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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이야기

운승(雲升)

【정견망】

고금의 놀이 중에서 유전된 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바둑만 한 것이 없다. 전설에 따르면 요(堯) 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쳤다고 한다. 바둑은 수신양성(修身養性)하고 지혜를 열어줄 수 있어, 수천 년 동안 중국인들의 존중을 받아왔다. 제왕장상(帝王將相)과 문인아사(文人雅士)든, 산야의 은자(隱者)든, 방외(方外)의 신선이든 모두 이를 깊이 사랑했다.

말하자면, 가원(賈元)이라는 이름의 국수(國手)가 송태종(宋太宗)을 모시고 바둑을 둔 적이 있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러웠는데, 태종이 그에게 석 점을 먼저 놓게 했음에도 여전히 고의로 한두 점을 졌다. 시간이 오래되자 태종은 흥미를 잃어버렸고, 그에게 진정한 실력을 꺼내 보이라고 하며 말했다. “또 지면 너를 처벌하겠다.” 한 판이 끝난 후 돌을 세어보니, 놀랍게도 무승부였다.

태종은 화난 체하며 말했다.

“한 판 더 두자. 만약 네가 이기면 상을 내릴 것이고, 만약 진다면 너를 진흙탕 속에 던져버리겠다!” 한 판이 금새 끝났고, 돌을 세어보니 놀랍게도 또 무승부였다. 태종은 그가 여전히 진정한 실력을 꺼내려 하지 않는 것을 알고 말했다.

“비록 무승부이기는 하나, 내가 앞서 네게 석 점을 양보했으니 이번 판은 네가 진 것으로 하겠다!” 말이 끝나자마자 가원을 물속에 던져버리라고 명하였다.

이때 가원이 크게 소리쳤다. “신에게 아직 손에 쥐고 있는 돌이 하나 있습니다.” 알고 보니 가원은 이미 한 점을 이긴 상태였는데, 돌을 셀 때 그 바둑돌을 손에 쥐고 숨겨두었던 것이다. 황제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서야 부득불 그 바둑돌을 꺼내 놓았던 것이다. 태종은 크게 웃으며 가원을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비의(緋衣-고관들이 입는 붉은 관복)를 하사했다.

《기경(棋經)》에 이르기를 “잘 이기는 자는 다투지 않고, 진을 잘 치는 자는 싸우지 않으며; 잘 싸우는 자는 패하지 않고, 잘 패하는 자는 어지럽지 않다. 대저 바둑은 처음에는 정(正)으로 시작하고, 마지막에는 기(奇)로 승리한다”고 했다. 위 이야기에 나오는 가원은 그야말로 마지막에 ‘기(奇)’로 승리한 대표라 할 만하다.

바둑을 두자면 방대한 사고가 필요하며, 사람에게 차분한 성격과 조용한 마음가짐을 길러줄 수 있다. 당조(唐朝)의 대신 이눌(李訥)은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지만 바둑을 몹시 사랑했다. 그는 바둑을 둘 때면 평소 쉽게 조급해하던 버릇을 싹 바꾸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가족들은 그의 이러한 특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화를 낼 때면 몰래 바둑판을 그의 앞에 갖다 놓곤 했다. 이눌은 바둑판을 보기만 하면 곧 노여움을 거두고 바둑돌을 집어 들고 포진을 시작했으며, 화를 내려던 일조차 잊어버리곤 했다.

물론, 조용하고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말하면 동진(東晉)의 명사 사안(謝安)을 빼놓을 수 없으니, 그는 가히 이 방면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비수(淝水) 전투 전,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백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수도인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 일대가 공포에 휩싸였으나, 사안은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바둑을 두었다. 평소 사안의 바둑 실력은 본래 사현(謝玄)보다 못했으나, 사태가 급박했던 탓에 이날의 대국에서 사현은 마음에 두려움을 품은 나머지 도리어 사안에게 지고 말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의 신분으로 사안에게 군사를 총괄하게 하였고, 사안은 계책을 세워 일가인 사석(謝石), 사현(謝玄) 등의 장수들에게 군사 8만 명을 이끌고 나아가 방어하게 했다. 진군(晉軍)이 비수 전투에서 전진을 대파했다는 첩보가 전해졌을 때, 사안은 여전히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는 첩보를 다 읽고 나서 한쪽에 대충 치워두었을 뿐 기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손님이 묻고 나서야 사안이 천천히 말했다.

“아이들이 이미 싸움에서 이겼구먼.”

흥미롭게도, 손님이 떠난 뒤 사안은 마침내 억눌렀던 흥분을 참지 못하고 기뻐서 나막신의 굽이 부러지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바둑 기사 입장에서 좋은 마음가짐을 갖추는 것 외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바둑 기예를 향상해야 하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예를 높이기 위해 두루 명사(名師)를 찾아다니곤 한다. 당 현종 시기 바둑 국수 왕적신(王積薪)에게는 다음과 같은 신비한 경험이 있다.

당 현종 천보(天寶) 14년,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현종과 문무백관은 혼비백산하여 남쪽으로 도망쳤고, 한림기대조(翰林棋待詔) 왕적신도 피난 행렬에 섞여 있었다. 촉도(蜀道)는 좁고 험준했기 때문에 밤마다 유숙할 때가 되면 길가의 우정(郵亭 역참)은 대개 귀인들이 먼저 차지해 버렸기에, 왕적신은 할 수 없이 시냇가를 따라 머물 곳을 찾아야 했다.

그날도 그는 시냇가를 따라 거처를 찾다가, 계곡 깊숙한 곳에서 인가를 하나 발견하고 묵기를 청했다. 날이 저문 후, 이 집의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각자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이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밤에 흥을 돋울 만한 것이 없으니, 차라리 바둑이나 한 판 두지 않겠느냐?”

왕적신은 매우 의아했다. 이렇게 캄캄한 밤에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에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바둑을 둔단 말인가?

며느리가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동쪽 5, 남쪽 9 자리에 돌을 놓겠습니다.”

시어머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동쪽 5, 남쪽 12의 자리에 돌을 놓겠다.”

알고 보니 고부 두 사람은 맹기(盲棋-눈을 가리거나 보지 않고 두는 바둑)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맹기란 무엇인가? 곧 대국자가 바둑판과 바둑돌에 의존하지 않고, 완전히 대화의 형식으로 바둑을 두는 것을 말한다. 이는 대국자의 바둑 기예가 매우 고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기억력까지 갖추어야만 가능하다. 왕적신은 듣자마자 두 사람이 비범한 고수임을 알아차렸고, 곧바로 고부 두 사람의 바둑 판국을 하나하나 기억해 두었다. 서른네 번째 수를 기록할 무렵에는 벌써 4경(새벽 1시~3시경) 가까이 되었다.

문득 시어머니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이미 졌구나. 내가 너에게 아홉 점을 이겼다.”

이제 겨우 서른여섯 수를 두어 중반에도 이르지 않았는데, 어떻게 승패를 판단할 수 있으며, 게다가 아홉 점이나 이겼다는 것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왕적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산 넘어 산이요, 하늘 위에 하늘이로구나. 저 고부 두 사람이 과연 도대체 어떤 신성(神聖)인지 모르겠구나.”

날이 밝기를 기다려 왕적신은 의관을 정제하고 시어머니를 찾아가 바둑의 이치를 가르쳐달라고 청했다. 시어머니는 그가 기록해 둔 잔국(殘局)을 보더니 며느리에게 명해 공수(攻守), 살탈(殺奪), 구응(救應), 방거(防拒)의 방법을 왕적신에게 가르쳐 주게 하였고, 그에게 일렀다. “이것을 꿰뚫어 보면 세상에서 무적(無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왕적신은 거듭 절을 하며 감사를 표하고 작별을 고했다. 걸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문뜩 어떤 생각이 들어 다시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곳에 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푸른 산림과 쫄쫄 흐르는 시냇물뿐이었다. 알고 보니 정말로 신선을 만났던 것이다. 그 이후로 왕적신의 바둑 기예는 과연 천하제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 두 신선이 남겨준 기보(棋譜) 역시 촉(蜀) 땅에서 얻었기 때문에 이 바둑판을 ‘등애개촉세(鄧艾開蜀勢)’라 명명하게 되었다.

신선이 내려와 절학(絶學)을 전수해 주었다는 것은 다소 믿기 어렵게 들릴지 모르지만, 역사상 바둑과 신선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다.

“바둑은 애초 인간 세상의 일이 아니며, 그 시작은 파(巴), 공(邛)의 귤에서 나왔고, 주목왕(周穆王)의 무덤에서 나왔으며, 이어서 석실(石室)에서 나오고, 또 상산(商山)의 선가(仙家)에서 보이니, 수신양성하고 도를 즐기는 도구이다.”(《이헌만연(梨軒曼衍)》) 적지 않은 고인(古人)들은 바둑이 애초에 인간 세상의 소유가 아니라 신인(神人)이 사람에게 전수한 수신양성하고 도를 즐기는 기예라고 여겼다.

송나라 나필(羅泌)의 《노사후기(路史後記)》에는 더욱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요 임금의 아들 단주(丹朱)는 우둔하고 싸우기를 좋아하여 요임금을 매우 골치 아프게 했다. 어느 날 요 임금이 분수(汾水) 물가에 이르렀는데, 두 신선이 모래사장에 가로세로로 수많은 선을 긋고, 선 위에는 흑백 양색의 돌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요 임금은 매우 이상하게 여겨 앞으로 다가가 단주를 가르칠 방법을 물었다.

그중 한 신선이 말했다.

“단주는 싸우기를 좋아하면서도 우둔하니, 마땅히 그의 취향에 맞추어 주어 그의 정(情)을 한가롭게 해야 합니다.”

그는 땅바닥의 사판(沙盤)과 돌을 가리키며 또 말했다.

“이것을 이름하여 혁평(弈枰)이라 하고, 또한 위기(圍棋 바둑)이라고도 합니다. 판은 모나서 고요하고, 바둑돌은 둥글어서 움직이니, 천지를 본받은 것으로 스스로 이 놀이를 세웠으나 세상에 이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만약 바둑이 진정 신선에 의해 전해진 것이라면, 당연히 신선들의 깊은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바둑에 관한 전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왕질(王質)이 바둑을 구경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도끼자루가 썩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진(晉)나라 사람 왕질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몇몇 아이들이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아이들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어찌하여 아직도 돌아가지 않습니까?”

왕질이 일어나 살펴보니 손에 쥐고 있던 도끼 자루가 이미 썩어 있었다. 그가 길을 따라 마을로 돌아와 보니 벌써 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있었고, 마을에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후세 사람들은 바둑을 ‘난가(爛柯)’라 부르게 되었고, 난가라는 단어에서 또 수많은 아름다운 시문(詩文)과 고사(故事)가 파생되어 나왔다.

“바둑판은 땅이요 바둑돌은 하늘이니,
색은 음양을 따라 조화가 온전하네.
현묘하고 오묘한 이치에 통달한 곳에 다다르니,
그날 도끼 자루 썩은 신선을 웃으며 찬탄하네.”

棋盤爲地子爲天
色按陰陽造化全
下到玄微通變處
笑誇當日爛柯仙

이 어지러운 세상사 속에서 현대인들은 종종 물욕에 시달리느라 마음을 차분하게 하기 어렵다. 모처럼 바쁜 일상에서 한가할 때, 서너 명의 좋은 친구를 초대해 향기로운 차 한잔을 놓고 마주 앉아 손으로 대국을 하며, 기분 좋게 근심을 잊는 것도 한 가지 멋진 일이 아니겠는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