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칭기스칸 (에포크타임스 제작)
칭기스칸이 금나라를 공격하는 동시에,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호라즘의 국왕 알라우딘 무함마드가 1215년에 바하 아딘 지랄을 우두머리로 하는 사절을 파견해, 중도 부근에서 금나라를 공격하고 있던 칭기스칸을 알현했다. 그 목적은 몽골의 군사력 및 각 방면의 정세를 탐지하는 것이었다.
칭기스칸은 사절단 멤버들을 성심껏 대접했다. 그는 호라즘이 거대한 이슬람 국가이며, 게다가 호라즘인들이 상업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몽골 제국이 흥기한 후에 상권을 보았고, 이 때문에 많은 호라즘 상인들이 몽골에 와서 몽골인들과의 무역을 통해 풍부한 이윤을 얻었으며, 몽골 또한 이러한 상품들을 필요로 했다.
이를 위하여 칭기스칸은 무함마드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중 한 구절은 “무함마드 칸이여, 그대는 해가 지는 곳을 다스리고, 나는 해가 뜨는 곳을 다스린다”였으며, 양측이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상인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통행하게 하여 문화 교류를 촉진하고 서로를 번영하게 해야 한다고 명백히 밝혔다.
호라즘이 사절을 보내 방문한 뒤, 1216년에 칭기스칸은 사자를 보내 호라즘을 답방함으로써 우호적인 교류의 선의를 표현했다. 프랑스 역사학자 페티 드 라 크루아는 당시 칭기스칸의 지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군주는 더 이상 아시아 동부와 서부를 걱정하지 않으며, 아시아 북부도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호라즘과 진정한 우정을 발전시키는 데 전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호라즘에 선물을 지닌 세 명의 사자를 파견해…… 질문하게 했다…… 그들의 백성들이 함께 안전한 무역을 진행하기를 원하는지, 서로 이상적인 동맹 관계를 통해 휴식과 번영을 얻기를 원하는지, 이것은 어떤 왕국에게 있어서도 커다란 행복이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결국 실망하고 만다.
호라즘의 굴기
호라즘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페르시아 수니파 무슬림의 통치로 기원한 왕조이다. 12세기 중엽, 서요 국왕 야율대석이 10년의 시간을 들여 서카라한국, 동카라한국, 고창 위구르 및 호라즘 왕국을 정복하고 자신의 부속국으로 삼았다. 그때 서요의 수도는 호사알을타로, 당대(唐代)의 대시인 이백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 영역은 북으로는 일리강에 이르고, 남으로는 시르다랴강 상류, 서로는 탈라스(오늘날의 파미르고원 서쪽), 동으로는 바르스칸(오늘날의 이식쿨호 동남쪽)에 이르렀다.
1200년, 호라즘의 무함마드가 즉위했는데, 그 영토는 동북으로는 시르다랴강, 서남으로는 페르시아만, 동남으로는 인도로, 서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에 달했다. 서요의 국세가 쇠미해짐에 따라 무함마드는 불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이때 중앙아시아에서 비교적 강대했던 것은 서요, 호라즘 외에도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북부에 위치한 고르 왕조가 있었다. 1204년, 서요와 호라즘이 연합하여 고르 왕조를 격파했고, 고르 왕조는 동일한 신앙을 바탕으로 호라즘에 병합되는 것을 선택했다.
그 후, 서요의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함마드는 1208년에 서요에 신속(신하로 복속)되어 있던 사마르칸트(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도시)를 공격했으나 서요에게 패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요의 내란으로 인해 사마르칸트 군주 오스만 이븐 이브라힘이 서요를 배반하고 스스로 칸이라 칭했으며, 무함마드는 또 오스만과 연합하여 트랜스옥시아나(두 강 사이) 지역에서 서요의 세력을 몰아냈다. 나중에 무함마드는 또 오스만을 격파하고 트랜스옥시아나 지역을 점령했다.
1211년, 나이만부가 멸망한 후 서요로 도망쳐 구르칸(즉 야율직로고耶律直魯古)에게 의탁했던 원래 나이만부 타양칸의 아들 쿠출룩(古出魯克)이 구르칸이 출정한 틈을 타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호라즘과 연합해 구르칸을 타도하고 서요 정권을 탈취해 서요의 새로운 군주가 되었다. 그 속국인 서카라한국은 호라즘에 병합되었고, 동카라한국은 쿠출룩에게 병합되었으며, 고창 위구르는 칭기스칸에게 신복(臣服)했다.

우즈베키스탄 우르겐치 교외의 호라즘 도시 유적. (shutterstock)
주변의 잔여 세력을 정복하고 서요를 멸하다
금나라를 공격하고 호라즘과 우호를 표현하는 동시에, 칭기스칸은 또 계속하여 장수를 파견해 주변 세력을 정복했다.
1217년, 칭기스칸은 “몽골 사걸(四傑)” 중 한 사람인 보로굴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탁마티인과 교전하게 했다. 그들은 바이칼호와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중간 지대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 수령 구르베스 카툰은 원래 칸의 미망인였다. 그녀의 매복 하에 준비가 없었던 보로굴이 목숨을 잃었다. 칭기스칸은 이에 다시 병력을 보내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구르베스 카툰이 포로가 되었고, 보로굴의 가족을 위로하기 위하여 칭기스칸은 일부 탁마티인들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같은 해, “몽골 사맹(四猛)” 중 하나인 수베데이도 성지를 받들어 군대를 이끌고 메르키트부의 잔여 부락을 추격해,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남카자흐스탄주 추강 일대까지 추격하여 그들을 섬멸했다.
1218년, 제베가 성지를 받들어 서요를 공격했다. 제베가 이끄는 몽골군이 막을 수 없는 기세로 서요를 멸한 후, 쿠출룩은 바다흐샨(오늘날의 타지키스탄 공화국 경내에 위치함)으로 도망쳤고, 나중에 현지 사람들에게 붙잡혀 제베에게 보내져 처형당했다.
서요가 칭기스칸에게 귀속된 후, 대몽골국은 호라즘 왕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고, 양측의 교류가 더욱 편리해졌다. 양측은 이 해에 평화 통상 협정을 체결했다.
몽골 상단이 피해를 입자 칭기스칸이 서정을 결심
1218년, 통상 협정에 따라 칭기스칸은 45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상단을 파견했는데, 500마리의 낙타에 금, 은, 비단, 낙타털 직물, 해달가죽, 담비가죽 등의 귀중한 상품을 싣고, 칭기스칸이 무함마드에게 보낸 편지를 가지고 호라즘을 향한 여정에 올랐다. 상단 구성원은 몽골 사자 우투나 외에 다른 구성원들은 모두 무슬림이었으며, 이것은 칭기스칸이 신앙 문제를 충분히 고려했음을 설명해 준다.
칭기스칸은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평소에 다니는 길과 버려진 길이 안전하게 열리도록 해야 하며, 그리하여 상인들이 안전하게 그리고 구속 없이 왕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 또한 칭기스칸이 두 나라가 우호적으로 지내기를 바라는 진실한 바람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상단이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남부에 위치한 시르다랴강 상류, 호라즘의 국경 도시 오트라르성에 이른 후, 총독인 이날추크가 재물을 탐해 상단을 억류하고, 사람을 보내 무함마드에게 아뢰기를 상단 중에 칭기스칸의 간첩이 있다고 했다. 무함마드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곧 상단 멤버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전부 몰수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오직 한 사람만이 재앙을 면하고 감옥에서 도망쳐 나와 칭기스칸에게 상단이 피해를 입은 과정을 보고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호라즘은 성숙하지 못한 국가로, 칭기스칸의 <대자사>와 유사한 국가를 안정시킬 법전이 없었고, 몽골인과 대항할 만한 충분한 군사력도 없었으며, 게다가 그 군주 무함마드는 성격이 포악하고 일을 처리하는데 전혀 논리가 없었다.
상단 멤버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칭기스칸은 크게 진노했다. 그러나 맨 처음 그는 여전히 양측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기를 희망하여, 바할라를 우두머리로 하는 세 명의 사자를 호라즘으로 파견해 무함마드에게 사건 책임자를 요구하고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이날추크를 문책하기는커녕(그가 자신의 어머니 친척이었기 때문에), 도리어 칭기스칸을 비난하며 정사인 바할라를 살해했으며, 두 부사의 수염을 깎아 쫓아 돌려보냈다. 몽골인들은 수염을 남자의 존엄으로 여기는데, 강제로 수염을 깎이는 것은 몽골인의 존엄을 박탈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칭기스칸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사서는 그가 “놀라고 화가 나서 울며, 산 정상에 올라 관을 벗고 띠를 풀어 목 뒤에 두고, 땅에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빌며 복수를 돕게 해달라고 청하고, 단식하며 3일 동안 기도한 뒤에야 산에서 내려왔다”고 적었다.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칭기스칸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에 대가를 따져 묻기로 결정했으며, 무칼리에게 계속 금나라 공격 전쟁을 하도록 명하고, 그의 아우 옷치킨은 몽골에 남아서 지키도록 했다.

몽골 군대의 출정 (에포크타임스 제작)
병력을 네 갈래로 나누어 호라즘의 수도에서 회합
1219년 6월, 몽골인들이 서정(西征)의 서막을 열었다. 몽골 대군은 크룰렌강변에서 출발했으며, 칭기스칸의 네 아들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톨루이 및 대장 수베데이, 제베, 대단사관 시기 쿠투쿠 등이 수행했다. 10만에서 15만 명의 몽골 기병 외에도, 위구르, 알리말리, 카를룩에서 온 수많은 위구르, 튀르크의 병사들 및 한인 의사와 장인들이 협조했고, 서하는 출병을 거절했다.
몽골 군대 중 대다수의 사람들은 금나라와의 전쟁에 참가한 적이 있어 성지(城池 성과 해자)를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일부 실전 경험이 있었으며, 게다가 한인 장인들의 도움 아래 몽골인들은 이미 공성 기계와 기술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가령 공성에 사용되는 노포(弩砲), 토석으로 성 밖의 해자를 메우거나, 토대를 축조해 성벽과 높이가 같게 만드는 등의 기계나 기술 등이었다.
반면 칭기스칸이 공격하고자 한 호라즘은 각급 지방 무장을 포함하여 40만 대군을 가지고 있다고는 했으나, 실제로 기동 작전에 사용될 수 있는 기병은 불과 4만 명 안팎이었고 게다가 자질이 높지 않았으며, 무함마드의 지휘 능력 또한 칭기스칸보다 못했다. 그는 몽골인들에 대한 인상이 여전히 초원 작전에 능숙하고 방비가 견고한 도시는 칠 수 없다는 데 머물러 있었기에, 전략상 초원 지역에서는 저항하지 않고 대부분의 군대를 주요 도시에 주둔시키며, 오직 소수의 부대로 도시 간의 교통과 소규모 전투를 유지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 몽골군은 식량 부족으로 저절로 퇴각할 것이며, 그때가 되면 승세를 타서 추격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전략 또한 그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해 가을, 몽골 대군은 시르다랴강에 도착하여 오트라르성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정보에 근거해 칭기스칸은 이 성의 성벽이 높고 수비병이 많아 1년이 아니면 함락시킬 수 없으며, 게다가 상대의 전략 또한 성지를 굳게 지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에 칭기스칸은 초기 작전 계획을 입안했으니, 즉 먼저 병력을 나누어 도처에서 성을 취하고, 자신은 직접 부하라성을 취한 뒤에 회합하는 것이었다.
부하라를 공략해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호라즘의 신도성인 사마르칸트(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주요 도시)와 구도성인 우르겐치(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도시)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을 손에 넣으면 호라즘과 트랜스옥시아나 사이의 교통을 차단할 수 있고, 또한 시르다랴강 위에서 포위당한 각 성들의 외부 지원을 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몽골 대군은 마침내 병력을 네 갈래로 나누었다.
제1로는 칭기스칸의 차남 차가타이, 삼남 우구데이가 군대를 이끌고 오트라르를 포위 공격하고 나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제2로는 칭기스칸의 장남 주치가 군대를 이끄는 것으로 우익군이 되어 시르다랴강 상류의 강변 각 진지를 공격하는 것이었으며 주요 목표는 잔드, 양기켄트 등의 성들이고 그 후 강을 거슬러 북상하는 것이었다.
제3로는 장군 아라하, 수이케투 및 타해가 5천 기병을 거느리고 시르다랴강 동남의 페르가나 분지를 정벌하며 코칸트 등의 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좌익군이었다.
제4로는 칭기스칸과 4남 톨루이가 5만 명의 인마를 이끌고 중로(中路)를 취해 시르다랴강을 건너 서남쪽으로 붉은 사막을 횡단하여 부하라성을 전격 공격하는 것이었다.

우즈베키스탄 우르겐치 교외의 호라즘 도시 유적. (shutterstock)
칭기스칸은 각 군에 기한 내에 목표에 도달하고 사마르칸트에서 회합할 것을 명령했다. 몽골인의 행동에 대하여 무함마드는 아는 것이 극히 적었으며, 심지어 “타타르 병사들이 수는 많아도, 채찍을 던지면 족히 그것을 메울 수 있다”는 오만함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몽골인들이 성 아래에 이르렀을 때 무함마드는 매우 놀라고 당황했다. 한편 몽골인들이 여러 갈래로 출격함에 따라 무함마드로 하여금 사마르칸트에서 병력을 나누어 지원하도록 강제하게 되었고, 도성 병력을 더 줄어들게 했다.
제1로의 오트라르 전투는 공성전이 매우 힘들었다. 그 성은 내성과 외성 두 겹으로 나뉘어 있었고 성지(城地)가 견고했으며 식량이 충족했다. 처음에는 3만 수비군이 있었으나 나중에 또 1만이 증원되었다. 몽골군은 5개월 동안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나중에 수비군의 사기가 저하되고 두 수비 장수 중 한 명은 굳게 지키려 하고 한 명은 투항하려 한다는 것을 몽골인들이 알게 되었다. 몽골인은 마침내 성을 함락하는 데 성공했고, 내성 안에서 수비군 및 평민들과 또 시가전을 전개했으며, 잔류 수비군은 모두 살해되었다.
제2로는 주치가 군대를 이끌고 먼저 고성(古城) 시그낙에 이르렀고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사자가 살해당했으며, 주치는 이에 공격을 명령해 밤낮 7일을 공격한 끝에야 함락시켰다. 그 후 또 연달아 몇 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잔드의 수장은 겁에 질려 야반도주했으며, 몽골군은 순조롭게 성 안으로 들어갔다.
제3로군은 먼저 베나케트성(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시노즈성 부근)을 포위 공격하여 3일 만에 함락시켰고, 그런 다음 성 안의 장인들을 전부 몽골군으로 편입시켰다. 그 후 코칸트성을 향해 진격했다. 코칸트 수장 테무르 멜리크는 매우 날쌔고 용감하여 오직 1천 명으로 몽골군을 저항했으며, 대적하지 못하게 된 뒤 강 중간의 작은 섬으로 물러나 수비하다가, 전전하여 도망쳐 나와 무함마드의 아들 잘랄알딘의 처소로 의탁했다.
제4로군은 칭기스칸이 직접 이끈 중로군이자 몽골의 주력군이었다. 그들이 부하라성을 향해 전진하는 도중에 잘라르나크진을 거쳤는데, 진에 있던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모두 성 안으로 숨었다. 칭기스칸은 사람에게 명하여 구두 명령을 전해 항복을 권유하게 했고, 현지 사람들은 이에 투항에 동의했기에 한 부대를 징병하고 성벽을 파괴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곳 백성들은 손실이 없었으며 여전히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했다.
그 후에 또 너르성을 항복시키고, 부하라성으로 향했다. 이 성은 내성과 외성 두 겹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2천 명의 튀르크 기병과 2만 명의 평민 남자 성인들이 주둔하며 지켰다. 몽골인이 포위 공격한 셋째 날에 튀르크 기병이 돌파를 시도하다 몽골 군대에 의해 포위 섬멸당했고 외성이 함락되었다. 나머지 성을 지키던 남자들이 또 내성에서 12일 동안 굳게 지켰지만 결국에는 성지가 함락되었다. 전황은 매우 참혹했으며, 성을 지키던 이들은 모두 전사했고 일반 민중과 몽골병도 사상자가 많았다.
부하라성이 함락된 후, 몽골인들은 호라즘의 신도읍인 사마르칸트와 구도읍인 우르겐치 사이의 교통을 완전히 차단했으며, 호라즘의 시르다랴강 방어선은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고, 트랜스옥시아나 전체가 몽골인들 앞에 노출되었다.
이렇게 이미 정한 목표를 완수한 몽골의 네 갈래 군대는 모두 칼날을 사마르칸트를 향했다. 사마르칸트성은 요충지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은 키질쿰 사막이고, 남쪽은 철문관(鐵門關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남부 데르벤트 서쪽)의 천험이며, 북에는 시르다랴강, 남에는 아무다랴강이 있어 전략적 지위가 매우 중요했고 그 인구도 10만 이상이었다. 이때 무함마드는 장군 알프 칸에게 명하여 강리(튀르크에 속함), 타지크 등의 부족 용병으로 구성된 11만(또는 6만이라고도 함)의 군대를 통솔하여 수비하게 했으며, 또 더 많은 보루를 증축했고 그 방어공사는 매우 견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 자신은 마음속으로 두려운 나머지 사마르칸트를 떠났다.
그렇다면 몽골인들은 사마르칸트를 과연 순조롭게 함락시킬 수 있을까?
(계속)
참고자료:
《蒙古秘史》
《元史》
《成吉思汗與今日世界之形成》
《中國曆代戰爭史》(元朝) 台灣出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