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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전】 19 문명한 다스림으로 성덕(聖德)황제의 이름을 천고에 남기다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차비(察必) 황후와 황태자 진금(真金)의 잇따른 사망은 쿠빌라이를 끝없이 비통하게 만들었고, 그의 건강 또한 심각하게 훼손되게 했다.

1293년, 쿠빌라이는 마침내 병으로 쓰러졌다. 어의들이 그를 위해 백방으로 치료했으나 병은 호전되지 않았고 도리어 갈수록 위중해졌다. 위중한 병 때문에 대신들과의 조당(朝堂) 의정(議政)도 할 수 없었다. 규정에 따르면, 이때는 몽골인과 과거 공(功)이 있는 신하가 아니면 침궁에 들어와 문안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예외였으니, 그가 바로 불홀목(不忽木 부쿠무)이었다。

불홀목은 쿠빌라이의 시종인 연진(燕真)의 아들이었다. 젊었을 때 이미 용모가 비범하게 뛰어났으며, 일찍이 태자찬선(太子贊善) 왕순(王恂)을 스승으로 모셨고 훗날 왕순을 따라 북정(北征)을 갔다가 다시 허형(許衡)을 스승으로 모셨다. 허형이 역대 제왕의 시호와 이름, 황제의 계통, 세년(歲年) 등의 책을 편찬해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불홀목은 몇 번 읽으면 곧 암기할 수 있었다. 그는 한화(漢化)가 비교적 깊었으며 유학을 중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16세 때 그가 《정관정요》 중의 수십 가지 일을 초록해 쿠빌라이에게 올렸는데, 예컨대 조정 중에 몽골인으로 벼슬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만약 몽골족 인재를 많이 양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한인의 제도를 통달하게 하려면 반드시 고대처럼 각지에 학교를 많이 설립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 등이었다.

쿠빌라이는 그의 뜻이 이를 빌려 규탄하고 간언하려는 데 있음을 알고, 본 후에 찬탄을 마지않았으며 그 후 불홀목에게 중임을 맡겼다. 불홀목은 선후로 연남하북도제형안찰부사(燕南河北道提刑按察副使), 제형안찰사(提刑按察使), 참의중서성사(參議中書省事), 이부상서(吏部尚書), 공부상서(工部尚書), 평장정사(平章政事) 등을 역임했으며, 신중하고 후덕하며 사치를 좋아하지 않아 황제의 깊은 신임을 얻어 고굉지신(肱股之臣)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쿠빌라이가 앓아누운 기간에 불홀목은 한 걸음도 떠나지 않고 곁을 지키며 황제의 의약(醫藥)을 책임지고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쿠빌라이는 임종 전에 그에게 백벽(白璧, 흰 옥석) 한 개를 하사하며 말하기를, “훗날 이것을 지니고 와서 짐을 보라”고 했다. 백벽을 하사한 것은 불홀목의 완벽한 품행에 대한 인정인 동시에, 그가 다음 대 황제를 보좌할 때도 여전히 백벽처럼 티 없는 품격을 유지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지원(至元) 31년 정월 22일(1294년 2월 18일), 재위 35년 만에 쿠빌라이가 대도(大都)에서 병으로 서거하니 향년 80세였고,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이며, 몽골어 존칭으로는 ‘세첸(薛禪, 현자라는 의미) 칸’이라 했다. 그 후 막북(漠北)의 기련곡(起輦谷) 조상의 능에 안장되었다. 몽골의 안장 풍습에 따라 후인들은 그 매장지를 찾을 수 없으며, 다른 몽골 대칸들도 마찬가지이다.

《원사(元史)‧제사지(祭祀志)》는 원조 황제의 신비로운 매장법을 기록하고 있다. 황제가 죽은 후, 온전한 향남목(香楠木) 한 그루를 골라 중간을 쪼갠 다음 사람 모양의 홈을 파내는데, 크기는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정도가 알맞다. 다 파낸 후 황제를 홈 안에 모시고 원목을 합친 뒤, 겉을 네 줄의 황금 테로 단단히 묶는다. 묘지에 운반한 후 묘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구덩이를 파낼 때는 흙을 통째로 꺼내는데 꺼낸 후 순서대로 한편에 배열하고, 관목을 구덩이에 넣은 후 다시 꺼낸 흙덩이를 순서대로 돌려놓으며, 남은 흙은 먼 곳에 버려 보기에 아무것도 묻지 않은 것과 같고 지형지물이 조금도 변하지 않게 한다.

상여를 모시는 관원은 오직 세 명만 남기고 5리 밖에 살게 하며, 3년 동안 능을 지킨 후 돌아간다. 몽골 원조 황제들을 이처럼 매장했으니 자연히 아무도 그들의 무덤을 찾을 수 없다.

쿠빌라이가 붕어한 후 장례 절차 및 묘호(廟號)를 정하는 등의 일은 모두 불홀목이 주재했다. 태자 진금의 아들 테무르(鐵穆耳)가 제위를 계승하니 이가 성종(成宗)이다. 성종이 즉위한 후 조정의 대사 또한 대부분 불홀목의 의견을 채택했으며, 태후 또한 불홀목을 이전 조정의 구신(舊臣)으로 여겨 매우 존중했다.

忽必烈驾崩后,太子真金的儿子铁穆耳继承大位,是为成宗。图为元成宗铁穆耳画像。(公有领域)

쿠빌라이가 붕어한 후, 태자 진금의 아들 테무르가 제위를 계승하니 이가 성종이다. 그림은 원 성종 테무르의 초상화. (공유 영역)

세인의 공경하며 현군(賢君)이라 찬송

쿠빌라이는 사후에 세상 사람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대신 왕구(王構)는 《세조황제시책문(世祖皇帝諡冊文)》에서 그를 찬하며 “여러 사람의 지혜를 끌어 모아 쓰시면서도 결단은 스스로의 속마음으로 내리셨고, 천하의 모든 중요 정무를 총괄함에 손바닥을 가리키듯 명쾌하셨다. 조정을 구성하는 조정 내부의 신하로부터 지방을 다스리는 제후에 이르기까지, 위엄과 등급을 차례로 두어 알맞지 않음이 없었다. 교화를 앞세우고 형벌은 뒤로 돌려 근본과 말단이 서로 따르게 하니, 이 또한 모두 질서가 있었다.”라고 했다.

또한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항복하여 귀순한 이들에게도 은혜를 더하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매번 ‘인(仁)을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하셨으며, 작은 나라를 인으로 아끼고 자비를 베푸시어 넓은 포용력을 특별히 보여주셨다.” “그 성덕(聖德)은 미칠 수 없으며 신공(神功)은 성대하여 숭상할 만하다”라고 했다.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았던 간신(諫臣 간언하는 신하) 왕운(王惲)은 《대행황제만사(大行皇帝挽辭)》 8수에서 쿠빌라이의 공적을 노래하며 그를 요(堯) 임금, 우(禹) 임금과 같은 현군에 비유했다.

“정치를 논함은 요·우 임금 같으셨고,
현인을 구함에 어부와 농민에까지 이르셨네.
백성의 땅에 두 황제가 없었으니,
묘산(廟算, 조정의 계획)에 기병이 있었네.
온 세상이 바람과 연기 고요하고,
하늘 가운데 해와 달이 밝도다.
미천한 신하가 덕을 기리고자 하나,
결국은 억지로 붙인 이름일 뿐이네“

論治方堯禹,求賢到釣耕。
民區無二上,廟算有奇兵。
萬寓風煙靜,中天曰月明。
小臣思頌德,終了是強名。

일찍이 쿠빌라이의 중용을 받았던 대유(大儒) 학경(郝經)은 “지금의 주상께서는 천운을 타고나 운수를 여셨으니, 성품이 영민하고 의관과 예악을 숭상하며 인재를 아끼고 선비를 높여 중원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얻으셨으며, 오랫동안 여러 몽골 왕족들의 추앙을 받아오셨습니다. 천운과 기수를 따져보고 그 덕망과 그릇을 살펴보건대, 한 고조, 당 태종, 위 효문제와 같은 부류이십니다.”

쿠빌라이의 증손자이자 원조 4대 황제였던 인종(仁宗)은 쿠빌라이를 매우 숭배해 쿠빌라이의 법으로써 법을 삼았는데, 그는 일찍이 조서를 내려 “오직 우리 조종(祖宗)께서는 신무(神武)로 천하를 평정하셨고, 세조 황제께서 관직을 설치하고 직분을 나누시며 고상한 유학자들을 불러 쓰셨고, 학교를 숭상하여 인재를 기르는 터전으로 삼으셨으며, 과거를 의논하여 선비를 뽑는 방도로 삼으셨으니 규모가 거대하고 원대하도다”라고 했다.

원 순제(元順帝) 역시 일찍이 “오직 세조 황제만이 재위하심이 장구하시어 하늘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고 온갖 복이 다 이르렀다”라고 했으며, 이를 칭송하기 위해 자신의 연호를 쿠빌라이가 일찍이 사용했던 연호인 ‘지원(至元)’으로 고치기까지 했다.

《원사(元史)》의 편찬자들이 내린 쿠빌라이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세조는 도량이 넓고 크며, 사람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잘 기용했으며 유술(儒術)을 신뢰하고 등용했다. 이로써 ‘이하변이(以夏變夷, 중화의 선진 문물과 법도로 오랑캐의 풍습을 변화시킴)’를 이루어내어 나라의 기강과 제도를 세웠으니, 한 시대의 제도를 확립한 그 기틀과 규모가 원대했다.“

여기서 ‘이하변이’란 곧 한족의 법도인 한법(漢法)을 사용해 몽골의 옛 습속을 변화시켰음을 뜻한다. 또한 《원사》의 편찬자들은 쿠빌라이 시대를 한 초와 비교하며, 당시에는 “어진 관리가 곳곳에 눈에 띌 정도”로 사회 풍속이 매우 바르고 곧았다고 했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원나라는 세조가 천하를 하나로 통합한 이래 백성을 넓게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였으니, 참으로 ‘인자한 마음(仁心)’을 가졌다 할 만하다.”

“옛날 중국의 대송(大宋) 황제가 310여 년 동안 천하를 다스렸으나, 후손들이 하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하늘이 원 태조 황제(칭기스칸)를 내시어 막북에서 일어서게 하셨고, 달달(몽골), 회회(중앙아시아 무슬림), 여러 이방의 군장들을 모두 평정하게 하셨다. 태조의 손자(쿠빌라이)는 인덕(仁德)으로 이름이 높아 세조 황제가 되었으니, 천하를 하나로 합치어 구이팔만(九夷八蠻)과 해외 여러 나라들이 모두 하나로 통일되기에 이르렀다. 백 년의 세월 동안 그 은혜와 덕을 누군들 그리워하지 않았겠으며, 그 호령을 누군들 두려워하지 않았겠는가. 당시에는 사방에 아무 근심이 없어 백성들은 평안하고 물산은 풍요로웠다.“

“생각건대 성상(세조)께서는 예전에 북방 땅에서 오시어 중국의 주인이 되셨고, 다스림이 성대하고 백성을 살리고 키워낸 번성함으로 그 공덕이 백성들에게 깊이 미쳤다.”

청나라 강희(康熙) 연간의 대신 소원평(邵遠平)이 편찬한 《원사류편(元史類編)》에서도 높은 평가를 내렸다.

“마침내 영웅적인 대업을 이루어 중국와 외국을 하나로 통합하였으니, 그 덕과 위엄이 미치는 곳은 아무리 멀어도 도달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국호를 새로이 정하고 제도를 세워 한 시대의 모범을 후대에 남겼으며, 유학을 숭상하고 간사한 무리를 간파하여 기용되었더라도 곧 실패하도록 만들었다. 영민함으로 능히 결단을 내리시니 행함에 후회가 없었다.“

《신원사(新元史)》 또한 쿠빌라이의 정적을 당 태종의 ‘정관의 치’에 견주어 “다스림의 융성함이 정관에 거의 가깝다”고 했다.

그리고 마르코 폴로의 눈에 쿠빌라이는 “세계의 군주 중 그에게 미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다”, “인류의 시조 아담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상에서 일찍이 이토록 광대한 인민, 토지, 재화를 보유한 강력한 군주를 보지 못했다”라고 했다.

일 칸국의 사학자 바사프(Wassaf) 역시 로마의 카이사르 등 세계 유명 군주들이 모두 쿠빌라이와 비교될 수 없다고 여겼으며, 그를 천고의 일제(一帝)라고 찬미했다. 그는 “우리 나라(페르시아) 영토로부터 몽골 제국의 중심에 이르면, 복 있는 황제 공도 대칸(公道可汗 쿠빌라이)이 이곳에 주재하고 계신다. 노정이 비록 1년의 먼 거리에 떨어져 있으나 그 풍부하고 위대한 공업(功業)이 외부로 전해져 우리가 거주하는 땅에 이르렀으니, 그 제도와 법률, 그 지혜의 깊고 예리함, 그 판단의 현명함, 그 치적의 놀랍고 부러워할 만함은 믿을 만한 증인, 예컨대 유명한 상인과 박학한 여행자의 말에 의하면 모두 지금까지 보아온 위인들 위에 우뚝 솟아 있다”라고 했다.

분명한 것은 쿠빌라이는 단지 중국인들의 마음속에서 위대한 군주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럽과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눈에도 그러했으니, 그가 유럽과 세계에 미친 영향은 심원한 것을 알 수 있다.

《元史》作者对忽必烈的评价是:“世祖度量弘广,知人善任使,信用儒术,用能以夏变夷,立经陈纪,所以为一代之制者,规模宏远矣。”(大纪元制图)

《원사(元史)》의 편찬자들이 내린 쿠빌라이에 대한 평가는 “세조는 도량이 넓고 크며, 사람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잘 기용했으며 유술(儒術)을 신뢰하고 등용했다. 이로써 ‘이하변이(以夏變夷)’를 이루어내어 나라의 기강과 제도를 세웠으니, 한 시대의 제도를 확립한 그 기틀과 규모가 원대했다.”(에포크타임스 제작)

비범한 일생, 천고에 이름을 남기다

쿠빌라이의 비범한 일생은 “묵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펼쳐(鼎新革故)” 그의 “성강(成康)의 다스림을 잇겠다”는 이상을 실천했다. 그의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은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찬탄하게 만든다.

문치 방면으로는 다음과 같다.

① 나라를 열고 제도를 세우며 한법(漢法)을 모방해 국가를 다스렸다. 예컨대 연호와 국호를 정하고 도읍을 세웠으며 정권 기구를 완비하고 제사 의례를 높여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다.

② 국사(國師) 파스파(八思巴)에게 명령해 새로운 몽골 문자를 제정하게 했고 국교를 확정했으며 역법을 제정했다.

③ 지폐를 유통하는 법을 제정했다.

④ 수리 교통을 강화하여 운하를 개통하고 해운을 증설했으며 참치(站赤, 역참) 제도를 완성했다.

⑤ 농사(農社) 제도를 건립해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고 떠도는 백성들을 편안히 구휼하며 이재민을 구제했다.

⑥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학교를 흥성하게 일으킨 등등.

무공 방면으로는 다음과 같다.

① 운남(雲南)을 정복했다.

② 남송을 정복하여 통일 왕조를 건립했다.

③ 서북과 동북의 반란을 평정하고 변강에 대한 관리를 강화했다.

④ 고려(高麗)를 항복시켰고 두 차례 일본을 동정했으며 세 차례 안남(安南, 베트남)을 남정했고 면전(緬甸, 미얀마)을 남정한 등등.

이전의 제왕들과 비교할 때, 쿠빌라이는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① 소수민족 제왕으로서 화하(華夏, 중국)에 들어와 남북을 통일한 최초의 사람이다.

② 운남과 티베트를 원 제국의 판도에 편입시킨 최초의 사람이다.

③ 다민족 통일 국가의 발전을 추진한 최초의 사람이다.

④ 해운을 확장하고 시박(市舶, 무역선) 무역을 주목한 최초의 사람이다.

④ 중화 제국과 중앙아시아·유럽의 경제와 문화 교류를 새로운 높이로 밀어 올린 최초의 사람이다.

또한 바로 쿠빌라이의 통치 기간에 원나라는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안정으로 나아갔으며, 국가 또한 강성해졌다.

첫째는 농업의 회복과 발전이 식량 생산량의 제고를 가져왔다. 쿠빌라이 시기 섬서(陝西) 관중(關中) 지역의 밀이 “천하에 풍성했다” 하여 관(關), 롱(隴), 섬(陝), 락(洛)에는 “해마다 곡식이 풍년 들어 백성들이 풍요롭고 즐거운” 장면이 나타났다.

장강 이남 강남 지역은 생산량이 더욱 높아 강절(江浙) 한 성의 세량(歲糧, 연간 세금 곡물) 총수만 해도 전국 세량 총수의 3분의 1이 넘었다. 소수민족 지역의 농업 생산 역시 큰 발전이 있어 당시 북으로는 크룰렌강, 키르기스, 지금의 예니세이강 상류 일대에 이르고 남으로는 라라스(羅羅斯, 사천 남부), 오몽(烏蒙, 운남 소통昭通)에 이르기까지 모두 둔전(屯田)이 있었다。

이외에도 남방 농업의 발전 때문에 남부 지방의 면화 산지가 비교적 빠르게 확대되었다. 이와 동시에 면화는 북방의 섬서와 감숙 일대에서도 보편적으로 재배되었다. 당시 중국의 태반에 이미 면화가 심어졌다.

首先是农业的恢复和发展带来了粮食产量的提高。示意图,图为清焦秉贞《耕织图》册局部。(公有领域)

첫째는 농업의 회복과 발전이 식량 생산량의 제고를 가져왔다. 그림은 청 조병정(焦秉貞)의 《경직도》 중 일부. (공유 영역)

둘째로 상업 역시 한바탕 번영했다. 각지를 왕래하는 무역이 끊이지 않았고 원조의 개방과 유럽으로 통하는 길의 원활함은 더욱 세계 각지의 상단들을 끌어들였다. ‘칸발리크’로 불린 원 대도는 단지 하나의 큰 도성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 중심지의 하나였다. 동유럽, 중앙아시아로부터, 아프리카 해안으로부터, 일본, 고려로부터, 남양(南洋 동남아) 각지로부터 모두 상단과 사절단이 대도로 찾아왔다。

대도 성내에서 유통되는 상품에는 전국의 식량, 차, 소금, 술, 비단, 보석 등이 있었고 또한 단일 상품을 집중적으로 경영하는 시장, 예컨대 미시(米市 쌀시장), 철시(鐵市), 피모시(皮毛市 모피 시장), 마우시(馬牛市 말과 소시장), 타락시(駝駱市, 낙타 시장), 주자시(珠子市, 진주 시장) 등이 있었다. 상업 항회(行會)의 조직 중에는 ‘항로(行老)’가 있어 대내외 사무를 책임졌다.

국내에서 티베트의 라마들은 매번 내지(內地)를 왕복할 때마다 대량의 화물을 운송해야 했다. 동남 연해로부터 천진(天津)으로 직항하는 해선 역시 복건(福建), 광동(廣東), 강소(江蘇), 절강(浙江)의 비단, 도자기와 남양(南洋)의 향료를 실어 왔다.

그리고 북방의 중요 도시들은 육로 교통 간선을 따라 탁주(涿州), 진정(真定), 대동(大同), 태원(太原), 평양(平陽), 봉원(奉元, 지금의 서안), 개봉(開封), 제남(濟南), 상도(上都), 카라코룸(和林), 진해(鎮海) 등의 도시가 있었는데, 이 도시들 역시 수많은 한족과 서역 상인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상도에서 멀지 않은 소도시 담마림(蕁麻林, 지금의 하북 만전현 세마림)에는 3000호의 회회(回回) 장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칭기스칸이 호라즘을 서정할 때 데려온 이들이었다. 그들은 금박 비단을 직조하는 일을 책임지며 원조 사람들과 각국 상인들에게 제품을 제공했다.

운하와 장강을 따라 기존의 몇몇 상업 도시들이 더욱 발전했으니 비교적 유명한 곳으로 항주(杭州), 평강(平江), 진강(鎮江), 남경(南京), 양주(揚州) 등의 도시가 있다. 이외에도 연해 도시 광주(廣州), 천주(泉州), 복주(福州), 온주(溫州), 경원(慶元, 지금의 영파), 감포(澉浦), 상해(上海) 등은 복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박사(市舶司)와 제거사(提舉司)를 둔 대외 개방 무역 항구였다. 그중 천주는 대외 무역의 제1대 항구였으며 수출 상품으로는 도자기, 비단 등이 있었고 수입 상품으로는 정향, 백두구, 후추, 다이아몬드, 보석 등이 있었다. 원조 사람 왕대연(汪大淵)의 《도이지략(島夷志略)》은 일찍이 천주와 왕래가 있던 국가와 지역이 100여 개에 달한다고 언급했다.

서남 방면으로는 성도(成都), 곤명(昆明), 대리(大理) 등의 도시가 상업 중심지가 되어 서남 소수민족의 경제 생활을 모두 전국의 상업망 안으로 편입시켰다.

1270년 국내의 상세(商稅, 상업세)는 “은 4만 5천 정을 액수로 삼고 액수를 넘는 자는 별도로 증여(增餘) 항목으로 삼게 했다.” 1289년 상세는 이미 증가하여 “복리(腹裏, 수도 주변 핵심 지역)는 20만 정이요 강남은 25만 정”에 달해 도합 45만 정이었다. 20년도 되지 않아 10배가 성장했다. 상세의 성장은 당시 상업의 번영을 반영한다.

[역주: ‘증여’란 원래 정해진 액수(정액)를 초과하여 수취된 금액이 발생한 경우, 그것을 본래의 장부 항목에 섞어 적지 말고 별도의 항목으로 편성해 장부를 작성하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야 회계가 투명해지고 이듬해 세액 기준이 올라가지 않게 된다. ]

경제의 발전은 또한 인구의 빠른 증가를 가져왔다. 1290년 당시의 인구는 가구수 1300만을 넘었고 인구는 5900여 만에 달해, 1262년의 141만여 호와 비교할 때 가구수가 약 10배 증가했다.

从东南沿海直航天津的海船也带来福建、广东、江苏、浙江的丝绸、瓷器和南洋的香料。示意图,图为清院本《清明上河图》局部。(国立故宫博物院提供)

동남 연해로부터 천진으로 직항하는 해선 역시 복건, 광동, 강소, 절강의 비단, 도자기와 남양의 향료를 실어 왔다. 그림은 청원본(清院本) 《청명상하도》 일부.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원말 명초의 대학자 엽자기(葉子奇)는 자신의 저서 《초목자(草木子)》에서 쿠빌라이 시기가 보기 드문 성세였다고 했으니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적절하다. 그는 “원조는 세조가 하나로 혼합한 이후로 천하가 다스려져 평안한 지가 6, 70년이었으니, 형벌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였으며 무력을 드물게 사용했다. 산 사람은 봉양하고 죽은 사람은 장사 지내니 만리를 여행가도 숙박이 자기 집과 같았으니 진실로 성대하다 할 만하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세를 창조한 천고의 제왕이 동서방 교류에 미친 영향 또한 거대하다.

모두가 알다시피 몽골의 세 차례 서정은 늘 대량의 외국 관원과 장인들이 포로로 잡아 동쪽으로 데려왔고, 이후에 다시 대량의 중앙아시아 상인, 여행가들이 잇따라 원조로 찾아왔으니 그들 중에는 회회인, 서역인, 대식인(大食人, 아랍인) 등이 있었다. 그들은 원조에서 정치에 종사하고 상업을 경영하며 아라비아의 과학과 문화 또한 가져왔다. 원조 전체에 걸쳐 페르시아, 아라비아의 천문역법, 수학, 의학, 사학 등의 서적 및 다방면의 인재들이 대량으로 중국에 들어왔다. 이와 동시에 몇몇 몽골인과 한인들 역시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다. 예컨대 원조는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의사들을 들여왔고 또 중국 의사들을 중동으로 보냈으니, 중의(中醫)의 맥진(脈診)은 중동과 인도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당시 중국은 기술적으로 세계를 1000년 앞서고 있었다. 화약, 지폐, 인쇄술, 도자기, 의약, 예술 등이 이때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고, 몽골인들이 강조한 자유로운 상업, 개방된 교통, 지식의 공유, 종교의 공존, 국제 법칙과 외교 특권(면책 특권) 이념은 모두 유럽의 역사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유럽의 르네상스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영향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 속에 몽골인의 형상이 출현한 것 및 몽골의 관념이 유럽의 문학 작품 속에 출현한 것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쿠빌라이는 몽골에서 칭기스칸을 이은 가장 위대한 제왕 중 한 명이며, 특히 그의 통치 기간(1260—1294)이 전성기였다. 이때부터 몽골인들이 동아시아로부터 서아시아까지 통제한 국면은 14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끝이 난다. 쿠빌라이가 역사의 두루마리 속에 남긴 짙은 자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감동하고 경탄하게 만든다.

(시리즈 완결)

참고자료:
《元史》
《新元史》
《忽必烈秘史》
《忽必烈傳》
《忽必烈和他的世界帝國》
《明太祖實錄》
《成吉思汗與今日世界之形成》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7/28/n1312243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