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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사랑한 아들 칭기스칸 시리즈 14 – 【칭기스칸】 야율초재가 포부를 펼치고 무칼리가 금나라 정벌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成吉思汗】耶律楚材展抱负 木华黎征金칭기스칸(에포크타임스 제작)

전장을 누빈 칭기스칸의 평생에서, 초원의 여러 부를 통일하는 것이든 혹은 서하, 금나라 및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방을 정복하는 것이든 모두 충심을 다해 그를 보좌하는 문신과 무장들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의 눈에 천명(天命)을 받든 칭기스칸은 용감하고 굳세며, 흉금이 넓고 관용과 성실함을 갖추고, 안목이 원대하며 사람을 알아보고 쓰는 데 뛰어났다. 그리고 이것 또한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위해 힘을 발휘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그들은 칭기스칸의 휘하에서 동서로 정벌하고 계책을 내고 묘책을 세우며, 칭기스칸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강대한 몽골 제국을 건설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여기에는 ‘몽골 사걸’로 불리는 보르굴, 무칼리, 보오르추, 칠라운과 ‘몽골 사맹’이라 불리는 수베데이, 젤메, 제베, 후빌라이가 포함되며, 그들은 모두 몽골 제국의 개국 대장으로서 큰 공로를 세웠다. 한편 문신 중에서 가장 칭기스칸과 후계자 우구데이가 칭찬하고 의지한 인물이 바로 야율초재(耶律楚材)였다.

한(漢) 문화의 훈도를 깊이 받은 야율초재

야율초재는 거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요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9세손이자 동단왕(東丹王) 야율배(耶律倍)의 8세손이며, 금나라 상서우승(尙書右丞) 야율리(耶律履)의 아들로 말 그대로 진정한 황실 귀족이었다. 그가 막 태어났을 때 점술 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그의 아버지 야율리가 이렇게 예언했다.

“내 나이 예순에 이 아들을 얻었으니, 우리 집안의 천리마로다. 나중에 반드시 위대한 그릇이 될 것이며 또한 다른 나라를 위해 쓰일 것이다.”

그는 또 《춘추좌씨전》 중의 “비록 초나라에 인재가 있으나, 실제로는 진나라가 쓴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아들의 이름을 ‘초재(楚才 초나라 인재란 의미)’라고 지었다.

야율초재가 두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는 어머니의 양육을 받아 성장했다. 열두 살 때 야율초재는 서원에 들어가 글을 읽으며 유가의 시서예의(詩書禮義)를 배웠다. 야율초재 집안은 대대로 금나라에 관직을 지냈고 줄곧 연경(燕京 북경)에 거주했다. 요나라는 태조 야율아보기 시기부터 한문화(漢文化)를 숭상했고 한의 제도를 모방해 거란국을 다스렸으며, 금나라 역시 세 번째 황제 금 희종(熙宗) 시기부터 한제(漢制) 개혁을 추진하고 한인을 중용하며 유학을 숭상했다. 도성인 연경은 자연히 깊은 한문화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에, 야율씨 가문은 대대로 한문화의 훈도를 받아 글을 읽고 예를 아는 가풍을 형성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야율초재는 어려서부터 한문 서적을 공부하고 한문(漢文)에 정통하여, 나이가 어린데도 이미 “뭇 책을 널리 섭렵하고, 천문, 지리, 율력(律曆), 술수(術數) 및 석로(釋老 불교와 도교)와 의술, 점복(占卜)의 설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붓을 들어 글을 지으면 마치 오래전에 미리 지어둔 사람 같았다”고 할 정도였고, 그의 이상은 유가의 학설에 따라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1206년, 야율초재는 재상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관직을 직접 제수받을 수 있는 우대를 누리지 않고, 대신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응시자 중에서 유일한 우등생이 되어 선발되어 연직(掾職 실무 관리)에 임명되었고, 나중에 개주동지(開州同知 개주 지부의 부책임자)가 되었다.

1214년, 금 선종(宣宗)이 변경(汴京)으로 천도하자 야율초재의 형인 야율변재(耶律辨才), 야율선재(耶律善才)는 모두 수행했고, 야율초재는 중도(中都)에 남아 연경을 지키는 승상 완안승휘(完顏承暉)에 의해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郎)으로 임명되었다.

칭기스칸이 야율초재를 초빙하다

1215년, 몽골군이 중도를 함락시킨 후 칭기스칸은 거란 귀족을 초빙하여 자신을 위해 쓰이게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에 사람을 보내 수소문하여 요나라 황족의 후예인 야율초재가 재주가 뛰어나고 식견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조서를 내려 그를 불렀다.

야율초재가 칭기스칸의 징조를 받아들인 것은, 금나라 군신(君臣)들이 백성을 돌보지 않는 소위에 대해 깊이 실망한 것 외에도 천하의 대세를 똑바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금나라가 멸망하고 공격만 하면 이기는 몽골인들이 천하를 차지하는 것이 단지 시간문제라는 점이었고, 포부를 품은 그 역시 천하 창생(蒼生)을 위해 더욱 유익한 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러므로 그는 중도를 떠나 온갖 험난함을 겪은 뒤 칭기스칸의 막북 대막으로 향했다.

자신이 본 대칸의 대막에 대해 야율초재는 《서유록(西遊錄)》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산천이 서로 교차하고, 산색, 하늘색, 풀빛이 서로 어우러지며, 수레와 장막이 하얀 구름처럼 초원 위에 흩어져 있고, 장사들은 빗방울처럼 많으며, 말과 소가 들판에 깔려 있고, 갑옷과 무기의 빛이 하늘을 밝히며, 진영 앞의 연기와 불빛이 서로 비추며 만 리로 이어졌다. 예로부터 이토록 성대한 광경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대한 광경의 창조자는 바로 칭기스칸이었다. 칭기스칸을 만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칭기스칸의 능력에 탄복했던 것이다.

이어서 야율초재는 대막 안에서 칭기스칸을 알현했다. 칭기스칸의 영웅적인 기개는 야율초재를 탄복하게 만들었고, 마찬가지로 체격이 훤칠하고 용모가 준수하며 아름다운 턱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이 29세의 거란 청년은 칭기스칸의 마음에 들었다. 그는 직접 친근하게 그를 “우투사할리”라고 불렀는데, “긴 턱수염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야율초재와 깊은 대화를 나눈 후 칭기스칸은 말했다.

“이 사람은 쓸 만하니, 좌우에 남겨두어 자문하게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번에 “만 리의 용정(龍庭 황궁)에서 천자를 배알”한 후 야율초재 역시 칭기스칸에게 큰 기대를 걸었으며, 자신이 대칸을 보좌해 대업을 성취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일찍이 ‘서정’ 세계 전략을 칭기스칸에게 바쳐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耶律楚材(公有领域)

야율초재(공유 영역)

서정을 호종하고 서하를 정벌하다

1219년 여름, 칭기스칸이 호라즘을 서정할 때 칭기스칸의 깊은 신임을 받은 야율초재 역시 호종 인원의 하나가 되었다. 서정 내내 전투는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어 몽골 대군은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의 도시를 연달아 함락시키고 시르다리야강과 아무다랴강 사이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다. 그후 몽골군은 또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인더스강, 코카서스, 러시아 남부 지역까지 진격했다. 야율초재는 칭기스칸의 안팎에서 길흉을 점치고 계책을 세우며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도를 설명했다.

장생천을 믿었던 칭기스칸은 야율초재의 길흉을 점치는 능력을 매우 중시했다. 출정할 때마다 칭기스칸은 반드시 야율초재에게 점을 치게 했으며, 칭기스칸은 때때로 몽골 전통의 점술 방식인 양의 넓다리뼈를 태우는 방식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야율초재의 예측은 모두 아주 영험했다.

예를 들어 1220년, 몽골군이 호라즘의 주요 도시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공략한 후에 겨울에 우뢰가 치는 천상이 나타났다. 칭기스칸은 이에 이것이 무슨 조화인지 물었다. 야율초재가 말했다. “호라즘 국왕 무함마드가 마땅히 들판 가운데서 죽을 것입니다.” 연말에 무함마드는 과연 카스피해의 한 작은 섬에서 죽었다.

또 예를 들어 1222년, 야율초재는 또 “장성(長星 혜성)이 서쪽에 나타난” 천상(天象)을 통해 금 선종의 죽음을 예언했다. 다음 해에 과연 그대로 들어맞았다.

또 1224년 칭기스칸의 대군이 철문관(鐵門關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주둔하고 있을 때, 시위(侍衛)가 괴상한 짐승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사슴의 몸을 가졌고 말과 같은 꼬리를 가졌으며 온몸이 초록색이었고 머리에는 또 외뿔이 돋아 있었으며, 더욱 기이한 것은 또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칭기스칸의 시위에게 말했다.

“너희 군주는 마땅히 조속히 군대를 돌려 돌아가야 한다.”

시위들이 겁에 질려 이 일을 칭기스칸에게 보고했다.

칭기스칸 역시 놀라고 의심하며 확신하지 못하여 부하에게 물었는데, 견문이 넓은 야율초재가 해석을 내놓았다.

“이 괴수의 이름은 ‘각단(角端)’이며, 하루에 1만 8천 리를 갈 수 있고 온갖 언어에 통달했습니다. 각단은 악살(惡殺 살육)의 상징이며, 그것의 등장은 살벌함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을 미리 경고하는 것으로, 이것은 하늘이 폐하에게 내리는 경고입니다. 폐하께서 하늘의 뜻에 순종해 조속히 회군하시기를 바라며, 그래야만 더 많은 복택을 누리실 수 있습니다.”

칭기스칸이 그 말을 따라 곧 회국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 이야기는 《원사》와 야율초재의 묘지명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角端图”,出自《古今图书集成‧博物汇编‧禽虫典‧第五十八卷》。(公有领域)

각단도(角端圖) 《고금도서집성·박물휘편(博物彙編)·금충전(禽蟲典)·제58권》. (공유 영역)

점복과 예측 외에도 야율초재는 칭기스칸의 한문 서기(書記)이기도 했으며, 무릇 몽골 대칸 조정의 한문 문서들은 모두 그가 처리했다. 1222년, 진인(真人) 구처기가 칭기스칸의 초청을 받아 대설산 행궁에 도착했을 때 야율초재는 통역으로 칭기스칸과 구처기의 회담 전 과정에 참여했다. 그의 《서유록》에서는 구처기가 “대답한 바는 모두 평범한 말과 정기신(精氣神)에 관한 일이었다”고 언급했고, 그가 주필한 《현풍경회록》에서는 구처기와 칭기스칸이 도를 논한 내용 등을 기록했다.

게다가 1220년 사마르칸트가 함락된 후 야율초재는 명을 받아 그곳에 주둔하며 둔전 사무를 관리했다. 그곳에서의 2년 동안 그는 한가하고 편안한 생활의 여유 속에서 현지의 자연 풍광, 풍토 물산과 인정 풍속을 체험하고 관찰했으며, 성지(城池), 정원, 기후, 농업, 수공업, 상업과 온갖 물산 등을 모두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는 또 현지 여인들이 한무(漢舞)를 배우고 관기(官妓 기생)가 거문고를 타는 등 동서 문화 교류의 현장을 기록했으며, 자연 풍광, 사회 풍속과 생활을 묘사한 많은 시가를 지었다.

칭기스칸은 서정에서 돌아온 후 곧바로 서하 원정에 나섰고, 야율초재가 또 수행했다. 서하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야율초재는 주군(州郡) 관리들이 함부로 징발하고 살육하는 것을 금지해 달라고 끊임없이 간언해 탐욕스럽고 포악한 기풍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이외에도 그는 가능한 한 서적과 의약을 보존해 적지 않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칭기스칸이 붕어하기 전, 일찍이 야율초재를 가리키며 후계자(우구데이)에게 당부했다.

“이 사람은 하늘이 우리 집안에 내려준 것이니, 앞으로 군국(軍國)의 모든 정무는 다 그에게 위임할 수 있다.”

우구데이가 즉위한 후 과연 야율초재를 중용(重用)해 중서령(中書令 재상에 해당)으로 세웠다. 야율초재는 문치(文治)의 회복에 힘써 “유가로 나라를 다스리는” 방안과 ‘제도를 정하고, 예악(禮樂)을 의논하며, 종묘를 세우고, 궁실을 건설하며, 학교를 만들고, 과거를 설치하며, 은일(隱逸)한 이를 발탁하고, 원로를 방문하며, 현량(賢良)을 천거하고, 방정(方正 단정하고 곧은 이)을 구하며,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고, 놀고 게으른 것을 억누르며, 형벌을 줄이고, 부세를 가볍게 하며, 명예와 절개를 숭상하고, 유세객을 배척하며, 불필요한 관원을 없애고, 가혹한 관리를 내치며, 효제(孝悌 효도와 공경)를 숭상하고, 곤궁한 이들을 구휼하는’ 정치적 주장을 점진적으로 실시하여 “사직의 신하[社稷之臣]”로 칭송받았으며, 몽골 제국의 중원 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史集》中描绘的窝阔台登基的情形(公有领域)

《사집(史集)》에 묘사된 우구데이의 즉위 (공유 영역)

무칼리의 금나라 정벌

1217년 8월, 요서(遼西)를 평정하고 요동(遼東)을 다시 평정한 공로로 무칼리는 칭기스칸에 의해 태사·국왕으로 봉해지고 서권(誓券 맹세의 증서)과 금인(金印 금으로 만든 도장)을 하사받았으며, 조서에 이르기를 “자손이 나라를 전해 대대로 끊이지 않게 하라”고 했다. 칭기스칸은 매번 외출할 때마다 전용의 구유대기(九斿大旗 천자나 제후가 사용하는 9개의 장식 술이 달린 큰 깃발)를 갖추었다. 그는 구유대기를 무칼리에게 함께 하사하고 장수들에게 말했다. “무칼리가 이 깃발을 세워 호령을 발하면 짐이 친히 임한 것과 같다.”

또 그로 하여금 전권(全權)으로 몽골병 1만 3천, 옹구트부병 1만 및 몽골에 투항한 거란족, 한인 여러 군대를 통솔해 금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그에게 중원의 호걸들을 포용해 행성(行省)을 설치하고 중원을 경영하라고 타일렀으며,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몽골로 돌아와 서정을 준비했다.

이때부터 무칼리는 금나라 공격을 지휘하는 전권을 책임졌다. 그는 이전의 몽골인들이 공격하여 취하고 영토를 빼앗아도 지키지 않던 습관을 바꾸어, 몽골에 귀순하기를 원하는 지방 무장 세력을 중용했다. 예를 들어 하북 청락군(清樂軍) 수령 사병직(史秉直), 사천예(史天倪) 부자와 흥중부(興中府) 원수 석천응(石天應) 및 역주(易州) 토호, 금나라 중도 유수 장유(張柔) 등이 있으며, 몽골군의 장점을 결합해 요서, 하북, 산서, 산동 각지의 수십 성을 공략하고 각 지역에 관원을 배치해 지키게 했다.

1220년 가을, 무칼리는 군대를 이끌고 만성(滿城 오늘날의 하북 보정保定)에 이르렀고, 지방 무장 수령 무선(武仙)이 진정부(眞定府 오늘날의 하북 정정현正定縣)에서 투항하자 무칼리는 사천예의 건의를 받아들여 백성에 대한 약탈을 엄금하라고 명했기에 널리 민심을 얻었다. 그후 그는 경기병을 이끌고 제남(濟南)으로 들어가 남송의 제남치중(濟南治中) 엄실(嚴實) 및 그가 관할하는 상주(相州), 위주(魏州), 자주(磁州) 등 8주 30만 호를 항복시키고 그로 하여금 행상서성 업무를 보게 했으며, 또 금나라 형주 절도사 무귀(武貴), 송 충의군(忠義君) 수령 석석(石矽), 송 경동안부사(京東安撫使) 겸 총관 장림(張琳) 등을 복종시켜 싸우지 않고도 광대한 토지를 얻었다.

황릉강(黃陵岡 오늘날의 하남 난고蘭考 동쪽)의 격전 중에서 무칼리는 병력을 임기응변으로 능숙하게 운용하고 친히 말에서 내려 독전하며 장사들로 하여금 활을 당겨 일제히 쏘게 하여 20만이라 칭하던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위주(衛州), 단주(單州)를 공략했다. 다음 해 겨울, 그는 연달아 가주(葭州 오늘날의 섬서 가현佳縣), 수덕(綏德)을 취하고 연안성(延安城) 동쪽에 복병을 두고 야전을 벌여 금나라 병사 3만을 격파하고 7천 명을 베어 죽였다.

1222년, 무칼리는 군대를 이끌고 경조부(京兆府 서안)를 포위 공격했으나 20만 금나라 병사가 굳게 지키어 함락시키지 못했기에 병력 6천을 남겨 금나라 군대와 대치하게 하고 또 3천 명을 파견하여 동관(潼關)을 틀어쥐고 지키게 했으며;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봉상(鳳翔)을 취했으나 한 달이 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듬해 봄, 무칼리는 황하를 건너 문희(聞喜 지금의 산서 문희현)에 이르렀을 때 병사했으며, 향년 54세였다. 임종 전 무칼리는 동생인 다이순(帶孫)에게 말했다.

“내가 나라를 위해 대업을 이룩하도록 도우며,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은 지 근 40년이다. 동서로 정벌하여 유감은 없으나, 다만 아직 변경(지금의 개봉)을 공략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너는 힘써 노력해야 한다!”

사실 6년 동안의 정벌전을 거쳐 무칼리는 이미 차례로 금나라 영토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금나라 군대의 모든 군력(軍力)을 소탕했으며 금나라의 많은 장수들을 복종시켰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보로(孛魯)가 작위를 세습하고 군대를 거느리며 계속 금나라를 공략했다.

蒙古乌兰巴托市的木华黎雕像 (shutterstock)

몽골 울란바토르의 무칼리 조각상 (shutterstock)

칭기스칸의 고굉지신(股肱之臣)

무칼리는 아난수의 동쪽에서 태어났으며,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한 무리의 상서로운 하얀 기운이 대막에서 피어올랐다고 한다. 초원의 한 신무(神巫 무당)가 이 광경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이 아이는 범상한 아이가 아니다.”

성인이 된 후 무칼리는 침착하고 굳세며 지혜와 계책이 뛰어났고 체격이 훤칠하며 팔이 원숭이처럼 길고 활쏘기에 능해 이석(二石 200근)의 강궁을 당길 수 있었으며, 그 용맹함이 몽골 초원에서 당대 으뜸이었다. 그는 보오르추, 보르굴, 칠라운과 함께 충용(忠勇)으로 칭기스칸을 보좌해 당시 사람들이 네 사람을 ‘돌리반·구률(掇裏班‧曲律)’이라고 불렀는데, 중국어로 번역하면 ‘사걸(四傑)’이란 뜻이다.

어느 해 칭기스칸이 출정하여 패배해 영장(營帳)을 잃어버렸다. 밤이 되어 그는 그저 풀숲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마침 그날 밤 또 큰눈이 내렸고, 무칼리와 보오르추가 함께 털가죽 담요를 펼쳐 대칸을 위해 풍설을 가려주었으며, 초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발걸음조차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또 어느 날은 칭기스칸이 3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어떤 산골짜기 사이로 가고 있었다. 갑자기 한 무리의 적들이 인근 숲속에서 튀어나와 그들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순식간에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무칼리는 즉시 활을 당겨 화살을 먹이고 연달아 세 발을 쏘아 세 사람을 맞혔다. 적군의 수령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사람이냐?”

그가 대답했다.

“나는 무칼리다.“

이어서 무칼리는 안장을 풀고 손에 쥐고 방패로 삼아 칭기스칸을 보호하며 철수했다. 나머지 기병들이 반격에 나서자 적들이 흩어져 도망쳤다.

수십 년 동안 무칼리는 칭기스칸을 따라 동서로 정벌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여러 차례 위난 속에서 칭기스칸을 구출했다.

1206년, 칭기스칸이 몽골의 여러 부를 통일하고 황제의 대위(大位)에 올랐다. 즉위 초 대칸은 무칼리와 보오르추에게 말했다.

“지금 국내가 평정된 것은 대개 그대들의 공로이다. 그대들은 내게 있어서 수레에 끌채가 있고 몸에 팔이 있는 것처럼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니, 그대들은 나의 이런 생각을 이해하고 애초 나를 보좌했던 초심(初心)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곧이어 각각 무칼리와 보오르추를 좌(左) 만호장과 우(右) 만호장으로 세우고 그들에게 상응하는 시위 및 의장을 갖춰주었으며 그들에게 제후왕의 대우를 하사했다.

나중에 칭기스칸은 또 무칼리를 태사이자 국왕에 봉하고 맹세의 증서와 황금으로 만든 인장을 하사했다. 몽골 제국에서 무칼리는 왕위에 봉해진 첫 번째 사람이었다. 청나라 말엽에 편찬된 《신원사(新元史)》에서는 ”그가 사람을 알아보고 임용하는 데 뛰어났으며 칭기스칸의 풍모가 있었다“고 했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니다.

(계속)

참고자료:
《元史》
《成吉思汗與今日世界之形成》
《國朝名臣事略‧太師魯國忠武王》‧卷一
《元史‧木華黎傳》卷一百一十九
《耶律楚材》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12/8/n1260441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