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당조 황권이 쇠퇴한 표현 ① : — 안사의 난 이후 번진할거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 안록산과 사사명의 잔당들은 여전히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리석고 나약했던 대종(代宗)은 구차하게 안일을 도모하고자 “하북의 땅을 분할하여 반란 장수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반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당조는 내지에서 군대를 장악한 자사들에게도 절도사(節度使)의 칭호를 다수 가해주었다. 이 때문에 중원 지역에도 수많은 절도사 등 크고 작은 군진(軍鎮)이 출현했고, 이후 전국으로 확산했다. 그들은 지방의 군정 장관이자 주(州) 이상의 일종 권력 기구, 즉 번진(藩鎮)이었다.
안사의 난 이후, 오늘날의 섬서, 사천 및 강회(江淮) 남쪽의 번진들은 대부분 여전히 중앙정부에 복종하며 중앙에 조세를 납부했다. 반면 하북, 산동, 하남, 호북, 산서 일대의 번진, 즉 당시 ‘하삭삼진(河朔三鎮)’이라 불리던 성덕(成德), 위박(魏博), 노룡(盧龍) 삼진은 한 지방을 할거하여 표면상으로는 조정을 존중했으나 법령과 관작을 모두 자체적으로 처리하고 조정에 조세도 납부하지 않았다. 심지어 절도사의 직위조차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잇거나 부하들이 자체적으로 후계자를 옹립하는 경우가 많아, 당 조정은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변경할 수 없었다.
하삭삼진 외에 중요한 번진으로는 치청진(淄青鎮, 치소는 청주青州/산동 익도), 회서진(淮西鎮, 치소는 채주蔡州/하남 여남), 창경진(滄景鎮, 치소는 창주滄州) 등이 있었다. 이들 역시 대부분 하삭을 본받아 전횡을 부리며 할거하고 영웅을 자처했다.
이러한 번진의 장기적인 할거 국면은 당 왕조가 천하를 일통(一統)했던 국면을 파괴했고, 중앙의 재정 수입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외에도 각 번진은 경내(境內)의 백성들에게 잔혹하고 폭력적인 통치를 실시했다. 절도사는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필사적으로 확충하는 것 외에도 정예병을 뽑아 심복인 ‘아병(牙兵)’을 조직했다. 아병들은 대부분 “부자가 세습하고 친족과 패거리가 견고하게 결탁해” 공동의 이익을 공유했다. 절도사가 아병들을 풍족하게 공급했기에 때로는 그들의 목숨을 바친 충성을 얻을 수 있었으나, 이는 또한 아병들을 매우 교만하고 횡포하게 만들었다. 절도사가 자신들의 뜻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그들은 절도사를 죽이거나 축출하고 새로운 주인을 따로 세웠으니, 마침내 “주수(主帥) 바꾸는 것을 아이들 장난처럼 여기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물론 중앙정부도 번진의 권력을 깎아내리고자 시도했기에, 중앙정부와 번진 사이에는 자주 다툼이 발생했다. 덕종(德宗)과 헌종(憲宗) 시기에는 연달아 ‘사진의 난(四鎮之亂)’과 ‘회서의 난(淮西之亂)’이 일어났다.
‘사진의 난’의 원인은 781년 성덕절도사 이보신(李寶臣)이 죽자 그의 아들 이유악(李惟嶽)이 절도사 자리를 물려받으며 조정에 승인을 요구했으나, 당 덕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세습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위박진의 전열(田悅), 치청진의 이납(李納), 산남동도(山南東道 치소는 양양) 절도사 양숭의(梁崇義)가 이유악과 연합해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얼마 안 가 양숭의와 이유악은 패배해 죽임을 당했고, 전열과 이납 역시 당군에게 패했다. 그러나 노룡진(盧龍鎮) 절도사 주도(朱滔)와 성덕진의 항복 장수 왕무준(王武俊)이 권력과 땅을 다투기 위해 다시 전열, 이납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켰다. 회서절도사 이희열(李希烈)도 반란의 대열에 합류하여 스스로 천하도원수(天下都元帥)라 칭했다.
783년, 덕종이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관내 여러 진의 군대를 차출했는데, 경원진(涇原鎮) 군대가 장안을 지나던 중 군사 정변을 일으켜 장안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덕종은 봉천(지금의 섬서 건현乾縣)으로 도망쳤다. 경원 반군들은 주도의 형제인 주차(朱泚)를 주군으로 세우고 장안에서 칭제하며 국호를 진(秦, 나중에 한漢으로 개칭)이라 했다.
삭방절도사 이회광(李懷光)이 군사를 이끌고 덕종을 구원하러 왔으나, 장안 근처에 이르러 그 역시 덕종과 갈등이 생기자 반란군과 연합해 공동으로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이회광의 압박 속에서 784년(흥원 원년), 덕종은 다시 봉천에서 양주(梁州 지금의 섬서 한중漢中)로 도망쳤다. 훗날 덕종은 이성(李晟)이 이끄는 당군(唐軍)에 의지해 장안을 수복하고 주차를 추격하여 살해했으며, 다시 주도, 왕무준, 전열, 이납 등의 세력과 타협하고서야 겨우 반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한편 ‘회서의 난’은 당 헌종 시기에 발생했다. 814년 회서진의 오소양(吳少陽)이 죽자 그의 아들 오원제(吳元濟)가 스스로 군무(軍務)를 이끌었다. 그는 더욱 횡포해져 사방으로 공격하고 약탈했다. 헌종은 이에 군사를 동원해 회서를 토벌하게 했다. 출병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817년 헌종은 재상 배도(裴度)를 회서선위처치사(淮西宣慰處置使)로 임명하여 전군을 통솔하게 했다.
당시 각 도(道)의 군대에는 모두 환관들이 감군(監軍)으로 있었는데, 장수들이 압제를 받아 모두 힘을 쓰려 하지 않았다. 배도가 전선에 도착한 후 헌종에게 청해 감군 환관들을 취소시키자 수동적인 국면이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던 어느 날 밤, 당 장수 이소(李愬 773년 ~ 821년)가 9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회서진이 있는 채주성(蔡州城)을 습격하여 단숨에 오원제를 생포하고 회서의 난을 평정했다.
회서가 평정된 후 창경, 노룡, 성덕 등의 진이 연이어 중앙에 귀순했다. 오직 치청의 이사도(李師道)만이 완강히 저항했으나 당 중앙에서 군사를 발동해 그를 무찔렀다. 이때에 이르러 당조는 표면적인 통일을 회복한 셈이 되었으나, 절도사가 중병(重兵)을 거느리는 국면은 변하지 않았다.
번진할거는 당 중앙정부의 재정 수입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부 번진이 조세를 납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 중앙정부의 수입은 주로 강회(江淮) 일대에 의존해야 했다. 재정을 정돈하고 세금 제도를 개혁하여 정부 수입을 늘리기 위해, 숙종 때 재정을 담당했던 대신 유안(劉晏)과 덕종 때의 양염(楊炎)이 연이어 몇 가지 조치를 실시했다. 예컨대 균전 제도를 정돈하여 “부역을 바치지 않고 호적에 올라있지 않은” 유민(流民)과 객호(客戶)를 국가의 균전 토지에 다시 편입시킨 일, 염법(鹽法)과 조운(漕運)을 개혁한 일, 물가를 안정시킨 일, 그리고 양세법(兩稅法)을 실시한 일 등이 있었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당 중앙의 재정 상황은 다소 호전되었다.
당조 황권이 쇠퇴한 표현 ② : — 환관의 전횡과 당쟁
당 초기의 정치는 청명(淸明)해서 환관의 수가 많지 않았고 지위도 매우 낮아 오직 황궁 내의 경비와 청소 등의 일만 담당했을 뿐, 군정(軍政)의 대사에 관여할 권한이 없었다. 현종 때에 이르러 이러한 상황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개원·천보 연간에 환관이 3천 명으로 급증했으며, 그중 5품 이상의 환관이 천여 명에 달했다. 환관 고력사(高力士)는 특히 중용되어 개원 말년 이후에는 그가 대신들이 올린 상소문을 검토하여 작은 일은 스스로 처리하고 큰일만 현종이 직접 재결할 정도였다.
여러 왕공(王公)과 공주들이 고력사를 ‘아옹(阿翁 아버님)’이라 불렀고 태자는 ‘이형(二兄 둘째 형님)’이라 부를 정도였다. 이 외에도 현종은 환관들에게 번국(藩國)에 사신으로 가는 등 중요한 임무를 맡기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환관 세력이 이미 고개를 들었을지언정 황제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하여 감히 멋대로 전횡하지는 못했다.
안사의 난 이후 환관들이 군권(軍權)과 재권(財權)을 장악하면서 황권이 약화하기 시작했다. 당조 환관의 전권은 숙종과 대종 시기에 시작되었다. 숙종은 바로 환관 이보국(李輔國)이 보좌하여 즉위한 인물로, 즉위 후 숙종은 그를 매우 총애하고 신임하여 금군(禁軍)을 장악하게 하고 병부상서로 승진시켰다. 숙종은 또 환관 어조은(魚朝恩)을 관군용선위처치사(觀軍容宣慰處置使)로 임명하여, 전방의 유명한 장수인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조차 모두 그의 제약을 받게 했다. 이 외에도 환관들은 국가의 재정까지 장악했다.
대종 때부터는 환관 두 명을 내추밀사(內樞密使)에 충원해 기밀을 장악하고 교서를 선포하게 하였는데 권력이 매우 컸으며, 이들은 두 명의 호군중위(護軍中尉)와 함께 ‘사귀(四貴)’라 불렸다. 환관들이 무력을 배후로 삼자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들은 장수와 재상을 임면할 권한을 가졌으며, 지방의 절도사들 역시 대부분 금군 중에서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환관들이 대권을 장악함에 따라 번진들은 대부분 이들을 내부의 지원군으로 삼았고, 환관들 역시 자신의 실력을 키워 황제를 통제하기 위해 번진을 외부의 지원군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덕종 때 설치된 호군중위(護軍中尉) 두 명과 중호군(中護軍) 두 명은 모조리 환관으로 충원되어 좌우 신책군(神策軍), 천위군(天威軍) 등의 금군을 통솔했다. 이때부터 환관이 금군을 장악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환관의 전횡은 사회 전체에 재앙을 가져왔다. 황제가 환관에게 불만을 품으면 환관은 황제를 살해하거나 폐위하고 새로 세울 수 있었다. 당 후기의 순종(順宗), 헌종(憲宗), 경종(敬宗) 황제가 모두 환관의 손에 죽었으며, 목종(穆宗), 문종(文宗), 무종(武宗), 선종(宣宗), 의종(懿宗), 희종(僖宗), 소종(昭宗)은 모두 환관에 의해 옹립되었다. 즉, 헌종 때부터 당이 멸망할 때까지 황제는 모두 꼭두각시나 다름 없었고 환관이 당조의 실제 통치자가 되었으며, 재상과 대신들은 환관의 부속품, 즉 ‘남아(南衙, 외조)’가 ‘북사(北司, 내조)’의 부속 기구가 되어버렸다.
환관의 전횡 외에도, 정견과 이익의 분쟁으로 인해 조정 내에 서로 대립하는 다양한 파벌이 형성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소위 ‘붕당(朋黨)’다.
만당(晩唐) 시기의 붕당의 다툼은 주로 ‘우이당쟁(牛李黨爭)’이었다. 당 중앙의 관료는 주로 두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음서(門蔭) 출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사 출신이었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구분하면 음서 출신은 대부분 몰락해가는 문벌 사족에 기울어져 있었고, 진사 출신은 대부분 문벌과 대립하는 서족(庶族)에 기울어져 있었다.
당조에서 해마다 평균 진사에 합격하는 사람은 30명을 넘지 않았으나 관료 계층 내에서는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지위가 같고 취향이 맞아 당파를 결성하기 쉬웠다. 당시 같은 해에 등과한 진사들을 ‘동년(同年)’이라 불렀고, 진사가 시험관을 부를 때는 ‘좌주(座主)’, 시험관이 자신이 뽑은 진사를 부를 때는 ‘문생(門生)’이라 부르며 이들 간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여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었다. 사족들은 일관되게 가문의 내력을 자부했기에 비록 그들의 지위가 나날이 떨어지고 있었음에도 서족을 업신여기고 진사를 적대시했다. 이 두 출신 관원들 사이의 암투와 다툼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는데, 그중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되고 투쟁이 가장 격렬했던 것이 우승유(牛僧孺)를 수장으로 하는 ‘우당(牛黨)’과 이덕유(李德裕)를 수장으로 하는 ‘이당(李黨)’ 사이의 ‘우이당쟁’이었다.
우승유와 이덕유가 처음 원한을 맺은 것은 당 헌종 시기였다. 808년(원화 3년) 제과(制科) 고시 때 응시했던 우승유, 이종민 등이 대책(시험 답안)을 통해 시정을 지적하며 언사가 격렬했으나 주고관(主考官)에 의해 합격 처리되었다. 당시 이덕유의 아버지인 이길보(李吉甫)가 재상이었는데, 그들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여겨 헌종에게 눈물로 하소연하며 시험에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시험관들은 모두 폄적되어 쫓겨났고, 우승유 등 역시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했다. 이것이 우이당쟁의 서막이었다.
우·이 두 당의 투쟁이 절정에 달한 것은 문종 시기였다. 두 당의 투쟁 형태는 두 당이 교대로 정권을 잡는 방식이었는데, 한 당이 정권을 잡으면 상대 당에 인재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않고 일률적으로 배척했으며, 상대 당의 정책이 취할 만한 것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고 일률적으로 뒤엎어, 붕당의 이익을 국가와 사회의 이익보다 완전히 위에 두었다. 붕당 다툼의 결과는 정치가 더욱 부패해졌다.
우·이 두 당의 격렬한 충돌을 마주한 문종은 속수무책으로 탄식하며 말했다.
“하삭(河朔)의 번진을 제거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이 붕당을 없애기란 참으로 어렵도다!”
선종 이후 우·이 두 당의 영수급 인물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면서, 4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이 붕당의 다툼은 마침내 그쳤다.
환관 집단은 붕당의 다툼을 마주했을 때 내부적으로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결국 외조의 대신들을 상대할 때는 하나로 뭉쳤고, 외조의 대신들도 기회를 보며 변신했다.
환관 집단의 지배를 받기를 원치 않던 일부 조정 대신들도 폐단을 혁파하고 환관의 권력을 깎아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예컨대 순종 시기의 ‘영정개혁(永貞革新)’과 ‘이왕팔사마(二王八司馬)’ 사건, 그리고 문종 시기의 ‘감로의 변(甘露之變)’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관련 대신들은 폄적되거나 죽임을 당해 환관 세력은 더욱 흔들기 어렵게 되었다. 이때부터 “천하의 일은 북사(北司 즉, 환관)에서 결정되고, 재상은 문서나 결재할 뿐이다”라는 말이 돌았다. 이러한 혼란한 국면은 당조 말기까지 계속 이어졌으며, 이는 당조 멸망의 복선을 깔아놓았다.
당 후기 헌종의 ‘원화중흥’
덕종과 순종이 사망한 후 헌종이 즉위하니 연호는 원화(元和)였다. 당시 당 중앙의 재정 상황은 다소 호전되어 중앙 금군을 확대하고 강화할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헌종 본인 역시 원대한 뜻을 품고 정사를 잘 다스렸기에, 그는 당 후기의 유일하게 성과를 낸 황제라 할 수 있으며 거의 태평성세를 재건했다.
첫째로 그는 무원형(武元衡), 이길보(李吉甫), 배도(裴度) 등 어진 신하들을 발탁하여 조정의 기강을 정돈했고, 둘째로 정확한 삭번(削藩 번진 삭감) 전략, 즉 먼저 약한 곳을 치고 나중에 강한 곳을 치며 각각 파괴하여 으뜸가는 원흉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헌종은 먼저 실력이 비교적 약한 서천(西天)과 절서(浙西) 절도사를 공격하여 조정에 귀순하게 만든 뒤, 역량을 집중하여 강력한 회서(淮西)절도사를 상대했다. 명재상 배도의 뛰어난 지략 덕분에 회서가 평정되었다. 다른 번진들도 다투어 땅을 바치며 조정에 귀순할 뜻을 밝혔다. 《자치통감》에서는 “광덕(廣德 대종) 연간 이래로 60년 가깝게 번진이 하남과 하북의 30여 주에서 전횡을 부리며 스스로 관리를 임명하고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았으나, 이에 이르러 모조리 조정의 단속을 따르게 되었다”고 했다. 후대 사람들은 헌종 재위 10여 년을 ‘원화중흥(元和中興)’이라 불렀다. 그러나 헌종이 번진을 중앙에 귀순시키긴 했으나 그 뿌리까지 뽑지는 못했다.
그러나 820년, 헌종은 환관 세력을 뿌리뽑으려 시도하던 과정에서 환관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하삭 삼진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고 할거 세력이 갈수록 거세어져, 이러한 번진할거의 난립 국면은 당조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덕종 때부터 시작하여 헌종 시대에 이르기까지 당조의 상업(商業) 역시 한층 더 발전했는데, 특히 장강(長江) 유역의 상업이 더욱 활발했다. 당 후기의 양주(揚州)는 조운 쌀, 천일염, 차 등의 화물이 모이고 흩어지는 거점이었기에 “웅장함과 부유함이 천하 으뜸”이었으며 상업이 더욱 번창했다. 수많은 아랍, 페르시아 등의 외국 상인들이 이곳에서 보석류와 같은 사치품 매매에 종사했다. 익주(益州 지금의 성도)는 서남 지역의 정치·경제 중심지로, 서남 지역에서 산출되는 각종 화물이 대부분 이곳에서 타지로 운송 판매되었기에 상업 역시 극도로 번창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첫째는 양주요, 둘째는 익주라(揚一益二)”라 칭했으니, 당 후기에 양주와 익주의 경제적 지위가 이미 장안과 낙양을 뛰어넘었음을 볼 수 있다. 동남 지역의 항주 역시 당 후기에 이르러 번창한 상업 도시로 발전했다.
광주(廣州), 천주(泉州), 명주(明州) 역시 유명한 대외 무역 도시였다. 외국 상선들이 향료, 약품, 상아, 서각(犀角 코뿔소 뿔), 보물 등의 화물을 실어 왔고, 중국에서 도자기, 비단 등의 물품을 사갔다. 당 정부는 광주에 시박사(市舶使)를 설치하여 대외 무역을 관리했다. 명주는 대일 무역의 중요한 항구로, 수많은 상선이 이곳에서 바다로 나아가 일본으로 향했다.
큰 뜻을 이루지 못한 군주 — 당 문종 이함
헌종 이후, 태감 유극명(劉克明)이 또 당조 제17대 황제인 경종을 시해하고 강왕(絳王) 이오(李悟)를 세우려 했으나, 환관 수장 왕수징(王守澄)이 금군을 이끌고 궁으로 돌진해 그를 살해했고 이함(李涵)을 황제로 옹립되니 이가 바로 당 문종이다. 당시 환관의 세력은 실로 무법천지의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200여 년을 거쳐온 당조는 당 문종에 이르러 이미 정치 도리가 어두운 시기였다. 조정의 폐단이 매우 많았고 환관이 권세를 잡아 조정을 휘둘렀으며 궁궐 내에는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맴돌았다.
당 문종은 대당이 이대로 쇠락해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잃어버린 세력을 되찾아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흥성시키기로 결심했다. 먼저 홀수일마다 조회를 회복해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사치를 버리고 검소함을 따랐고, 나아가 조서를 내려 궁녀 3천 명을 풀어주어 그녀들이 다시 자유를 얻게 했다. 문종은 시제관(侍制官 황제 측근에서 조서를 작성하거나 자문하는 관원)을 자주 불러 정사의 잘잘못을 물었다. 이렇게 하자 조야(朝野)에 새로운 기상이 감돌았고 백성들은 태평한 날이 오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태화(太和) 9년(834년), 문종은 황실을 부흥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한 판 승부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심복 정주(鄭注)와 이훈(李訓)이 모든 환관을 복병으로 살해할 일련의 대계를 마련한 것이다. 본래 모든 준비가 차질 없이 진행되었으나, 이훈이 공을 독차지하고 싶어 스스로 전략을 변경했다. 11월 21일, 이훈은 문종이 조회에 나간 틈을 타 사람을 보내 좌금오청(左金吾廳 좌금오위 청사) 뒤편 석류나무에 밤새 감로(甘露)가 내렸다고 아뢰게 하고는, 문종이 여러 환관과 함께 구경하러 갈 때 환관 전체를 일망타진하려 했다.
그러나 환관 수장 구사량(仇士良)이 좌장원(左仗院)에 이르렀을 때 막사 아래에서 느닷없이 병기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사태가 불길함을 눈치채고 즉시 죽기를 무릅쓰고 전각 위로 도망쳐 문종을 협박해 궁 안으로 들어갔다. 이훈이 즉시 일을 벌여 위사(衛士)들을 이끌고 환관들을 추격해 도륙하니 수십 명을 베었다. 구사량이 문종을 납치해 동상각문(東上閣門)으로 들어가 즉시 문을 굳게 닫았다. 잠시 후 여러 환관이 신책군(神策軍)을 이끌고 문을 나와 반격하며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죽이니, 무고한 대신들마저 칼날 아래 억울하게 죽어갔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감로의 변’이라 부른다.
이훈은 패망했고 정주 역시 뒤이어 죽임을 당했다. 문종은 속수무책으로 이때부터 환관의 제약을 더욱 심하게 받으며 원망과 괴로움 속에 나날을 보내야 했다. 훗날 스스로를 자조하며 망국의 군주인 주난왕(周赧王 동주 마지막 왕)이나 한헌제(漢獻帝)만도 못하다고 했으니, 그들은 그저 제후들에게 제약을 받았을 뿐이지만 오늘 자신은 집안의 노복(환관)에게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가련한 문종이 울적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31세였다.
당 왕조는 헌종 시기의 짧은 중흥을 거친 후 마침내 쇠퇴하는 기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밖으로는 번진할거, 안으로는 환관 전횡과 붕당의 다툼이 벌어지는 국면 속에서 분열을 향해, 멸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추배도》에 나타난 당조 멸망에 관한 예언
《추배도》 제9상은 당 왕조의 멸망을 예언했다. 이 상의 그림에는 큰 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고 나무 위에 새둥지(巢) 하나가 있으며 아래에는 수많은 시체가 누워 있다. 당 말기 황소(黃巢)의 난이 실패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것임을 암시한다.
참(讖)에 가로되: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은데
풀머리 사람(草頭人)이 나오네
가지 하나를 빌리니
하늘 가득 피가 날리도다
非白非黑
草頭人出
借得一枝
滿天飛血
앞의 두 구절은 황소의 난을 가리키는데,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다”는 것은 황색을 의미하니 황소(黃巢)를 암시한다. 뒤의 두 구절은 황소의 난이 당조와 전쟁을 벌여 온 하늘에 피가 날림을 말한다.
송(頌)에 가로되:
만인(萬人)의 머리 위에서 영웅이 일어나니
피가 하천을 물들여 햇빛이 붉구나
한 나무의 이화(李花)가 모두 참담하니
가련하게도, 둥지가 뒤집히니 또 텅비겠구나
萬人頭上起英雄
血染河川日色紅
一樹李花都慘澹
可憐巢覆亦成空
만(萬) 자의 상단과 영(英) 자의 하단이 결합하면 여전히 황(黃)이 된다. 1, 2구절은 여전히 황소의 난으로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강산을 붉게 물들임을 말한다. 그리고 3, 4구절은 황소의 난 이후 이(李)씨의 당 왕조의 나날이 참담해져 좋은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음을 말한다. 네 번째 구절은 원래 황소의 수하 장수였던 주온(朱溫 주전충)이 당조를 멸망시켰으나 주온이 후량을 건국했기에 “가련하게도, 둥지가 뒤집히니 또 텅비겠구나”라고 말한 것이다.
당조의 분열과 멸망
조정 정사의 부패, 번진의 할거와 다툼은 지난날 비할 바 없이 찬란했던 당 왕조를 몰락으로 내몰았고 백성들의 삶 역시 점차 악화되었다. 당 문종 시기에 이미 당조의 형세는 “관리는 어지럽고 백성은 가난하여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니 흙이 무너지는 근심이 조석에 있도다”라는 지경이었다. 30년 뒤 당 희종 시기에 이르자 농민들은 이미 “추워도 입을 옷이 없고 배고파도 먹을 것이 없는” 지경이었으며, 특히 조세 징수가 가혹했던 강회(江淮) 지역에서는 일어나는 난의 물결이 강회 각지를 덮쳤고, 그중 비교적 큰 규모의 원조(袁晁)와 방청(方清)의 난이 일어나 당조의 통치는 이미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875년, 산동의 왕선지(王仙芝)가 복양현(濮陽縣)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부하들이 수만 명에 달했다. 발표한 격문에서 왕선지는 당조에 대해 “관리는 탐욕스럽고 조세는 가혹하며 상벌이 불공평하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오늘날 산동 조현(曹縣) 북쪽의 황소 역시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왕선지에 호응했다.
왕선지와 황소는 모두 소금밀매꾼이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황소는 집에 재산이 넉넉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으며 시와 글에도 어느 정도 통달해 있었다.
훗날 왕선지가 패배하여 죽자 남은 부하들이 모조리 황소에게 귀순했다. 황소는 스스로 ‘충천(沖天)대장군’이라 칭하고 군사를 이끌고 당군과 싸워 연이어 항주, 복주, 천주, 광주, 낙양, 장안 등지를 공략했다. 황소는 부대를 통제할 능력이 없었기에 그가 가는 곳마다 모두 약탈당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 《추배도》에서 말했던 ‘피로 강산을 물들인다’는 예언에 응험했다.
황소가 장안을 공략해 점령하자 당 희종은 성도로 도망쳤다. 황소는 881년 1월 장안에서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이라 했다. 당의 귀족과 고관대작들은 죽거나 도망쳐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에서 묘사했듯 “궁궐 길엔 공경들의 뼈가 짓밟히고”, “대궐 문엔 주홍빛 대문 반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했으니 당조가 멸망할 날이 머지않았다.
장안성 내의 식량이 부족해진 데다 황소의 부하 장수인 주온이 동주(同州 지금의 섬서 대려현大荔縣)에서 당조에 항복하자, 당군이 장안으로 공격해 들어와 황소는 어쩔 수 없이 장안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철수했다. 884년, 황소는 산동에서 패배하여 자살했다. 9년 동안 지속되었던 황소의 난은 평정되었으나 그로 인해 초래된 결과는 매우 심각했다. 그것은 통일 당조(唐朝)를 분열로 내몰았다. 이후 당조는 명목상으로는 20여 년 더 존속했으나 이미 명실상부하게 몰락해 있었으며, 당조의 영토는 각종 할거 세력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들 할거 세력은 다툼을 거쳐 세 개의 주요 집단을 형성했으니, 변주(汴州)를 중심으로 하는 주온, 태원(太原)을 중심으로 하는 이극용(李克用), 봉상(鳳翔)을 중심으로 하는 이무정(李茂貞)이었다.
907년, 주온이 당조 마지막 황제인 애제(哀帝)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양(梁)으로 바꾸고 연호를 개평(開平)으로 고쳤다. 당조는 공식적으로 멸망했고 역사는 오대십국(五代十國) 시기로 접어든다.
한 편의 웅장하고 격렬했던 대하드라마는 마침내 막을 내렸으나, 한때 찬란했던 당조는 모든 면에서 후세에 소중한 유산을 남겨주었으며, 중국 역사상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긴 왕조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