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객(長袖客)
【정견망】
최근 대영박물관이 소장 중인 《여사잠도(女史箴圖)》를 전시했다. 이 두루마리 그림은 동진(東晉)의 화가 고개지(顧愷之)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두루마리 그림 자체가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매년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대중에게 공개된다. 이미 조금 바래버린 선들이 전시 케이스 속에 다시 나타날 때, 천 년 전의 인물들도 마치 역사 저 깊은 곳에서 다시 걸어 나오는 듯하다.
사람들은 흔히 중국 초기 인물화의 관점에서 《여사잠도》를 논하며, 궁궐의 여성들을 규범하고 경계하기 위한 작품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두루마리를 따라 펼쳐가며 그림 옆에 남겨진 글들을 읽다보면, 옛사람들이 후인들에게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여자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차원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관심을 두는 바는, 사실 천지의 도(道)가 어떻게 인륜(人倫)으로 들어오며 또 어떻게 한 집의 질서로 내려앉는가 하는 점이다.
《여사잠도》는 애초에 여자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고, 천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득한 조화여, 음양이 비로소 나뉘었네.(茫茫造化,二儀始分)”
천지가 처음 갈라지고 음양이 비로소 판가름 나며,
기화(氣化)가 유행하여 만물이 형체를 이룬다.
이어서 인륜이 생기고 부부가 생기며 군신이 생기니,
이에 “가정의 도는 바름으로 바로잡고, 나라는 도에는 윤리가 있도다(家道以正,王猷有倫)”
이렇게 천지로부터 인간 세상에 이르는 질서가 세워진 뒤에야 문자는 비로소
“부인의 덕은 유순함을 숭상하고(婦德尚柔)”,
“자리를 바르게 하여 거처에 머물며(正位居室)”,
“엄숙하고 삼가며 너의 예법을 지키라(肅慎爾儀)”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러한 배열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중국 옛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사람은 결코 천지 사이에 홀로 외롭게 살아가지 않았다. 천지에는 그 운행하는 법칙이 있어 음양이 서로 조화롭고 만물이 각자의 자리를 얻는다. 사람이 기왕 천지 사이에 태어났으니, 사람의 삶 또한 마땅히 이러한 더 큰 질서와 합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도(道)는 천지 사이에서 내려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윤리 기강이 되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덕(德)이 되며,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에 낙착되어 예(禮)가 되고, 다시 일언일행(一言一行), 일거일동(一擧一動) 사이에 드러나 의(儀)가 된다.
이것이 어쩌면 《여사잠도》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린 것은 겉보기엔 궁궐 속의 몇몇 여인들에 불과하지만, 그 이면에서 드러내는 바는 천지 사이의 도가 어떻게 한 걸음 한 걸음 인륜 질서가 되며 또 어떻게 한 집안의 살림살이로 낙착되는가 하는 것이다. 전체 두루마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그린 그림은 비록 개개인의 인물이지만, 진정으로 끊임없이 드러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서로 다른 관계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편안히 배치하는지, 자신의 자리와 분수를 어떻게 지키는지, 또 서로 간에 질서를 잃지 않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두루마리 안에는 아주 의미심장한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번희(樊姬)는 초 장왕(莊王)을 간언하며 사냥해 온 신선한 새고기를 먹지 않았고, 위희(衛姬)는 제 환공을 권계하며 음악을 듣지 않았다. 한쪽은 먹지 않는 바가 있었고, 한쪽은 듣지 않는 바가 있었다. 그녀들은 권력을 믿고 군왕을 강요하지 않았고, 먼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선택으로써 군왕이 느끼고 깨닫는 바가 있게 했다. 《여사잠도》에서는 “뜻이 굳세고 의로움이 높으며, 두 임금의 마음을 바꾸었다”고 칭찬했다.
소위 덕(德)이라는 것은 여기서 더 이상 추상적인 한마디 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선택으로 구체화된다. 음식에 대한 욕망 앞에서 취하지 않음이 있을 수 있고, 보고 듣는 즐거움 앞에서 역시 절제가 있을 수 있다. 겉모습은 온화할 수 있으나 내심에는 지키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소위 ‘부드러움’이란 꼭 연약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다투지 않을 수 있지만 오히려 원칙이 있고, 안정할 수있지만 오히려 힘이 있을 수 있다.
풍첩여(馮婕妤)가 곰을 막아선 곳에 이르면 화면은 느닷없이 긴장된다. 검은 곰이 난간을 기어오르고, 어떤 이들은 뒤로 물러서는데 풍첩여는 도리어 앞으로 나아간다. 《여사잠도》는 그녀가 두려움을 몰랐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반문한다.
“어찌 두려움이 없었겠는가?”
그녀는 당연히 무서움을 알았다.
허나 “죽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아끼지 않았다.” 몸을 던져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대영박물관 소장본 《여사잠도》 부분: 풍첩여가 곰을 막아선 모습
나아가고 물러나는 사이에 사람의 내재적인 것을 전부 다 그려냈다.
화가는 굳이 ‘용(勇)’ 자를 써 넣을 필요조차 없다. 덕(德)은 원래 보이지 않지만, 그림은 그것을 드러나게 할 수 있다. 용맹은 원래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동작이 사람에게 용맹을 보게 한다. 의로움은 원래 보이지 않지만, 위기의 순간에 내린 한 사람의 선택이 그것을 사람들 눈앞에 펼쳐 보인다.
반첩여(班婕妤)가 수레를 사양한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선택이다. 영광과 총애 앞에서 그것이 고귀함을 그녀가 몰랐던 것이 아니다. 《여사잠도》에서는 말한다.
“어찌 그리워하지 않았으리오? 미세한 기미를 막고 멀리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정한 것이 아니라, 총애 속에서도 마땅히 절제해야 할 바가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이어서 두루마리는 문득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려놓고 눈앞에 산천, 새와 짐승, 태양과 둥근달, 그리고 쇠뇌를 든 사냥꾼을 등장시킨다. 제사(題辭)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도는 창성하되 쇠하지 않음이 없고, 만물은 성대하되 시들지 않음이 없다.
해는 중천에 오르면 기울고, 달은 차면 이지러진다.”
(道罔隆而不殺,物無盛而不衰。日中則昃,月滿則微。)
태양이 한낮의 하늘에 이르면 곧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달이 가장 둥글어졌을 때 이미 이지러지는 쪽으로 향하게 된다. 천지 만물에 영원히 가득 차기만 한 것은 없는데, 인간 세상의 총애와 부귀, 남녀 간의 애정인들 어찌 예외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옛사람들이 중시한 ‘도(度, 알맞은 한계와 절도)’란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만을 묶어두기 위한 규칙이 아니라, 천지의 운행으로부터 목격한 일종의 보편적인 법칙이다.

대영박물관 소장본 《여사잠도》 부분: 도는 창성하되 쇠하지 않음이 없고, 만물은 성대하되 시들지 않음이 없다.
나중에 두루마리는 다시 “너희의 영광을 뽐내지 말라,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미워한다(無矜爾榮,天道惡盈)”고 썼고, 또 “사랑이 극에 달하면 변하고, 가득함이 이르면 반드시 줄어든다(愛極則遷,致盈必損)”라고 했다. 달의 차고 이지러짐에서부터 사람의 부귀영화에 이르고, 다시 부부 사이의 애정에 이르기까지 겉보기엔 전혀 다른 일들 같지만 그 이면에서 말하는 바는 모두 같은 도리이다. 즉, 절도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중국 옛사람들이 음양과 중용(中庸)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일면이다. 평형(平衡)이란 만물을 똑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명들이 서로를 제약하고 서로를 성취하게 하여 어느 한쪽도 한없이 팽창함으로써 마침내 전체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정이 오래 지속될 수 있는가 하는 점 역시 바로 이러한 평형이 부부의 일상적인 어울림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여사잠도》가 그린 것은 궁궐이지만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도(家道)임을 똑똑히 보게 된다.
“그 말함을 선하게 하면 천리가 호응하고,
만약 이 의로움을 어기면 한 이불을 덮고서도 서로 의심하네.
(出其言善,千裏應之;苟違斯義,則同衾以疑。)”
부부가 비록 한 이불을 덮고 자더라도 만약 선(善)과 의(義)를 잃는다면 서로 의심하게 된다.
“즐거움은 함부로 할 수 없고, 총애는 독점할 수 없다(歡不可以瀆,寵不可以專)”는 대목에 이르면 그 뜻은 더욱 명백해진다. 부부 사이에 정이 없을 수 없지만 정은 도를 잃어서는 안 되고, 친밀하지 않을 수 없지만 친밀함 속에도 여전히 공경함이 필요하다.
정(情)은 인간관계의 끈이다. 정이 있기에 사람과 사람이 친근해지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부모 자식이 서로 아끼고 한 가정에 온기가 생긴다. 그러나 정에는 농도가 있게 마련이고 시간과 처지에 따라 변화가 생기기 마련이다. 정이 일단 지나쳐 버리면 그것은 또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사잠도》가 말하는 바는 “즐거움을 가져서는 안 된다”가 아니라 “즐거움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총애를 가져서는 안 된다”가 아니라 “총애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사랑해서는 안 된다”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사랑이 극에 달하면 변하고 가득함에 이르면 반드시 줄어든다”는 경각심을 주는 것이다.
문제는 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것에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해는 중천에 오르면 기울고 달은 차면 이지러진다”는 것과 사실은 같은 도리이다. 해가 가장 높은 곳에 이르면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달이 가장 둥글어지면 이지러지기 시작하듯이, 사람의 정도 ‘극(極)’과 ‘참(盈)’에 이르면 비로소 원래의 아름다움을 잃기 시작할 수 있다. 천지 사이의 그 도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인간 세상에 이르러 사람의 정 속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전통 관념 속에서 한 가정이 오래 지속되려면 오직 정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정은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 주지만, 그 속에서도 사람은 변화 속에서 지켜내야 할 바가 있어야 하니 이것이 덕(德)이다. 또한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려면 준수해야 할 분수가 있어야 하니 이것이 예(禮)이다.
정이 사람을 서로 연계 하고, 덕이 사람에게 지킬 바가 있게 하며, 예는 어울림에 절도가 있게 한다.
중국 옛사람들이 부부가 “손님처럼 서로를 공경한다(相敬如賓)”고 말할 때, 이 ‘공경’이란 결코 소원(疏遠)함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친밀하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기 쉽고,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분수를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소위 “즐거움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 준다. 즉, 사랑하되 얕잡아 보지 않고(간격이 없고 예절에 구애되지 않음), 친근하되 업신여기지 않으며, 정을 품되 절도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다시 예를 바라보면 그것은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의 가로막힌 담벼락도 아니고 사람의 감정을 억누르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예는 정을 보호하여 친밀함이 업신여김으로 변하지 않게 하고, 사랑이 독점욕으로 변하지 않게 하며,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를 얻으면서도 서로를 완성하게 해준다.
천도(天道)에서 인도(人道)에 이르르고 다시 가도(家道)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는 줄곧 하나의 질서가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예(禮)란 바로 이 질서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뒤 실천될 수 있는 분수이다.
그림 속에서 거울을 보며 단장하는 여인이 그토록 음미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용모를 꾸밀 줄 알면서도, 자신의 심성을 꾸밀 줄은 모르는구나.“
(人咸知飾其容,而莫知飾其性。)

대영박물관 소장본 《여사잠도》 부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용모를 꾸밀 줄 알면서도, 자신의 심성을 꾸밀 줄은 모르는구나.
《여사잠도》는 여기서 마치 또 하나의 거울을 조용히 내려놓는 듯하다. 진정으로 꾸밈이 필요한 것은 비단 겉모습만이 아니다. 한 사람의 공경, 삼감, 고요, 선으로 비록 보이지 않지만 그의 말과 표정, 거취 속에 조금씩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뒷부분에 이르면 《여사잠도》는 극히 의미심장한 네 글자를 써낸다.
“아름다운 자는 스스로 아름답다.(美者自美)”
진정한 아름다움은 밖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며, 누구의 총애를 얻거나 외적인 치장에 의존하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필요도 없다. 덕이 안으로 갖춰지고 의(儀)가 밖으로 드러날 때, 한 사람의 내면이 수양되어 생명이 청정(淸正)하고 절도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아름다움은 자연스럽게 외면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것이 어쩌면 중국 전통 인물화가 지닌 아주 깊은 한 층의 미학일지 모른다. 화가는 후인들에게 단순히 어떤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말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생명의 상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리려 했다.
도(道)는 원래 형체가 없고 덕(德) 역시 원래 보이지 않지만, 옛사람들은 그것을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했다. 유순함은 한 사람의 자세가 되고, 공경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되며, 삼감은 나아가고 물러설 때의 분수가 되고, 용맹은 위기의 순간에 나아가는 한 걸음이 되며, 그침을 아는 것은 영광과 총애 앞에서 한 번 물러서는 양보가 된다. 그리하여 도(道)는 형체를 얻고 덕(德)은 가시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림은 다시 이러한 생명의 상태를 보존해 냈다.
이것이 어쩌면 중국 전통 예술이 ‘도를 싣는(載道)’ 의미일지 모른다. 그것은 추상적인 도리에 예쁜 겉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형상 속에서 덕을 보고 아름다움 속에서 도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형태로 도를 싣고, 아름다움으로 덕을 드러낸다(以形載道,以美顯德).
《여사잠도》는 ‘다른 사람을 보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않다. 두루마리가 끝을 향해 갈 때, 한 여인이 홀로 조용히 앉아 있다. 제왕도 없고, 곰도 없고, 수레도 없고, 거울도 없으며, 바깥의 이야기들은 마치 모두 물러간 듯 오직 네 글자만 남아 있다.
“공손한 태도로 스스로 돌아보라.(靖恭自思)”
그림의 시선 방향 역시 여기서 바깥에서 안으로 향한다. 번희가 어떻게 했고, 위희가 어떻게 했으며, 풍첩여와 반첩여가 어떻게 했는지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한 이야기들을 아는 것이 곧 자신이 그러한 덕을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침내 사람은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앞서 그 여인이 구리 거울을 빌려 자신의 ‘용모’를 비추어 보았다면, 여기에 이르러서는 거울조차 없이 비추어 보아야 할 대상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다.
두루마리의 맨 마지막에는 오직 고개를 숙인 채 붓을 잡은 여사(女史) 한 사람만이 남는다.
“여사가 잠언을 맡아 삼가 모든 후궁들에게 고하노라.(女史司箴,敢告庶姬)“

대영박물관 소장본 《여사잠도》 부분: 여사가 잠언을 맡아 삼가 모든 후궁들에게 고하노라.
‘아득한 조화’에서 시작된 두루마리는 천지의 음양, 역사 속 인물, 영욕의 진퇴, 부부와 가정을 거쳐 마지막에는 한 자루의 붓으로 떨어진다. 천지간의 도(道)가 사람에게 인식되고 실천되며 문자에 기록되고 다시 화가에 의해 형상으로 변한다. 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두루마리가 다시 펼쳐질 때 후세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미 바래버린 그 선들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거꾸로 찾아갈 수 있다. 옛사람들이 어떻게 천지를 보았고 어떻게 사람을 보았으며, 천지의 도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진정으로 자신의 일상 속에서 살려냈는지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오늘날 《여사잠도》를 다시 펼쳐보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다시 펼쳐야 할 것은 한 축의 옛그림 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중국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방식까지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여사잠도》가 남긴 것은 단지 아득한 옛날의 궁궐 의전 세트가 아니다. 그것은 천지에서 시작해 인륜을 말하고, 인륜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말하며, 관계에서 부부를 말하고, 부부에서 다시 한 사람의 말과 행동, 거동과 내심으로 귀결된다.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시들지 않은 하나의 질문이다. 사람은 천지 사이에 마땅히 어떻게 자신을 안돈(安頓 편안히 정돈)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안돈은 우선 가정 안에서부터 일어난다.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정을 필요로 하고 사랑과 친밀함을 목말라하며 안식처가 되어줄 가정을 갈망한다. 그러나 《여사잠도》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어쩌면 바로 이것이다. 정은 사람들을 서로 이어줄 수 있을지언정 정만으로 한 가정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 낼 수는 없다. 한 가정이 기나긴 세월을 걸어가려면 사람마다 정 속에서 지킬 바를 지켜야 하고, 어울림 속에서 적절한 도를 지켜야 한다.
《여사잠도》는 마지막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더 이상 남을 평가하라고 독촉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이렇게 남길 뿐이다.
“공손한 태도로 스스로 돌아보라.(靖恭自思)”
여기에 이르러, 천백 년 동안 인간 세상을 떠난 적이 없는 하나의 질문이 그림 속에서 다시 솟아오른다.
한 가정은, 대체 무엇에 의지해야 비로소 오랫동안 한 가정이 유지될 수 있는가?
부록:
Google Arts & Culture 고화질 영상 링크: 여사잠도
여사잠 (女史箴) 전문
서진(西晉) 장화(張華)
아득한 조화 속에 음양 두 거대한 기운이 나뉘고,
기가 흩어져 형체를 이루니 질그릇이 되었네.
복희씨에 이르러 비로소 하늘과 사람의 도리를 경영하셨고,
이에 부부에서 시작하여 군신의 도리에 미쳤으니
집안의 도리가 바르게 되고 왕의 도리에 질서가 잡혔네.
茫茫造化,二儀既分。散氣流形,既陶既甄。
在帝庖羲,肇經天人。爰始夫婦,以及君臣。
家道以正,王猷有倫。
부인의 덕은 유순함을 숭상하고, 아름다움을 품어 바르고 길하도다.
부드럽고 정숙하며 조심스럽고, 자리를 바르게 하여 거처에 머무네.
허리띠를 매고 끈을 맺으며, 공경하고 정성스럽게 제사 음식을 받드네.
엄숙하고 삼가며 너의 예법을 지키고, 맑고 아름다운 덕을 우러러보라.
婦德尚柔,含章貞吉。婉嫕淑慎,正位居室。
施衿結褵,虔恭中饋。肅慎爾儀,式瞻清懿。
번희는 초 장왕을 감동시켜, 신선한 새고기를 먹지 않았네.
위희는 제 환공을 바로잡아, 귓가에서 풍악 소리를 잊었네.
뜻이 굳세고 의로움이 높으니, 두 주인의 마음을 바꾸었도다.
樊姬感莊,不食鮮禽。衛女矯桓,耳忘和音。
志厲義高,而二主易心。
검은 곰이 난간을 기어오르니, 풍원(풍첩여)이 앞으로 나아갔네.
어찌 두려움이 없었으리오? 죽음을 알면서도 아끼지 않았도다!
반첩여는 글을 올려, 총애를 끊고 수레를 함께 타지 않았네.
어찌 그리워하지 않았으리오? 미세한 기미를 막고 멀리 생각했기 때문이다!
玄熊攀檻,馮媛趍進。夫豈無畏?知死不吝!
班妾有辭,割歡同輦。夫豈不懷?防微慮遠!
도는 창성하되 쇠하지 않음이 없고, 만물은 성대하되 시들지 않음이 없다.
해는 중천에 오르면 기울고, 달은 차면 이지러진다.
높이 쌓임은 티끌이 쌓인 것 같고, 무너짐은 놀라게 하는 쇠뇌 같도다.
道罔隆而不殺,物無盛而不衰。日中則昃,月滿則微。
崇猶塵積,替若駭機。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용모를 꾸밀 줄 알면서도, 자신의 심성을 꾸밀 줄은 모르는구나.
마음이 꾸며지지 않으면, 혹시 예의 바름을 그르치게 되리라.
다듬고 쪼아내어, 생각을 온전히 하여 성인이 되네.
그 말을 선하게 하면, 천리가 호응하고,
만약 이 의로움을 어기면, 한 이불을 덮고서도 서로 의심하네
人咸知飾其容,而莫知飾其性。性之不飾,或愆禮正。
斧之藻之,克念作聖。出其言善,千裏應之。
苟違斯義,則同衾以疑。
.말이 비록 미세할지라도, 영욕은 이로부터 말미암느니라.
그윽하고 어둡다 말하지 말라, 신령의 거울엔 형상이 없지 않고,
아득하고 적막하다 말하지 말라, 신명의 귀엔 메아리가 없지 않느니라.
夫出言如微,而榮辱由茲。
勿謂幽昧,靈監無象。
勿謂玄漠,神聽無響。
너의 영광을 뽐내지 말라,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미워하느니라.
너의 귀함을 믿지 말라, 드높은 자들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작은 별을 보고 거울삼아, 그것이 지나침을 경계하라.
메뚜기의 마음에 견주어, 너의 무리를 번성케 하라.
無矜爾榮,天道惡盈。
無恃爾貴,隆隆者墜。
鑒於小星,戒彼攸遂。
比心螽斯,則繁爾類。
기쁨은 함부로 할 수 없고, 총애는 독점할 수 없다.
독점은 실로 게으름을 낳고, 사랑이 극에 달하면 변하기 마련이다.
가득함에 이르면 반드시 손상되니, 이치는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아름다운 자는 스스로 아름다우나, 뽐내면 재앙을 부르노라.
꾸민 용모로 좋게 보이려 하면, 군자에게 미움을 받으리니,
은혜를 맺고서 끊어짐은, 직무가 이로 말미암아 생기는도다.
歡不可以黷,寵不可以專。專實生慢,愛極則遷。
致盈必損,理有固然。美者自美,翩以取尤。
冶容求好,君子所讎。結恩而絕,職此之由。
그러므로 이르노니, 조심하고 또 삼갈지니, 복이 흥하는 까닭이라.
공손한 태도로 스스로 돌아보며 생각함은, 영광과 현달을 기약하는 바니라.
여사가 잠언을 맡아, 삼가 모든 후궁들에게 고하노라.
故曰:翼翼矜矜,福所以興。靖恭自思,榮顯所期。女史司箴,敢告庶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