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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개변하고 자아를 닦다

대만 대법제자

【정견망】

최근 동수들 사이에서 삼퇴(三退)나 기타 대법 프로젝트에 대한 인식과 방식의 차이로 인해 서로 모순과 다툼이 발생하는 것을 종종 들었기에, 자신의 생각을 좀 말해보고자 한다.

사실 동수들의 출발점은 모두 좋은 것이며 모두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나, 다만 인식상에서 다른 견해가 생겼을 뿐이다. 각 동수에게 있어서 프로젝트 위에서 이미 다년간의 경험이 축적되었고, 저마다 자신만의 견해와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모두 손에 익숙한 것이고 또 실현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법에서 사람이 자신만의 사고 논리를 형성한 후에 자신의 관념을 고수하기 매우 쉽고, 서로 다른 관념과 견해에 대해 본능적으로 배척하는 마음이 생기며, 사실 이러한 고수란 곧 하나의 집착이고 자아 인식에 집착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이러한 집착은 또 쉽게 하나의 쟁투심을 조성하는데—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고, 오직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협조하기만을 바라며,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사실 중국 공산악당이 바로 이렇게 한다. 그것은 사람이 파룬궁을 연마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반드시 자신의 견해를 따르도록 강제하며, 그렇지 않으면 박해하고, 일부 수단을 써서 남이 굴복하도록 강요한다.

우리 수련인은 자비를 수련하는 것이고, 선타후아(先他後我)를 수련하는 것이다. 양측의 견해가 다를 때, 사존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다른 사람의 방식을 들으라고 요구하셨으니, 만약 실현 가능하다면 가서 달성하도록 돕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묵묵히 보충해 주어야 한다. 이는 일종의 선의(善意)적인 포용이다. 만약 동수에게 진정 집착이나 부족한 곳이 있음을 발견한다면 선의로 일깨워주어야 하고, 만약 상대방이 듣지 않더라도 상대방을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으며, 오직 선(善)으로 권할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선·인을 수련하고 있고 점차 대법과 동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속인은 일이 통하지 않을 때 마주치면 흔히 어떤 위협적이고 격렬한 수단을 쓰곤 하는데, 우리 수련인에게 있어서 이런 것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사존께서는 《2004년 뉴욕국제법회설법》에서 “사실 모두 법을 위해 고려할 때, 비협조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하셨다. 만약 우리가 진정 대법을 제1위에 놓고 중생 구도를 중점으로 삼는다면, 아마도 더 이상 그렇게 자아를 강조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을 내려놓고 남에게 협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왜 상대방이 개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개변해야 하는가?”라고 느낄 수도 있다. 우리는 전반 수련 과정이 끊임없이 집착심을 버리는 과정임을 알고 있다. 모순이 생겨서 팽팽하게 물러서지 않을 때 양측 모두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고 자신을 실증하려 하는 것이다. 누가 먼저 내려놓고, 누가 먼저 한 걸음 물러서며, 누가 먼저 사람마음(人心)을 닦아버리고, 누가 먼저 제고해 올라오는가를 보는 것이다.

이상은 현재 층차에서 나의 작은 인식이니,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