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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사랑한 아들 칭기스칸 시리즈 5 – 【칭기스칸】 옹 칸과 자무카를 격파하고 초원을 제패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成吉思汗】战王汗与札木合 称雄草原

초원의 영웅 칭기스칸(에포크타임스)

20여 년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테무진은 초원에서 가장 뛰어난 군사 통수권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호(東胡) 계통의 옹기라트부(보르테의 부족), 나이만부, 케레이트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몽골 부족을 정복함으로써 초원 정복 사업을 사실상 완수했다. 다만 정복된 부족 중 일부 수장들은 여전히 나이만부와 케레이트부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에, 언제든지 몽골 제 부족의 반란을 재발시킬 불씨를 품고 있었다. 특히 케레이트부의 옹 칸이 자무카의 항복을 받아들여 그를 상객(上客)으로 대우하고, 자무카의 부중(部眾)과 재물을 거들먹거리며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테무진을 배신할 조짐을 더욱 짙게 드리웠다. 그럼에도 테무진은 예년처럼 사신을 보내며 옹 칸의 안부를 물었다.

의리를 버리고 배신한 케레이트부를 정복

양측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테무진은 거듭 사돈을 맺자고 제안했다. 1203년, 테무진은 옹 칸에게 혼인을 청하며 자신의 장남 주치에게 그의 딸을 시집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옹 칸은 테무진이 자신의 양아들이고 주치는 손자 항렬이며 자신의 딸은 주치의 고모가 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곧이어 테무진은 다시 청혼하며 자신의 딸 호진 베기(火臣別吉)를 옹 칸의 손자 투사하(禿撒合)에게 시집보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만약 옹 칸이 이 청혼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테무진이 자무카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成吉思汗的长子术赤。(<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uchi_Khan.JPG" rel="nofollow noopener noreferrer">Betta27/Wikimedia Commons提供</a>)

칭기스칸의 장남 주치. (Betta27/Wikimedia Commons 제공)

옹 칸이 마침 이 청혼을 수락하려던 찰나, 자무카가 참소했다. 테무진의 딸 호진 베기는 외모가 추하고 오만해 아내로 삼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테무진이 보낸 청혼 사신들이 겉으로는 혼인을 청하고 있으나 실은 암중에 몽골에 항복했던 장수들을 설득해 테무진에게 귀부하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모함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옹 칸은 몹시 화를 내며 혼사를 거절했다. 다만 자무카의 제안을 전부 수용해 테무진을 군사적으로 공격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옹 칸은 자무카에게 예수게이와 테무진 부자 모두 자신에게 은혜가 있으니 그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테무진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 자신의 친아들 상쿤의 형으로 삼고 함께 부족을 다스리게 할 속셈이라고 털어놓았다.

옹 칸의 뜻을 파악한 자무카는 전략을 바꾸어 이번에는 상쿤(桑昆)을 찾아가 다시 참소했다. 테무진이 나이만부와 밀약을 맺고 옹 칸을 도모하려 하니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참소를 곧이곧대로 믿은 상쿤은 테무진과 결사전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마침 테무진에게 귀부했던 숙부 자하 감부 등에게 몰랴 연락했다. 때마침 자하 감부 역시 테무진을 떠나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우고 싶어 하던 차라 상쿤의 계획에 동의하며, 서쪽에 주둔 중인 테무진의 5개 군대의 배치 상황을 낱낱이 알려주었다.

옹 칸으로부터 출병 허락을 얻어내기 위해 상쿤은 옹 칸의 앞에서 거듭 테무진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옹 칸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고 테무진을 공격할 의도도 없었으나, 도량이 넓지 못했던 그는 결국 아들의 거듭된 설득에 넘어가 행동에 나설 것을 허락하고 말았다. 상쿤의 계책에 따라 옹 칸은 테무진에게 사람을 보내 마음을 바꾸어 주치와의 혼인을 허락할 테니 혼인 잔치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다.

혼인 잔치를 몽골어로 ‘부울자르(不兀勒劄兒)’라고 하는데, 이는 ‘양의 목구멍’을 뜻한다. 양의 목구멍 부위는 근육이 질기고 목뼈가 단단하여 변치 않는 굳건함을 상징한다. 혼인 잔치에서 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은 두 집안의 혼사가 두 번 다시 번복되지 않으며, 부부가 백년해로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때문에 ‘부울자르를 먹는다’는 것은 곧 혼인 잔치에 참석한다는 뜻이 되었다. 이 풍습은 오늘날까지도 몽골 지역에 남아있다.

초청을 받은 테무진은 20년 넘게 자신을 의부로 대하던 옹 칸을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군대를 남겨둔 채 소수의 수행원만 이끌고 연회 장소로 향했다. 그는 참소가 두 사람의 관계를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의부 앞에서 직접 해명할 참이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만약 이 혼사가 성사된다면 그는 자신의 수족 부족들과 케레이트부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옹 칸의 후계자 중 한 자리까지 꿰찰 수 있었다.

成吉思汗和王汗。法国国家图书馆藏。(公有领域)

칭기스칸과 옹 칸.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공유 영역)

그러나 도중에 길을 가다 하룻밤 머물던 중, 테무진은 혼인 잔치가 자신을 해치기 위한 음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옹 칸은 이미 군대를 매복시켜 그와 그 일족을 제거하고 서쪽에 주둔하던 5개 부대를 습격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옹 칸이 전력을 총동원하리라 판단한 테무진은 자신이 현재 수적으로 너무 불리함을 깨달았다. 이에 옹 칸이 체포하러 사신을 보내기도 전에 수행원들과 함께 가벼운 행색으로 도망쳤으며, 사신을 보내 4개 군대에도 급히 철수해 마우운두르산(卯溫都兒山)의 겨울 주둔지로 집결하라고 일렀다.

과연 옹 칸 부자가 정예 부대를 이끌고 잡으러 닥쳤을 때 천막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테무진의 행방은 묘연했다. 5개 군대 중 몽리크 군과 외다르 군은 제때 철수해 마우운두르산의 동계 주둔지에 무사히 도착했으나, 카사르 군과 우구데이 군 등 나머지 두 부대는 옹 칸 군대의 포위를 당해 어쩔 수 없이 결사적으로 돌파해야 했다. 테무진이 자신의 군대와 막 합류했을 때 옹 칸의 군대가 마우운두르산 앞의 할라할지트(合剌合勒只特)에 들이닥쳤다.

테무진은 몽리크 군을 보내 처자식을 동쪽의 기지인 푸이르하이, 즉 오늘날의 바이칼호로 피신시키고, 주얼체대와 외다르를 선봉으로 삼아 군대를 정렬시켰다. 각 부대는 밀집 대형을 유지하며 옹 칸 군대의 선봉에 맞섰으니, 이를 역사에서는 ‘할라할지트 전투’라고 부른다. 옹 칸의 선봉군은 섬멸되었으나 뒤이어 옹 칸의 제2진 군대가 순식간에 도착해 외다르의 부대로 돌진했다. 치열한 난전 속에서 외다르는 말 위에서 창에 찔렸으나 다행히 그의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구출해 냈다. 주얼체대는 자신의 좌측 아군 진영이 아수라장이 된 것을 발견하고 즉시 지원병을 보내 마침내 옹 칸의 제2진을 격퇴했다.

이때 상쿤이 군대를 이끌고 도착했다. 선봉대가 패배한 것을 본 그는 옹 칸이 도착하기도 전에 1천여 기의 호위대를 이끌고 전투에 뛰어들었다. 주얼체대는 상쿤을 알아보자마자 그를 향해 화살을 날렸고, 화살은 상쿤의 왼쪽 볼을 뚫고 오른쪽 볼로 빠져나갔다. 상쿤은 곧바로 말에서 떨어졌고, 케레이트 장수들이 그를 부축해 서둘러 후퇴했다.

더 이상 가용 병력이 없던 데다 날마저 저물어 오래 싸우기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테무진은 적의 공세가 꺾인 틈을 타 철수 명령을 내렸다. 진영 곳곳에 모닥불을 환히 밝혀둔 채 밤을 타 몰래 도망친 것이다.

테무진 일행은 동쪽으로 향했다. 그는 군중 속 부상자와 노약자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정예병을 거느리며 후미를 방어하는 한편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했다. 군중에 식량이 떨어져 도중에 사냥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사흘을 행군한 끝에 카사르 군에 철수를 통보하러 갔던 보오르추가 쫓아왔다. 그는 테무진에게 자신과 카사르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적의 화살에 말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남의 말을 빼앗아 달아났으나 카사르는 온데간데없이 찾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마우운두르산에 도착했을 때는 오직 옹 칸의 군대만 보여 그 뒤를 추격해 왔다는 것이다. 그날 밤에는 보르굴이 화살을 맞고 부상당한 우구데이를 데리고 합류했고, 테무진은 눈물을 흘리며 우구데이의 상처를 직접 치료해 주었다.

이후 테무진 일행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나아와 둥우주무친치(東烏珠穆沁旗) 동북부에 위치한 발주나호(巴勒渚納湖) 기슭에 이르렀다. 외다르는 말을 타고 짐승을 쫓다가 화살 상처가 도져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테무진은 통곡한 뒤 옹 칸에게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이때 테무진의 곁에는 단 19명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아홉 부족 출신으로 혈연과 신앙이 모두 달랐다. 테무진은 이 19명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들과 함께 흙탕물이나 다름없는 호숫물을 나누어 마셨고, 추종자들은 그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테무진 역시 그들에게 훗날 대업을 이룩하면 반드시 고락을 함께하고 남다른 특권을 누리게 해주겠다고 맹세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발주나 맹약’이다.

발주나 맹약이 담아낸 형제애는 혈연관계, 종족, 신앙의 경계를 뛰어넘었다. 이는 개인의 선택과 상호 간의 충성에 기반한 권력 및 의무 관계로 발전하는 초석이었으며, 훗날 몽골 제국 내부를 하나로 묶어주는 지배적인 통합의 기반이 되었다.

이후 테무진 일행은 발주나호를 떠나 강줄기를 거슬러 북상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신을 옹기라트부에 보내 귀부를 권고했고, 옹기라트부는 항복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테무진의 장인인 데세첸을 새로운 수장으로 추대하며 테무진에게 귀부했다. 한편으로 그는 옹 칸과 자무카를 규탄하는 격문을 날리는 한편, 흩어져 있던 부중(部眾)들에게 반격의 신호를 보냈다. 새로운 편제로 개편된 군대들이 차례로 뒤를 쫓아와 그의 휘하로 다시 집결했다. 그들은 후룬호(呼倫湖) 부근에 이르러 전력을 가다듬으며 옹 칸과의 결전의 날을 기다렸다.

당시 옹 칸은 테무진의 무리가 완전히 흩어졌으며 테무진은 여전히 아득한 동쪽에 처박혀 있다고 여긴 나머지, 방비는커녕 금장(金帳)에서 연회를 벌이며 승전을 자축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테무진은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주저 없이 밤낮으로 질주하며 초원에 옹 칸이 설치해 둔 망루와 초소를 차례로 격파하여 진군 소식이 새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차단했다. 테무진의 군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옹 칸의 진영을 겹겹이 포위했고, 그제야 옹 칸 대영의 병사들이 적의 기습을 알아차렸다.

옹 칸의 대영 바깥에서 테무진은 옹 칸 부자에게 나와 투항하라고 외쳤으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이에 테무진은 사방에서 동시에 총공격을 명했다. 옹 칸의 대영 주변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어 이를 방어막 삼아 완강히 저항했기에 쉽게 돌파하기 어려웠다. 3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케레이트부는 대패했고, 진영 안에서 항복을 외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테무진은 항복한 자들에게 100명씩 조를 나누어 맨손으로 차례차례 진영을 걸어 나오게 했다. 인원수를 점검해 보니 옹 칸 부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항복한 장수들에게 물어보니 옹 칸 부자는 사흘 전에 이미 도망쳤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최후는 모두 비참했다. 옹 칸은 나이만부로 피신하려 했으나 국경 수비대에 의해 간첩으로 오인받아 살해당했다. 상쿤은 남쪽으로 도망쳐 서하로 향하던 중 하인들에게 버림받고 사막에서 목말라 죽었다. 그를 버린 하인들은 테무진에게 귀부하려다 처형당했는데, 테무진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자들이 바로 이처럼 불충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자무카는 일부 부중을 이끌고 서쪽 나이만 영지로 도망쳤다.

이로써 막강했던 케레이트부는 정복되었다. 케레이트부와 테무진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근원적 적의가 없었기에 그 군대, 귀족, 토지, 재물은 고스란히 테무진에게 흡수되었다. 이로써 테무진은 물과 풀이 풍부한 후룬부이르 초원을 거머쥐었으며, 그의 실력과 위세는 눈부시게 치솟았다. 이제 나이만부는 테무진이 아직 꺾지 못한 세 개의 대형 초원 부족 중 최후의 남은 세력이 되었다. 테무진에게 패배한 각 부족의 귀족들은 잇달아 나이만 칸에게 몰려들어 그들의 지원을 업고 자신들이 잃어버린 가축과 목장을 되찾으려 벼르고 있었으나, 과연 그들이 뜻을 이룰 수 있었을까?

呼伦贝尔草原 (shutterstock)

후룬부이르 초원. (shutterstock)

새로운 전술을 채용하니 일격에 무너진 나이만부

테무진의 연이은 승리는 나이만인들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세력을 결집하고 몽골에 적대적인 부족들 속에서 동맹을 찾아 테무진을 공격하려 했으나 그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고 말았다. 몽골 제 부족의 세력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1204년 여름 4월 16일, 테무진은 제베와 훌빌라이를 선봉으로 삼아 나이만부를 토벌하러 나섰다. 결전의 장소는 다사알리 초원이었다. 멀고 먼 길을 달려와 병사와 말의 숫자가 적대 부족보다 적음을 고려한 테무진은 각 병사에게 모닥불을 5개씩 피우게 하여 실제 병원 규모를 위장했다. 이 때문에 나이만인들은 “몽골 군대가 다사알리 초원을 가득 메웠고, (그들이 피운 진영의) 불빛이 하늘의 별보다 많다!”고 착각했다.

이 계책은 제대로 주효하여 나이만인의 진격을 늦추었다. 아울러 몽골군의 실제 실력에 대한 혼란은 나이만 지도부 내부의 분열을 불러일으켰다. 나이만의 나이든 ‘타이양 칸’은 보고를 듣고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아들 쿠추크 칸에게 불안감을 토로했다. 기세등등한 몽골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보다 일단 알타이산맥으로 후퇴한 뒤 몽골군을 나이만 영지 깊숙이 유인해 섬멸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아버지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쿠크는 사신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면박 주며 거칠게 반발했고, 다른 이들도 일제히 몽골군을 향한 즉각적인 총공격을 강력히 주장했다. 타이양 칸은 몹시 화를 냈으나 결국 몽골군과의 정면 승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메르키트인들과 자무카가 이끄는, 테무진의 지배에 반대하는 몽골인들로 이루어진 연합군까지 끌어모았다.

전투에 앞서 테무진은 군대를 지휘해 진을 치고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술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덤불처럼 전진하고, 호수처럼 진을 치고, 송곳처럼 파고들어라!”

구체적으로 말해 ‘덤불처럼 전진한다’는 것은 군대가 각자 흩어진 10인 분대 단위로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적을 향해 접근해 공격한다는 뜻이다. 공격을 마친 분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적들은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으면서도 공격자들이 사라지기 전에 반격할 도리가 없었다. ‘호수처럼 진을 친다’는 것은 공격할 때 앞줄의 긴 병사 열이 화살을 쏘고 나면 다음 줄의 병사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마치 파도처럼 순환하며 적을 타격하는 전술이었다. 마지막으로 ‘송곳처럼 파고든다’는 것은 분대들을 서로 바짝 붙여 ‘송곳 대형’으로 재편성한 뒤, 선두 분대가 최전선을 돌파해 적의 심장부 깊숙이 파고들어 적의 방어선을 찢어내는 전술을 의미한다.

이렇게 원래 구식 작전 수단과 수렵 전략을 융합한 독창적인 전술은 군대 내부의 긴밀한 상호 협력과 절대적인 지휘 복종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테무진이 처음으로 실전에 적용한 이 전술은 즉각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고, 속수무책이던 나이만인들은 겁에 질려 서로 먼저 도망치기 바빴다.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험준한 산등성이뿐이었기에, 어두운 밤길에 앞을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나이만인들이 가파른 협곡으로 굴러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타이양 칸 역시 사로잡혔고, 그의 아들 쿠추크는 간신히 도망쳤다. 그 뒤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를 거쳐 나이만부는 테무진에게 철저히 정복되었다. 곧이어 테무진은 메르키트 잔당까지 추격해 완전히 섬멸했다.

成吉思汗的营地。图片出自蒙古伊儿汗国时期,史学家Rashid al-Din Hamadani(1247年至1318年)主编的《史集》。(公有领域)

칭기스칸의 진영. 몽골 일 칸국 시대의 사학자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1247~1318)가 편찬한 《사집(史集)》에 수록된 삽화. (퍼블릭 도메인)

자무카의 최후

나이만인들과 함께 행동하던 자무카의 수많은 부하들도 테무진에게 항복했다. 반면 자무카는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도망쳐 사냥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1년 뒤, 그의 부하들은 절망감과 체념 끝에 자무카를 결박해 테무진에게 끌고 왔다.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원한이 얽혀 있었으나, 평소 ‘충성’을 그 무엇보다 높이 쳤던 테무진은 자무카의 부하들에게 상을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처형해 버렸다.

자무카를 대면한 테무진은 옛날의 형제애를 떠올리며 여전히 서로 의지하는 친구로 남기를 바랐으나, 마음의 부끄러움을 느낀 자무카는 이를 거절하고 오직 죽음만을 청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나와 안다, 두 사람의 명성은 해 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모르는 이가 없소. 안다에게는 현명한 어머니가 계셔 그대를 이토록 걸출한 영웅으로 낳아 주셨고, 유능한 동생들과 영웅 같은 동반자들이 있으며, 73마리의 준마 같은 호걸들이 있소. 그러니 내가 안다에게 패한 것이 당연하오. 그러나 나는 어릴적 부모를 여의고 형제도 없었으며 아내는 입이 싼 여자였고 의지할 동반자조차 없었기에, 천명이 향하는 안다에게 패배하고 말았소.”

그러면서 그는 죽은 뒤 자신의 유골을 높은 언덕에 묻어 달라고 청했다. “그리하여 영원히 당신의 자손들을 보살피게 해 주시오.”

당시의 샤머니즘 신앙에 따르면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은 자의 영혼은 영원히 유혈의 고통에 시달리며 샹그릴라 같은 텡그리(하늘)의 천국에 오르기 어렵다고 여겨졌다. 이에 테무진은 자무카를 ‘피를 흘리게 하지 않고 처형하되, 그의 유골이 들판에 버려져 더럽혀지지 않도록 후하게 장사 지내라’고 명령했다. 그에 따라 자무카는 자루에 담겨 질식사하는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이로써 테무진은 몽골 고원의 모든 부족을 완전히 정복하고 막북(漠北) 초원을 통일했다. 그가 온 세상에 펼쳐보인 왕자(王者)의 풍모는 훗날 유럽과 온 세계를 거대한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게 된다.

(계속)

참고자료:
《蒙古秘史》
《元史》
《成吉思汗與今日世界之形成》
《中國曆代戰爭史》(元朝) 台灣出版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10/5/n12455271.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