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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연소 전기】 완결편: 양가장 전설은 허구인가 실화인가? (4)

앙악

【정견망】

양육랑(楊六郎)(천외객과 공유영역 에포크타임스 합성)

양가장 이야기는 정사 《송사·열전제31》의 기록이 3천 자도 안 되지만 역대 전기소설의 기록은 매우 생동감이 넘친다. 그렇다면 양가장 전설은 허구일까, 아니면 실제로 존재했던 사실일까?

양가장 이야기는 명청(明淸) 시대뿐만 아니라 이미 북송(北宋) 시기부터 널리 유포되었다. 구양수(歐陽修)는 친구 양전(楊畋)의 부친 양기(楊琪)를 위해 쓴 《공비고부사양군묘지명(供備庫副使楊君墓志銘)》에서 양씨 가문 선조의 영웅 사적을 찬양했다. 그중 한 대목에는 “(양업) 부자가 모두 명장이 되어 그 지모와 용맹이 무적(無敵)이라 일컬어졌으며 오늘날 천하의 선비로부터 마을 아이들과 시골뜨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일을 말할 수 있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구양수가 이 글을 썼을 때는 양업이 세상을 떠난 지 60여 년, 양연소가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들의 사적이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경시하던 북송 사회에서 이토록 널리 퍼져 변방 마을 아이들까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또한 조정의 명신인 포증, 왕안석 등도 공문서나 주장(奏章), 문답 속에서 양가장(楊家將)의 용맹한 사적을 찬송했다. 그러나 《송사》 열전 중 양업 부자 3인에 대한 기록은 매우 짧다.

양업 조손(祖孫) 3인의 관직은 높아야 5품 중급 군관이었으나, 적국인 요나라는 양업을 위해 양무적묘(楊無敵廟)를 세웠고 양연소의 이름을 딴 육랑묘(六郎廟)는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있다. 상대적으로 같은 시기 전공이 현격하고 요직에 있었던 송나라 대장 이계륭(李繼隆), 조빈(曹彬), 곽수문(郭守文), 왕전빈(王全斌) 등은 민간의 성망과 후세 영향력이 그들에게 훨씬 못 미친다. 그럼에도 정사 기록은 양업 부자보다 훨씬 상세한데, 이 현상은 분명 극히 비합리적이며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대량의 사적(史蹟) 이야기가 있음을 짐작게 한다.

양가장 사료 연구 측면에서 청말민초(清末民初)의 저명한 학자 여가석(餘嘉錫)이 저술한 《양가장고사가신록(楊家將故事考信錄)》은 학계에서 가장 빠르고 유명한 연구 판본이다. 이 책은 역대 기록된 양가장 관련 사료들을 수집하고 소설, 희곡의 묘사와 대조하여 진위를 고증했다. 저자는 양가장의 정충보국(精忠報國) 사적은 긍정했으나 민간에 유포된 금사탄 대전, 맹량과 초찬, 칠랑팔호(七郎八虎), 나아가 양문 여장군의 사적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표하며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근대 학자들도 많은 보충 연구를 했으나 대개 비슷한 논술이었다. 필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 대량의 사료(史料) 소실

북송 말기 금병(金兵)이 남침한 정강(靖康)의 난 때 금병이 변경성(汴京城 지금의 개봉)으로 쳐들어와 궁중의 보물과 문물을 대거 약탈했고 대량의 사료도 이때 훼손되었다. 정강요록(靖康要錄)에 따르면 “비각(秘閣)의 도서가 진흙 속에 낭자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송 이종(理宗) 소정(紹定) 4년에는 도성 임안(臨安)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다시 대량의 사적들이 화를 당했다.

남송 말기 몽골 대군이 임안을 함락했을 때도 수많은 도서가 다시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학식 높은 문관들은 대부분 송 소제 조병과 함께 바다에 투신하여 순국했다. 세 차례의 대규모 문화적 재난를 거치며 원나라가 정식으로 《송사》를 편찬할 때 국가 창고의 장서는 극도로 불완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가장의 영웅 사적 상당수가 정사에 기록되지 못한 것이다.

◎ 역사가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사람들이 망각을 선택함

《송사》는 원나라 재상 탈탈, 아루도 등이 주편했다. 한인 학자들이 협력하긴 했으나 과거 적대했던 중원 왕조 장수들의 용맹한 전적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꺼리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요나라와 서하 등 외족을 여러 차례 격파한 양문 여장군에 대해서는 더욱 의도적으로 무시했을 것이며 그들의 사적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게다가 양가 일문은 양업부터 칠랑팔호, 5대 양회옥에 이르기까지 남자들이 전장에서 죽거나 간신의 박해로 제명을 다하지 못하는 등 고난을 겪었다. 서정(西征)에 참여한 열두 과부 또한 대부분 적루애(滴淚崖)에서 전사했는데, 이 비장한 역사는 북송 신민(臣民)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당시 사적이나 문예 작품에서 이 과거를 다시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여기며 민간의 입소문으로만 전해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역사 찾기 여행: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

필자는 어려서부터 중국 전통 역사 이야기를 좋아했다. 특히 설인귀 동쪽 원정, 양가장, 악가군(岳家軍) 같은 고전 영웅 이야기를 즐겼다. 양가장의 일곱 아들이 나갔다 여섯째만 돌아왔다는 역사극을 보며 마난을 겪은 양연소가 안문과 하북 삼관을 지키는 장면을 보았을 때 가슴이 벅차올라 한참을 진정하지 못했다. 마치 내가 그 양가장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이었고 밤늦게 별을 바라볼 때면 마음속에 수심이 서리며 내가 중대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에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그 시절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고자 했다. 역대 양가장 사료와 소설, 민간 설화를 연구하고 전국 수백 개의 관련 유적과 문물을 결합하여 종합적으로 고찰한 결과, 필자는 《양가장연의》에 나오는 맹량, 초찬, 악승 등과 양문 여장군이 실존 인물이며 관련 이야기들도 결코 근거 없는 소문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필자는 마침내 양가장의 주인공인 양연소를 주체로 한 40여 편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찾아냈고 그 정수를 뽑아 글로 엮은 것이 바로 이 《양연소 전기》 시리즈이다. 그러나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가 민간에 흐르고 있을 것이라 믿으며, 후인들이 이를 발굴하여 이 먼지 쌓인 역사를 보충해 주기를 기대한다.

부록: 역대 양가장 관련 시사 (정선)

◎ 소송—중손과 고북구 양무적묘를 지나며(和仲巽過古北口楊無敵廟)

한나라 비장군 곰과 같은 군사 거느리고,
연산에서 죽기로 싸워 우리 군대를 지켰네.
위신(威信)이 적국에까지 떨쳐 명성이 사라지지 않으니,
지금까지 전해오는 풍습으로 사당을 받드네.

漢家飛將領熊羆
死戰燕山護我師
威信仇方名不滅
至今遺俗奉遺祠

주석: 소송(蘇頌) 《위공집(魏公集) 권30》。
1. 한나라 비장군은 한 대 명장 이광(李廣)을 말한다.
2. 웅비(熊羆)는 용맹한 군사나 군대를 비유
3. 적국:적대국

◎ 소철—양무적묘를 지나며(過楊無敵廟)

적막한 사당이 관문에 붙어 있는데,
들풀도 오히려 핏자국을 피할 줄 아네.
한 번의 패배는 가련하나 전투의 죄가 아니니,
너무 강직하여 홀로 남의 말을 두려워했음이 한스럽네.
치달림은 본래 중원을 위함이었으니,
제사를 받음은 이역에서도 존경받게 하네.
내 그대를 주자은에 비기고 싶으니,
사마융을 죽여 충혼을 위로함에 족하네.

行祠寂寞寄關門,野草猶知避血痕。
一敗可憐非戰罪,太剛嗟獨畏人言。
馳驅本爲中原用,嘗享能令異域尊,
我欲比君周子隱,誅肜聊足慰忠魂。

주석:
이 작품은 소철(蘇轍)의 《난성집(欒城集)/16》《봉사거란28수(奉使契丹二十八首)》에 실려 있다.
1. 너무 강직함:성격이 너무 강직하다는 의미
2. 남의 말:의견을 표시해 반미와 왕선의 시기를 초래함
3. 주자은은 주처(周處)를 가리키는데 그의 자가 자은(子隱)이었다. 어려서는 고향을 어지럽혔으나 나중에 개과천선해 공업을 세워 주처가 세 가지 해악을 제거하다라는 전설을 남겼다. 서북에서 저강족의 반란을 토벌할 때 사령관인 사마융(司馬肜)의 모함을 받아 분전했으나 전사했다
4. 융은 사마융(司馬肜)을 가리키는데 서진의 종실로 관직이 태재(太宰), 영사도(領司徒)에 이르렀다. 사람이 재능은 없으면서 고위직에 올라 비판을 받았다.

◎ 시도석에서 양무적 부자를 추모(試刀石吊楊無敵父子)

안문은 진한(秦漢) 시절부터 웅장한 요새인데,
꺾인 창끝은 오래도록 사막 속에 묻혔네.
돌 하나 우뚝 서서 더미를 이루니,
이른바 양가의 전공(戰功)을 기록한 것이라네.
양가의 위명은 변새에서 무거웠고,
장수가 되어 대대로 성의 인장을 찼네.
무적의 성망과 위엄 더욱 절륜하니,
칼을 비껴 들고 호령하니 풍운이 진동하네.

雁門重鎮秦漢雄,折戟久埋沙漠中。
有石屹立分磊砢,雲是楊家紀戰功。
楊家威名邊塞重,登壇世佩專城印。
無敵聲威更絕倫,橫刀叱吒風雲振。

소년 시절 말 타고 사냥하며 무지개 같은 뜻 품으니,
매와 개 데리고 병법 논하던 날 햇빛이 처량했네.
깃발 들고 한 번 노하니 천군이 놀라고,
눈을 부릅뜨니 삼관에 만 마리 말이 울부짖네.
하루아침에 적의 기병 구름처럼 모여드니,
왕선은 어진 이를 시기하고 반미는 술책이 없었네.
전투를 옮기며 군사를 재촉하니 백우전이 날아오고,
군대를 내보내며 모략 없이 법에만 얽매였네.

少年馳獵志虹霓,鷹犬談兵日色淒。
擁旌一怒千軍駭,瞋目三關萬馬嘶。
一朝敵騎如雲集,侁也嫉賢美無術。
轉戰催軍白羽飛,師出不謀占以律。

기막힌 계책 쓰이지 않으니 어찌할 수 없어,
안장 짚고 일어나 창을 메고 나갔네.
대장부 죽음을 맹세하고 돌아보지 않으니,
좌우를 지휘함이 그물을 펼친 듯하네.
강한 활 진가곡에 몰래 매복했으니,
깃발 쓰러지며 패배할 것을 미리 알았네.
원군 오지 않아 힘이 다하니,
삭을 비껴 잡고 길게 울부짖으며 눈물이 가슴을 적시네.

奇計不用無奈何,決起憑鞍行負戈。
丈夫有死誓不顧,指揮左右如張羅。
強弩暗伏陳家穀,預識旗靡此敗績。
援軍不發力已窮,橫槊長號淚沾臆。

말가죽에 싸인 시신 변방 풀 속에 붉게 물드니,
군에 간 아들 살아서 돌아감을 부끄러워했네.
은혜 입은 남은 병졸 동시에 다하니,
백골이 쌓여 백설산이 되었네.
장군은 비록 죽었으나 이름은 죽지 않으니,
육랑은 참으로 장수 가문의 자식이로다.
칼을 뽑아 돌을 끊으니 돌이 갈라지니,
오정신력(五丁神力)에 북평의 화살이라.

馬革屍橫塞草殷,從戎有子恥生還。
受恩殘卒同時盡,白骨堆成白雪山。
將軍雖死名不死,六郎真是將門子。
抽刀斷石石爲分,五丁神力北平矢。

아아 송나라는 변방의 공을 중히 여겼으니,
창과 철기 구름처럼 주둔했네.
봉화에도 놀라지 않는 양씨 보루,
그 명성이 어찌 악가군에 뒤지겠는가?
동남에는 악가군 서북에는 양가군,
삼백여 년 동안 똑같은 전공의 자취로다.
길가에서 칠랑의 무덤을 가리키고,
산정에서 천 년의 돌을 보고 놀라네.
옛일은 사라져 사람들이 알지 못하나,
막야검은 오히려 음풍 속에 불어오네.
의연히 안문 요새를 지키고 있으니,
이 돌은 연연비(燕然碑)와 다를 바 없네.

籲嗟有宋重邊勳,珘戈鐵騎屯如雲。
烽火不驚楊氏壘,先聲何減嶽家軍?
嶽家東南楊西北,三百餘年同戰跡。
路旁指點七郎墳,山頂驚看千載石。
舊事淪亡人不知,莫邪猶作陰風吹。
巍然留鎮雁門塞,此石無異燕然碑。

주석
이 시는 청대 시인 낭약이(郎若伊)의 작품으로 《대주지(代州志)》에 실려있다.
1. 뢰라(磊砢): 수없이 쌓여 있는 돌들.
2. 등단(登壇): 고대에 장수를 임명할 때 거행하던 성대한 의식.
3. 홍예(虹霓): 사람의 뛰어난 문채와 재능, 하늘을 지르는 호탕한 기운을 비유함.
4. 간신 왕선(王侁)은 현능한 이를 시기하고 능력자를 미워하였으며, 주수(主帥)인 반미(潘美)는 통솔하는 재능이 없었음.
5. 군사를 출동시킴에 책략이 없고 도리어 군율에만 고집함을 형상화함.
6. 부과(負戈): 반드시 패할 싸움을 치르러 감을 가리킴.
7. 전사들이 그저 길게 부르짖어 통곡하니 눈물이 가슴을 적셨음(長號淚沾臆).
8. 양육랑(楊六郎)의 무예가 마치 오정(五丁)이 산을 개간하는 힘과 같아 북방의 적을 진섭(震懾·위엄으로 굴복시킴)했음을 형상화함.[五丁神力北平矢]
9. 안타깝게도 양가장(楊家將) 장수들의 과거 찬란했던 옛일은 대부분 세상 사람들에게 잊혔으나, 마치 막야검처럼 충혼이 스러지지 않고 여전히 하늘과 땅 사이에 회돌이침을 상징함.[舊事淪亡人不知,莫邪猶作陰風吹:]
10. 연연비(燕然碑):두헌(竇憲)이 북흉노를 대파하고 《봉연연산명(封燕然山銘)》을 돌에 새겨 공적을 기록했던 고사를 가리킴.

◎ 오대산 오랑사를 읊다(詠五台山五郎祠)

국토는 쓸쓸하여 말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흰 구름은 오랑사(五郎祠)를 깊이 가두었도다.
송나라 세상은 꿈으로 변해 버렸으니,
철몽둥이(鐵棍)를 상시 부여잡고 누구를 원망하려 하는가.

國土寥寥馬不嘶,白雲深鎖五郎祠。
宋家世界變成夢,鐵棍常拈欲恨誰。

주석:
이 시는 명조(明朝) 승려 석진징(釋鎮澄)이 지은 것으로, 《청량산지(清涼山志)》에서 나왔다.
1. 國土寥寥馬不嘶: 예전 송나라와 요나라의 전장이 지금은 이미 텅 비고 서늘해져, 영웅은 세상을 떠나고 말 울음소리는 끊어졌음.
2. 鐵棍常拈: 철몽둥이(양오랑의 병기)를 과거에 일찍이 상시 잡고 놓지 않았음.

◎ 양오랑을 읊다 2수(詠楊五郎二首)

송대 공신의 뜻은 매우 비범하여,
수풀 아래로 이름을 버리고 승려를 배웠도다.
천지간에 이에 이르러 누가 감히 견주겠는가,
오직 영웅다운 풍모가 제왕을 감동하게 함을 허락하노라.
스님의 공업은 하늘과 더불어 평등하건만,
화공(丹青)이 제화(題畫)를 해주지 않았음이 사무치게 한스럽네.
만약 장군이 상시 세상에 머물게 할 수 있었다면,
송조가 어찌 선우(單于)에게 복속함을 기꺼이 허락했겠는가.

宋世功臣志異常,棄名林下學僧郎。
乾坤到此誰堪並,獨許英風動帝王。
阿師功業與天齊,恨殺丹青不與題。
儻得將軍常在世,宋朝爭肯屬單於。

주석:
이 시는 명대 승려 석진징(釋鎮澄)이 지은 것으로, 《청량산지(清涼山志)》에서 나왔다.
1. 棄名林下: 산림에 자취를 숨기고 출가함.
2. 誰堪並: 누구 있어 그와 더불어 서로 모아 견주겠는가.
3. 恨殺丹青不與題: 그의 초상화와 역사적 자취를 남기지 못했음을 탄식함.
4. 宋朝爭肯屬單於: 송조가 어찌 선우에게 신하라 칭하며 화친하기를 기꺼이 허락했겠는가.

◎ 인마동(引馬洞)

송나라의 업은 한 물에 치우쳐 안주하더니,
지도(輿圖)는 이제 이미 연운(燕雲) 땅을 모두 잃었도다.
들판은 넓고 모래는 평평하여 언덕과 골짜기가 변하였는데,
밭가는 백성은 오히려 육장군(六將軍)을 말하는도다.

宋業偏安一水分,輿圖今已盡燕雲。
野曠沙平陵穀異,耕民猶說六將軍。

주석:
이 글의 작자는 명대 시인 왕영풍(王靈風)이다.
1. 輿圖: 국가의 강역(영토).
2. 野曠沙平陵穀異: 산능선과 골짜기 지형이 변이했으니, 즉 과거의 풍경이 변천했음을 가리킴.

◎ 무제(無題)

거마호(拒馬河) 가의 옛 전장에,
흙이 이끼를 묻어 녹침창(綠沉槍)을 덮었도다.
지금껏 마을 북 소리와 맹인 가객의 노랫가락 속에서,
위엄이 삼관(三關)을 떨쳤던 육랑(六郎)을 말하는도다.

拒馬河邊古戰場,土花埋沒綠沉槍。
至今村鼓盲詞裏,威震三關說六郎。

주석:
이 글의 작자는 청대 시인 반조음(潘祖蔭)으로, 《진유일기(秦輶日記)》에서 나왔다.
1. 綠沉槍: 녹침죽(綠沉竹)으로 만든 창.
2. 村鼓盲詞: 민간의 전통적인 설창(說唱), 희곡, 가극…… 등등.

◎ 양육랑묘(楊六郎廟)

설령 양랑(楊郎)의 사당이 남아 있거늘
그것이 송의 국운을 어찌하겠는가.
마음 아프게 부질없이 전쟁만 벌였으니,
눈을 멀리 들어 한껏 바라보는 것은 산하뿐이로다.
구름과 새를 사람이 능히 말할 수 있거니와,
누린내(腥膻)의 한은 없어지지 않는도다.
흉악함을 제거하여 밝은 시대의 열렬함을 드러내었으니,
응당 저승(九原)의 수많은 혼을 위로함에 넉넉하리라.

尚有楊郎廟,其如宋祚何。
傷心空戰伐,極目且山河。
雲鳥人能說,腥膻恨不磨。
除凶昭代烈,應慰九原多。

주석:
이 글의 작자는 명대 시인 윤경(尹耕)으로, 《삭야집(朔野集)》에 수록되어 있다.
1. 極目: 시력을 다하여 멀리 바라봄.
2. 雲鳥人能說,腥膻恨不磨: 양육랑의 영웅 사적은 마치 떠도는 구름과 들새처럼 민간에 전송(傳誦)되지만; 적에게 당한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깨진 치욕의 한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갈아 없애기 어려움을 뜻함.
3. 除凶昭代烈,應慰九原多: 양육랑이 일생 동안 북방의 강적에 대항하여 남긴 영렬한 정신을 형상화한 것이니, 이러한 장거는 지하의 수많은 충혼을 위로하기에 응당 넉넉하다.

◎ 무제(無題)

아곡성(亞穀城) 황량한 곳은 초찬(焦贊)의 무덤이요,
상간하(桑幹河) 가까운 곳은 맹량(孟良)의 진영이로다.
나그네는 얼마만큼의 흥망의 감회를 느끼는가,
지는 해 가을 안개 속 화각(畫角) 소리 들려오누나.

亞穀城荒焦贊墓,桑幹河近孟良營。
行人多少興亡感,落日秋煙畫角聲。

주석:
이 글의 작자는 청대 시인 반조음(潘祖蔭)으로, 《진유일기(秦輶日記)》에서 나왔다.
1. 아곡성亞穀城: 하북성 웅현 아형촌에 위치함.
2. 화각畫角: 옛 관악기 이름으로, 군대에서 경계·진군·전령·지휘를 위해 사용하던 물건.

◎ 양칠랑의 무덤에 제사지내며 시를 짓다(祭楊七郎墓賦詩 )

쇠락한 비석은 이끼 깊어 잘린 글씨를 수놓았고,
길가에서 손가락으로 칠랑(七郎)의 무덤을 가리키네.
악가(岳家)의 부자와 양가(楊家)의 형제는,
삼백 년 동안 공통된 전쟁의 공훈을 세웠도다.

殘碣苔深繡斷文,路旁指點七郎墳。
嶽家父子楊兄弟,三百年來共戰勳。

주석:

이 글의 작자는 청 산서성 번치 현감 주인갑(周人甲)이다.

1. 繡斷文: 이끼가 끊어진 비석에 가득 자라나, 비문이 모호하여 거의 읽을 수 없게 만듦.

2. 共戰勳: 서로 다른 시대에, 똑같이 혁혁한 공훈을 세워 중원을 지켰음.

참고자료:
《宋史‧列傳第三十一》
《楊家將故事考信錄》餘嘉錫著 1945年出版
《楊家府世代忠勇通俗演義》明朝 佚名著 秦淮墨客校閱
《兩宋志傳》明朝 熊大木著 秦淮墨客校閱
《楊家將(穆桂英)傳說》北京美術攝影出版社 2015年出版 高雪松整理
《楊家將外傳》河北少年兒童出版社 1986年出版 趙雲雁搜集整理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