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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의 실체》 7: 부패 방임

제2장 “장쩌민의 권력 농단” 제3절

【정견뉴스】

지금부터 14년 전, 《장쩌민의 실체(真實的江澤民)》이 처음으로 독자들과 만났다. 14년이 지난 지금, 장쩌민은 이미 죽었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독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많은 혼란과 위기는 모두 장쩌민 집권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부패로 국가를 다스리고, 법치(法治)를 짓밟으며, 도덕을 파괴하고, 파룬궁을 박해하는 한편, 그로 인해 팽창된 중공의 전제(專制) 및 폭력 기구는 중국에 끝없는 환란을 남겼다. 오늘날의 중공을 똑똑히 보고, 중국이 어찌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장쩌민의 실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에 에포크타임스에서는 본문을 다시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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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부패 방임과 선별적인 부패 공격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의 급변에 따라 공산주의는 이미 철저하게 파산했음이 증명되었다. 이 죄악의 이데올로기가 당원들의 충성심을 결집할 수 없게 되자, 장쩌민은 마침내 부패를 이용하여 당원들로 하여금 이 제도를 수호하도록 매수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장쩌민은 부패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자를 공격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장쩌민 이전에는 중공 내에서 ‘보황파(保皇派)’든 ‘조반파(造反派)’든, ‘보수파’든 ‘개혁파’든 모두 그 정치 강령을 표준으로 삼았다. 장쩌민 이후 중공은 이념도 없고 원칙도 없는 시대로 진입했으며, 장쩌민이 권력 기반을 구축하는 과정은 중공 내에 새로운 권력 모델을 세우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부패를 방임하고 권력과 이익을 함께 도모하는 것이었다.

싼샤(三峽) 공정을 부추긴 것은 장쩌민의 부패 방임 정책의 첫 번째 막에 불과했다. 덩샤오핑이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로 개혁을 재시동하자 보수파가 궤멸되었고, 장쩌민은 보수파에 계속 가담하는 것의 위험성을 느낀 동시에 본능적으로 부패를 방임할 기회를 보았다. 그는 한편으로는 덩샤오핑의 비위에 맞춰 개혁의 기틀을 치켜들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의 내용을 슬그머니 바꾸어 덩샤오핑이 인정했던 시장경제를 권력경제로 만들어 버렸고, 중국 5천 년 문명사 통틀어 일찍이 없었던 관과 자본의 간통을 자신의 권력을 세우고 팽창시키는 비결로 삼았다.

리창춘(李長春), 자칭린(賈慶林), 천량위(陳良宇), 쩡칭훙(曾慶紅), 저우융캉(周永康) 등 첫 번째 장가방(江家幫 장쩌민 파벌) 멤버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밀수, 투자 유치, 토지 점거 등을 통해 주머니가 터질 정도로 돈을 벌어들였다. 크고 작은 권력을 이용해 사욕을 채우던 관료들은 신속하게 장쩌민의 기치 아래로 결집했다. 당과 군과 나라를 위해 일찍이 어떠한 치적도 세운 적이 없는 장쩌민은 이 부패 방임을 통해 탐욕과 이기심이란 악마를 치켜세웠고, 기적적으로 몇 년 안에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해 냈으며, 과도기 인물에 불과했던 자가 이로써 발판을 굳건히 하고 20년 동안 중국 정계를 좌우했다.

장쩌민 시대부터 시작하여 부패는 심지어 관료가 승진하기 위한 투항 문서가 되었다. 청렴한 관료는 오히려 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푸젠성(福建省) 롄장현(連江縣) 당서기 황진가오(黄金高)는 자기 관할 구역 내의 거대한 부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윗선의 압력을 받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흑사회(黑社會)의 위협을 받아 6년 동안 방탄복을 입고 출근했다. 2004년 8월 11일, 그는 어쩔 수 없이 인민일보 산하의 인민망에 글을 투고했는데, 제목은 《난 어쩌다 6년간 방탄복과 함께 했는가》였다. 그 결과 1년 뒤 황진가오는 여전히 체포되었고, 2005년 11월 8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12년 1월 25일 오후 8시 12분, 후야오방의 장남 후더핑(胡德平)은 시나 웨이보에 글을 게시했다. “우리 모든 매체는 거짓말투성이다! 진실이라곤 한마디도 없고, 도처에서 치적을 과장하고 공을 찬양하며 칭송한다. 우리 관료의 96%가 모두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첩을 두었다.” 장쩌민이 ‘부패로 나라를 다스림(腐敗治國)’이 조성한 부패가 얼마나 맹렬했는지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중국 제1의 탐관” 장몐헝

1980년대 장쩌민의 지위가 불안정하자, 장남 장몐헝(江綿恒)더러 미국 유학을 가서 영주권을 취득하고 중국의 형세를 관망하게 했다. 1992년 장쩌민이 당·정·군의 대권을 거머쥔 후, 장몐헝에게 속히 중국으로 돌아와 “조용히 큰돈을 벌게” 했다. 그리하여 장몐헝은 온 가족을 데리고 귀국했고, 1993년 1월 그는 중국과학원 상하이 야금연구소에서 근무했으며, 4년 후 소장을 맡았다. 장쩌민의 지위가 공고해지고 권세가 커짐에 따라 장몐헝은 사업전선에 뛰어들어 관직과 돈벌이를 모두 놓치지 않았다.

1994년, 장몐헝은 수백만 위안을 ‘대출’받아 상하이시 경제위원회 산하의 억 위안이상 가치를 지닌 상하이연합투자회사(上海聯合投資公司)를 사들이며 그의 “통신 왕국” 생애를 시작했다. 상하이연합은 원래 황(黃) 씨 성을 가진 상하이시 경제위원회 부주임이 기획 창립한 것으로, 이를 인해 막대한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설립하고 운용된 지 3개월 만에 황 씨는 갑자기 경제위원회로 불려 돌아갔고, 이어서 아무도 모르던 장몐헝이 ‘낙하산으로 내려와’ 스스로 이사장 겸 총경리가 되어 “통신 대왕”이 되었다. 애초 창립자 황 씨는 이후 사라졌고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상하이연합’은 이렇게 장몐헝에게 빼앗겼다.

표면상으로 ‘상하이연합’은 국유기업이었으나 실제로는 장몐헝의 사유재산과 다름없었다. 장몐헝은 상하이연합을 개인 사업의 기함(旗艦)으로 삼고 상하이에 진주했다. 그는 장쩌민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돈을 원하면 돈이 나오고 권력을 원하면 권력이 나왔으며, 장사는 손해 보는 법이 없어 화교와 서구 상인들, 야후(Yahoo) 수장 제리 양(楊致遠 중국이름 양즈위안) 등을 포함한 이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방문하거나 의탁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장몐헝은 이미 자신의 거대한 통신 왕국을 구축했고, 2001년 상하이연합과 상하이연합이 지배하는 회사는 상하이정보네트워크, 상하이유선네트워크, 차이나넷컴 등 10여 개에 달했다. 업무는 케이블, 전자 출판, 광디스크 생산, 전자상거래의 전 광대역 네트워크 등으로 상당히 광범위했다.

상하이 기업계 인사들에 따르면 장몐헝의 이사장 타이틀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상하이의 여러 중요한 경제 영역에 손을 뻗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심지어 상하이의 황푸강 터널, 상하이 지하철의 이사회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떤 상인은 상하이 항공 주식회사 비행기를 탔다가 무심코 기내 잡지에 실린 상하이 항공 이사회 개최 사진을 보았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장몐헝이었다. 그러나 상하이 항공의 정식 주주 명단은 사회에 공고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장몐헝이 중국의 통신 대왕일 뿐만 아니라 상하이탄의 큰형님이라고 했다.

하지만 장 씨 부자는 이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중공의 역사상 대부호들이 아무리 크게 성공한다 해도 관직에 보장이 없으면 역시 위기가 사방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99년 12월 2일, 국무원이 발표한 신규 임용자 명단에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장몐헝의 이름이 등장했다. 그는 장쩌민에 의해 중국과학원 부원장으로 임명되었고, 로켓처럼 빠른 속도로 국가 지도자 행렬에 끼어들었다.

2001년 5월, 홍콩에서 개최된 ‘포춘 포럼’에서 장쩌민은 ‘국가 지도자’ 장몐헝을 대동하고 참석해 부자 아니면 귀족인 국제 요인들에게 소개했으며, 특히 다국적 기업의 부호들에게 소개해 장 씨 왕국의 실력을 확장하려 했다. 과연 중국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장몐헝은 곧바로 이 외국 부호들과 커다란 주문 계약서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이때 장몐헝은 이미 중공 ‘관상일체(官商一體)’의 최고 대표가 되어 있었다.

‘차이나넷컴’이 있기 전에 장몐헝은 ‘넷컴’의 사장이었고, 그는 ‘북방전신(北方電信)’을 삼키겠다고 큰소리쳤으나 사실 ‘넷컴’은 이미 오래전에 장몐헝에 의해 텅 비어 버렸고 그는 애초에 ‘북방전신’을 인수할 능력이 없었다. 장몐헝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하여 장쩌민은 직접 차이나넷컴(中國電信)을 둘로 쪼개 ‘북방전신’과 ‘남방전신’으로 나누라고 명령했고, ‘북방전신’ 10개 성의 고정 자산을 무상으로 ‘넷컴’에 넘기게 했다.

2004년 9월, 중국 4대 통신사 중 마지막 비상장 회사로서 ‘넷컴’의 상장 시간표는 미루고 또 미뤄졌고 10월이 마지막 기한이었다. 어째서 중공 4대 통신사 중 3개는 상장할 능력이 있는데 장몐헝은 북방전신 10개 성의 고정 자산을 얻고서도 여전히 자산이 없었을까? 돈은 어디로 갔는가?

이 시기 장몐헝은 넷컴을 세 차례 통합한 뒤 또 모두 취소했는데, 눈이 어지러울 정도의 통합과 취소라는 장난 속에서 그는 국가 통신 자산들을 모두 자신의 주머니에 쓸어 담았다. 장몐헝이 직접 끌어들인 차이나넷컴 총경리 장춘장(張春江)은 숨김없이 말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주식 상장을 위해서”였다. 까놓고 말해서 자신의 손으로 국유자산(官產)을 모두 챙겨 개인 소유로 만들고, ‘넷컴’ 주식을 사는 이들을 호구로 만든 것이다. 2011년 7월 22일, 장춘장 수뢰 사건은 1심 공판이 열렸고, 사형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12년 5월 10일 NTDTV보도에 따르면, 장몐헝이 대만 통일전선을 구실로 거액의 국가 자금을 동원해 개인 사업에 투자한 흑막이 폭로되었다. 1994년 장몐헝은 상하이 야금연구소 소장 직을 내던지고 수백만 위안으로 억 단위 가치의 상하이연합투자회사를 사들였다. 상하이연합투자회사를 손에 쥐자 장몐헝은 상하이에 자신의 기지를 마련하여 자신의 통신 왕국을 구축했다. 당시 가장 떠들썩했던 뉴스는 장몐헝이 대만의 유명한 기업가 왕융칭(王永慶)의 아들 왕원양(王文洋)과 슈퍼 협력을 통해 상하이 푸둥(浦東) 장장(張江) 하이테크파크에 웨이퍼 공장을 설립한 사건으로, 한때 양안의 ‘금권태자당(金權太子黨)’의 슈퍼 협력으로 불렸다.

사실 왕원양은 일개 서생에 불과했고 혼외정사 때문에 부친의 인정도 받지 못해 집에서 쫓겨났는데, 그가 벌인 슈퍼 협력의 거액 자금은 어디에서 난 것인가? 대만 언론의 연이은 추궁 아래, 왕원양은 자신이 ‘투자’한 16억 달러의 자본 중 자신은 사실 단 한푼도 내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수십억의 자금은 모두 장몐헝이 일방적으로 출자한 것이었으며, 장몐헝이야말로 진정한 큰손이었다. 장몐헝은 수년 동안 이 사실의 진상을 대외적으로 줄곧 은폐해 왔다.

장몐헝이 최초로 상하이연합투자회사를 매입했을 때의 자금 출처는 류진바오(劉金寶)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류진바오 역시 1994년부터 중국은행 상하이 지점장으로 부임했고, 97년 중국은행 홍콩-마카오 판사처 부주임으로 전근했으며, 다시 줄곧 승진하해 총재, 부이사장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거침없는 출세라 할 만했다. 2000년 장몐헝은 또 훙리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宏力微電子)란 회사를 창립해 64억 달러를 투자했는데, 소요된 자금은 당연히 모두 국고에서 나온 것으로 백성들의 고혈이었다.

당시 장쩌민이 군사위원회 주석을 더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 전에, 황쥐(黃菊)는 상하이에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장쩌민을 위해 두 채의 행궁(行宮)을 지어주었다. 나중에 장몐헝은 상하이를 거점으로 삼아 자신의 ‘통신 왕국’을 발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신청 심사부터 은행 대출에 이르기까지 황쥐는 모두 일직선으로 초고속 승인을 해주었으며, 이를 실제로 주관한 사람은 바로 황쥐의 비서 왕웨이궁(王維工)이었다.

상하이의 최고 부호라 일컬어지는 부동산 재벌 저우정이(周正毅)는 2003년 5월에 체포 및 구금되었는데, 그의 탈세, 주가 조작, 불법 대출은 이미 중국은행(中銀) 홍콩 지점장 류진바오가 해임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 사건은 “건국 이래 최대의 금융 사기 의혹 사건”으로 불렸으며, 조사 결과는 곧바로 장몐헝을 겨누었다. 당시 훙리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가 설립될 때 류진바오가 중은 상하이에서 승인해 준 10여 억 위안의 대출은 모두 규정을 위반한 조작이었기 때문이다.

홍콩의 일부 언론은, 저우정이의 관상 결탁과 토지 싹쓸이 문제를 조사할 때 심지어 장쩌민의 두 아들 머리 꼭대기까지 도달했다고 폭로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사 인력들은 징안구(靜安區)와 맞닿은 푸퉈구(普陀區)에서 장쩌민의 장남 장몐헝과 푸퉈구 정부가 저우정이가 징안구에서 썼던 수법으로 커다란 땅덩이를 싹쓸이한 사실을 발견했다. 장몐헝과 장몐캉(江綿康)이 상하이에서 싹쓸이한 땅은 모두 사용 비준을 받은 것으로 모두 무상으로 싹쓸이한 것이며 단 푼도 돈을 내지 않았다. 장몐헝은 저우정이보다 더 악랄했다. 저우정이는 그래도 상하이방에 상납이라도 해야 했지만,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던 대공자(大公子) 장몐헝은 거주민들을 멀리 교외로 강제 이주시키기만 하면 되었고 규정에 따른 보상조차 아예 해주지 않았다.

홍콩 중국인권민운정보센터가 발표한 소식에 따르면, 장쩌민의 아들 장몐헝이 저우정이 뇌물 수수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후진타오-원자바오 당국은 이미 장몐헝과 저우정이의 통화녹취 테이프를 손에 쥐었다고 한다. 소식은 2003년 5월 26일 저녁, 장몐헝이 저우정이와 어느 노래방에서 회동했으며 이 기간에 장몐헝이 상대방에게 국가 기밀을 누설했는데, 전 홍콩 중국은행 총재 류진바오 사건 정황 등 내막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했다. 장몐헝과 저우정이가 회동하기 전에 당국이 저우정이의 뇌물 공여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으므로 저우정이의 휴대전화는 사실 이미 도청당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경찰은 기세를 몰아 장몐헝과 저우정이가 회동한 노래방에 도청기를 설치했고, 두 사람의 대화는 고스란히 녹음되었다. 그날 밤 장몐헝이 노래방을 떠난 후 공안 부문은 즉시 저우정이를 구속했고 녹음테이프를 중공 고위층에 넘겼다.

돈을 쓸어 담은 장 씨 일가

장쩌민의 차남 장몐캉은 형만큼 화려하지는 않으나 역시 장쩌민의 위탁을 받아 쉬차이허우(徐才厚)에 의해 난징군구 부사령관으로 꽂혀 들어갔으며 계급은 소장이었다. 장몐캉은 원래 무선 분야를 전공한 인물로 일찍이 그가 한 업무는 군대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장쩌민은 은퇴하기 전에 총을 누구에게 넘기든 자기 아들에게 넘겨주는 것만큼 미덥지 못하다고 여겨 장몐캉을 총참모부로 전근시키려 했으나 뜻밖에도 츠하오톈(遲浩田)에게 퇴짜를 맞았다. 별 방법이 없자 장쩌민은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총정치부 조직부로 밀어 넣어 제2국 국장을 맡겼고, 머지않아 조직부 부부장으로 승진시켰으며 다시 조직부 부장으로 올려놓았다.

장상칭(江上青)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바로 장쩌후이(江澤慧)와 장쩌링(江澤玲)이다. 장쩌민은 장상칭의 딸 장쩌후이를 발탁하여 부장급 간부로 만들었다. 장쩌후이는 원래 안후이(安徽) 농업대학의 평교수에 불과했다. 장쩌민이 집권한 후 장쩌후이는 초고속 승진을 했는데 먼저 안후이농대 삼림대학 원장이 되었고, 곧이어 농업대학 총장으로 승진했으며, 다시 임업과학원(林科院) 원장이 되었다.

장쩌민에게는 안후이 방부(蚌埠)에서 18년 동안 선로 전환수로 일했던 외조카 우즈밍(吳志明)이 있었는데, 장쩌민의 생모 우웨칭(吳月卿)의 친척이다. 오지명은 배운 것도 없고 기술도 없어 장쩌민이 상하이시 서기를 맡은 이후인 1986년 3월에야 당에 가입했고 간부로 발탁되었으며, 이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부부장급 간부로 뛰어올랐다. 현재는 중공 상하이시위 상무위원, 시공안국 당서기, 공안국장, 무장경찰 상하이시 총대(總隊) 제1정치위원이다.

한편 장쩌링의 아들 타이잔(邰展)은 부동산 투기를 하다 1150만 위안의 적자를 보았으나 타이잔이 장쩌민의 외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재판을 받을 때 겹겹의 저항을 받았다. 타이잔은 부동산 매매에 실패하고 갚을 능력이 없자 가짜로 “양저우항전부동산개발유한회사(揚州港展房地產開發有限公司)” 인장을 위조해 어느 홍콩 사업가의 주택 45채를 공상은행에 저당 잡혔다. 피해를 당한 홍콩 사업가가 이 사건을 광링(廣陵) 법원에 고소해 2000년 3월 심리가 열렸다. 법원은 비록 인장이 위조된 것은 인정했으나 당시 양저우시위 서기이던 우둥화(吳冬華), 시정법위 서기 지런구이(冀仁貴) 및 양저우 중급법원 원장 솨이샤오팡(帥小芳) 등의 압력을 받아 2000년 3월 30일 마지못해 이 사건에 대한 조사와 재판을 중지한다고 선포했다. 결국 타이잔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고 홍콩 사업가도 부동산을 되찾지 못했다.

이후 십수 년 동안 타이잔은 장쩌민의 외조카라는 신분을 이용해 주택 매매, 주식 및 유흥업 투자를 마구잡이로 벌였다. 그는 차례로 “양저우 빌딩(揚州大廈)” 총경리, “톈잔 카지노(添展娛樂城)” 사장 및 다수의 합자회사 이사를 역임했다. 타이잔은 또 장쩌민의 외조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군부 배경을 지닌 “북방공업그룹(北方工業集團)”으로부터 1600만 위안을 차입해 주식을 매매했고, 이후 타이잔은 사업의 최전선에서 줄곧 활발히 활동했다. 2012년 2월 6일, 충칭시 부시장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충칭 정계에 지진이 일어났다. 타이잔은 충칭시 정부 부비서장직에 올라 관직과 기업을 모두 가졌고 이를 통해 장쩌민의 정계 영향력이 건재함을 과시했다.

2003년 1월, 장쩌민은 자신의 외조카 샤더런(夏德仁)을 랴오닝성 상무위원, 다롄시 부서기, 다롄시 시장으로 전근시켰다. 이때부터 장쩌민이 다롄에 가는 것은 마치 자신의 집에 가듯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었다.

저우융캉은 스스로 장쩌민 부인의 친조카라 칭했고, 늘 자신이 “장 주석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저우융캉은 품행이 악랄했다. 저우융캉과 가까운 인사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늘 “업무에 몰두한다”는 명목으로 호텔에 머물며 밤에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사실상 몰래 매춘부를 불러 음란한 짓을 벌였으며, 여러 차례 호텔 내 여직원들을 강간했다. 그러나 파룬궁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저우융캉은 최전선에 뛰어든 소수 중 한 명이었고, 나중에 장쩌민에 의해 공안부장으로 발탁되었다. 2007년 제17대가 개최될 때 저우는 피비린내 나는 죄악이 누적되어 장쩌민에 의해 정법위원회 서기로 발탁되었고 정치국 상무위원에 끼어들었으며,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중요한 정치적 견제 세력이 되었다.

이외에도 장쩌민에게 겉으로 드러내놓거나 또는 암암리에 벼슬을 하거나 소리없이 벼락부자가 된 친척이 얼마나 더 있는지는 이미 통계를 내기조차 어렵다.

장쩌민파 부패 분자 보호

“위안화(遠華) 사건”의 주인공은 샤먼(廈門) 위안화 그룹 이사장 라이창싱(賴昌星)이다. 라이창싱은 1994년 위안화 그룹을 설립했고 나중에 밀수 활동에 종사했다. 1996년부터 사건이 발발할 때까지 위안화 그룹은 밀수 범죄 활동에 종사한 지 5년이나 되었고 밀수 물품 총가치는 530억 위안, 탈세 액수는 300억 위안에 달하여 합산하면 국가에 830억 원의 손실을 입혔다.

비록 샤먼 위안화 회사 밀수 사건이 홍콩-마카오에서 시끄럽게 불거졌음에도 중국 매체는 단지 1999년 11월 《베이징만보(北京晚報)》의 한 구석에 폭로했을 뿐 이후 매체는 일제히 침묵했다. 2000년 해외 매체인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등이 대서특필하기 시작하면서 위안화 사건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위안화 사건”이 발발한 계기는 1999년 3월 당시 중국 총리 주룽지가 익명의 편지 한 통을 받은 것인데, 이 편지에는 샤먼시 위안화 그룹의 대규모 밀수에 관한 상세 정황을 폭로했고, 그 중 아주 상세한 증인과 물증이 포함되어 있었다. 때문에 천문학적 액수에 달하는 이 거대한 밀수 사건이 불거져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주룽지는 “누구를 청산하든 끝까지 철저히 파헤칠 것이며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고 표명했다. 장쩌민 역시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 봐주지 않겠다고 표명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수사팀은 이 사건이 장쩌민의 측근인 자팅안(賈廷安), 자칭린(賈慶林)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발견했고, 장쩌민의 입장은 즉시 돌변했다.

2000년 초, 홍콩 《경제일보》는 베이징 소식통을 인용해 중공 중앙이 파견한 “4·20 수사팀”이 반드시 3월 초 양회(兩會) 개최 전에 사건을 전부 마무리 지어 당국이 양회 기간에 이 사건을 “세기적 반부패 대사건”의 “중대한 성과”로 공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장쩌민의 진정한 셈법이 고작해야 이 사건을 이용해 자신을 치장하고 동시에 조사를 조속히 끝내 자기 집 문안까지 조사하지 못하게 막을 희망뿐임을 보여주었다.

2000년에 이르러 기율검사위원회, 감찰, 해관, 공안, 검찰, 법원, 금융, 세무 등 부문이 협조하여 사건을 처리했고, 샤먼 대형 밀수 사건 및 이와 연관된 직무 범죄의 사건 정황이 기본적으로 파헤쳐졌다. 이 기간에 총 600여 명의 연루 인원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300명에 가까운 이들이 형사 추궁되었다. 2001년 각급 인민법원은 이미 샤먼 대형 밀수 사건과 연관된 167건의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렸고 피고인 269명이 연루되었다. 2001년 7월 아직 사건이 종결되지 않았을 때 이미 수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미 집행되었는데, 그중에는 중국공상은행 샤먼시 전 지점장 예지천(葉季諶), 샤먼해관의 리바오민(李寶民)과 리스좐(李士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토록 세기적인 대사건을 완전히 규명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종범 십여 명을 총살한 것은 사실상 증거를 인멸해 “위안화 사건”을 마무리할 수 없는 미궁의 사건으로 만든 것이다. 이 속의 진정한 원인은 바로 이 사건이 장쩌민 측근들과 연루되었기 때문에 장쩌민이 참지 못해 사람을 죽여 입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런 음험한 살인멸구는 오히려 장쩌민에 의해 자신의 결심과 성적으로 대서특필되었다.

위안화 사건에서 장쩌민의 심복이자 장쩌민 판공실 주임 자팅안은 곧 라이창싱에게 몰래 알려주었다. 라이창싱은 자신이 장쩌민의 비서 5명 중 3명과 매우 친하며 여기에는 대비서(大秘書)인 자팅안을 포함한다고 털어놓았다. 자팅안은 장쩌민이 총서기로 있을 때 판공실 주임이었다. 그는 장쩌민이 전자공업부에 있을 때부터 장쩌민의 비서를 맡았다. 1985년 1월, 자팅안은 장쩌민을 따라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갔다. 1989년 6월, 또 장쩌민을 따라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는 장쩌민에게 가장 중요한 비서이자 막료였으며 내부에서는 그를 “대비서”라고 불렀다.

2004년, 장쩌민은 장쩌민 판공실 주임 자팅안을 군사위원회 판공실 주임으로 승진 발탁했고, 심지어 억지로 “특수 상황”과 “업무에 유리하다”는 구실로 자팅안을 소장에서 곧바로 중장으로 승진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군사위원회 위원들은 자팅안의 행정부 등급이 고작 사국급(司局級)이고 군대 계급는 소장인데 이렇게 하면 밑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장쩌민은 포기하지 않고 재차 제안했고, 중앙군사위원회가 토론할 때 두 번이나 보류되었으니 자팅안이 장쩌민의 심복임을 알 수 있다.

라이창싱은 《위안화 사건 흑막》의 저자 성쉐(盛雪)에게 자신이 장쩌민 본인과 직접 접촉한 적은 없으나 중앙군사위원회에 기부할 뜻이 있었다고 말했다. 장의 비서는 그것을 장쩌민에게 보고했다. 라이창싱은 장쩌민이 “그는 본래 내가 자기 비서의 친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위안화 사건에 연루된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장쩌민의 측근 자칭린이다.

샤먼 위안화 사건 연루 자금은 700억 위안가량으로 확정되었으며, 지방, 성 혹은 심지어 중앙급의 관료에 이르기까지 250명 이상이 연루되었다. 그들은 1994년부터 1999년 사이에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수수하여 수억 달러 가치의 자동차, 연료, 원자재, 중장비 및 사치품 등 화물이 샤먼 항구를 통해 중국으로 밀수되도록 했다고 기소되었다. 그리고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자칭린은 푸젠성 당서기이자 푸젠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이었는데, 이것이 장쩌민이 위안화 사건을 위로 파헤치지 못하게 한 이유였다.

자칭린은 1940년 3월에 태어났고 허베이 보터우(泊頭) 사람으로, 장쩌민과 함께 제1기계공업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는데 운 좋게 ‘오래된 상사’ 장쩌민의 눈에 들었고, 장쩌민이 나중에 중공 총서기로 등장함에 따라 그의 정치적 앞날은 계속 승승장구했다.

장쩌민이 베이징시 서기 천시퉁을 무너뜨린 후, 1996년 당시 푸젠성 서기였던 자칭린은 장쩌민에 의해 베이징으로 불려가 시장이 되었고, 그 뒤 다시 베이징시 서기와 정치국 위원을 역임했다. 2003년 중앙기율검사위원회 4명의 부서기가 중앙위원회에 자칭린에 대한 자격 및 정치심사에 대한 재검토를 제출하고 각 민주당파와 정협 인사들이 잇따라 자칭린의 정협 주석 임명에 반대하는 한편, 국무원 심계서(審計署 우리의 감사원에 해당)는 또 자칭린이 푸젠을 통치하던 시절의 초대형 경제 추문을 터뜨렸다.

국무원 심계서는 2003년 1월 하순 중공 중앙정치국, 인민대 상무위원회에 본기 감사 국채(國債)전문건설자금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보고서는 1993년 푸젠성 위원회의 결정으로 20억 위안을 투자해 푸저우 창러(長樂) 국제공항을 건설하기로 했다고 폭로했다. 그런데 1997년 초에 이르러 이미 12억 위안을 초과 지출했다. 또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자칭린이 푸젠성장, 성 서기를 지내는 임기 내에 창러 공항 건설 비용을 유용하고 침탈했다. 조사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중 12억 8천만 위안은 푸젠성 성위원회와 성 정부가 유용하고 침탈한 것으로 대다수가 고위 간부들의 복지를 마련에 쓰였거나 근거가 없고 불명확했다.

푸저우 창러 국제공항은 건설된 후 1998년 초 운영부터 2002년까지 5년 동안 누적 적자가 15억 5천만 위안에 달했다. 그 원인은 건설 규모가 너무 지나쳐 현재 여객량과 화물량이 설계 규모의 30%밖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공항 건설에 들어간 실제 비용은 중국 내 비슷한 공항의 1.25배였다. 감사 보고서는 또 공항 건설 과정에서 자칭린, 허궈창(賀國強)이 잇달아 11차례 국토개발 전용 자금을 유용해 초과 지출 경비를 메우기로 서명한 것이 12억 위안에 달한다고 폭로했다.

심계서는 또 조사 결과 공항 건설을 구실로 유용하고 침탈한 자금 중 일부는 570여 채의 호화 별장을 신축하고 구매한 것으로 푸저우, 샤먼, 주하이(珠海), 다롄, 칭다오, 우시(無錫), 항저우, 베이징 등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230여 명의 고관들이 익명으로 침탈했음을 밝혀냈다.

2000년 12월, 국무원 심계서가 국채 전문 건설 자금을 감사할 때 이미 감사 보고서에서 중점적으로 제기했다. 공항 건설, 고속도로 건설, 싼샤 공정, 농업 종합 개발이라는 이 4대 건설 중에서 건설 자금을 심각하게 유용하고, 초과 지출했으며, 투자 자금의 행방이 불명한 등의 상황이 심각하며 “자칭린-허궈창 공정[賈賀工程, 역주: ‘가짜 재앙 공정이란 의미의 가화공정(假祸工程)과 발음이 유사하다]”에 유용 및 자금 출처가 불명한 등의 문제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당시 이 보고서가 장쩌민에게 보내졌을 때 장쩌민은 그저 창러 공항과 유사한 상황은 비교적 보편적이며 문제는 관리에서 비롯된다고 간단한 지시만 남겼다. 그 후 국무원으로 돌려보냈다.

자칭린이 푸젠성 서기로 있을 때 그의 아내 린유팡(林幼芳)은 중국대외무역그룹 푸젠성 총공사의 당서기를 맡았다. 린유팡은 위안화 그룹과 관계를 청상하지 못했고 심각한 부패 행위가 있었다. 이 때문에 2000년 장쩌민은 자칭린을 그녀와 이혼시켜 스스로 린유팡과 “명확히 선을 긋도록” 표명하게 했다. 그러나 린유팡은 2000년 1월 남편이 자신과 이혼했다는 보도를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결혼한 지 40년이 되었고 우리 관계는 아주 좋으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시 그녀는 또 “홍콩에 등록된 그 화위안(華遠)이란 회사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당연히 린유팡이 어리석은 척 가장한 것이다. 밀수에 연루된 그룹은 홍콩에 등록된 화위안이란 회사가 아니라 푸젠 샤먼의 “위안화그룹”이었다. 푸젠 사람들은 모두 린유팡이 푸젠의 대외무역을 책임졌으니 푸젠성 최대의 수출입 부자를 모른다고 한 것은 바보나 믿을 일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결백 주장은 변명할수록 더 검어질 뿐이었다.

1999년 9월 18일, 장쩌민은 의도적으로 “베이징 도시 건설 업무를 시찰”했고 당시 탄핵 위기에 직면해 있던 베이징시 서기 자칭린과 동시에 공개 활동에 참석했다. 외부에서는 보편적으로 이것이 장쩌민이 자칭린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라 여겼다.

제10기 인민대, 정협 “양회(兩會)” 개최가 임박하자 장쩌민에 의해 제10기 정협 주석으로 내정된 자칭린은 압력에 못 이겨 정식으로 서면 형식을 빌려 건강을 이유로 중앙정치국에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직무를 사직할 것을 요구하며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휴양”하겠다고 청원했다. 하지만 장쩌민에 의해 엄한 말로 거절당했다. 장쩌민은 “네가 내려오면 나는 끝난다.”라고 말했다. 장쩌민에게 남에게 말하기 힘든 숨겨진 경제 범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쩌민은 자칭린을 이용하고 자칭린은 장쩌민을 지키니, 그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어떠한지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비록 장쩌민이 자칭린을 중공 최고 권력 기구에 밀어넣긴 했지만 위안화 사건은 줄곧 자칭린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그림자였다. 자칭린과 위안화 사건의 관계는 또한 중공 부패 정ž치의 최대 상징이 되었고 장쩌민의 반부패 공언이라는 빈말에 대한 가장 큰 풍자가 되었다.

2011년 7월 23일, 라이창싱이 캐나다 정부에 의해 중국으로 송환되었는데, 때는 마침 중공 원로들이 베이다이허에 모여 회의를 열고 제18대 인사 권력 배분을 상의할 때였다. 라이창싱의 귀국은 자칭린에게 가장 큰 타격이었고 자칭린은 이로 인해 제18대 인사에 대한 발언권을 포기했다. 2012년 초 왕리쥔, 보시라이 사건에서 자칭린의 태도는 줄곧 애매했고 저우융캉처럼 후진타오-원자바오와 끝까지 맞서진 않았는데, 이는 위안화 사건이라는 약점을 공격받았기 때문이다.

자칭린과 비슷한 탐관으로는 황쥐와 천량위 등이 있는데, 모두 한때 장쩌민이 목숨 걸고 비호하던 대상들이었다. 2006년 장쩌민은 권력과 제17대 인사 발언권을 유지하기 위해 천을 버리고 황을 지켰으며, 이로 인해 천량위는 징역 18년을 선고받았다.

반부패를 이용해 정적 공격

반부패를 이용해 정적을 공격하는 것은 장쩌민의 커다란 발명이었다. 앞서 언급한 천시퉁이 가장 전형적인 사례이다.

위안화 사건이 폭로된 후 장쩌민은 또 연루된 인물이 자신과 친하고 소원한 정도에 따라 치거나 지켰다. 장쩌민이 무거운 손으로 손을 본 이들 중에는 중공의 자서전 외교관 지펑페이(姬鵬飛)의 아들 지성덕(姬胜德)이 있었으며 사형 유예를 선고받았다.

이번 위안화 밀수 사건에서 가장 깊이 연루된 당과 국가급 전직 지도자는 전 중공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자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류화칭(劉華清)이었다. 류화칭의 딸 류차오잉(劉超英)과 아들 며느리가 모두 위안화 밀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류화칭은 “6.4” 이후 덩샤오핑이 총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장쩌민을 위해 마련해 준 군사적인 “보모”였다. 덩샤오핑이 장쩌민으로 하여금 중공 중앙총서기, 군사위원회 주석을 맡게 할 때 장쩌민이 군대와 아무런 연원이 없는 것을 걱정해 특별히 류화칭, 장전(張震) 두 노장으로 하여금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아 장쩌민을 호위하게 함으로써 군심을 안정시키려 했던 것이다.

장쩌민은 날개가 점차 단단해진 후 군부에 자신의 세력을 심기 시작했고 한무리 청장년 장령(將領)들을 발탁했다. 얼마 후 장쩌민은 이전에 군사에 대해 묻지 않던 습관을 바꾸어 더 직접 군대 업무에 손을 뻗쳤다. 류화칭과 장전은 일찍이 군사를 아는 사람이 군대를 영도해야 한다고 거듭 공언했는데, 이를 통해 장쩌민이 군대에 손을 대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류화칭이 정치국 회의에서 자주 장쩌민의 얼굴을 지적하며 훈계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은 덩샤오핑에 의해 배치되었고 하루도 전쟁을 치러본 적이 없는 장쩌민 앞에서 자격을 뽐내는 것은 당연지사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쩌민과 같은 소인배는 건드려선 안 된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1999년, 중공 정권 성립 50주년 경축 행사에 장쩌민은 군대에서 은퇴한 노장성들이 군복을 입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내렸는데, 사실은 바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던 것이다. 열병식 전 장쩌민은 천안문 성루에 올라 당·정·군 요원을 회견했으나 류화칭 상장의 군복 모자와 휘장이 위풍당당한 것을 보고 이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여겨 화를 꾹 참고 물었다.

“군복을 입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당신은 어떻게 된 거요?”

류화칭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당신은 단 하루도 전쟁을 치러본 적 없으면서 군복을 입을 수 있는데, 나는 왜 입으면 안 된다는 말이오!”

장쩌민은 한순간 말문이 막혀 낯빛이 하얗게 질리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다가 열병식이 시작되어 성루에서 내려와 열병차에 탈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열병식에 다녀온 후 장쩌민은 경호 책임자인 유시구이(由喜貴)에게 류화칭을 단단히 손봐주어야겠다고 말했다.

중공 제15대 이후 장전은 은퇴를 선언했고 덩샤오핑도 이미 세상을 떠났다. 동시에 일정한 기간의 정교한 배치를 거쳐 장쩌민의 군부 내 세력도 날로 강력해졌다. 이때 장쩌민은 류화칭을 손볼 시기가 무르익었음을 알았다. 류화칭 본인은 잡힐 꼬리가 없었으나 당시 그의 딸 류차오잉(총참모부 정보부 5국 상교이자 부국장)이 미국의 정치 헌금 추문에 연루되었다. 류차오잉의 상관이 마침 지성더(姬勝德)였는데 지성더는 바로 라이창싱과 친구였다. 이것이 결국 장쩌민에게 기회를 주었다.

대만에서 태어난 미국 국적 화교인 종위한(鍾育瀚)은 1998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에서 그가 1996년 6월 홍콩에서 류차오잉과 처음 만났다고 시인했다. 당시 류차오잉은 해방군 상교(上校 우리의 대령에 해당)이자 동시에 중국항천(航天)홀딩스 회사에서 국제 무역을 베테랑 매니저였다. 이 회사는 주로 위성 기술, 미사일 거래 및 로켓 발사 등의 업무에 종사했다. 종위한은 96년 7월 11일, 류차오잉이 미국 비자를 신청하도록 주선했고 7월 21일 그녀와 함께 식권 가격이 무려 2만 5천 달러에 달하는 백악관 만찬에 공동으로 참석했다고 시인했다. 이날 밤 류차오잉은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클린턴과 함께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그녀는 1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을 종위한에게 주어 클린턴의 민주당 대통령 선거 운동에 “정치 헌금”으로 삼게 했다.

류화칭의 막내딸 류차오잉과 둘째 며느리 정리(鄭莉)는 그가 가장 아끼던 두 사람이었다. 그녀들이 체포된 일 때문에 류화칭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듭 숙고한 끝에 다른 길이 없자 낯을 두껍게 하고 직접 장쩌민에게 전화를 걸어 선처를 호소했다. 하지만 장쩌민은 전화를 받은 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다 들은 후 바로 전화를 내려놓았으며 입꼬리에 자부심과 경멸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쩡칭훙은 일찍이 류화칭에게 말했다. “당신이 장 주석에게 반대하니 우리가 당신을 어찌할 수는 없지만, 당신의 며느리, 아내, 자식들을 잡아넣기에는 여유가 넘칩니다.”

류화칭의 가족 안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장쩌민이 직접 전체 과정을 지휘하고 직접 명령을 내려 사건 처리 인력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류화칭의 가족들이 잡힌 후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장쩌민의 ‘측근’이 그에게 “은인의 후손은 잘 대우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즉 류화칭이 그를 보좌한 공이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장쩌민은 이 말을 듣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며 그에게 즉시 입을 다물라고 했다.

2000년, 샤먼 위안화 밀수 사건 조사가 한창 급박하게 전개될 때 광시(廣西) 자치구 주석 청커제(成克傑)가 처형되었다.

청커제는 소수민족인 장족(壯族) 출신으로 젊은 시절 광시 류저우(柳州) 지역 철도국 기술원, 엔지니어, 총엔지니어, 부국장, 국장을 지냈다. 그는 밑바닥에서 시작해 단계마다 위로 올라가 1986년 광시 장족 자치구 정부 부주석이 되었고, 1990년 광시 자치구 주석으로 승진했으며, 1992년 청커제는 제14대 중공 중앙위원이 되었고, 1998년 제9기 전국인민대 제1차 회의에서 인민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무를 맡아 부총리급의 “당과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청커제는 광시 장족 자치구 주석으로 재직하는 동안 정부(情婦)와 함께 뇌물을 수수한 액수가 4109만여 위안에 달했다. 2000년 7월 31일, 청커제는 베이징시 제1중급인민법원에 의해 “거액 뇌물 수수”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평생 참정권 박탈, 개인 재산 전부 몰수 처분을 받았다. 청커제는 즉시 상소를 신청했으나 8월 22일 베이징시 고급인민법원에 의해 기각되었다. 9월 7일 최고인민법원은 베이징시 고급인민법원이 형사소송법의 규정에 따라 상부에 보고한 청커제 사형 판결을 비준했다. 9월 14일, 베이징시 제1중급인민법원 사형 집행반이 청커제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부총리급의 “당과 국가 지도자”가 한 달 반 만에 아주 깔끔하게 “목이 잘려” 버렸으니 청커제는 이로써 중공 건국 이래 극형에 처해진 직위가 가장 높고 처형이 가장 빨았던 영도 간부가 되었다.

9월 21일 관영 신문의 한 사설에서 말했다. 청커제가 처형된 것은 당국이 고위 간부들에 대해 직위가 아무리 높아도 법망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경종을 울린 것이다. 사설은 또 말했다. “청커제에 대한 판결, 그리고 정부가 이번 샤먼 밀수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맹세한 것은 정부가 탐관 숙청에 있어 말하면 반드시 실행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청커제가 탐오한 얼마 안 되는 돈은 “중국 제1의 탐관”인 장쩌민의 아들 장몐헝이 탐오한 돈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했다.

소식통이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인민대 부위원장 청커제가 처형된 진짜 원인은 장쩌민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원인은 청커제가 일찍이 인민대 대표이자 가수 쑹주잉(宋祖英)에게 “지나친 관심”을 표명해 장쩌민의 질투심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련하게도 청커제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누구의 비위를 건드렸는지, 도대체 누구 때문에 목숨이 떨어졌는지 몰랐다.

《장쩌민의 실체》 공동 집필팀

2012년 5월 첫 발행

(에포크타임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