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음악 편
초당(初唐) 시기 문예 방면의 활달한 수용과 포용은 변방 소수민족과 인접 여러 나라의 악기 및 가무(歌舞) 예술이 전례 없이 대량으로 중원에 유입되게 했으며, 그 결과 당조 가무대곡(歌舞大曲)의 성취는 전례 없는 고봉에 도달했다. 《청상악(清商樂)》, 《구자악(龜茲樂)》, 《서량악(西涼樂)》이 당조 음악의 주류를 구성했다.
여기서 《청상악(清商樂)》이란 위진(魏晉) 시기에 형성된 중원 한족(漢族)의 속악(俗樂)으로, 전통 악기인 금(琴), 슬(瑟), 축(築), 진비파(秦琵琶), 생(笙), 소(簫), 적(笛), 쟁(箏), 와공후(臥箜篌), 편종(編鐘), 편경(扁磬)류 등을 사용했다. 음색이 우아하고 완만하며, 대부분 좌기부(坐伎部 주로 현악기 위주의 실내악과 가무로 구성)가 당상(堂上)에 앉아서 연주했고 가무자는 많아야 4명으로 기교가 세밀했다.
《서량악》은 후량(後梁 386~399년)에서 유래한 것으로, 흔히 한족 악기인 종, 경, 생, 쟁, 와공후와 서역 악기인 수공후(豎箜篌), 곡항비파(曲項琵琶 목이 뒤로 꺾인 형태의 비파)를 혼합하여 사용했기에 《수서·음악지 하》에서는 “음악과 성조가 모두 역사책에 쓴 것과 다르다”고 하였으니, 호악(胡樂)과 한악(漢樂)의 특징을 겸비했다.
《구자악》은 전진(前秦) 시기 서북 변방 황무지에서 내원한 것으로 서량 악기를 바탕으로 필률(篳篥), 오현비파(五弦琵琶), 패(貝), 동발(銅鈸), 박판(拍板), 대고(大鼓 큰 북) 등을 추가했다. 대부분 입기부(立伎部)가 당 아래에 서서 연주했고 가무자는 64명에서 180명에 달하여 기세가 호방하고 웅혼하며 무용에 힘이 있어, 거칠지만 마음을 진동시키는 예술 풍격을 가져왔다.
성당 가무 대곡
당대(唐代) 음악에는 대곡(大曲)과 소곡(小曲)의 구별이 있었다. 대곡은 크고 넓으며 웅장하고 장관이었으며, 소곡은 경쾌하고 활발했다. 대곡 중의 일부는 법곡(法曲)이라 불렸는데, 그 기원이 종교와 관련이 있었기에 흔히 도교의 음악이 안에 섞여 있었다.
《진왕파진악(秦王破陣樂)》(또는 《칠덕(七德)》이라고도 함)은 당 태종이 지은 것으로 무무(武舞)에 속한다. 여재(呂才), 이백약(李百藥), 우세남(虞世南), 저량(褚亮), 위징(魏徵) 등이 가사를 썼다. 120명이 갑옷을 입고 극(戟 창의 일종)을 들고 춤추었으니, 연회에서 이를 연주하면 천자가 자리를 비웠고 앉아서 연회를 즐기던 이들이 모두 일어섰다. 이 곡은 “큰 북을 번개처럼 울리고 구자악을 섞어 쓰니, 소리가 백 리를 진동하고 산골짜기를 요동치게 했다.”
《경선악(慶善樂)》(《구공(九功)》이라고도 함) 역시 당 태종이 지은 것으로 문무(文舞)에 속한다. 이 곡은 오직 서량악을 사용해 가장 한가롭고 우아하다. 무용수 64명이 자색의 큰 소매 저고리를 입고 가체 상투를 틀고 가죽 부츠를 신었다. 춤사위가 편안하고 완만해서 문덕(文德)으로 천하가 안락함을 상징한다.
《예상우의(霓裳羽衣)》는 당시 가장 이름 높던 곡이었다. 백거이의 시에 “천 가지 노래와 백 가지 춤을 헤아릴 수 없으나, 그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우의무(羽衣舞)로다”라고 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개원 연간 어느 한가위 15일 밤, 도사 엽법선(葉法善)이 현종을 청하여 함께 월궁(月宮)을 거닐며 선악(仙樂)인 《자운곡(紫雲曲)》을 들었는데, 음률에 통달한 현종이 몰래 기억해 두었다가 돌아온 뒤 친히 악보를 그리고 이원(梨園) 악사들에게 연주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절미(絶美)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 탄생한 내력이다. 음악 속에는 사죽(絲竹)의 소리가 많아 완전하고 청아했으며, 무용수는 공작 깃털 상의와 무지개처럼 화려한 치마를 입어 선녀처럼 속세를 벗어난 듯 표일(飄逸)하니, 마치 도가에서 말하는 우화비승(羽化飛昇)과 같았다.
수대(隋代)에 출현한 중국과 이민족 악무를 모은 ‘구부악(九部樂)’은 당대(唐代)에 이르러 10부로 늘어났으니 가무가 얼마나 성황했는지 족히 볼 수 있다. 민간 예술이 침투하면서 가무는 희곡 쪽으로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이때 이른바 ‘대면(大面 가면)’ 또는 ‘대면(代面)’이라 부르는, 즉 가면을 쓰고 연출하는 극이 있었다. 유명한 극목(劇目)으로는 《난릉왕입진곡(蘭陵王入陣曲)》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북제(北齊)의 난릉왕(蘭陵王) 고장공(高長恭)이 용맹이 삼군(三軍)에서 으뜸이었으나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이것이 적을 위압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목각 가면을 쓰고 진에 나아갔다. 이 희곡은 일찍이 일본까지 전해졌다. 이 외에도 《난릉왕》, 《발두(撥頭)》, 《답요낭(踏搖娘)》 이 세 가지 당대의 유명한 가무희(歌舞戲)는 모두 각기 짧지만 완전한 이야기와 인물, 갈등이 있다. 줄거리의 전개가 규정된 결말을 향해 나아갔다.
음악 대가(大家)
백화가 만발한 이 당조(唐朝)에 이구년(李龜年), 조씨(曹氏) 가문, 안만선(安萬善), 동정란(董庭蘭), 이빙(李憑) 등 천하에 이름난 음악 연주 대가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을 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용가들이 출현했다.
당시(唐詩) 속에는
“요동의 작은 색시 나이 열다섯,
비파 연주에 익숙하고 노래와 춤을 이해하네.
이제 강적 피리로 출새의 소리를 내니,
우리 삼군으로 하여금 눈물을 비 오듯 흘리게 하도다”
[이기(李頎)],
“시끌벅적 철컥철컥 섞여 탄주하니,
큰 구슬 작은 구슬이 옥쟁반에 떨어지는 듯하네”
(백거이)라는 천고의 명구가 있다.
당대에는 변방의 이민족 여인과 시정의 장사꾼 아낙까지도 이토록 음악에 통달했음을 볼 수 있으니, 연주 대가들의 기예(技藝)는 어떠했을지 상상할 수 있다.
수많은 무용 공연가들 가운데 가장 특별한 한 사람을 들자면 명성이 아주 높았던 공손대랑(公孫大娘)을 꼽을 수 있으니, 그녀의 검기무(劍器舞) 기예는 입신의 경지에 들어 “구경하는 사람들은 산처럼 빽빽이 모여서도 넋을 잃은 채 놀라움에 얼굴빛이 변했고, 웅장한 검무의 기세에 온 세상과 천지마저 한참 동안 오르내리듯 요동치는 것 같았다.”라는 경지에 도달했다.
아울러 일반 백성들의 가무 활동에 대한 사랑도 탄성을 자아낼 정도에 이르렀다. 명절이 되면 위로는 궁궐에서 아래로 조야(朝野)에 이르기까지 남녀가 손에 손을 잡고 돌며 나아가고 물러서며 밤새도록 춤추고 노래하니 이를 ‘답가(踏歌)’라 불렀다. 가령 713년 정월대보름 하루 동안, 궁중에서 밤새도록 답가를 즐긴 궁녀만도 3천 여 명에 달했다. 천보(天寶) 연간에 당 현종은 궁 밖에 산봉우리를 만들고 등루(登樓)를 높이 20여 장이나 올려 등륜(燈輪) 5만 개를 매달아 빛이 사방 백 리를 비추었다. 백성들이 성을 비우고 나와 불수레바퀴와 등나무 아래에서 노래하고 뛰며 사흘 밤낮을 연속으로 답가를 즐겼으니 그 즐거움이 지극하여 이전까지 못보던 장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