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객(長袖客)
【정견망】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 자칭하지만, 우리가 인문시조(人文始祖)로 받드는 황제(黃帝)가 과연 어떻게 인간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 묻는 사람은 드물다.
《사기·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는 단지 “황제는 소전(少典)의 아들로 성은 공손이요 이름은 헌원이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후세에 전해진 고대 전설은 이와 달리 비범한 탄생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황제의 어머니 부보(附寶)가 교외 들판에서 “큰 번갯불이 북두칠성의 추성(樞星)을 둘러싸는 것”을 보았고, 그 빛이 사방을 비추면서 감응해 임신하였고, 마침내 황제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북두칠성인가?
《사기·천관서(天官書)》에서는 북두를 ‘제차(帝車)’라 부르며 “중앙에서 운행하며 사방을 제어한다”고 했고, 또 음양·사시(四時)·오행·절도(節度)의 운행을 북두와 연결시켰다. 고대인들의 우주관 속에서 북두는 평범한 별이 아니라, 중앙에서 운행하며 사시를 조절하고 질서를 통섭(統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음미할 것은, 황제가 인간 세상에 온 이후 전통문화에서는 역법(曆法), 의관, 궁실, 주차(舟車), 의약, 음률 등 많은 문명 제도의 시작을 그의 시대에 귀속시켰다는 점이다. 우리는 물론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이 어느 특정한 순간에 발명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고대인들의 기억은 매우 선명한 대응 관계를 남겨놓았다. 북두는 하늘에서 사시를 운행하고 모든 기강을 조절하며, 황제는 인간 세상에서 제도를 세우고 문명을 열었다.
마치 그 북두의 추성(樞星)을 둘러싸며 다가왔던 한 줄기의 번갯불이, 애초부터 후세 사람들에게 이 생명이 인간 세상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님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러나 황제가 이렇게 태어난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시 중화문명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매우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중요한 문명적 사명을 짊어진 많은 상고(上古)의 인물들이 저마다 평범하지 않은 출생 전설을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복희(伏羲)의 어머니 화서(華胥)는 전설에 따르면 일찍이 뇌택(雷澤)에서 ‘거인의 발자국(大人之跡)’을 밟고 감응하여 임신했고, 마침내 복희를 낳았다고 한다.
주나라의 시조 후직(後稷)에 대해 《시경·대아·생민(生民)》은 그의 어머니 강원이 “제(帝)의 발가락 자국을 밟고 기뻐하다(履帝武敏歆) 기뻐하다” 임신한 것으로 서술한다. 전통적인 해석은 종종 이를 ‘제(帝)의 발자국’을 밟고 감응해 임신한 것으로 이해한다.
상나라의 시조 설(契)에 대해 《사기·은본기》는 그 어머니 간적(簡狄)이 현조(玄鳥)가 떨어뜨린 알을 보고 그것을 집어 삼켜 이로 인해 임신하여 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시경·상송(商頌)》에는 그 유명한 “하늘이 현조에게 명해 지상에 내려가 상의 조상을 낳게 했다(天命玄鳥,降而生商)”는 구절이 남아 있다.
천상(天象), 신적(神跡), 현조…… 이야기는 서로 다르지만 반복해서 하나의 유사한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즉, 한 중요한 생명이 탄생하기 전에는 먼저 인간 세상 이외의 곳으로부터 온 징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가 자란 후에는 또 어떤 면에서 개인의 삶을 훨씬 뛰어넘는 사명을 짊어지곤 했다.
후직은 나중에 다양한 곡식을 파종하는 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나라 사람들이 농사 문명을 추적하는 중요한 시조가 되었고, 설은 상족(商族)의 시조가 되었으며, 복희는 팔괘, 어류와 사냥, 혼인 등의 문명 기억과 연결되었다. 황제는 특히나 중화민족이 공동으로 받드는 인문시조가 되었다.
왜 그들은 모두 ‘평범하게 태어나지’ 않았는가?
만약 이것이 후세 사람들이 조상을 찬양하기 위해 덧붙인 신기한 색채에 불과하다면,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남는다. 왜 이런 ‘신기함’은 하필 중대한 문명적 사명을 짊어진 사람들에게만 매번 주어지는 것일까?
이러한 기억은 심지어 중국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후에 서양 문명에 깊은 영향을 미친 기독교 전통 속에서도 예수의 탄생은 결코 평범한 탄생이 아니었다. 《누가복음》은 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그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리아가 자신은 아직 남자와 잠자리를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묻자, 천사는 성령(聖靈)이 그녀에게 임할 것이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녀를 덮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중국 상고의 ‘감생(感生)’과 기독교의 예수 탄생에 관한 신앙은 서로 다른 문화 전통에 속하므로 간단히 동일시할 수 없으며, 서로 영향을 주었다고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공통적으로 매우 오래된 인식이 남아 있다. 즉, 어떤 생명의 사명(使命)은 그의 탄생보다 앞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평범한 사람이 우연히 인간 세상에 와서 나중에 우연히 큰일을 해낸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완수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가 인간 세상에 온 것이다.
사람의 육신은 인간 세상에 태어나지만, 생명의 진정한 고향은 꼭 인간 세상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 선(線)을 따라 중화문명을 다시 돌아보면, 원래 머나먼 고대 전설 속에 흩어져 있던 많은 인물들이 문득 서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복희는 팔괘를 그려 사람들이 음양의 변화 속에서 천지를 인식할 수 있게 했고, 신농(神農)은 쟁기를 만들고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으며 또 백 가지 풀을 맛보아 사람과 토지, 초목, 그리고 신체 사이에 더욱 깊은 관계가 맺어지게 했다. 후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백성들에게 백곡을 파종하고 토지의 마땅함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쳐 농사가 전승되고 발전할 수 있게 했다. 황제 시대에는 의관, 역법, 의약, 궁실, 주차 등 일련의 문명 기억이 남겨졌고, 뇌조(嫘祖)는 양잠과 연결되어 뽕잎이 누에를 통해 마침내 사람의 옷이 되게 했다. 창힐(倉頡)은 글자를 만들어 언어가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형상을 갖추게 했고, 요임금과 순임금은 덕치(德治)의 모범을 남겼으며, 대우(大禹)는 물을 다스렸고, 주공은 예악을 제정했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각자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합쳐보면 공교롭게도 하나의 문명이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세계를 이루어낸다.
사람은 살아가야 하므로 농경이 있어야 하고, 사람에게 병이 있으므로 의약이 필요하며, 사람은 소통해야 하므로 글자가 있고, 사람은 살아가야 하므로 궁실, 주차, 의관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사회를 이루므로 윤리, 제도, 예(禮)가 있어야 하고, 사람은 또 천지를 인식하고 생명을 이해해야 하므로 팔괘와 음양이 있고, 하늘을 경외하고 제사를 지내며 수련이 있는 것이다.
마치 중화문명이 정식으로 펼쳐지기 전에, 문명을 구성하는 많은 중요한 부분들이 이미 하나하나 인간 세상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만 같다.
이 또한 중국 문명의 한 가지 현상을 유독 음미하게 만든다. 그것은 자신의 원류에 대한 기억이 ‘고대일수록 더욱 거칠고 비루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반대로, 원류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오히려 후세 사람들이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되는 표준과 마주하게 된다. 《주역》은 수천 년을 거쳐 왔으나 후세 사람들은 여전히 끊임없이 그 속에서 천지 변화의 이치를 찾고 있으며, 《황제내경(黃帝內經)》은 지금까지도 한의학의 가장 근본적인 경전으로 남아 있다. 요·순은 시기가 오래되었다고 해서 몽매한 시대의 상징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세 사람들이 되돌하 흠모하는 덕치(德治)의 모범이 되었으며, 주례(周禮) 역시 문명 초기 단계의 거친 제도로 간단히 여겨지지 않고 이후 머나먼 예제(禮制) 전통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만약 문명이 단순히 몽매에서 고급으로 선형으로 발전해 왔을 뿐이라면, 어째서 중화문명은 자신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오히려 마음의 눈에서 최고봉에 더 쉽게 다다르게 되는 것일까?
고고학 역시 이 의문을 끊임없이 더욱 흥미롭게 만들고 있다.
하남성 무양현(舞陽縣) 가호 유적(賈湖遺址)은 지금으로부터 약 9천 년에서 7천5백 년 전의 것이다. 그곳에서는 실제로 연주할 수 있는 뼈피리(骨笛)가 발견되었는데, 7개 구멍이 난 어떤 뿔피리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음률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거북 껍질 각부(刻符), 묘장(墓葬), 터키석 장식품 및 초기 제사, 점복(占卜)과 관련된 유지도 함께 발견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소위 신석기시대에 살고 있었겠지만, 그들은 분명 단순히 먹을거리를 찾고 도구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음악을 연주하고 부호를 사용하며 의식을 거행했으며, 인간과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천지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발견들이 상고 전설 속의 신성한 탄생을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고 신전문화(神傳文化) 자체를 증명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익숙해진 현대적 상상을 더 이상 당연하게 여기지 않도록 만들어 줄 수는 있다. 소위 문명의 초기 단계란 정말로 거칠고 몽매하며 단순한 생존 추구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어쩌면 중화문명이 남긴 그 고대 기억들은 또 다른 풍경을 보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명은 애초 무(無)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것은 내력이 있다.
만약 문화가 완전히 사람이 조금씩 더듬어 찾아낸 것이라면, 처음 나타났을 때 마땅히 가장 거칠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명 속에서 가장 중요한 어떤 것들이 원래부터 인간 세상으로 가져와진 것들이라면, 그것이 처음 나타났을 때 본래부터 상당한 수준의 완정성(完整性)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인류가 나중에 한 일이라는 것도 반드시 늘 ‘문명을 창조’해 온 것만은 아닐지 모른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단지 이미 남겨진 것들을 배우고, 계승하고, 풍부하게 하고, 보존해 왔을 뿐이며; 머나먼 역사 속에서 그것들을 끊임없이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러한 상고 성왕(聖王)들의 평범하지 않은 출생은 또 다른 층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들은 먼저 사명을 지니고, 그런 다음에 인간 세상에 온 것이다.
신성한 생명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사람으로 출생해야만 하며; 일단 이곳에 이르면 역시 부모가 있고, 이름이 있고, 신체가 있어서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며 겉보기에는 보통 사람과 같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각기 인류에게 필요한 문화의 일부분을 가져왔다. 어떤 이는 사람들에게 천지를 인식하게 가르치고, 어떤 이는 농경을 남겼으며, 어떤 이는 의약을 남기고, 어떤 이는 글자를 남겼으며, 어떤 이는 예악을 세우고, 어떤 이는 수련의 도를 전했다.
한 사람이 한 부분을 완성하고, 한 시대가 한 부분을 펼쳐낸다.
이러한 부분들이 한 층 한 층 펼쳐지면서 중화문명도 점차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단지 사람이 지상에서 좀 더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면, 어째서 이토록 오랜 준비가 필요했던 것일까?
5천 년의 역사 속에서 중국인들은 어떻게 경작하고, 집을 짓고, 병을 다스리며 국가를 다스릴 것인가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생명과 천지를 인식하는 일종의 완전한 체계의 언어까지 구축해냈다.
사람들은 머리 위에 ‘하늘’이 있고 세상에 ‘도(道)’가 있음을 알며; 사람이 되려면 ‘덕(德)’을 중시해야 하고, 일을 하는 데는 인과가 있으며; 선악에는 보응이 있고 생명은 이번 하나의 생만이 아니며; 사람은 수련할 수 있고 반본귀진(返本歸真)할 수 있으며, 속세에서 벗어나 더욱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안다.
노자는 도를 말하고, 공자는 인의예지신을 말했으며, 불법(佛法)이 동토에 전해진 이후에는 윤회, 인과, 수련, 해탈이 다시 중국 문화의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유·석·도(儒·釋·道)는 겉보기에는 각자 자신들의 길이 있는 것 같지만, 공통적으로 중국인들로 하여금 천(天), 지(地), 인(人), 신(神), 그리고 생명이 온 곳과 돌아갈 곳을 이해하는 일종의 문화적 언어를 갖추게 했다.
서로 다른 조대는 또 마치 서로 다른 한바탕 연극과도 같다. 한(漢)에는 한의 웅혼함이 있고, 당(唐)에는 당의 신채(神采)가 있으며, 송(宋)에는 송의 문아(文雅)함이 있고, 명(明)에는 명의 의관과 예서(禮序 예의 질서)가 있다. 글자, 음악, 무용, 회화, 건축, 복식, 의약, 예의…… 일조일대(一朝一代)에 펼쳐지며 하나의 방대한 문화 체계를 점차 사람들에게 연출해 보였고, 또 후세 사람들에게 남겨주었다.
이 5천 년의 문화적 포석을 연결해 살펴보면, 그것이 가리키는 바는 단지 한 민족이 어떻게 자신의 문명을 세웠는가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멀고 더욱 홍대한 하나의 안배를 향하고 있다.
창세주(創世主)께서는 최후에 중생을 구도하시기 위해, 뭇신(衆神)들로 하여금 서로 다른 역사 시기에 세상에 내려와 서로 다른 신분으로 인류를 위해 문화를 다지도록 안배하셨다. 어떤 이는 글자를 남기고, 어떤 이는 의약을 남기고, 어떤 이는 예악을 세우며, 어떤 이는 수련 문화를 전했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서 서로 다른 이름을 지니고 서로 다른 역할을 연기하며, 겉보기에는 수천 년의 간격이 있고 서로 상관없는 듯 보이지만, 합쳐보면 결국 최후의 사람들을 위해 천(天), 도(道), 덕(德), 선악(善惡), 수련과 회귀를 인식할 수 있는 문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돌이켜 그러한 ‘비범한 탄생’의 이야기들을 바라보면, 그것들은 마치 5천 년 문명이란 큰 연극이 막을 올리기 전에 남겨놓은, 희미하게 볼 수 있는 한 줄기 한 줄기의 빛과 같다.
황제가 탄생하기 전에 북두에 이상 징후가 있었고;
화서가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복희를 낳았으며;
강원이 제(帝)의 발자국을 밟고 후직을 낳았고;
현조가 내려와 상족의 시조가 인간 세상에 왔다.
그 이야기들이 진정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늘 “이 사람의 출생이 참 신기하다”는 것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는 다른 곳에서 왔다. 그는 사명을 품고 왔다.
5천 년 전, 사람들은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성인의 탄생 징조를 기억해 두었다; 뒤이어 하나 또 하나의 생명이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와, 어떤 이는 팔괘를 남기고, 어떤 이는 농사를 남기고, 어떤 이는 글자를 남기고, 어떤 이는 예악을 남겼으며, 어떤 이는 도를 설하고 어떤 이는 법을 전했다. 왕조는 끊임없이 교체되고 무대 위의 인물들은 한무리씩 퇴장했지만, 그 보이지 않는 선은 줄곧 끊어진 적이 없었다.
대법(大法)이 세상에 널리 전해질 때까지 말이다.
이때 5천 년을 다시 돌아볼 때 비로소 사람들은 비로소 새롭게 깨닫게 된다. 왜 중화문명이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천(天), 도(道), 덕(德), 신(神), 불(佛), 수련과 반본귀진에 대한 기억을 보존해 왔는지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인간 세상이라는 이 연극에 영원히 빠져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큰 연극이 마침내 최후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여전히 그 아득하고도 익숙한 목소리를 알아듣고, 생명이 진정으로 온 곳을 떠올리며, 창세주께서 중생을 위해 남겨두신 돌아갈 길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글 맨 처음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들은 왜 모두 ‘평범하게 태어나지’ 않았는가?
5천 년을 걸어온 뒤 다시 돌이켜보면, 어쩌면 진정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이미 또 다른 질문으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은 또 어디에서 온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