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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삼대 성세천조(盛世天朝)의 하나 당조(唐朝) (10)

(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찬란한 제국의 수도 편

대당(大唐)의 찬란함 속에는 서경(西京)인 장안(長安)과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이 남긴 짙은 한 획도 존재한다.

장안 — 동서방 문명이 교차한 도시

당조의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은 수조의 대흥성(大興城)을 바탕으로 건설하고 완비한 것으로, 황성(皇城), 궁성(宮城), 외곽성(郭城)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정치, 경제, 문화 활동의 중심지로서 장안성은 규모가 웅대하고 기세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구조가 균형이 잡혀 있고 배치가 정돈되어 있었다.

성 안에는 남북으로 늘어선 14개의 큰 길과 동서로 평행한 11개의 큰 길이 있어 전체 성을 108개의 이방(里坊)과 동시(東市), 서시(西市) 두 시장이 있었다. 큰 길의 너비는 25미터에서 134미터에 달했으며, 길 양옆으로 줄지어 회화나무를 심고 우기를 대비해 물길을 팠다. 이방 안에는 수많은 주민이 거주했을 뿐만 아니라 사찰, 도관, 왕부(王府 왕들의 저택)가 늘어서 있었는데, 성당(盛唐) 시기 방(坊) 내 사찰과 도관이 157곳에 달했다. 성 안에서는 밤에 야간 통행금지(宵禁)를 실시했으나, 사찰과 도관 및 3품 이상 관리의 저택은 이 제한에서 제외되었다.

동시와 서시는 수공업과 상업 점포가 집중된 곳이었다. 동시 안에는 200여 가지의 업종(行)이 있어 사방의 희귀한 보물이 모두 모여들었고, 서시 안에는 보석과 향신료를 취급하는 외국 상인[호상(胡商)]과 번객(蕃客 번국에서 온 손님)들이 가득해 길을 메우고 시장에 넘쳐날 정도로 번화했다. 그야말로 “백천(百千) 가구가 바둑판과 같고, 12개 도로는 밭 이랑과 같도다”라는 풍경이었다.

장안성의 궁전에는 ‘3대내(三大內)’라 불리는 태극궁(西內), 대명궁(東內), 흥경궁(南內)이 있었다. 태극궁은 당 태종이 신하들을 접견하고 조정 정사를 처리하던 곳으로, 당대 성세를 확립한 ‘정관의 치(貞觀之治)’가 바로 이곳에서 확립되고 추진되었다. 그 건축군은 웅장함과 위엄으로 이름 높았다.

정관 8년(634년), 고조가 나이가 많고 기력이 약해 더위를 견디기 힘들어하자, 태종은 궁성 북동쪽 모퉁이에 새로 대명궁(大明宮)을 지어 부친인 고조가 피서할 수 있도록 했다. 대명궁의 정문은 단봉문(丹鳳門)이고 북문은 현무문(玄武門)이었으며, 정전은 함원전(含元殿)이었고, 그 북쪽으로 선정전(宣政殿), 자신전(紫宸殿), 인덕전(麟德殿) 등이 있었다. 전각과 누각이 높고 낮게 솟아 서로 어우러지고, 누각이 복도로 이어져 웅혼하고 화려하며 장관을 이루었다.

대명궁성에는 11개의 문이 있었는데, 동쪽 성벽 문 밖에는 좌3군이 주둔하고, 서쪽 성벽 문 밖에는 우3군이 주둔하여 궁정을 엄밀히 호위했다. 성벽 안쪽에는 궁성 벽이 따로 설치되어 이것이 제2차 방어선이 되었다. 두 성벽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복도 같은 길이었기에, 무단으로 침입한 자는 숨을 곳이 없어 반드시 화살에 맞아 죽게 되어 있다.

장안성은 대당(大唐) 300 년 동안 여러 황제들의 지속적인 건설을 거쳐 나날이 더욱 아름답고 완벽해졌다. 742년에는 조거(漕渠 운하)를 파서 서시로 물길을 끌어들였고, 연못을 파서 목재를 적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827년부터 840년 사이에는 곡강(曲江) 부용원(芙蓉園)을 준설하고 정비했는데, 곡강 연못의 면적은 70만 제곱미터, 부용원의 면적은 144만 제곱미터에 달했습니다. 꽃이 피는 계절이면 향기가 온 성에 가득 찼고, 선비와 백성들이 못 위에 배를 띄우고 유람하며 즐기니 극히 성대했다.

이에 이르러 일대(一代)의 명성(名城) 장안은 세계 고대 도시 건설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으며, 당 이후의 도시들은 물론, 일본의 나라(奈良), 교토(京都) 등 도시 건설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장안은 당나라의 수도이자 전국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제도시이자 동서방 문명이 교차하는 중심지였다. 이는 장안이 가진 특수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결정된 것이다.

장안은 동서방 교통의 요충지로서, 서역 각국이 당조와 왕래하려면 반드시 장안을 거쳐야 했다. 동아시아, 남아시아 각국이 육로를 통해 서역과 교류할 때도 반드시 장안을 통과해야 했다. 장안이 수도였기에 각국의 사절이 빈번하게 왕래했고, 이들은 이역 만리의 문화를 가져옴과 동시에 찬란한 대당 문화도 자국으로 가지고 돌아갔다. 문화의 중심지였던 장안은 자연스럽게 수많은 재능 있는 인재들을 끌어모았고, 시가(詩歌)·곡부(曲賦)와 새로운 음악·명곡들이 이곳으로부터 전파되었다.

미국의 학자 에드워드 셰이퍼(Schafer)는 자신의 저서 《당대(唐代)의 외래 문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조가 통치한 만화경 같은 3세기 동안, 아시아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이 신기(神奇)한 당조의 땅에 들어왔다. 당조에 온 외국인 중에는 주로 사신, 승려, 상인이라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또한 장안성 내 외래 주민의 수가 상당히 많았으며, 주로 북방인과 서방인, 즉 돌궐인, 위구르인, 토하라인, 소그드인이었고, 많은 아랍인, 페르시아인, 천축(인도)인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당조는 동쪽 이웃인 한반도 및 일본과의 교류가 더욱 밀접했는데, 이러한 교류는 주로 장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 초기, 한반도에는 여전히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대립하는 국면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사신을 보내 당조와 왕래했다. 그러다 신라가 상원(上元) 2년(675년)에 한반도를 통일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많은 신라 유학생들이 장안으로 와서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며, 귀국 후 대당 문화를 적극적으로 전파했다. 신라의 법률, 과거, 과학 기술, 불교, 학교 등은 모두 당조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기본적으로 당조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당시의 신라는 한마디로 당조의 축소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7세기에서 8세기의 일본 역시 당조의 또 다른 축소판이라 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은 당조의 번창함을 매우 찬탄했기에, 당으로 파견하는 사신, 유학생, 학승(學僧)의 수가 매우 많았다.

631년(정관 5년), 일본은 유학생과 학승으로 구성된 첫 번째 ‘견당사(遣唐使)’를 장안으로 파견했다. 838년(개성 3년)까지 일본이 파견한 견당사는 총 13회였으며, 그 외에 당조로 파견된 ‘영입당사(迎入唐使 당에서 오는 사신을 맞이하는 사절)’와 ‘송객당사(送客唐使 당에서 온 사신이 귀국할 때 환송하는 사절)’가 총 3회 있었다. 당 초기 일본이 파견한 견당사는 보통 200명을 넘지 않았으나, 8세기 초부터 인원이 대폭 늘어나 717년, 733년, 838년에 파견된 세 차례의 견당사는 인원이 모두 550명 이상이었다.

1970년 서안에서 발견된 일본 은화는 견당사가 가지고 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 나라 동대사(東大寺 토다이지) 내 정창원(正倉院 쇼소인)에 보관된 당대(唐代) 악기, 병풍, 청동거울, 대도(大刀) 등 귀중한 유물 중 일부도 견당사가 가지고 간 것이다. 중국의 문화 성과를 흡수하기 위해 일본은 많은 유학생을 뽑아 당(唐)에 보내 공부하게 했으며, 이들은 장안 국자감(國子監)에 배치되어 각종 전문 지식을 배웠다. 예를 들어 아베 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 한자명 조형晁衡)는 오랫동안 중국에 머물며 시문(詩文)에 능했다. 당에서 광록대부, 비서감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그는 유명한 시인 이백(李白), 왕유(王維) 등과 깊은 우정을 나누며 자주 시를 주고받곤 했다. 일본 유학생들은 귀국 후 중국 문화를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 중국으로 와 공부한 학승은 총 90여 명이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공해(空海 쿠카이)였습니다. 그는 정원(貞元) 20년(804년) 중국에 와서 장안 청룡사(靑龍寺)에서 혜과(惠果)에게 밀교(密敎)를 배웠고, 귀국할 때 180여 부의 불경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는 또한 중국의 문학과 문자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중일(中日) 문화 교류 측면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중국 승려들도 끊임없이 일본으로 건너가 양국의 문화를 소통시켰는데, 그중 가장 공헌이 큰 사람은 감진(鑑眞) 화상이었다.

감진은 원래 속성이 순우 씨로 양주(揚州) 사람이다. 그는 율종(律宗)을 이 연구했고 양주 대명사(大明寺)에서 율을 강의하고 율을 전했다. 그는 일본 쇼무(聖武 724~749 재위) 천황의 요청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고자 여섯 번의 노력 끝에 갖은 위험을 겪고 두 눈이 멀면서까지, 마침내 현종 천보(天寶) 13년(754년) 제자들을 데리고 일본에 도착했으니 당시 나이가 거의 칠순에 가까웠다. 감진은 율종을 일본에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사찰 건축, 조각, 회화 등 예술도 일본에 전수했다. 일본에 현존하는 당쇼다이지(唐招提寺)가 바로 감진과 그 제자들이 지은 것으로, 일본 건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감진은 의학에도 정통했는데 특히 본초(本草)에 뛰어나, 두 눈이 멀었음에도 코로 냄새를 맡아 각종 약재를 구분할 수 있어 일본 의약학 발전에도 공헌했다.

교육 면에서는 텐지(天智 668~671 재위) 천황 시기 교토에 대학을 설립했고, 이후 학제가 점차 완비되어 각 과목의 학습 내용이 기본적으로 당나라와 유사했다. 언어와 문자 면에서는 8세기 이전까지 일본이 한자를 표현 도구로 사용했다. 유학생 기비 노 마키비(吉備真備)와 학승 공해(空海)는 일본 인민들이 중국 한자의 음과 뜻을 활용하던 바탕 위에 일문 가나 자모를 창제했습니다. 기비 노 마키비는 한자 해서체의 편방을 따서 ‘카타카나’를 만들었고, 공해는 한자 초서체를 채용해 ‘히라가나’를 만들었다. 이러한 새 문자 체계의 발명은 일본 문화의 발전을 크게 촉진했다. 동시에 일본어의 어휘와 문법도 한어(漢語)의 영향을 받았다.

역사 속 장안은 동서방 문명이 교차하던 곳으로서 후세에 자랑스러운 고적들을 수없이 남겨주어, 후인들이 이를 음미할 때 옛날에 대한 아련한 회고의 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낙양 — 장안과 기각의 세를 이룬 도성

당 낙양성은 남쪽으로 이궐(伊闕)과 맞닿아 있고 북쪽으로 망산(邙山)에 기대어 있으며, 낙수(洛水)가 그 가운데를 관통해 은하수의 형상을 띠고 있다. 이 역시 수조 동도(東都)를 바탕으로 건설된 것이다. 남북 너비 약 16리, 동서 너비 약 15리로 둘레가 70리였다. 외곽성, 황성, 궁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 안에 가로세로 각 10개의 큰 길이 있어 103개의 이방(里坊)으로 나누었고, 남시, 북시, 서시라는 세 개의 시장을 두었다.

지리적 위치에서 낙양성은 서경 장안과 멀리서 서로 응하여 기각(犄角)의 세를 이뤘다. 평면 배치는 장안성과 큰 차이가 있는데, 궁성과 황성이 전성 북쪽 정중앙에 있지 않고 서북쪽 모퉁이에 위치하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형상으로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황성의 남쪽은 낙하(洛河 낙수)로 경계를 삼았기에 방어의 견고함과 엄밀함이 장안보다 더했다. 측천무후 시기에는 옹주, 동주, 진주 등 7개 주에서 수십만 가구, 거의 백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낙양으로 이주시켰으며, 상양궁(上陽宮)을 지어 조정 정사를 처리하는 주요 궁전으로 삼았다.

궁성은 동서 너비가 거의 5리, 남북 너비가 거의 3리로 4중의 성이 있었다. 정문은 응천문(應天門), 정전은 명당(明堂)이라 했으며, 명당 서쪽의 무성전(武成殿)은 관청으로서 백성들의 정사를 처리하던 곳이다. 상양궁은 궁성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어 남쪽으로는 낙수에 임하고 서쪽으로는 곡수(穀水)가 막아서며, 동쪽은 궁성과 접하고 북쪽은 금원(禁苑 황실 정원)과 이어졌다. 궁 안의 정문과 정전은 모두 동쪽을 향했는데 정문은 제상문(提象門), 정전은 관풍전(觀風殿)이라 했다. 안에는 편전, 정자, 누각 등 총 9곳이 숨겨져 있었다. 상양궁 서쪽으로 곡수를 사이에 두고 서상양궁(西上陽宮)이 있었는데, 곡수를 지지하는 무지개 다리가 놓여 두 궁을 연결했기에 왕래가 매우 편리했다. 금원 안에는 희귀한 새와 짐승을 많이 모아 놓아 황실 사냥터가 되었으며, 제왕의 집에서 먹는 음식 중 일부도 이곳에서 나왔다.

남시, 북시, 서시라는 세 시장은 장안성의 동·서시와 달리 세 시장이 모두 운하와 하천에 접해 있어 화물선이 시장 안까지 직접 도달할 수 있었다. 남시와 서시 안에는 화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북시는 낙양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전국 각지의 배 만 여 척이 이곳에 모였다가 흩어졌으며 물길을 가득 채웠고, 상인들이 왕래하며 매매하여 수레와 말이 길을 막았다. 북시 근처에는 낙양에 있는 대부분의 여관과 주점(酒店)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비단길을 따라 동쪽에서 온 아랍인, 페르시아 상인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용문석굴에 새겨진 글씨는 당시 북시에 채백항(彩帛行 비단), 향항(香行 향), 사항(絲行 실) 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이들 업종이 모두 석굴 개착에 참여한 것을 보면 그 재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대당 경제의 번영 또한 이를 통해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