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몽골 제국의 전통에 따라 쿠빌라이에게는 네 명의 정처(正妻)가 있었으며, 각각 제1황후, 제2황후, 제3황후, 제4황후라 불렀다. 통상적으로 제1황후가 낳은 아들만이 황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었고, 만약 제1황후에게 아들이 없으면 제2황후가 낳은 아들이 계승하는 식이었다.
쿠빌라이가 잠저(藩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저택)에 있을 때의 정비는 첩구륜(帖古倫)으로 성은 옹기라트(弘吉剌) 씨였으나, 아이를 낳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쿠빌라이가 대칸의 자리를 계승한 후 책봉한 실질적인 제1황후는 차비(察必)이며, 역시 옹기라트 씨이고 제녕충무왕(濟寧忠武王) 안진(按陳)의 딸이다. 쿠빌라이가 아직 잠저에 있을 때 차비와 혼인을 하였는데, 당시에 그녀는 두 번째 정처였으며 쿠빌라이의 사랑을 깊이 받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쿠빌라이를 보좌했다.
유학자를 위해 손수 도포를 만들어
젊은 시절 오르곤 강 유역의 카라코룸(和林)에 살았던 쿠빌라이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며, 그는 더 많은 지식을 갈구하고 자신을 위해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유능한 인재와 지혜로운 선비를 찾았다. 이를 위해 그는 몇몇 이름난 유학자들을 초빙하여 다스림의 도리를 물었다.
1242년, 쿠빌라이는 유학자 조벽(趙璧)의 명성을 듣고 그를 카라코룸으로 청했다. 당시 유학자로서 막북(漠北, 고비사막 북쪽 지역)으로 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만난 후, 쿠빌라이는 존중을 표시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직통으로 “수재(秀才)”라 불렀으며, 그에게 세 명의 시종을 하사했다.
막북은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컸기 때문에 중원의 의복을 입은 조벽은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이 말을 듣고 왕비 차비에게 친히 조벽을 위한 몽골 도포를 만들어주게 했다. 도포가 다 만들어진 후 쿠빌라이는 조벽에게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입어보게 하였고, 어울리지 않는 곳이 있으면 차비가 하나하나 인내심을 가지고 수정해 주었다.
용기와 지략이 있어 쿠빌라이에게 제때 소식을 전하다
1259년, 뭉케가 남송을 정벌하던 중 세상을 떠났을 당시 명령을 받들어 남송을 공격하던 쿠빌라이는 장강을 건너 악주(鄂州)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고, 쿠빌라이의 동생 아릭부케(阿里不哥)는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었다. 처음에 쿠빌라이는 “어찌 아무 공(功)도 없이 돌아갈 수 있겠는가”라며 부하들의 권고에 따라 돌아가 대칸의 자리를 계승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차비가 보낸 긴급 소식을 받은 후에야 쿠빌라이는 북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뭉케 수하의 대신 아람다르(阿藍答兒), 혼도해(渾都海), 탈화사(脫火思), 탈리치(脫裏赤) 등은 카라코룸을 유수(留守)하던 아릭부케를 대칸으로 옹립하려 모의하고 있었고, 아릭부케 또한 대칸의 자리를 다툴 의사가 있었다. 아람다르는 아직 개평(開平) 부근에서 군대를 징집하고 있었고, 탈리치는 연경(燕京) 부근에서 인마(人馬)를 모으고 있었다.
차비가 이 상황을 알고난 후, 즉시 사신을 보내 아람다르에게 “군대를 부르는 것은 큰일인데, 태조 황제(칭기스칸)의 증손자인 진금(真金)이 여기에 있거늘, 어찌하여 알리지 않았는가?”라고 질책했다. 아람다르는 이에 대응하지 못했다. 차비는 그 속에 속임수가 있음을 깊이 직감하고, 조사를 거쳐 아릭부케가 대칸의 자리를 취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위험을 감지한 차비는 사람을 보내 말을 빨리 몰아 쿠빌라이에게 알리게 했고 그에게 하루빨리 북쪽으로 돌아올 것을 재촉했다.
쿠빌라이는 차비가 보낸 소식을 받은 후, 제때에 북쪽으로 돌아와 칸의 자리를 계승했다.

원 세조 쿠빌라이의 황후인 차비의 초상화. (공유 영역)
현명하고 선량해 남송 태후를 후대
1260년, 쿠빌라이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후 차비는 제1황후로 세워졌다. 1273년 3월에 책봉을 받아 ‘정의소성순천예문광응황후(貞懿昭聖順天睿文光應皇后)’라는 존호를 올렸다. 황후로서 차비는 후궁을 통솔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스스로를 다스리며, 시정에 많은 도움을 주고 일에 따라 넌지시 간언하니 쿠빌라이의 현명한 내조자였다.
쿠빌라이가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로 천도한 후, 케식 관원들이 경성 외곽 부근의 농지를 말을 기르는 목장의 부지로 정해 줄 것을 청했다. 많은 몽골 귀족들이 보기에는 말을 키우는 마장(馬場)이 농업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쿠빌라이도 이미 허락을 하였고, 막 실시를 준비하려던 참이었다.
차비 황후가 이 일을 들은 후 간언하려 했다. 차비가 쿠빌라이를 만나러 갔을 때, 태보(太保) 유병충(劉秉忠)이 마침 중요한 일을 아뢰려 하자, 차비는 고의로 그를 외실에 가로막고 큰 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라의 중신이자 한인의 기재(奇才)로, 폐하께서 내내 그대의 말을 들으셨소. 그러나 폐하께서 경성 교외의 농지를 사냥터로 징발하려 하시는데, 이런 큰 일에 그대는 어찌하여 폐하께 간언하지 않는 것이오? 국도(國都)를 옮겨오기 전에 토지는 이미 백성들에게 분배되어 있었소. 이제 기름진 밭을 말을 키우는 동산으로 바꾸려 하니 백성들이 유리걸식하고 원망을 낳게 할 것인데, 어찌 혼란을 조성하지 않겠소? 신하가 되어 제때에 일깨워 주지 못하여 만약 폐하를 불인불의(不仁不義)에 빠뜨리게 한다면 이를 어찌한단 말이오?”
유병충이 듣고 바로 마음으로 깨달아 미소를 지으며 역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신이 즉시 도면을 가지고 확인한 후 다시 보고하겠나이다.”
차비 황후와 유병충의 대화를 쿠빌라이는 똑똑히 들었고, 그는 즉시 명령을 내려 토지를 징발하는 일을 취소했다.
1276년, 쿠빌라이의 대군이 송조를 정복한 후, 송의 어린 임금 공제(恭帝)와 태후 등이 모두 상도(上都)로 와서 세조를 알현하자 쿠빌라이는 크게 연회를 베풀었고 조정 안팎이 기쁨으로 가득 찼으나, 오직 황후 차비만은 조금도 기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도리어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쿠빌라이가 그녀에게 왜 기뻐하지 않는지 묻자 차비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첩이 듣기에 자고로 천 년을 가는 나라는 없다고 하니, 우리 자손들이 이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한다면 다행이겠나이다.”
쿠빌라이가 사람을 시켜 송조 궁궐의 보물을 전각 앞에 쌓아두고 궁인들과 나누게 했다. 차비 황후가 또 말했다. “송나라 사람이 저축하여 그 자손에게 남겨준 것을 자손이 지키지 못하여 제게 돌아왔는데, 제가 어찌 차마 한 물건이라도 취할 수 있겠습니까!”
차비 황후는 대송의 망국을 슬퍼하며, 쿠빌라이에게 편안할 때 위험을 생각하여 “우리 자손들이 이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라”고 권간했다.
남송의 어린 황제와 전(全) 태후를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해, 차비는 쿠빌라이에게 그들에게 모욕적인 포로의 예(禮)로 대하지 말라고 권하며 말했다.
“자고로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는데 어찌 그 마지막 임금을 모욕하십니까. 본조의 자손들이 만약 망국을 면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대하고 어진 마음에 기반하여, 차비 황후는 평소에 그들을 극진히 보살폈다. 그녀는 전 태후가 풍토가 맞지 않아 고생하는 것을 발견한 후, 몇 차례 쿠빌라이에게 그녀를 남방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그녀에게 일깨워 주며 말했다.
“만약 그녀를 남방으로 돌려보냈다가 혹 헛소문이 한 번 움직이면 곧 그 집안을 멸하게 될 것이니, 이는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이 아니오.”
차비 황후는 그제야 깨달았다. 만약 전 태후를 남방으로 돌려보냈다가 일단 그녀가 그곳의 반원 세력에게 이용당해 거사한다면, 태후에 대한 차비 황후의 어진 마음이 도리어 그녀를 해치게 될 것이었다.
비록 송의 어린 임금과 태후를 돌려보내지는 않았으나, 쿠빌라이는 황후에게 그들을 많이 보살피고 예로써 두텁게 대하라고 명했다. 훗날 태후 모자 두 사람이 출가(出家)하기로 결정하자, 차비 황후는 특별히 360 헥타르의 토지를 떼어 두 사람의 부양비로 쓰게 했고 그들의 모든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훗날 전(全) 태후 모자 두 사람이 출가하기로 결정하자, 차비 황후는 특별히 360헥타르의 토지를 떼어 두 사람의 부양비로 삼게 하고 그들의 모든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그림은 명조 구영(仇英)의 《도화원도》 일부. (공유 영역)
몸소 절검을 중시하다
쿠빌라이는 검소함을 숭상하였고 차비 황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는 친히 궁인들을 이끌고 군대 안의 낡은 활시위를 수집하여, 이 낡은 활시위들로 천을 짜서 옷을 만들게 했다. 원단이 매우 견고하고 치밀했기 때문에, 이 독창적인 창의성은 당시에 보기에 무장의 가벼운 “방전의(防箭衣, 화살을 막는 옷)”와 더 비슷했다. 그녀는 또한 선휘원(宣徽院)에서 버려둔 양 앞다리 가죽을 수집하여 꿰매어 양탄자로 만들어 사용했다. 차비 황후 덕분에 사서에는 “검소함을 권하고 절도가 있어 버리는 물건이 없었다”는 기록이 남았다.
총명한 차비는 일찍이 쿠빌라이를 위해 “비갑(比甲)” 한 벌을 꿰매어 주기도 했는데, 옷깃이 없고 소매가 없으며 뒤가 길고 앞이 짧고 두 개의 끈이 있어, 이 옷은 쿠빌라이가 말을 탈 때 입기에 더 몸에 붙고 동작을 더 날렵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비갑이 바로 군사들이 훗날 입게 된 마갑(馬甲, 조끼)의 전신이다. 한번은 쿠빌라이가 사냥을 하고 돌아와 차비 황후에게 햇빛이 너무 눈이 부시다고 말하자, 차비는 이에 전통 모자에 앞창을 더해 햇빛을 가리게 했다. 쿠빌라이는 매우 기뻐했으며, 이 이후로 몽골 모자의 정식 형태가 되었다.
한림학사 왕사렴(王思廉)이 일찍이 쿠빌라이에게 《자치통감》을 강의할 때, 장손황후가 당 태종에게 간언한 이야기를 강의하자, 쿠빌라이는 내관에게 명해 왕사렴을 후궁으로 인도하여 후비들을 위해 이 대목을 강의하게 했다. 차비 황후가 들은 후 이렇게 말했다.
“이는 진실로 성덕(聖德)에 유익함이 있고, 또 이와 유사한 것들이 있으니, 그대는 마땅히 때맞추어 나아가 읽으시오.” 차비의 현명함은 이런 부류의 일이 많았다.
1281년 2월, 현덕(賢德)한 차비 황후가 세상을 떠났으며, 훗날 성종 때 “소예순성황후(昭睿順聖皇后)”로 추봉되어 세조의 묘에 봉안되어 제사를 받들었다. 사서는 그녀에 대한 평가가 매우 높으며, 가로되 “황후는 성품이 밝고 민첩하며 사물의 기틀에 통달하여, 지원(至元)의 정치를 좌우에서 보좌했으니, 당시에 힘을 보탠 바가 있다고 여겼다”고 했다.

한번은 쿠빌라이가 사냥을 하고 돌아와 차비 황후에게 햇빛이 너무 눈이 부시다고 말했다. 그림은 원조 화가 유관도(劉貫道)가 지원 17년(1280년) 2월에 그린 《원세조출렵도(元世祖出獵圖)》로, 그림에서 검은 말을 타고 흰 갓옷을 입은 남자가 원 세조 쿠빌라이다. (공유 영역)
자손을 엄하게 가르치다
쿠빌라이는 유가에서 먼저 “집안을 다스려야(齊家)”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할 수 있다(治國平天下)”는 도리를 깊이 깨닫고 있었기에, 자신의 아들과 손자들에 대한 요구가 모두 매우 엄격했다.
《신원사(新元史)》에 이르기를, 쿠빌라이에게는 11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도르지(朵兒只), 진금(真金 친킴), 망갈라(忙哥剌), 노무한(那木罕)은 모두 차비 황후의 소생이었으며, 도르지는 일찍 죽었기에 진금이 태자가 되었다. 제2황후 남필(南必)은 테무르치(鐵蔑赤)를 낳았으나 역시 일찍 죽었다. 다른 여러 아들로는 후게치(忽哥赤), 아야치(愛牙赤), 오그루치(奧魯赤), 코코추(闊闊出), 토곤(脫歡), 호도루첩목아(忽都魯帖木兒 쿠틀루그 테무르)가 있었다.
이들의 교육에 대해 쿠빌라이는 매우 마음을 썼다. 유가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은 쿠빌라이는 한인 유학자 요추(姚樞), 두묵(竇默), 이덕휘(李德輝), 왕순(王恂) 등을 여러 아들의 스승이나 반독(伴讀 같이 글을 공부하는 벗)로 선택하여, 그들이 어릴 때부터 유가 교육을 받아 사람 되는 도리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알게 했다. 그중 진금은 유가 사상에 깊이 감복했다.
중통(中統) 원년 쿠빌라이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후, 진금을 연왕(燕王)에 봉하고 중서성의 일을 총괄하게 했다. 1270년 가을, 진금은 명령을 받아 막북의 칭해(稱海)를 순무(巡撫)하게 되었는데, 이 기간에 제왕 자랄홀(劄剌忽) 및 종관 바얀(伯顏) 등과 처세의 도리를 담론했다. 진금이 말하기를, “부한(父汗, 아버지 대칸)께서 훈계하시기를, 오만하고 자만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하셨소. 오만하거나 자만하는 마음을 품기만 하면 일을 망치게 되오. 내가 공자의 말을 보니, 곧 부한의 말씀과 뜻이 부합하오”라고 했다.
1273년, 진금은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에 “궁사부(宮師府)”를 설치하고 38명의 한인 신하를 선택해 관속으로 삼았다. 진금이 정사에 참여한 후, 어진 선비를 예우하고 백성을 낮추어 세금을 가볍게 하며 백성과 더불어 휴식할 것을 주장했다. 이외에도 그는 몽골 국자감 학생들에게 한문을 배울 것을 요구했다.
한가한 시간에 진금은 여러 왕과 근신(近臣)들과 더불어 경전을 강의하고 전적을 논했는데, 《자치통감》, 《정관정요》 및 왕순, 허형(許衡)이 진술한 요·금 양조(兩朝)의 황제들이 국사를 처리한 요략 및 《무경(武經)》 등의 책이었으며, 그는 한두 마디 말 속에서도 체득하는 바가 있어 듣는 이들이 엄숙히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황, 모후와 마찬가지로 진금은 검박함을 숭상하여, 그가 입는 옷이 더러워지면 시신(侍臣 옆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명령하여 물을 들여 고치게 하니, 시신이 새것으로 바꿀 것을 청하자 진금은 도리어 말했다. “내가 백 필을 짜고자 해도 어려운 일이 아니냐. 다만 이 물건이 아직 해지지 않았으니 어찌 버리는 것이 마땅하겠느냐?”
즉 옷이 망가지지 않았는데 어찌 버릴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동궁의 향전(香殿)이 완공되자 장인들이 돌을 파서 못을 만들어 태자가 옛사람을 본받아 “곡수유상(曲水流觴 굽은 수로에 물잔을 뛰우고 노는 것)”의 즐거움 누릴 것을 건의했다. 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육림주지(肉林酒池)가 있었으니, 그대들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본받게 하려는가!”라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진금은 매우 효성스러워서 쿠빌라이의 몸이 편치 않을 때마다 근심하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나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모친인 차비 황후가 중풍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그는 당장에 슬피 울며 옷에 띠도 매지 못한 채 달려가 문안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진금은 시묘 살이를 하며 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누추한 집에서 거처했다.
1286년 1월, 진금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가 겨우 42세였다. 쿠빌라이는 매우 슬퍼하여 이듬해 정월 초하루에 조하(朝賀, 조정의 하례)를 멈추고 그를 위해 “명효(明孝)”라는 시호를 올렸다. 그의 아들인 성종(成宗)이 즉위한 후 “문혜명효황제(文惠明孝皇帝)”로 추증하고 묘호를 유종(裕宗)이라 하여 태묘(太廟)에 공양하고 제사를 지냈다.
진금이 세상을 떠난 후, 쿠빌라이는 진금의 세 번째 아들 테무르(鐵穆耳)를 황태손으로 세우니 곧 훗날의 성종이다. 테무르는 어릴 때부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마침내 그속에 빠져들었다. 쿠빌라이는 때때로 그를 훈계하고 호위들로 하여금 그를 감시하게 했으며, 심지어 그를 때리기도 했다. 쿠빌라이의 엄격한 통제 아래 테무르의 술버릇이 통제되었고, 이후에는 완전히 술을 끊었다.
쿠빌라이는 줄곧 자손들에게 어질고 용서하는 마음(仁恕之心)이 있어야 하며 백성을 침해하고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교육했다. 한번은 그의 다섯 번째 아들 후게치가 자신의 봉지에 있는 한 마을에서 별도로 야생 조류를 더 많이 가져가자, 쿠빌라이는 이 소식을 들은 후 명령을 내려 그에게 칠십 대의 곤장을 때려 경계를 보였다. 자손들이 안락에 빠지는 것을 면하게 하기 위해, 쿠빌라이는 또한 그들의 능력에 따라 그들을 각지의 군대에 보내 단련하게 했다.
집안과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쿠빌라이는 진심으로 마음을 쓰고 온갖 정성을 다해 고심했다.
참고자료:
《元史》
《新元史》
《忽必烈傳》
《忽必烈和他的世界帝國》
《史集》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7/23/n13110780.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