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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의 실체》 9: 보이지 않는 거센 흐름

제3장 “질투 때문에 세기의 박해” 제1절 제2절

【정견뉴스】

지금부터 14년 전, 《장쩌민의 실체(真實的江澤民)》이 처음으로 독자들과 만났다. 14년이 지난 지금, 장쩌민은 이미 죽었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독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많은 혼란과 위기는 모두 장쩌민 집권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부패로 국가를 다스리고, 법치(法治)를 짓밟으며, 도덕을 파괴하고, 파룬궁을 박해하는 한편, 그로 인해 팽창된 중공의 전제(專制) 및 폭력 기구는 중국에 끝없는 환란을 남겼다. 오늘날의 중공을 똑똑히 보고, 중국이 어찌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장쩌민의 실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에 에포크타임스에서는 본문을 다시 게재한다.

파룬궁 수련인에 대한 탄압은 실질적으로 모든 이의 양심에 대한 박해 — 머리말

1992년 5월 13일, 리훙쯔 대사는 불가(佛家)의 상승(上乘) 성명쌍수(性命雙修)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공개적으로 전했으며, ‘진·선·인(眞·善·忍)’을 최고 원칙으로 삼았다. 파룬궁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졌고 불과 몇 년 사이에 중국에 수천만 명의 수련자가 생겨났다. 민간에서 유래한 도덕 각성은 이 민족에게 또 한 차례의 기회를 주었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몸과 마음을 닦고, 신체가 건강해지며, 도덕을 제고했으니 이 사회에 백 가지 이로움은 있어도 한 가지 해도 없었으며, 나아가 사회를 안정시키는 적극적인 힘이었다. 누가 혜택을 보았는가? 누가 집권하고 있는가? 불행히도 집권자들은 역사상 그릇된 편에 서는 것을 선택했다. 나중에 일어난 일들은 두 마디 말을 입증했다.

“소인이 뜻을 얻으면 곧 함부로 날뛴다”

“오직 비겁한 자가 가장 잔인하다”.

오늘날 사람들이 보는 것은 해로운 식품의 범람이고, 폭력 철거의 잔인함이며, 샤오웨웨(小悅悅) 사건은 양심의 마지노선에 대한 고문이고, 쑨즈강(孫志剛)과 숨바꼭질식의 집행 남용의 비애이며, 가오즈성, 천광청 등이 약자 집단을 위한 권익을 옹호하다가 스스로 약자 집단으로 전락한 무기력함이며, 치안 유지 비용이 국방비 증가를 지속적으로 초과하는 광기이며, 전체적인 도덕 하락, 신용 위기가 가져온 사회적 절망 등등⋯⋯.

누가 신앙을 말살하고 있는가? 누가 도덕을 타락시키고 있는가? 누가 공안·검찰·법원·사법과 선전 등 직능 기구를 생명을 무시하고 법률을 짓밟는 직업 기구로 바꿨는가?

각종 거짓말을 지어내어 파룬궁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초점방담(焦點訪談)》이 사회의 다른 일에 대해 언론인의 도의와 양심을 진정으로 받들 것이라곤 상상하기 어렵다. 파룬궁 수련자를 제멋대로 구타해 죽이거나 다치게 할 수 있는 경찰이 다른 사람에게는 마음이 인자하고 손이 부드러울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변호사에게 파룬궁 수련자를 변호하지 못하게 하거나 변호사마저 탄압의 대상이 되게 하는 사법 시스템이 다른 집단에 대해 공정한 법적 보호를 제공할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진·선·인’을 인터넷 차단어로 삼는 사회가 민족의 도덕을 재건할 희망을 보여주리라곤 상상하기 어렵다.

이 모든 것의 발생은 엄밀하게 은폐된 채 십 수년 동안 지속된, ‘진·선·인’을 신앙하는 파룬궁 수련자들에 대한 치를 떨게 하는 박해와 떼어놓을 수 없다.

제1절 파룬궁의 전파

리훙쯔(李洪志) 선생은 1992년 5월 13일부터 공개 강의를 시작해 파룬따파를 정식으로 전파했다. 강의 속에서 리훙쯔 선생은 단도직입적으로 수련자들에게 파룬따파는 불가의 수련 대법이라고 알려주었다. 이는 중국공산당 집권 후 처음으로 사람이 공개적으로 수련을 창립한 것이며, 중국인들에게 중국공산당에 의해 단절되었던 수련(修煉) 문화를 이어준 것이었다.

수련은 인류 문명 중 연원이 아주 멀고 오묘하기 그지없는 영역으로, 통상적으로 심법(心法 원칙이라고도 함)과 공법(功法) 두 부분을 포함하며 그 함의는 철학과 건강증진의 범위를 멀리 초과한다. 공법은 일반적으로 몸을 닦는 데 쓰이는 부분을 가리키고 심법은 사람에게 마음을 닦게 하고 경지를 향상하게 하는 핵심이 되는 곳이다. 비록 수련의 정수는 예로부터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심층적으로 토론되거나 보급한 적은 없지만, 그것이 인간과 물질이 존재하는 각 공간, 생명 및 우주의 신비를 드러내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여전히 중국 문화와 서구 문명 속에 각종 흔적과 신적(神迹)을 남겼다. 중국 고대의 태극(太極), 하도(河圖), 낙서(洛書), 팔괘(八卦), 인도의 고대 요가, 서구의 일부 가부좌 방법은 모두 수련의 신비를 포함하고 있으나, 역사의 추이에 따라 그 심법이 실전(失傳)됨에 따라 현대인은 이미 그러한 수련 방법 원래의 깊은 뜻에 접촉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파룬따파는 파룬궁(法輪功)이라고도 부르며, 파룬궁은 ‘진·선·인’을 지도로 하는 성명쌍수 공법으로 우주 연화(演化) 원리에 따라 수련한다. “수련”이라는 두 글자는 동시에 두 방면의 내용을 포함한다. 수(修)는 마음을 닦는 것이고, 련(煉)은 공을 연마하는 것이다. 마음을 닦으려면 상응하는 법리(法理)를 지도로 삼아야 한다. 파룬따파의 가장 주요한 저서 《전법륜(轉法輪)》 속에는 수련 입문에서 수련 원만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일체의 법리가 포함되어 있다. 성명쌍수 공법으로서 당연히 공을 연마하는 것도 필요하다. 파룬궁에는 다섯 세트의 공법, 즉 네 세트의 동공과 한 세트의 가부좌하는 정공이 있다.

중국에서 나온 수많은 건강증진 공법 중 파룬궁의 발전이 가장 빨랐고 대중 속에서 영향이 가장 컸기에, 의학계의 관심과 정부의 주목을 불러일으켰다. 1998년, 국가체육위원회가 각 기공(氣功) 공파(功派)에 대해 진행한 조사와 신고 업무에 협조하기 위해 베이징시, 우한시, 다롄 지역, 광둥성 및 기타 지역(난창, 광시, 안후이 등지)에서 각각 현지 의학계가 조직되어 현지 연공점의 파룬궁 수련자들을 대상으로 예비적인 의학 조사를 진행했다. 현존하는 베이징시(두 차례), 우한시, 다롄 지역 및 광둥성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상술한 다섯 차례 조사는 조사표본 약 3만 5천 부를 회수했다. 비록 예비적이지만 이미 지금까지 가장 시스템적이고 전면적으로 파룬궁의 병을 없애고 건강을 증진하는 효과에 대한 “기초 의학 방면의 거시적 조사”였다.

조사를 받은 파룬궁 수련자들은 사회 각 계층에서 왔으며 상이한 교육 정도를 가졌는데, 그중 여성이 72.9%, 50세 이상이 62.1%를 차지했고 수련 전 한 가지 이상의 질병을 앓던 이가 90% 이상을 차지했다. 대다수 수련자는 연공(煉功)을 통해 병을 없애고 건강을 증진하는 목적에 도달하기를 희망하여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사 결과 병을 없애고 건강을 증진하는 총 유효율이 98% 이상임을 보여주었다.[1] 사람들은 파룬궁이 그들에게 제2의 생명을 주었거나 혹은 그들의 가족을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했다.

병을 없애고 건강을 증진하는 효과가 현저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에 관한 파룬궁의 참신한 가르침은 더욱이 많은 사람을 타락에서 일깨웠다. “사람이 반본귀진(返本歸真)하려는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된 진정한 목적이다.” 리훙쯔 선생의 말은 사람들 내심의 갈망을 소생시켰다. 그들은 수련을 통해 새로운 내포가 주어진 생활을 체험했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평온을 느꼈으며, 그들은 쌓인 원한을 버리면서도 손해를 본다고 여기지 않으며, 물질적 부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고 더는 손해를 볼까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정부 관리는 부패에 저항하고 뇌물을 거부했으며, 상인은 속임수을 버리고 정직하게 운영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흑사회(黑社會) 구성원, 약물 중독자, 도둑도 마음을 고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파룬궁 수련자들이 체현한 고상한 도덕은 사회에 적극적인 작용을 일으켰는데, 이 점은 서로 다른 계층의 중국공산당 관리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인식되었다. 가령 중국에서 곡물 수매창의 표준 절차는 체로 거른 후 농민이 납부한 곡물을 한 번 더 달아보는 것이지만, 후베이성 젠리현(監利縣)에서는 파룬궁을 연마하는 농민에게 이 절차가 면제되었다. 많은 회사는 심지어 파룬궁 수련자를 고용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왜냐하면 ‘진·선·인’을 준칙으로 삼는 파룬궁이 이미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대명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리훙쯔 선생이 전파한 파룬따파(파룬궁)는 ‘진·선·인’을 수련 표준으로 삼으며, 선을 닦는 평화적인 것이고, 모든 활동은 공개적이고 자발적이며 무료였으며, 명부도 없고 가고 오는 것이 자유로웠다. 남녀노소를 불문했고 유아부터 구십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련자 저마다 사회의 일원이었다. 개인에게 있어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은 병을 없애고 건강을 증진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정직하고, 선량하며, 너그럽고, 평화롭게 되도록 만들고, 게다가 지혜를 열어주어 점차 인생과 우주의 신비를 꿰뚫어 보는 자재(自在)한 경지에 도달하게 했다. 사회에 대해 말하자면, 파룬궁 수련은 사회 안정, 포용, 상화(祥和)를 증가시켰고 사람들의 전반적인 정신 생활의 질을 제고시켰다. 그러므로 오로지 사람에서 사람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만으로도 수련자가 날로 많아져 1992년 전파된 이래 1999년에 이르기까지 파룬궁은 중국 대륙에 7천만에서 1억 명의 수련자가 있었다. 오늘날 파룬궁은 중국과 세계 100여 개 국가 및 지역에 전파되어 수련자가 전 세계 각 민족에 두루 퍼져 있으며 각국 정부, 단체로부터 대량의 표창 및 지지를 받았다.

제2절 보이지 않는 거센 흐름(暗流湧動)

비록 파룬궁이 사회에 가져다준 정면(正面)적인 작용을 목격했음에도,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무신론을 신조로 삼는 일부 관리들은 파룬궁에 대한 날로 증가하는 환영에 대해 큰 불쾌감을 느꼈다. 그들은 40년간 마르크스주의 주입과 세뇌를 거친 후에도 여전히 공산당원을 포함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명백한 유신론(有神論)인 고대 수련 속으로 전향해 정신과 도덕의 가르침을 찾으려 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시에 중국공산당의 정치사찰과 공안 부문의 일부 관리들은 마침 파룬궁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이용해 권력을 확장하고 정치적 자본을 챙길 수 있다고 여겼으므로 이 두 부분의 정치 세력이 한패가 되어 일련의 수단을 취해 파룬궁을 탄압했다.

공안의 소란

1994년부터 중공 공안 요원들은 파룬궁에 잠입해 있었으나 어떠한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고, 심지어 많은 잠복 요원들도 파룬궁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1996년, 《광명일보》는 기공에 대해 ‘선전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으며, 몽둥이질하지 않는다’는 ‘삼불(三不)’ 정책을 위배하고 기사를 발표해 사상 영역에서 까닭 없이 파룬궁을 비판했으며, 이어서 중앙선전부는 파룬궁 도서 출판을 금지했다. 그 후 공안과 ‘과학자’ 직함의 씌운 정객들로부터 파룬궁에 대한 소란은 줄곧 끊이지 않았다.

1997년 초,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서기 뤄간은 직권을 이용해 공안 부문에 암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파룬궁에 대한 일차 조사를 진행하게 했는데, 이는 파룬궁을 단속해 죄명을 엮어내어 취재하려는 의도였다. 각지에서 “아직 어떠한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린 후, 뤄간은 1998년 7월 또 중국 공안부 제1국(정치보위국이라고도 하며, 정보국(政保局)으로 간칭)을 통해 공정[1998] 제555호 《파룬궁에 관한 조사 전개 통지》를 발령해 먼저 파룬궁을 ‘사교(邪敎)’로 정죄(定罪)한 후 전국 각지 공안 부문으로 하여금 체계적인 ‘잠복 조사’, 증거 수집을 진행하게 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는 여전히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 파룬궁 수련자의 정상적인 수련 활동에 대한 소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1998년, 신장, 헤이룽장, 허베이, 푸젠, 장쑤, 랴오닝, 산둥 등의 공안국은 이미 ‘불법 집회’란 명목으로 군중의 야외 연공을 강제로 해산하고, 파룬궁 수련자의 사유 재산을 압수하며, 파룬궁 수련자를 구속 심문하거나 구류하고 구타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여기서 언급해야 할 것은 ‘정보국(政保局)’이다. 중국공산당이 대대적으로 ‘정치 운동’을 벌이던 시대에 ‘계급의 적’을 타격하는 ‘정보(政保)’라는 직업은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개혁개방에 따라 경제 발전을 하는 것이 주류가 되면서 정보의 지위는 예전만큼 멋대로 하지 못했다. 정보의 사람들은 지위를 보장하고 승진하기 위해 사회에서 정부를 전복할 불법 조직을 어떻게든 파헤쳐내어 일부 큰 사건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존재의 필요성을 증명하려 했다. 1999년 7월 이전, 공안 부문이 파룬궁을 연공하는 군중에게 가한 소란은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파룬궁 수련자들은 겁에 질리지 않았으며, 그들은 직접적인 수련 체험을 통해 이러한 먹칠하는 고발이 터무니없는 날조임을 알았고, 자신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 되고 있으며 비난받거나 묘욕당할 만한 점이 조금도 없음을 알았다. 동시에 이러한 무단 탄압에 직면하여 그들은 거듭 대선대인(大善大忍)의 흉금으로 묵묵히 참아내며 탄압하는 자들에게 수련이 무엇인지, 수련자는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기회를 주었다. 많은 수련자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심지어 감옥에 갈 위험을 무릅쓰고 중앙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직접 체험으로 파룬궁이 사회에 유익하며 집권자에게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했다.

중공 공안과 선전 부문이 파룬궁에 가한 탄압이 초래한 사회적 파동을 감안해, 국가체육총국은 일찍이 1998년 조사팀을 창춘과 하얼빈에 파견해 파룬궁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게 했고, 결론은 “우리는 파룬궁의 공법(功法) 공효(功效)가 모두 괜찮으며, 사회의 안정에 대해, 정신문명 건설에 대해 효과가 매우 현저하므로 이것을 충분히 긍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 1998년 하반기, 차오스를 중심으로 한 일부 전국인민대 퇴직 노간부들이 파룬궁에 대해 일정한 시간 동안 상세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여 “파룬궁은 국가와 민중에 백 가지 이익만 있고 한 가지 해로움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연말에 장쩌민을 우두머리로 하는 정치국에 조사 보고서를 제출했다.

차오스에 대한 질투와 원한 때문에 장쩌민은 이 보고를 크게 불쾌해하며 “글이 터무니 없이 허황해서 알아볼 수 없다”고 지시했고, 이 보고를 줄곧 파룬궁에 대해 탄압 태도를 유지했던 뤄간에게 넘겨 처리하게 했다. 뤄간은 마음속으로 뜻을 알아차리고 파룬궁 탄압을 강화했다. 공안 계통을 장악한 뤄간은 파룬궁에 대해 적의를 품은 일부 과학건달(科痞)들을 이용해 더 큰 음모를 기획했다.

과학건달

중국과학원 원사 허쭤슈(何祚庥)가 바로 이러한 앞잡이 중 하나였다. 1951년 칭화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할 때, “자연과학에도 계급성이 있다”는 논점을 발표했기 때문에 허는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의 눈에 들어 중앙선전부에 배치되었다. 허는 나중에야 다시 이론물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나 중점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사용해 물리학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허쭤슈의 학술상 최대 연구 성과는 기본 입자의 소위 ‘층자 모델(層子模型)’을 제출한 것이며 논문을 발표했는데 제목이 《마오쩌둥 사상을 지도 삼아 기본 입자 연구를 진행하자》였고, ‘층자(層子)’ 역시 나눌 수 있으며 ‘무자(無子)’, ‘모자(毛子)’ 등 더욱 작은 입자로 나눌 수 있다고 여겼다. ‘무자’, ‘모자’라는 이름을 취한 것은 ‘무산계급의 자식’, ‘마오 주석의 자식’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허쭤슈는 중국과학원에서 매우 논란이 많은 인물인데, 과학자란 감투를 썼으나 사실은 중국공산당 정세에 바짝 뒤따르는 정치적 인물로 ‘과학건달’이란 호칭이 있다.

가령 20세기 초 케쿠레는 벤젠의 고리 구조를 발견했고 그후 수십 년 동안 화학자들은 이 구조에 대해 존재는 알았으나 왜 그런지 알지 못했는데, 나중에 노벨 화학상 수상자 폴링이 ‘공명론’ 개념을 제시하여 케쿨레 모델을 합리적으로 설명했으며, 이것이 화학 구조학에서 양자역학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허쭤슈 등은 이미 증명된 케쿨레 모델을 “과학계에서 계급조화론의 반영”이라고 지적했고, 중국의 대다수 구조화학 전문가들이 이에 연루되어 ‘자산계급 입장’을 검사받았으며, 중국의 양자역학 연구에 심각한 충격을 받아 장시간 중단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을 끌어안고 놓지 않는 허쭤슈는 중국의 수련 전통을 띤 기공에 대해 선천적인 적의를 품었다. 허는 중앙텔레비전 방송국 인터뷰에서 일찍이 부지불식간에 진심 한마디를 흘렸는데, 그가 파룬궁을 공격하는 용기는 원래 또 “내 등 뒤에는 공산당이 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1998년 5월 중순, 허쭤슈는 베이징텔레비전 방송국 ‘과학기술의 빛’ 프로그램에서 파룬궁을 비방했다. 이에 파룬궁 수련자들이 방송국을 찾아가 진상을 명백히 밝혔다. 베이징텔레비전 방송국은 상황을 이해한 후 잘못을 정정했다. 허쭤슈는 베이징에서 시장을 잃은 후 텐진으로 갔다. 1999년 4월 11일, 그는 텐진교육학원 《청소년과기박람(青少年科技博覽)》 잡지에 글을 발표하여 계속해서 그러한 거짓말로 파룬궁을 무함했다. 글 속에서 그는 파룬궁이 사람을 정신병에 걸리게 한다고 모함했고, 파룬궁이 의화단(義和團)처럼 망국에 이를 것이라고 암시했다.

이에 텐진의 일부 파룬궁 수련자들이 텐진의 관련 방면에 사실 진상을 명백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여겼고, 잡지 편집부와의 교섭을 통해 그 글의 그릇된 영향을 없애기를 기대했다. 그러므로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일부 수련자는 텐진교육학원 및 기타 관련 기구로 찾아가 실정을 반영했다. 처음에 편집부의 리더가 나서서 파룬궁 수련자를 접견하고 이 부실한 글을 정정할 의향이 있다고 표명했으나 다음 날 갑자기 말을 바꾸어 정정을 거절했다. 나중의 사태 발전은 허쭤슈가 이번에 단독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새로 중공 중앙정법위(政法委) 서기로 승진한 뤄간과 연합했음을 보여주었다.

4월 23, 24일 이틀 동안 텐진시 공안국은 300여 명의 전투경찰을 동원해 상황을 반영하는 파룬궁 수련자를 구타해 수련자가 피를 흘리며 부상당하게 만들었고 45명을 체포했다. 텐진시 정부의 관리들은 또 상방(上訪)하는 수련자들에게 이 일은 텐진에서 처리할 수 없으며 상황을 설명하려면 상급—베이징 중앙정부를 찾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파룬궁 수련자가 체포자 석방을 요구했을 때 공안부가 이 사건에 개입했으며 만약 베이징의 수권이 없다면 체포된 파룬궁 군중은 석방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텐진 공안 또한 파룬궁 수련자들에게 “당신들은 베이징으로 가시오, 베이징에 가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소”라고 건의했다.

‘4·25’ 만인(萬人) 상방

1999년 4월 25일, 1만여 명의 파룬궁 수련자가 베이징 중난하이 인근에 위치한 국가신방판(信訪辦)으로 단체 상방했다. 당시 총리 주룽지가 나서서 파룬궁 수련자를 접견하고 신방국(信訪局) 책임자로 하여금 수련자 대표와 좌담하도록 책임을 지웠다. 대화에서 파룬궁 수련자들은 세 가지 요구를 제기했다.

1) 이틀 전에 텐진에서 체포된 파룬궁 수련자들을 석방할 것;

2) 파룬궁에게 공정하고 합법적인 수련 환경을 줄 것;

3) 파룬궁 도서가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공개 출판되는 것을 허용할 것.

전 과정에서 중공 공안 부문은 완전히 알고 있었으며 탄압 구실을 만들기 위해 사건을 확대할 준비를 했다. 4월 24일 밤, 이미 많은 외지 파룬궁 수련자가 대형 버스를 타고 베이징에 들어와 상방했다. 동시에 중공 내부에서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이미 파룬궁을 수련하는 가족에게 다음 날 신방청에 가지 말라고 통지하고 설득했는데, 경찰이 이미 사람을 잡으려고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4월 25일 이른 아침, 수많은 파룬궁 수련자들이 국무원 신방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공안이 나서서 파룬궁 수련자들을 중국공산당 중앙 지도자의 업무장소인 중난하이로 인도했다. 파룬궁은 조직도 없었고 지휘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수련자들은 모두 선량했고 경찰의 배치에 순종해 어디로 걸어가라고 하면 걸어가고 어디에 서라 하면 서 있었다. 그 결과 두 갈래로 나뉘어 한 갈래는 남에서 북으로 걷고 한 갈래는 북에서 남으로 걸었으며 경찰의 지휘와 배치에 의해 중난하이를 포위하는 형세로 변해 중공의 덫에 빠졌다. 나중에 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할 때 바로 이것을 파룬궁이 “중앙정부를 포위”했다고 무함했다.

덫을 친 후 경찰은 아침 8시가 넘자 경계태세를 취하기 시작했고 많은 경찰차가 왔으며 촘촘히 선 무장경찰이 파룬궁 수련자와 마주 보며 대치해 서 있었고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차 안에서 이리저리 촬영하며 장부를 결산할 준비를 했다. 길 위에는 경찰차 아니면 경찰이었고 사복 경찰도 있었다. 중난하이 담벼락 안에는 철모를 쓰고 실탄을 장전한 군대가 나타났으며 분위기가 공포스러웠다.

파룬궁 수련자들이 수련을 통해 도달한 고상한 경지는 이날 상방 중에 충분히 체현되었다. 당일 매체에서 누차 파룬궁을 무함했던 허쭤슈도 사복경찰의 보호 하에 줄곧 상방 현장에 있었으나 파룬궁 수련자는 단 한 사람도 그와 충돌하지 않았다. 파룬궁 수련자로 위장한 일부 사복 경찰이 사람들을 선동해 구호를 외치게 했지만 파룬궁 수련자들은 그들에게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 명이 넘는 파룬궁 수련자들은 전체적으로 평화롭고 질서가 있었으며 도로와 인도 사이에 세 사람이 한 줄로 서서 교통을 방해하는 것을 피했다. 그들은 구경하는 행인에게 구경하지 말라고 권고하여 교통이 막히는 것을 방지했다. 그들은 자동차와 행인이 버린 쓰레기를 주웠고 경찰이 버린 담배꽁초를 주웠으며 경찰이 뱉은 가래까지 모두 닦아냈다. 파룬궁 수련자의 상화(祥和)함은 무장경찰들의 긴장된 대치 감정을 빠르게 융해시켰고 무형 중에 경계태세도 없애버렸다. 한 여경이 감동해서 말했다. “보세요, 무엇이 덕(德)인가? 이것이 바로 덕입니다!”

당일 아침, 국무원 총리 주룽지가 방대한 상방 군중을 보았을 때 그는 중난하이를 걸어 나와 직접 파룬궁 수련자 속으로 다가갔다. 주룽지는 말을 꺼내자마자 “여러분에게는 종교 신앙의 자유가 있잖습니까! 여러분에게 무슨 문제가 있든 여러분은 대표를 파견하시오, 내가 여러분을 데리고 들어가서 대화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작위로 세 명의 파룬궁 수련자를 지목하여 중난하이로 들어가 신방국장과 회담하게 했다. 담화 속에서 파룬궁 수련자는 주룽지가 일찍이 파룬궁 수련 문제에 대해 지시를 내린 적이 있으나 누군가에게 압수당해 전달되지 않았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3]

국무원 관계자와 파룬궁 대표가 하루 종일 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수련자들은 밖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밤 9시가 넘어 어느 정도 결과가 나왔고 텐진에서 체포된 수련자가 석방되었고 파룬궁 군중은 그 후 조용히 흩어졌으며 땅 위에는 부서진 종잇조각 하나조차 남지 않았다. 사건은 이렇게 평화롭게 막을 내렸고 이것이 바로 나중에 말하는 ‘4·25 만인 대상방(大上訪)’이다.

‘6·4’ 이후 중국에서 최대의 군중이 모인 사건이라 서방 매체도 광범위하게 주목했다. ‘4·25’ 상방의 평화적 해결에 대해 국제 관찰 인사들과 언론은 파룬궁과 주룽지에 대해 매우 높은 평가를 하며 이를 중국 정부와 민간이 협상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선례이자 문명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이정표로 여겼다.

《장쩌민의 실체》 공동 집필팀

2012년 5월 첫 발행

(에포크타임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