 등 두 조각만 있는 복장으로, 어깨 부위에서 가죽으로 만든 연결 끈으로 묶고 허리 사이에 가죽띠를 묶었다. 이러한 복장은 후세에 아주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니 바로 ‘배자(背心)’ 혹은 ‘감견(坎肩)’이라 일컫는 것이다.

위진남북조 시기 부녀자의 복장은 진한의 유속을 계승하면서 소수민족 복식의 특색을 흡수하여 전통적 기초 위에서 개량되었다. 일반적으로 상의는 삼(衫), 오(襖), 유(襦)를 입고 하의는 치마를 입었으며, 디자인은 대부분 위는 검소하고 아래는 풍성하여(上儉下豐) 상의 부분은 몸에 꼭 맞고 소매 끝은 펑퍼짐하며 치마는 주름이 많은 절간치마(多折襇裙)였고 치마 길이가 땅에 끌리며 단이 넓어 예쁘면서도 시원한 효과를 냈다. 여기에 풍성한 머리장식을 더하여 사치스럽고 화려한 풍조를 반영했다.

이 시기 부녀자의 머리 모양은 전대(前代)와 달랐다. 양진(兩晉) 시기에 유행한 ‘폐계(蔽髻)’는 일종의 가체(假髻)인데, 진 성공(晉成公)이 《폐계명》에서 전문적으로 서술한 바 있다. 그 가체 위에는 금 장식을 박아 넣었으며 저마다 엄격한 제도가 있어 명부(命婦, 궁중의 봉작을 받은 부인)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었다. 일반 부녀자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여러 가지 양식으로 틀어 올리는 것 외에 가체를 쓰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가체는 비교적 수수하여 가체 위의 장식이 폐계처럼 복잡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완빈경계(緩鬢傾髻)’라 불렸다.

또 적지 않은 부녀자들이 서역 소수민족의 풍습을 모방하여 머리 모양을 단환(單環) 혹은 쌍환(雙環)의 고리 형태로 틀어 올려 머리 정수리에 높이 솟구치게 했다. 아계(丫髻 양갈래 얹은 머리)나 나계(螺髻 트레머리)를 하는 이도 있었다. 남조 때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부녀자들이 머리 정수리 중앙에 계환(髻鬟)을 나누어 위로 수직으로 서는 고리 형태를 만들었으니 이를 ‘비천계(飛天髻)’라 일컬었으며, 먼저 궁중에서 유행한 후 민간에 보급되었다.

윤건(輪巾)은 폭건(幅巾 두건)의 일종으로 일반적으로 실띠로 짠 것으로 간주된다. 제갈량이 착용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제갈건(諸葛巾)’이라고도 한다. 폭건으로 머리를 묶는 것, 즉 관모를 쓰지 않고 단지 한 조각 비단 수건으로 머리를 묶는 것은 동한 후기에 시작되었다. 이것이 위진 시대까지 여전히 매우 유행했다. 위진 시기에는 관모(冠帽) 또한 매우 특색이 있었다. 한대의 건책(巾幘)이 여전히 유행하긴 했으나 한대와 약간 달랐던 점은 책(幘)의 뒷부분이 높아지고 부피가 점차 작아져 정수리에 이른 것으로, 당시 ‘평상책(平上幘)’ 혹은 ‘소관(小冠)’이라 불렀다.

소관은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남북을 막론하고 통용되었다. 만약 이러한 관책 위에 농건(籠巾)을 더하면 곧 ‘농관(籠冠)’이 되었다. 농관은 위진남북조 시기의 주요 관식으로 남녀가 모두 사용했다. 검은 옻칠을 한 고운 깁(細紗)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칠사롱관(漆紗籠冠)’이라고도 불렀다.

이외에 모자 종류에는 몇 가지 양식이 있었다. 하나는 ‘백고모(白高帽)’로 “그 제도가 일정하지 않아 혹은 연꽃이 말린 모양이 있거나, 혹은 아래로 치마가 있거나, 혹은 사(紗)로 된 높은 지붕(高屋)이 있거나, 혹은 검은 실(烏紗)로 된 긴 귀(長耳)가 있었다”라고 하며, 하나는 ‘돌기모(突騎帽)’로 “오늘날의 호모(胡帽) 같아 아래로 늘어진 치마가 띠를 덮으니 대개 댕기 머리가 남겨진 형상이다”라고 하는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