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당대(唐代)의 문화는 박대정심(博大精深)하고 화려하고 찬란하여, 중국 고대 문화의 최정상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복식 편
예로부터 제왕(帝王) 장상(將相)이 조정에 나와 정사를 논하거나 하늘과 땅,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서로 다른 예의(禮儀)와 예복(禮服)이 있었는데, 예절이 번화하고 복식이 화려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사방에 위엄을 떨치게 되면서 면류관과 곤복(袞服)에 금을 박고 옥을 늘어뜨렸으며, 의장대와 호위병이 천 승, 만 기에 달하여 그 웅장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후대 제왕들은 저마다 기발한 생각을 내어 다투어 호화로움과 사치를 겨루었으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과 같다. 북위(北魏)와 북제(北齊)의 제왕 및 백관의 수레와 복식은 기괴하고 괴이한 지경에 이르렀다.
대당 정관 초년, 당 태종은 이러한 사치스러운 풍조를 완전히 없애고, 매년 원일(元日 새해 첫날)과 동지 이틀만 조하(朝賀)를 받고 대제사를 지낼 때 곤면(袞冕)을 착용했으며, 평소 조정에서 정사를 보거나 들을 때는 모두 일상복(常服)을 입었다. 태종의 일상복은 적황색 포삼(袍衫) 한 벌, 접은 두건(頭巾) 하나, 구환요대(九環腰帶) 하나, 육합화(六合靴) 한 켤레뿐이었다. 점점 문무백관이 조용히 이를 본받았고, 심지어 궁녀와 사녀(仕女)들조차 이러한 차림새를 좋아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궁중의 풍조가 저잣거리와 시골 마을까지 퍼져 나가, 당조 남자들은 모두 복두(襆頭), 사모(紗帽), 포삼(袍衫)을 일상 복식으로 삼았다.
《예기·심의(禮記·深衣)》에 따르면 “옛날의 심의는 대개 제도가 있어 규구(規矩)에 응하고 저울과 추에 맞추었다. 짧아도 살결이 보이지 않아야 하고, 길어도 흙이 묻지 않아야 한다”라고 했다. 사실 중국 역대 복장이 어떻게 변하든 두 가지 유형을 벗어나지 않는데 하나는 위아래 두 개로 나뉘어 상반신에 입는 것을 ‘의(衣)’, 하반신에 입는 것을 ‘상(裳)’이라 하여 “상의하상(上衣下裳)”이라는 말이 있다. 또 하나는 의와 상을 하나로 연결한 것으로 ‘심의(深衣)’라 부르는데, 당나라의 포삼(袍衫)이 바로 심의에서 발전해 변화한 것이다.
* 남자 머리장식과 복식
복두(襆頭)는 머리를 싸매는 데 쓰는 비단 천인 건백(巾帛)의 일종으로, 주요 변화는 두 양쪽 끝에 있다. 양쪽 끝이 가볍고 얇아 아래로 부드럽게 늘어진 것을 ‘연각복두(軟腳襆頭)’라 했고, 양쪽 끝이 둥글거나 넓어 딱딱한 날개처럼 살짝 위로 말려 올라간 것을 ‘경각복두(硬腳襆頭)’라 했다. 당조 말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모자로 변한다.
사모(紗帽)는 본래 조정 관원들이 조정에서 송사를 듣고 빈객을 연회할 때 쓰던 것이었으나, 유생과 은사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유행하여 양식은 저마다 좋아하는 바에 따르고 신기(新奇)한 것을 숭상했다.
원령포삼(圓領袍衫 둥근 깃의 포삼)은 제사 의례 외에 관원과 선비, 백성이 모두 입었다. 관원의 포삼은 색상으로 등급을 구분했는데, 정관 연간의 규정에 따르면 3품 이상 관원은 자색(紫色), 4품은 홍색紅色), 5품은 연한 빨강[淺紅], 6품은 진한 녹색[深綠], 7품은 연한 녹색[淺綠], 8품은 진한 청색[深青], 9품은 연한 청색[淺青]을 입었다. 제왕이 적황(赤黃)색을 사용했기 때문에 신민은 모두 이 색을 금지당했다. 측천무후는 연재(延載) 원년(694년)에 문관의 두루마기에 새를 수놓고 무관의 두루마기에는 짐승을 수놓도록 하사했다. 예컨대 재상(宰相)의 포는 봉황이 노니는 못인 봉지(鳳池)로 장식하고, 상서(尙書)의 포는 두 마리 기러기로 장식하며, 장군의 포는 등급에 따라 사자, 기린, 호랑이, 표범, 매 등으로 장식하고, 여러 친왕(親王)은 반룡(盤龍) 및 사슴으로 장식했다.
여성의 머리 장식과 손장식
당조 부녀자들은 상투를 높이 틀어올리는 고계(高髻)를 좋아했는데,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아계(峨髻), 운계(雲髻), 나계(螺髻), 반번계(半翻髻), 쌍환망선계(雙環望仙髻), 쌍추계(雙垂髻) 등이 있어 명목이 아주 다양했다. 상투 위에는 비녀(簪釵) 등의 물건으로 꿰어 고정한 뒤, 다시 빗, 생화(生花), 취승(翠勝), 금전(金鈿) 등 머리 장식을 꽂아 장식했다.
비녀 중 잠(簪)의 본래 이름은 ‘계(笄)’로, 여자가 계를 꽂으려면 ‘계례(笄禮 성년식)’를 치러야 했으며 이는 성년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계의 형태는 대부분 납작하고 긴 외가닥이었고 재료로는 금, 은, 옥, 뼈, 대나무, 조개껍데기 등이 있었는데, 한쪽 끝은 굵고 한쪽 끝은 가늘었으며 굵은 쪽 끝에는 흔히 꽃을 조각하거나 짐승을 새기고 옥과 금을 박아 넣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것 중 가장 정교하고 으뜸인 것은 ‘취우잠(翠羽簪)’으로, 물치새의 깃털을 금비녀 위에 붙여 만든 것인데, 천백 년 전의 선명하고 화려한 광채가 오늘날까지도 볼 수 있다.
맹호연의 《정길(庭桔)》이란 시에 나오는 “뼈는 홍라 이불을 지르고, 향기는 취우잠에 붙어 있네”라는 구절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비녀 중에서 차(釵)는 보통 두 가닥으로, 대부분 금, 은, 옥으로 만들었다. 후세 사람들은 차 끝에 흔들리는 꽃가지나 옥주름 등을 달아 걸어갈 때 “한 걸음에 세 번 흔들리며” 끊임없이 들썩이게 했으니 이를 ‘보요(步搖)’라 불렀다. 당대 부녀자의 보요는 보통 새나 봉황 모양으로 만들어 입에 옥석으로 만든 구슬을 꿴 줄을 물려 놓았기에 인체의 움직임에 따라 구슬 줄이 흔들거렸다.
연지를 바르고 분을 바르는 것은 부녀자 화장의 주요 단계였다. 당대에는 ‘홍장(紅妝)’, 즉 도화장(桃花妝)이 성행했으니, 얼굴에 먼저 백분을 한 겹 바른 뒤 연지를 바르고, 이어서 눈썹을 그리고, 이마에는 화전(花鈿)을 붙이고, 입술 가장자리에는 면엽(面靨)을 찍고, 관자놀이에는 사홍(斜紅)을 그리며, 다시 입술 연지를 바르면 전체 화장이 완성되었다.
반지(指環), 손목 팔찌(手鐲), 팔뚝에 차는 비천(臂釧), 옥패(玉佩), 향낭(香囊)은 없어서는 안 될 장식품이었다. 반지는 장식과 액운을 피하는 용도 외에도 혼인의 신표 역할을 할 수 있었으니, 오늘날 남녀가 결혼할 때 반지를 주고받는 풍습이 바로 고대에서 유래한 것이다. 비천(臂釧)은 여러 개의 팔찌를 하나로 꿰어 만든 팔 장식으로 ‘도탈(跳脫)’이라고도 불렀다. 옥패와 향낭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차기를 좋아했는데, 향낭 안에는 흔히 훈초(薰草)라는 귀한 향료 식물을 넣었기에 향낭을 훈낭(薰囊)이라고도 했다.
여성 복식
당조 여성의 복장은 소매가 좁고 짧은 저고리, 피백(披帛 어깨에 두르는 천), 긴 치마를 위주로 했다.
유(襦)는 긴 소매의 짧은 웃옷으로, 옷 길이가 딱 허리에 달하여 허리 저고리라고도 불렀으며, 유를 만드는 옷감과 양식은 계절에 따라 구별이 있었다. 흔한 직물로는 견(絹), 나(羅), 기(綺), 사(紗) 및 금(錦) 등이 있었고, 양식의 변화는 대부분 깃과 소매에 있었으니 깃에는 둥근 깃, 네모난 깃, 비스듬한 깃, 바른 깃, 닭가슴 모양 깃, 깃이 없는 형태 등이 있었으며 소매에는 좁은 소매와 큰 소매 두 종류가 있었다.
반소매의 유를 ‘반비(半臂)’라 불렀다. 반비는 대부분 비단(금)으로 짜고 수놓아 재질이 두툼하고 소매가 넓어, 유의 겉에 겹쳐 입을 수 있었으니 화려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추위를 막는 역할을 했다.
적삼(衫子)은 여름 옷에 속하며, 한대(漢代) 이후에 출현한 안감이 없는 홑옷이다. 당조의 적삼은 대부분 넓은 깃에 큰 소매로, 안개처럼 가볍고 얇기가 참새 날개 같아 살결이 어렴풋이 보였다.
당대 제도에는 선비와 백성의 미혼 딸은 반드시 피백을 걸쳐야 했고, 시집간 사람은 피피(披帔)를 걸쳐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백(帛)은 백건(帛巾)이라고도 부르며 대부분 베 재질로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폭이 비교적 넓고 길이가 약간 짧아 어깨에 걸치면 망토(披風)와 비슷했고,
하나는 폭이 비교적 좁고 가늘고 길어서 양팔을 감싸 바람을 받아 날리면 펄럭이는 띠 모양과 같았다.
피(帔)는 피건(帔巾)을 가리키는데, 좁고 길며 화려하여 대부분 두툼하고 촘촘한 비단으로 만들고 위에 문양을 수놓으며 아래에 옥추(玉墜)를 달았기에 피백처럼 바람에 따라 나부끼게 할 수는 없었다.
여성의 치마는 넓고 큰 것을 으뜸으로 삼아, 최소 여섯 폭(3미터가 넘는다)의 천을 모아 만들었기에 “치마가 상강(湘江)의 물 여섯 폭을 끌고 간다”는 아름다운 명칭이 있었다. 치마 허리는 가슴까지 높이 매어 붙였고 치마 길이는 땅에 끌렸다. 치마의 색상은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녹색 등 원하는 대로 선택했는데, 그중에서도 붉은 치마가 특히 사랑받았다. 장위(張謂)의 시에 “도화 말 위의 석류 치마(桃花馬上石榴裙)”라 한 것은 붉은 치마를 입은 미인을 묘사한 것이다. 왜 붉은 치마를 ‘석류 치마’라 불렀을까? 원래 이러한 붉은 치마는 석류꽃에서 추출한 색으로 물들인 것이었기에 이처럼 예쁜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이렇게 빗질과 화장, 단장을 거쳐 차려입은 후, 대당 여인의 용모는 풍만하고 화려하며, 온화하고 예의 바른 풍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야말로 “찡그림과 웃음마다 모두 부드러운 아름다움이 나타나고, 돌아보고 바라봄마다 자태가 생겨나지 않음이 없도다(一顰一笑皆現柔美,一顧一盼莫不生姿)”라고 할 만하여, 손을 들고 발을 옮기는 사이에 보요가 가볍게 흔들리고 넓은 소매가 펄럭이며, 백건이 날리고 긴 치마가 끌리며, 옥패 소리가 옥을 치고 그윽한 향기가 나니, 참으로 선녀가 세상에 내려온 듯하여 주변 여러 나라 및 역대 부녀자들이 동경하고 참조하는 모범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