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장쩌민의 실체》 5: 장쩌민과 중공의 마음의 응어리

제2장 “장쩌민의 권력 농단” 제1절

【정견뉴스】

지금부터 14년 전, 《장쩌민의 실체(真實的江澤民)》이 처음으로 독자들과 만났다. 14년이 지난 지금, 장쩌민은 이미 죽었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독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많은 혼란과 위기는 모두 장쩌민 집권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부패로 국가를 다스리고, 법치(法治)를 짓밟으며, 도덕을 파괴하고, 파룬궁을 박해하는 한편, 그로 인해 팽창된 중공의 전제(專制) 및 폭력 기구는 중국에 끝없는 환란을 남겼다. 오늘날의 중공을 똑똑히 보고, 중국이 어찌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장쩌민의 실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에 에포크타임스에서는 본문을 다시 게재한다.

―――

장쩌민이 집권한 이후 중공은 이념도 없고 바닥도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권력을 이용해 크고 작은 사익(私益)을 도모하는 관리들이 그가 치켜든 자사(自私 자기 이익만 꾀하는 이기심)와 탐욕이란 악마의 기치 아래 순식간에 집결했다. ——머리말

세계 공산주의 운동이 초래한 비정상적인 사망자 수는 1, 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를 합친 것과 같다. 공산주의가 통치하는 국가들은 대개 빈곤, 권력 집중, 박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국가는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 등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며, 그 종말이 머지않았다.

이 모든 것은 마치 1천 년 전 북송의 소옹(邵雍)이 매화시에서 일찍이 예언했던 바와 같다.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가장 아름다운 가을빛은 장안에 있도다.” 오늘날의 공산당은 마치 ‘표범이 죽으며 남긴’ ‘가죽 주머니’처럼 중공에 의해 계승되어 공산당의 통치를 유지하고 있다. 세계 마지막 공산 대국의 수괴인 장쩌민은 2002년 3월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공언했다. “내가 젊었을 때는 공산주의가 곧 다가올 것이라고 믿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여전히 공산주의를 진정으로 믿는 이는 중국에서 이미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비록 공산주의가 일종의 이데올로기로서 이미 바람 앞에 촛불 신세가 되었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음에도, 그것을 권력의 의지처로 삼아 이제 막 독재의 단맛을 본 장쩌민이 어찌 독재자의 꿈을 쉽게 잃으려 하겠는가?

막스 베버의 분석에 따르면 통치의 유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전통적 권위(traditional authority), 합리적·법적 권위(rational-legal authority), 카리스마적 권위(Charismatic authority)가 그것이다. 그러나 장쩌민은 예외였다. 그는 황권(皇權)이나 천명(天命)으로부터 비롯된 것도 아니었고, 민주적인 투표로 얻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개인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여기에 ‘6·4’ 사건 이후 중공이 직면한 대내외의 곤경이 겹쳤으니, 권력에 대한 장쩌민의 불안감을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는 중공 내부에서 남에게 밀려 대체될까 두려워했고, 중공이 하루아침에 와해되어 권력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밀실 조작이 판치는 중공의 정치는 아첨과 알랑거리기에 통달하고 바람에 따라 깃발을 바꾸는 데 능한 장쩌민에게 한바탕 기량을 뽐낼 기회를 공교롭게도 안겨주었다.

그는 군부 실세인 양상쿤과 덩샤오핑의 관계를 이간질하여 1992년 군권을 틀어쥔 ‘양가장(楊家將 양상쿤 형제 가문)’을 끌어내리고 군대에 자신의 심복을 심음으로써 군부를 장악했다. 1995년에는 반부패를 도구로 삼아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베이징시 당 서기 천시퉁을 감옥에 집어넣고 장쩌민의 말을 듣지 않던 ‘베이징 방’를 쓸어버렸다.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하자 장쩌민은 마침내 시어머니 밑에서 고생 끝에 며느리가 권력을 잡듯 득세했다. 1998년, 장쩌민은 당 원로인 보이보(薄一波)와 다시 한번 거래를 트고, 나이를 구실로 중공 서열 3위 인사이자 폭넓은 신망을 누리던 차오스를 강제로 퇴역시켰다. 동시에 부패를 방임하는 방식을 통해 각급 관리들을 장쩌민의 이익 전차에 묶어놓았다. 그리하여 장쩌민의 권력은 끊임없이 공고해졌고, 마침내 실권을 장악했다. 애초 외계로부터 권력 기반이 없는 과도기적 인물로 여겨졌던 장쩌민은 무대에 올라 한자리 차지하더니 무려 15년이나 앉아 있었다.

제1절 장쩌민과 중공의 마음의 응어리 ═ 집권 합법성

‘6·4’ 사건은 중공의 극도로 이기적인 속성과 도덕에 마지노선이 없다는 특징을 전 세계에 똑똑히 보여주었다. 스스로 인민에게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뻔히 아는 정당으로서, 전제 권력을 수호하기 위해 중공은 최소한의 도덕적 마지노선을 끊임없이 돌파할 수 있었고, 영원히 중공 자신의 이익을 인민과 국가의 이익보다 위에 올려놓은 채 인민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거듭해서 저질렀다.

중공은 이데올로기 면에서 철저하게 파산했고, 개혁개방 이래 축적한 정치적 신용은 바닥까지 상실되었으며, 중공은 극도로 심각한 신뢰 위기에 빠져들었다. 장쩌민의 통치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공은 이 신뢰 위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더욱 깊어졌다. 중공의 각급 간부들은 중앙의 방침과 노선을 추호도 믿지 않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속이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속이며, 중앙은 전당(全黨)을 속이고 전당은 중앙을 속인다. 인민이 더 이상 공산당을 믿지 않는 것은 이미 보편적인 사실이 되었다.

신화사 산하의 《국제선구도보(國際先驅導報)》는 <나를 믿게 해다오>라는 보도에서 이 사실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것은 신기한 나라이다. 우리는 일찍이 모든 것에 대해 신뢰로 충만해 있었는데, 영도자에 대해, 혁명에 대해, 자본주의의 필연적 멸망과 공산주의의 밝은 미래에 대해 모두 그러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은 왠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 같다. 지방 정부의 입장 표명도 믿지 않고, 매체들의 보도도 믿지 않으며, 주변 사람들도 믿지 않는다. 특히 ‘정부가 무슨 말을 하든 무조건 의심한다. 이것은 이미 대다수 사람들의 습관이 되었다’.”

“의심이 중국인의 생활 양식이 되었을 때. 오늘날 의심과 경계는 중국인의 생활 양식이 되었다. 상식을 초월하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주거를 보면, ‘쓰러지는 아파트’,‘기울어진 아파트’, ‘종이장처럼 얇은 아파트’가 있고; 먹을 것을 보면, 가짜 담배, 가짜 술, 가짜 달걀, 가짜 우유, 하수구 기름, 인공 지방, 미용 성형을 거친 쌀, 약품으로 불린 콩나물, 피임약으로 살찌운 자라, 세탁 가루로 튀겨낸 꽈배기 등을 조심해야 하며; 문을 나서면, 영업사원과 자해공갈, 함정 단속을 경계해야 하고; 병원에 가면 가짜 약, 무면허 진료, 과잉 진료를 걱정한다(홍콩 《태양보》 최근 보도에 따르면 중국인들이 작년 한 해 동안 맞은 수액 병수가 104억 병으로 1인당 평균 8병에 달한다고 한다). 이 외에도 우리는 가짜 표, 가짜 신분증, 가짜 당첨, 은행 사기, 가짜 호랑이, 가짜 뉴스 등등에 직면해야 한다. 이토록 세태가 각박하고 인심이 험악한 상황 앞에서 멍하니 스스로에게 물을 뿐이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종종 공식 매체나 전문가들이 해명하는 것일수록 오히려 네티즌들의 의심을 더욱 사게 된다.” [1]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와 그에 뒤따른 동유럽의 체제 변화는 중공에게 엄청난 공포와 압박감을 안겨주었다. 당시 소련의 해체 외에도 베를린 장벽 붕괴, 폴란드 자유노조의 승리,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 헝가리의 민주적인 체제 전환,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실권과 처형, 불가리아의 첫 전국 민주 총선 완료 등 공산주의 세계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공산당 집권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폴란드에서는 10년, 헝가리에서는 10개월, 동독에서는 10주, 체코에서는 10일, 루마니아에서는 고작 10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생생한 말이 있다. 공산 정권들의 연쇄 붕괴는 장쩌민과 중공을 바늘방석에 앉은 듯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와 동시에 전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 특히 중국 주변의 일부 국가와 지역들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강력해 보였던 소련이 불과 며칠 사이에 붕괴하고, 막대한 비용이 소모된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면서 국제 정세는 거대한 변화를 겪었고, 세계 경제의 발전 수준은 가속 성장의 추세를 나타냈다.

대내외의 곤경에 처한 형세는 중공 통치의 합법성과 생존을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하게 만들었으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파산은 중공으로 하여금 더 이상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의 원래 교조주의로 당원들을 결집시키고 민중을 기만할 수 없게 만들었다. 88세의 덩샤오핑은 그의 저 유명한 1992년 초 남순강화에서 “발전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제 개혁을 다시 밀어붙였고, 경제 발전 방식을 통해 정치적 신임을 다시 얻어내어 당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때부터 경제 발전은 중공 집권 합법성의 유일한 밑천이 되었다.

공산주의의 시체를 껴안고 놓아주지 않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파산한 후 진정한 참회와 자성도 없었고, 도덕이나 이상 측면의 새로운 출발과 새로운 추구도 없었다. 죄업을 너무나 많이 지은 중공은 인민이 나중에 장부를 청산할까 봐 두려워한 나머지 공산주의를 버릴 도의적 용기를 가질 수 없었으며, 오직 정치적 고압을 고수해 자신의 전제 권력을 유지하면서 공산주의라는 시체를 껴안고 놓아주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중공의 깃발이다. 이는 중공이 스스로 “10월 혁명의 포성 한 방이 우리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보내주었다”고 자칭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공산주의는 중화 전통문화가 아니라 외래의 찌꺼기다. 그러나 중공 당원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폭력’ 기치 아래 무장 약탈의 방식으로 공공연히 정권을 찬탈하여 적지 않은 이득을 보았기 때문에, 중공은 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자신들이 집권하는 합법성의 근거로 삼아왔다. ‘혁명의 이름으로’ 중공은 지속적으로 중국 인민을 폭력 통치하고 일당 독재를 자행했다. ‘혁명의 이름으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또한 틈만 나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영도권 자리를 엿보았다.

마르크스주의도 결국 《공산당선언》 속에서 인민에게 머나먼 떡밥을 그려주었을 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이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곤 쇠사슬밖에 없다. 그들이 얻을 것은 온 세계일 것이다.” 중공은 당시 중국 인민에게 무수한 공수표를 남발했다. 가령 “경작하는 사람이 그 밭을 소유한다”, “노동자 계급이 주인이 된다”, “물질이 극도로 풍요로워진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에서 “만민이 평등하다”, “인간 세상의 천당”까지. 오늘날의 중국 인민은 이 떡밥의 그림자조차 만져보지 못했다. 노동자 계급이 주인이 되지도 못하고 권력을 쥐지도 못한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일반 백성들이 어떻게 관리나 고위 간부 자제들과 평등할 수 있겠는가? 사회를 완전히 뒤집어엎어 “경작하는 사람은 밭을 빼앗기고”, “능력에 따라 챙기는 것이 아니라 뇌물과 빽으로 챙기고(필요에 따른 분배가 아니라 권력에 따라 분배하고)” 천당은 고사하고 온 중국 인민을 ‘인간 지옥’ 속에서 살아가게 만들어서는 안 될 노릇이 아닌가. 중국인들은 언제나 ‘명분과 이치가 타당한 것’을 중시했으니, 중공 집권의 합법성이 당연히 역사상 유례없이 심각한 의심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깃발을 내릴 것인가, 말 것인가? 진짜로 깃발을 내려버린다면 그래도 중공에 뼈대가 있다고 말해줄 수 있겠지만, 폭정을 행하면서 민주주의를 제창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겉과 속은 일치하는 셈이 된다. 아니, 그렇다면 중공은 더 이상 중공이 아니게 된다. 중공의 특징과 다년간의 집권 경험 가운데 가장 귀중한 조항은 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을 꺼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큰 깃발은 여전히 치켜들고 있어야 한다. 사람조차 속이기 귀찮아진다면 중공도 그야말로 망할 때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속일 거면 끝까지 속이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한꺼번에 속여버리면 그만이다.

이 깃발이 있어야만 중공은 실감 나게 자신의 합법성을 계속해서 떠들어댈 수 있다.

장쩌민은 그 누구보다 마르크스주의의 간판이 절실했다

장쩌민은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같은 공산당의 ‘위인(偉人)’이 아니다. 전쟁 시기 총알이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공산당의 건국을 위해 ‘생사를 걸고 뛰며’ 당내의 명망과 지지, 그리고 복종을 얻어낸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신 성분이 불투명한 장쩌민이 백성드릐 분노가 극도로 달해 있던 진압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쥐새끼처럼 도망치듯’ 권좌에 기어올라간 것이 그의 가장 큰 약점이었으며, 당내와 민간 모두 이를 몹시 마땅찮게 여겼다. 그가 도처에서 ‘양저우 배우’의 불고, 당기고, 튕기고, 노래하는 재간을 부려보았지만, 중국인들로부터 얻은 것은 여전히 공공연한 조롱과 비웃음뿐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조금이라도 발전시키는 것은 예부터 중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자신들의 지고지순한 영광으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영광은 흔히 당의 수괴에게 특별히 수여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시대를 명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규칙이 있긴 하지만, 장쩌민은 그야말로 고작 ‘과장’ 급의 능력으로 무엇을 ‘창조’해 내기라도 했단 말인가?

장쩌민은 고위층 권력의 장애물들을 연이어 격파한 뒤에도 여전히 당심과 민심의 이반을 느꼈고, 이는 그의 거대한 권력 욕구에 있어서 참을 수 없는 멸시였다. 자신의 개인 전쟁을 도발하여 파룬궁 탄압을 통해 당내의 권력을 응집시킬 때, 그는 당내에서 자신의 합법성을 최대한 빨리 확립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만약 자신을 중공의 이익 기둥에 단단히 묶어두지 않는다면, 그는 당시에 여전히 개혁을 통해 집권의 합법성을 유지하고자 희망하던 다른 당원들에 의해 중공 역사의 궤도 밖으로 내쳐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중공은 당의 이익과 당의 원칙이 그 무엇보다 위에 있는 집단이다. 당내의 역대 투쟁에서 누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깃발을 문설주에 내걸지 않으면 그 누구든 동지들에 의해 도태되어 퇴출당하곤 했다. 이것이 바로 공산당의 당성(黨性)이 작동하는 원리이다. 장쩌민의 탐욕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합법성을 당과 한데 묶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중공당으로 하여금 그의 천박함을 당의 강령에 기록하게 만들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그의 공헌으로 삼고, 중공당의 당장(黨章)에 명기해 영원히 불패의 지위에 서게 만들도록 강요했다.

장쩌민은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입장, 관점, 방법을 반드시 고수해야 하며,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를 고수해야 한다. 이 점은 확고부동해야 하며 애매모호해서는 안 된다.” [2]

“당과 국가의 사업이 멈춰 서지 않게 하려면, 우선 이론상으로 멈춰 서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을 부인하고 조상을 내다 버리는 것은 잘못되고 유해한 일이다.” [3]

중공 창당 80주년에서, 장쩌민은 직접 나서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자신의 ‘3개 대표’ 이론을 “우리 당의 입당의 근본이자 집권의 기반이자 힘의 원천”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을 고수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규정했다. [4]

장쩌민은 자격 있는 공산당원조차 되지 못하면서도 교묘하게 공산주의 위인의 반열에 끼어들어, 중공 국 내에 잔존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잔여 요소를 빌려 중공 당내에서의 자신의 지고한 지위를 확립했다.

공산주의를 포기하는 어떠한 풍파도 견뎌내지 못해

지금의 중공은 이미 더는 아주 작은 진상 폭로조차 감당하지 못하는데, 그로 인해 전체 중공 체제의 전면적인 붕괴가 초래될 수 있기 때문에 중공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포기하는 어떠한 리스크도 감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민들이 질문을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포기한다는 것은 곧 부정함을 뜻하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 저지른 모든 역사적 과오는 과연 누가 책임질 것인가? 수천만 중국 인민의 피를 손에 묻힌 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당이 역사적 과오에 대해 설명할 도리가 없으므로, 마르크스주의의 동아줄을 꽉 붙잡는 것은 중공에게 바로잡을 메커니즘도 없고 진정으로 바로잡을 동기도 없기에 이로 인해 거듭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과거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현재와 미래의 잘못을 계속 저지르며, 잘못을 승리보다 더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올바른 것으로 포장해 영원히 번지르르하고 영원히 정당하다고 우기는 일종의 반응인 셈이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장쩌민과 중공으로 하여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수많은 날들을 초래했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과 교훈을 총화하여 얻어낸 결론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1991년 8월 24일, 소련 중앙위원회 총서기 고르바초프는 세계를 경악게 하는 두 가지 소식을 발표했다. 첫째는 ‘소련 중앙위원회는 스스로 해산하는 어렵지만 유일하게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나는 자신이 앞으로도 계속 소련 중앙위원회 총서기의 직책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으며, 모든 직권을 사임하겠다’는 것이었다. 12월 25일 크렘린궁 둥근 지붕 위의 소련 국기가 쓸쓸히 내려졌고, 소련은 이로부터 ‘과거의 역사’가 되었다.”

“고르바초프 시기에 소련 영도 집단은 개혁의 간판을 내걸고 본질적으로는 깃발을 바꾸고 노선을 갈아타며 마르크스주의를 전면 배신했고, 실질적으로 자본주의의 돌아올 수 없는 길에 들어서 마침내 사회주의를 매장했다.” “소련이 최종적으로 붕괴한 근본 원인은 소련 공산당이 흐루쇼프 영도 집단 시기부터 점차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이탈하고 배신했으며, 특히 고르바초프 등의 무리가 마르크스주의를 최종적으로 배신했기 때문이다.” “최고 영도권을 반드시 마르크스주의, 프롤레타리아 정당, 국가와 민족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의 손에 줄곧 쥐고 있어야 한다.” [5]

피비린내 나는 업보가 청산되어 단두대에 오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장쩌민은 이런 생각들을 할 때면 몸서리치며 떨었다. 그렇기에 장쩌민과 중공은 사뭇 진지한 체하며 마르크스주의의 큰 깃발을 계속 치켜들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중공에게 기회를 준 적이 있다

역사가 중공이라는 이 어둡고 음침한 유령을 비추는 한 줄기 밝은 태양빛을 반짝 비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싱다오환추왕(星島環球網)의 보도에 따르면, 타이완 단장(淡江)대학 전략연구소 교수 웨이어(魏萼)는 이 역사의 개혁 조류를 주도한 ‘총설계사’ 덩샤오핑이 1988년 9월 자신에게 솔직히 털어놓은 바 있다고 회고했다. “중공의 ‘4가지 고수’는 마땅히 시기에 맞춰 <헌법>에서 철수시키고 당장에만 남겨두어야 합니다. 덩샤오핑은 당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초상화를 톈안먼 광장에서 철거하기로 이미 결정했습니다.”

당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자 중앙고문위원회 주임이었던 덩샤오핑과 국가주석 양상쿤과 만났을 때, 웨이어가 ‘4가지 고수’(즉 마르크스·레닌주의 사회주의 고수, 무산계급 독재 고수, 마오쩌둥 사상 고수, 공산당 영도 고수)를 포기할 것인지 고려하는지 제기했다.

덩샤오핑은 이 말을 듣자 엄숙하게 말했다. “우리는 4가지 고수를 포기하지 않는다.”; “4가지 고수는 시기에 맞춰 <헌법>에서 철수시키고, 오직 당장(黨章) 속에만 남겨두어도 된다. 나도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등 네 사람의 초상화를 톈안먼 광장에서 먼저 철거하고 오직 손중산과 마오쩌둥의 초상화만 내걸기로 결정했다.” 정확히 20년이 지난 세월 동안 ‘4가지 고수’는 덩샤오핑의 소원대로 <헌법>에서 철수하지 않았지만,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초상화는 과연 1989년 4월 26일부터 광장에서 철거되었다. [6]

그렇다면 왜 ‘4가지 고수’는 덩샤오핑의 소원대로, 전체 중국 인민의 소원대로 <헌법>에서 철수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당의 권력이 장쩌민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장쩌민은 왜 공산주의를 꺼내들었는가? 세상에 그토록 많은 모델과 주의가 있는데, 그중 아무거나 하나 골라잡아도 공산주의보다 세계 인민들과 중국 인민들로 하여금 더 잘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장쩌민은 왜 중국을 위해 사회주의, 곧 공산주의 초급 단계를 정하여 점진적으로 공산주의로 과도해 나아가는 국가 노선을 설정했는가? 왜 중국 인민의 어깨에 짓눌린 이 비할바 없이 무거운 역사와 현실의 짐을 기꺼이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는가?

이는 장쩌민의 개인 특징과 중공의 정당 특징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오직 이러한 주의만이 그로 하여금 국가 자원을 마음껏 휘둘러 권력을 농단하고, 국가 나아가 세계를 향한 욕망을 극에 달하도록 마구 약탈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중공이 강조하는 바, 그들의 경제력이 충분히 강대해졌을 때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재편하는 데 사용할 중공의 핵심 가치 체계이기도 하다. 중공은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의 계승자, 수호자, 발전자, 심지어 영도자로 여긴다. 비록 세계가 공산주의를 버렸을지라도 장쩌민과 중공은 여전히 공산주의를 가지고 놀아나야만 하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눈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깃발은 절대로 내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니, 이것은 집권당의 생사존망과 관계되며 중공 권력의 최고 소유 및 그 합법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장쩌민은 당의 천하대란을 무릅쓰고 깃발을 바꾸고 노선을 갈아타는 모험을 당연히 감행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중공의 돛대 꼭대기에 올라탔고, 이후의 사실들이 증명하듯, 하늘이 중국에 다시 기회를 주고 중공에 다시 기회를 주어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중국에 널리 전파되었을 때 장쩌민은 가장 잔혹한 폭력을 서슴없이 동원해가며 거대한 탐욕을 채우고 통치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과시했다. 설령 그것이 중공의 훼멸이라는 만 길 나락에 직면해 있을지라도 장쩌민의 개인적 성품은 벼랑 끝에서 말을 멈추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이 터무니없는 노선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완강히 고수할 것이다.

그리하여 평소 거짓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으로 악명 높은 전제 국가에서, 모두가 잘 아는 하나의 거짓말이 탄생했다.

“중국이 해결해야 할 주요 모순은 인민들의 나날이 증가하는 물질적·문화적 수요와 낙후된 사회적 생산 사이의 모순이다”,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패권주의, 식민주의, 인종주의에 반대한다.” “당의 최고 이상과 최종 목표는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3개 대표’ 중요 사상을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는다.” [7]

“마르크스주의의 최종 목적은 무산계급과 전 인류를 해방하고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현재 사회주의가 국제 범위에서 심각한 좌절을 겪고 있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저조기에 처해 있으며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과 이상이 보편적으로 의심받는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 혹은 과학적 공산주의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특수한 중요성을 지닌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가 당을 세우고 나라를 세우는 근본적인 지도 사상이다.” [8]

《장쩌민의 실체》 공동 집필팀

2012년 5월 첫 발행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