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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사랑한 아들 칭기스칸 시리즈 13 – 【칭기스칸】 코카서스와 남러시아 정벌 및 4대 칸국 건설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成吉思汗】征高加索与南俄 建四大汗国1222년 10월, 칭기스칸이 조서를 내려 회군하다(에포크타임스 제작)

1222년 9월, 칭기스칸은 아무다랴강을 건너 사마르칸트성 동쪽에 진을 쳤고, 10월에 회군을 명했으며, 포로로 잡힌 긴 상단이 몽골 대군 앞을 걸으며 부하라를 향해 나아갔다.

1223년 봄, 칭기스칸은 부하라에서 6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서 알현식을 거행했고, 또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 북쪽 초원에서 대규모 수렵 활동을 진행했으며, 추이강 초원에서 여름을 보냈다.

1224년에는 이르티시강으로 가서 여름을 주둔했고, 이듬해 2월 툴라강 행궁(오늘날의 몽골 중북부)으로 돌아왔다. 귀환 일정이 빽빽하지 않았던 까닭은 칭기스칸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여전히 정벌 전쟁 중이던 제베와 수베데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카서스산맥 남북 지역 정벌

1220년 봄, 칭기스칸이 제베와 수베데이에게 호라즘의 무함마드를 추격하라고 명할 때, 일찍이 그들에게 3년 안에 전쟁을 끝내고 킵차크 초원에서 몽골 초원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했다. 킵차크 초원은 러시아의 서남부, 볼라강 하류에 위치해 있었다. 칭기스칸은 분명 제베와 수베데이로 하여금 유라시아 대륙의 상황을 한층 더 이해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베와 수베데이는 무함마드를 카스피해로 몰아내고 또 그의 어머니와 처를 포로로 잡은 후에 남쪽으로는 이라크에 이르러 쿠무 등의 성읍을 습격하여 노략질하고, 하마단(오늘날의 이란 서부)까지 공략해 들어가서 멈추었다. 그리고 북상하여 아제르바이잔 도성 타브리즈를 핍박했고, 아제르바이잔 국왕이 금은을 바치며 강화를 청하자 몽골군은 곧 그 경내를 빠져나와 카스피해 서안의 무간 평원에서 매우 추운 겨울을 보냈다.

1221년 초, 제베와 수베데이는 한 부대의 인마를 보내 그루지야 왕국 경내로 진입하게 했다. 그루지야 여왕 루수단은 원래 몽골군이 추위 때문에 출동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에 사자를 아제르바이잔과 자르자르 등 두 나라에 보내 봄에 함께 몽골군에 항거하자고 약속했다. 뜻밖에도 몽골군이 미리 도착했다. 그루지야 경내에 거주하던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튀르크만과 쿠르트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핍박받은 지 오래되었기에 잇달아 몽골군에 가입해 그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몽골군은 이에 두 부류를 선봉으로 삼아 그루지야를 대거 공격했고, 곧 그 수도 트빌리시성(오늘날의 트빌리시)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루지야 여왕은 황급히 1만 명의 군대를 보내 요격했다. 몽골군의 두 부류 선봉이 당해내지 못하자 그루지야인들로 하여금 몽골군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오인하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몽골군의 ‘유적심입(誘敵深入 적을 유인해 깊숙이 끌어들임)’ 전략에 말려들어 매복에 걸려들었고 제베가 병사를 이끌고 적의 대다수를 섬멸했다. 하지만 몽골군 역시 손상을 입은 데다가 그루지야 경내에 숲이 무성하고 지세가 험요하여 진군할 수 없었기에, 제베와 수베데이는 이에 타브리즈 부근으로 되돌아왔고 그 국왕이 다시 금은을 갖다 바쳤으며 몽골군은 방향을 돌려 마라가를 공격해 며칠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3월, 몽골군은 바그다드 공격을 포기하고 다시 하마단으로 가서 사흘 동안 맹렬한 공격을 한 끝에 성이 함락되었다. 다시 북상하여 세 번째로 아제르바이잔의 타브리즈로 들어갔으나 국왕이 장수들을 남겨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몽골군은 그 성의 방어가 견고함을 알았기에 은을 요구하고 떠났으나, 인근의 살라스 등의 성을 공략했다.

10월, 몽골군은 북상하여 아란의 도성 간자로 진군했다. 그들은 간자 사람들이 늘 그루지야 사람들과 작전하며 용감하고 싸움에 능하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금은을 요구한 후에 떠났다. 그후 다시 그루지야 경내로 들어갔고, 그 나라 여왕은 황급히 유럽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려던 3만 명의 인마를 불러들여 몽골인들을 저지했다.

제베와 수베데이는 여전히 적을 유인하여 깊숙이 끌어들이는 방법을 취해 3만 그루지야 대군의 절반이 넘는 병력을 소멸시켰고, 그후에 또 그루지야의 정예 기병을 섬멸했으니 그루지야 군대는 어쩔 수 없이 트빌리시로 퇴각해 수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그루지야 전투’이다. 몽골군은 원래 트빌리시를 진공할 의도였으나 그루지야 경내의 산이 높고 숲이 우거져 기병의 기동에 불리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곧 계속해서 방향을 돌려 코카서스산맥 이북 지역을 공략했다. 1243년에 이르러, 몽골 대군이 다시 서정(西征)했을 때 그루지야는 비로소 몽골 제국에 철저히 신복(臣服)해 속국이 되었다.

1222년 초, 몽골군은 아제르바이잔 남부의 무간 평원에서 동쪽으로 시르반(오늘날의 시리아)으로 진입하여 그 수도를 함락시키고, 데르벤트 산악 통로를 공격하려 했다. 칭기스칸의 명령에 따르면 그들은 승세를 타고 북상해 킵차크를 진공해야 했다. 킵차크인들은 튀르크 유목 부락의 일파에 속하며 그 영지가 카스피해, 북코카서스, 흑해의 북쪽에 위치하고, 동쪽으로는 강리부(아랄해 북쪽)와 접하며, 북쪽으로는 루스(지금의 러시아), 서쪽으로는 헝가리 등의 나라에 이르렀다.

코카서스산맥은 지세가 험준하여 통행하기 어려웠으며, 데르벤트 산악 통로는 고대 페르시아가 북방 민족의 남침을 방어하던 중요한 관문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 데르벤트성이 세워졌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철문’이라 불렸다. 이 험하고 중요한 관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몽골인들은 시르반국이 보낸 귀족을 협박하여 길잡이로 삼고, 카스피해 서안을 거쳐 북상하여 순조롭게 통과했다.

몽골군이 코카서스 이북의 테레크강 유역으로 진입한 후에 아란인들이 킵차크인 및 기타 부족들과 연합하여 몽골인들을 저지했다. 양군이 전투에 나섰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제베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형세를 감안하여 분열 책략을 취했다. 그는 사자를 보내 예물을 가지고 킵차크부 수령을 만나게 하며 말했다. “우리는 동일한 부락(즉 튀르크 인종)의 사람이자 동일한 씨족에서 나왔는데, 어찌 이민족인 아란인들을 돕는단 말인가. 차라리 손을 잡고 화해합시다, 우리는 금은을 선물로 주고자 한다.”

킵차크인들은 이에 마음이 움직여 마침내 맹우를 버리고 떠났다. 몽골군이 이 틈을 타 진공하여 아란 연합군을 대파하였고 북코카서스 산악 지역의 여러 부들이 잇달아 투항하고 패망했다. 승리를 거둔 후에 제베와 수베데이는 또 허를 찔러 아무런 준비가 없는 킵차크부를 진공했다. 그들은 킵차크 지역은 몽골 대칸의 장자인 주치의 봉지이며, 모든 킵차크인과 이 지역의 기타 민족들은 모두 몽골의 신민(臣民)이고 모두 주치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선포했다. 킵차크인들은 승복하지 않고 잇달아 달아났다.

킵차크부에는 가디옌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령이 있었는데, 일찍이 딸을 남루스(즉 러시아)의 갈리치공국 미치슬라프 대공에게 시집보냈으며, 가디옌은 그 부를 이끌고 키예프로 도망쳐 출병하여 도와줄 것을 청했다. 한편 몽골군은 가디옌을 몰래 추적해 루스 경내로 진입했다.

蒙古帝国大将速不台画像(公有领域)

몽골 제국 대장 수베데이 초상화 (공유 영역)

칼카강 전투: 루스 연합군을 대파

왜 킵차크부는 남루스와 혼인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역사를 거슬러 이야기해야 한다. 이미 서기 1세기경에 슬라브인들은 중동 및 유럽 지역의 드네프르강, 오데르강, 비스바강 및 부그강 유역에 거주했다. 6세기에 이르러 슬라브인들은 동슬라브인, 서슬라브인, 남슬라브인으로 나뉘었고, 동슬라브인은 주로 키예프에서 일멘호 일대에 분포하여 거주하며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의 조상이 되었다.

7~8세기, 동슬라브인은 키예프와 노브고로드르를 중심으로 하는 준(準)국가 실체를 형성했다. 9세기, 노브고로드의 왕공(王公) 류리크가 키예프와 드네프르강 서안의 여러 공국(公國)을 정복하여 키예프를 중심으로 하는 대공국(大公國)을 형성했으며 그 통치자를 대공이라 칭하고 국가를 루스라 불렀다. 류리크는 국토를 여러 나라로 나누고 아들들을 나누어 봉하여 다스리게 하였으며 키예프를 도성으로 삼았다.

10세기, 루스는 인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교(正敎)를 받아들였다. 루스는 야로슬라프의 통치 시대에 점차 강성해졌다. 12세기, 루스는 십여 개의 소공국으로 분열되었다. 13세기, 여러 공국들은 합쳐지기도 하고 나뉘기도 하며 서로 혼전했고 당시 전체 루스 영토는 크지 않았으며 그 동쪽 경계는 볼가강의 지류인 오카강을 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 초원의 킵차크인들이 수시로 루스 경내를 침략했기 때문에 루스 남부의 대공들은 침략당하는 것을 피하고 다른 공국들을 방어하기 위해 킵차크의 여러 부들과 혼인하는 것을 선택했다.

킵차크부 수령 가디옌이 루스로 도망쳐 사위에게 구원을 청한 후에, 미치슬라프 대공은 남루스의 여러 왕공들과 연락해 상의를 거친 끝에 함께 몽골인들을 방어하기로 일치단결하여 결정했으며 게다가 주동적으로 진공하여 그들을 국문 밖에서 막아내기로 했다.

제베와 수베데이가 키예프 루스인들이 연합하여 몽골군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자를 보내 키예프에 가서 각 왕공을 만나 몽골이 루스를 침범할 의도가 없으며 오직 킵차크인을 토벌할 뿐이고 하물며 킵차크인들은 늘 루스 경내를 침략해 왔으니 몽골과 병력을 합쳐 함께 킵차크를 토벌하고 전과를 같이 나누는 것만 못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루스 여러 왕들은 따르지 않고 도리어 몽골 사자를 살해했다.

现存罗斯基辅城古代的城门──黄金之门。(shutterstock)

현존하는 키예프 성곽의 고대 성문 – 황금의 문. (셔터스톡)

이에 제베와 수베데이는 적을 공략하기로 결의하였고, 적군으로 하여금 그 경내를 멀리 떠나게 유인하기 위하여 몽골군은 칼카강(카르코강,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경내)까지 물러났으며, 동시에 사람을 보내 카스피해 동쪽에 주둔한 주치 군대에 증원을 청했다. 주치는 이에 병력의 대부분을 나누어 출발했다.

1223년 봄, 미치슬라프 대공은 키예프 등의 공국 군대 및 킵차크부 군대와 연합하여 1만 대군을 조직해 돈강까지 추격했다. 한편 제베와 수베데이는 증원병이 이미 도착했기에 칼카강에서 서쪽으로 향했고, 일군(一軍)은 돈강을 건너 대열을 갖추고 대기했으며, 일군은 아조프해 남동쪽으로 가서 얼음 위에서 흑해에 이르기까지 크게 노략질하고 돌아왔고 두 군대가 다시 회합했다. 힘의 격차가 현저한 상황에서 제베와 수베데이는 다시 사자를 보내 루스 여러 왕공들을 만나 “결코 서로 범하지 않을 것이니 싸우지 말자”고 했다. 하지만 루스 왕공들은 몽골인들을 우습게 여겼기에 마침내 몽골인들과 일전을 치르겠다고 고집했다.

루스의 갈리치 왕은 몽골군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며 솔선하여 부하 1만여 기병을 이끌고 동쪽으로 드네프르강을 건너 몽골군 선봉을 격파했고, 여러 왕들도 그를 따라 강을 건넜으나 몽골군은 싸우면서 물러났다. 루스 연합군은 12일 동안 추격한 끝에 칼카강변에 이르렀고, 이때 몽골군은 이미 엄밀한 진을 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양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루스 연합군은 남북 두 부분으로 나뉘어 주둔했으며 남군은 키예프군, 체르니고프군으로 구성되었고, 북군은 갈리치군, 킵차크군으로 구성되었다. 제베는 6천 기병을 파견해 루스 연합군에 치는 척하면서 이기지 못하자 패한 척하고 달아나게 했다. 루스 연합군의 젊은 왕자들은 승세를 타고 추격에 나섰다. 한편 몽골인들을 조속히 소멸시키고자 급급했던 갈리치 왕은 경솔하고 무모하게 진격하여 연합군 북군을 지휘하여 먼저 강을 건너게 했다.

1223년 5월 31일, 몽골군과 루스 북군은 칼카강변에서 대전을 펼쳤다. 몽골군은 북군의 퇴로를 끊었으며 맹공을 퍼부어 루스 북군의 대형을 무너뜨리자 북군이 대패했다. 갈리치 왕은 겁에 질려 자신의 장수와 병사들을 버리고 배를 타고 대안으로 도망쳤으며 칼카강 위의 배들을 전부 불살라 몽골군의 추격을 방지했다. 결과적으로 루스 북군은 거의 전멸했으며 그중에는 여섯 명의 귀족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강 건너편 고지 위에 있던 루스 남군은 북군의 실패를 목도했으나 가만히 머물러 방어에 급급했다. 한편 몽골군은 루스 북군을 격파한 후 승세를 타고 병력을 이끌고 강을 건넜다. 앞뒤로 협공당한 루스 남군은 저항한 지 사흘 만에 황급히 항복을 청했다.

칼카강 전역에서 루스 연합군은 7만 명의 병사를 잃었고 여섯 명의 왕공이 처형당했으며 칠십 명의 귀족이 전사했고, 각개격파 전략을 채용한 몽골군은 중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몽골군은 거침없이 깊숙이 쳐들어가 남루스 경내로 들어갔고, 또 크림반도로 들어가 수다크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몽골군은 루스를 향해 추가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1223년 연말, 제베와 수베데이는 칭기스칸의 명을 받들어 동쪽으로 돌아갔고, 볼가 불라르부(오늘날의 러시아 내 타타르스탄)가 거주하는 곳을 지나쳤으며 불라르인들이 군대를 이끌고 저격하자 몽골군은 매복전으로 불라르인의 군대를 전멸시켰고 불라르인은 몽골에 신복했다. 그후 몽골군은 또 카스피해 연해 지역의 삭신 사람들을 항복시키고 킵차크부로 나아갔으며 킵차크부 수령이 병사를 거느리고 저항하러 왔으나 패전한 후 역시 몽골에 투항했다.

1224년, 수베데이는 풍부한 전리품을 가지고 군대를 이끌고 몽골 서부 지역에서 칭기스칸의 대군과 회합했고, 제베는 명을 받아 킵차크 초원에 남아서 지키게 했다. 얼마 안 되어 거듭 전공을 세운 몽골의 용장 제베가 아랄해 서부의 킵차크 경내에서 병사했다.

1223年5月31日迦勒迦河之战。图片出自《史集》。(公有领域)

1223년 5월 31일 칼카강 전투. 이미지 출처 《집사》. (공유 영역)

몽골의 유럽 서정의 전주곡

제베, 수베데이 두 장수가 명을 받아 호라즘의 무함마드를 추격한 후에 코카서스산맥 남북에서 정벌하고, 심지어 북상해서 돈강, 드네프르강 유역에 이르러 3년 동안 전전하며 행군한 거리가 5천여 킬로미터에 달하니 과연 전과가 대단했다. 14개국을 정복하고 40여 개의 성을 깨뜨렸으며 17만에 가까운 적을 섬멸했을 뿐만 아니라,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루스 등 중앙아시아, 유럽 국가의 사람들이 칭기스칸과 몽골인들의 위명을 알렸다. 말하자면, 그들의 유라시아 지역에 대한 무력 정찰은 미래 바투의 유럽 서정의 전주곡이었다.

이 3년 동안의 정벌 전쟁 중에서 제베와 수베데이가 작전에서 운용한 주요 전략 전술은 추격전, 매복전, 공성전, 습격전, 운동전(運動戰 기동전), 섬멸전 및 분열 와해, 각개격파 등이었으며, 이것 역시 칭기스칸이 호라즘과 기타 중앙아시아 도시를 공격할 때 운용했던 전술이었다.

최초의 서정(西征)이 일단락되다

칭기스칸이 1219년 호라즘을 향한 정벌 전쟁을 발동한 것부터 1225년 몽골로 돌아올 때까지, 최초의 서정은 몽골인들이 중앙아시아 각국을 공략하고 루스 연합군을 격파하며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지역을 두려움에 떨게 한 것으로 일단락되었으며, 몽골인들이 거쳐 간 지역은 오늘날의 유럽 동부, 이란 북부 및 인도의 광대한 구역을 포함한다. 그 광대한 범위와 거대한 영향은 세계 역사상 드문 것이었으며, 몽골인들이 이러한 승리를 거둔 것은 명백히 칭기스칸의 전략적 안목과 결단을 떠날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정 중에서 칭기스칸은 정치적으로 상대방 귀족, 관리, 종교 지도자, 군사 수령 등의 대표 인물들의 항복을 얻었고; 군사적으로는 수비군의 방어 특징에 맞추어 서로 다른 상황에 따라 공성, 기습, 운동전 등의 전술을 채용해 상대방을 격파했다. 동시에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베풀어 투항자와 저항자, 군인과 평민을 구별해 대우하는 정책을 채용했다. 기술적 전문성을 가진 장인과 지식인들이 모두 선별되거나 혹은 군대를 따라 복무했고, 혹은 몽골로 보내졌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몽골 제국으로 돌아간 후에 일부분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중앙아시아 민족이 점차 중국의 각 민족들 가운데 동화되었고; 다른 일부분은 중국 서북에 모여 살며 중앙아시아 민족이 회족(回族)의 주체를 형성했다.

몽골 군대 속의 적지 않은 한인(漢人) 혹은 이미 한화된 소수민족들은 정복된 지역에 남는 것을 선택하여 그곳에서 생활하고 후손을 남겻으며 중화 문화를 널리 전파했다.

서정은 또한 몽골 제국으로 하여금 국가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재산을 증가하게 했으며, 몽골의 군사 기술, 생산 기술, 사회 관리와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도 큰 제고가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칭기스칸의 서정이 동서방의 경제 문화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을 없애고 통상 거리를 단축시켰으며, 동서방의 교류가 빈번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정복된 땅을 분봉해 4대 칸국을 건립하다

칭기스칸이 승리를 거둔 후에 1225년 정복한 토지를 그의 세 아들에게 분봉했다.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세 종족을 서도제왕이(西道諸王)라 불렀다.

장자 주치는 킵차크, 호라즘 및 강리국의 옛 땅에 봉해졌으니, 오늘날의 아랄해 서쪽, 카스피해 북쪽의 돈강과 볼가강 일대의 킵차크 초원이 모두 이에 속했다. 주치는 칭기스칸이 세상을 떠난 것보다 일찍 죽었기에 이 봉지는 그의 아들 바투에게 귀속되었다. 바투는 나중에 지배 영역을 확장했고 이 기초 위에서 ‘킵차크 칸국’을 건립했다. 그 칸국은 몽골 도성에서 수만 리 떨어져 역마가 빨리 달려도 200여 일이 소요되었다.

차남 차가타이가 수령한 영지는 서요(西遼)와 위구르국의 고지로부터 뻗어나와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 이르렀으며, 톈산 남북로와 율두스강 및 마나스강 유역 및 오늘의 아무다랴강, 시르다랴강 사이의 중앙아시아 트랜스옥시아나 지역을 포함했다(가장 강성했을 때는 알타이산맥에서 아랄해에 이름). 1222년 차가타이 칸국을 건립했으며 초기에 알리말리 부근의 후야스(구르자)에 도읍을 세웠다.

삼남 우구데이의 영지는 나이만 고지이며, 오늘날의 오브강 상류 서쪽에서 발하시호 동쪽 일대에 이르는 곳이 모두 이에 속했다. 1225년, 우구데이 칸국을 건립했다.

몽골의 관례에 따라 칭기스칸이 서거한 후, 막내아들 톨루이가 그의 아버지의 직접 영지, 즉 오논강 및 케를렌강 유역 일대의 몽골 본부 지역을 얻었으며 나중에 원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칭기스칸의 자손들이 건립하고 장악한 칸국은 미래에 동서방의 소통을 효과적으로 촉진했다. 한편 쿠릴타이 제도 역시 나중에 이 칸국들을 통치하는 데 널리 활용되었으며, 몽골 칸을 추대하고, 군정 대사를 의결하며, 각 칸국 간의 맹약을 체결하는 등의 일을 포함했다.

(계속)

참고자료:
《蒙古秘史》
《元史》
《成吉思汗與今日世界之形成》
《中國曆代戰爭史》(元朝) 台灣出版
《蒙古帝國史》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11/30/n1258540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