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輕舟)
【정견망】
거센 바람이 돛을 부풀려 배는 나는 듯이 달렸고, 뱃머리가 일으키는 물보라는 마치 끊임없이 앞으로 펼쳐지는 우산 같았다. 양쪽 강둑의 원숭이 울음소리도 예전과는 달랐다. 향수의 수심도 없었고, 유배당한 처절함도 없었으며, 그것은 소란스럽고 끔찍한 소음이 되어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면 울음소리 속에는 가득 찬 조롱, 분함, 질투, 원한이 서려 있었다……. 나중에는 원숭이 울음소리가 아예 분노의 고함으로 변하여 배 안에 있는 사람을 끄집어내어 물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배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떠했을까? 그는 천천히 선실을 걸어나와 뱃머리에 서서 맹렬한 강바람이 옷자락을 ‘파닥파닥’ 소리 나며 때리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는 양쪽의 높은 산을 바라보았고, 마음속으로는 이미 모든 것을 환히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시원하고 쾌활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는데, 마치 원숭이 울음소리에 대한 화답 같았다. 시의(詩意)가 문득 모든 모공에서 솟구쳐 올랐으니, 그것은 익숙한 느낌이었다.
“아침에 백제성을 떠나니 오색구름 사이에 걸려 있네,
천리 먼길 강릉을 하루 만에 돌아왔네
(朝辭白帝彩雲間,千里江陵一日還)…….”
배 안의 사람은 이백(李白)이었다. 그는 술을 사랑했고 시 짓는 것도 사랑했으며, 사람들은 그를 ‘시선(詩仙)’이라 불렀고 어떤 이들은 그를 ‘적선인(謫仙人 떨어져 내려온 신선)’이라 부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단지 칭찬과 치켜세움이며 대부분 그의 시문에 대한 찬미라고 여겼다. 사실 이것은 매우 편협한 생각이다. 저자의 ‘신선(仙)’이 없다면 어찌 시문의 ‘신선仙’이 나올 수 있겠는가?
이백은 비범한 내력을 지녔으며, 그의 일생은 곧 수련의 일생이었다. 그는 다섯 살 때 도교 서적 인 《육갑(六甲)》을 암송했다. “다섯 살에 육갑을 암송하고, 열 살에 백가를 관람했으니, 헌원(軒轅) 이래로 제법 들은 바가 있었다.”(《상안주배장서(上安州裴長史書)》) 열다섯 살부터는 신선을 찾고 도를 구하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에 신선을 찾아 노닐었고, 신선의 노닒이 일찍이 멈춘 적이 없었네.”(《감흥(感興)》) 그의 일생 동안 가장 많이 교류한 이들은 산속의 은둔 고사들이거나 불도가(佛道家)의 수련인들이었다.
물론 수련이란 금단(金丹) 한 알을 먹는다고 단숨에 대공성취(大功成就)를 이루는 것도 아니요, 신인을 만나 도를 전수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허공으로 몸이 떠올라 신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은 이전에 수련인이 겪어야 했던 그 엄청난 감내와 희생이다. 그리고 이백이 걸어간 길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가장 艱難(간난)한 길이었다.
돌아보면 지난 수년 동안 사실 이백이 걸어간 모든 걸음은 그의 수련 성과였으며, 가장 직관적인 표현은 느닷없이 솟아오르는 영감이요 고금을 뒤흔드는 시편들이었다.
그는 의기양양할 때면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고 문을 나서니, 우리 무리가 어찌 초야에 묻힐 사람이리오(仰天大笑出门去,我辈岂是蓬蒿人)”라고 읊조렸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스스로 타락하지 않았다.
“세상살이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내일 아침에 머리 풀고 조각배를 희롱하리라(人生在世不称意,明朝散发弄扁舟).”
그는 속세를 초월하여 재물을 오물처럼 여겼다.
“하늘이 내 재주를 냈으니 반드시 쓸모가 있을 것이요, 천금을 다 써버려도 다시 돌아오리라(天生我材必有用,千金散尽还复来).”
그는 왕공 백작을 부러워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보았다.
“어찌 눈썹을 찌푸리고 허리를 굽혀 권세가를 섬기어, 내 마음을 편치 않게 하리오(安能摧眉折腰事权贵,使我不得开心颜).”
그는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 농가의 늙은 아낙 앞에서도 결코 머리를 높이 들지 않았다.
“표모(漂母)에게 부끄러워 세 번 사양하고도 밥을 먹지 못했네(令人惭漂母,三谢不能餐).”
그리고 그의 가장 큰 소원은 바로 “나는 장차 단사(丹砂)를 가꾸어, 영원히 세상사람들과 작별하리라(吾将营丹砂,永与世人别)”라는 것이었다.
솔직하고 진실함은 아마도 이백의 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그는 결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자신의 글을 꾸미지 않았다. 사실 이것이 바로 수련 경지이며 ‘진(眞)’의 체현이다.
그의 시명이 너무나 컸기에 현종(玄宗)조차도 이러한 신선 같은 인재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력사(高力士)로 하여금 신발을 벗기게 하고 귀비(貴妃)로 하여금 먹을 갈게 했던 그 시선을 보게 된다. 그러나 참소하는 말도 그 뒤를 이어 찾아왔다.
“뭇 여인들이 아미(미인의 눈썹)를 질투하니, 두 송이 꽃이 봄꽃 다툼을 하네. 위(魏)나라의 수(姝)는 정수(鄭袖)를 믿고서 소매로 얼굴 가리고 회왕(懷王)을 대했네. 교묘한 말 하는 자에게 한 번 현혹되니, 아름다운 얼굴이 상처를 입는구나. 장차 團扇(단선)을 잡고 울게 되리니, 슬프고 슬퍼서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는구나(衆女妒蛾眉,雙花竞春芳。魏姝信鄭袖,掩袂对怀王。一惑巧言子,朱颜成损伤。行将泣团扇,戚戚愁人肠).” (《구참(懼谗)》)
나중에 가서는 이백은 아예 정치를 멀리하고 술의 신선이 되기를 자처했다.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신은 술 가운데의 신선이라 하네(天子呼来不上船,自称臣是酒中仙).” (두부의 《음중팔선가(飲中八仙歌)》)
그러나 질투하는 자들은 그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를 질투하고 미워하여 반드시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이었다.
“초나라의 파리는 어찌 이리도 많은가, 성(城)의 흰 옥이 참소를 당해 부서지는구나. 형산(荊山)에서 목놓아 통곡하며 피눈물 흘리는 사람, 충신은 죽어서 발이 잘린 귀신이 되는구나(楚国青蝇何太多,连城白璧遭谗毁,荆山长号泣血人,忠臣死为刖足鬼).” (《국가행(鞠歌行)》)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안(長安)에도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조정이 자신의 안식처가 아니라면 계속 신선을 노닐며 유랑할 뿐이다. 천보 3년(744년), 44세의 이백은 하북 안릉(창주시)에 이르렀고, 도가의 고인(高人) 개환(蓋寰)이 이백을 위해 진록(眞籙)을 지어주었다.
“나를 위해 진록을 지어주니, 하늘과 사람이 그 묘한 솜씨에 감탄하네. 칠원동(七元洞)은 탁 트였고, 팔각(八角)은 별빛 무지개를 빛내네(为我草真箓,天人惭妙工。七元洞豁落,八角辉星虹).” (《방도안릉우개환위여조진록임별류증(訪道安陵遇盖还为余造真箓临别留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백은 다시 제주(지금의 지난시) 자극궁(紫極宫)으로 가서 고천사(高天師)에게 도록(道籙)을 전수받았다.
“도는 아득하여 볼 수 없고, 영서(靈書)는 동천(洞天)에 숨겨져 있네. 나의 스승은 4만 겁 동안, 세세를 거쳐 서로 전해왔네. 작별하는 지팡이는 푸른 대나무로 남겨두고, 노래하며 자줏빛 안개를 밟고 가네. 떠나는 마음은 멀고 가까움이 없으니, 언제나 옥경(玉京)의 높은 곳에 걸려 있네(道隐不可见,灵书藏洞天。吾师四万劫,历世遰相传。别杖留青竹,行歌蹑紫烟。离心无远近,长在玉京悬).” (《봉전고존사여귀도사전도록필귀북해(奉饯高尊师如贵道士传道箓毕归北海)》)
이백의 스승은 도대체 어떤 대단한 인물이란 말인가?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우리는 다만 시의 단편적인 구절 속에서 그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득한 大道의 진인(眞人)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수련은 수많은 관을 통과해야 하며, 심지어 생사마저 내려놓아야 한다. 이 관문을 이백은 젊은 시절에 이미 뚫고 지나갔다. “또한 옛적에 촉(蜀)나라의 친구 오지남(吳指南)과 함께 초나라를 유랑하였는데, 지남이 동정호(洞庭湖) 위에서 죽으니, 이백은 상복을 입고 통곡하기를 마치 친형제를 잃은 것 같았다. 더운 여름날 시신이 눕혀져 있었는데, 눈물이 다 마르자 피눈물이 이어졌다. 길을 지나가던 이들이 모두 마음 아파했다. 맹수가 앞으로 다가왔으나 굳건히 지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상안주배장서(上安州裴長史書)》)
이백은 친구 오지남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 맹수가 앞으로 다가와 위급한 순간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은 생사의 시험이며, 모든 수련자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이백의 마음이 동요하지 않자 맹수는 자연히 물러갔다.
사금방환(賜金放還·황제가 내린 금을 받고 방출됨) 이후의 10년은 비교적 평온한 수련 과정이었으며, 상천(上天)은 한 가지 큰일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당(盛唐)은 특수한 역사 시기로, 수많은 불도(佛道)의 고인들이 세상에 내려와 사람을 제도했다. 물론 제도받는 자는 저절로 제도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경지까지 수련해 올라가야 했다. 그것은 온갖 인연이 맞물려 초래된 겁난(劫難)이었으며, 당시의 수련인들이 수련을 향상할 수 있도록 안배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천보 14년,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다.
“서악 연화산에서 멀리 샛별을 보네. 고운 손으로 부용화를 잡고, 허공을 걸어 태청(太清)을 밟네. 예복은 넓은 띠를 끌고, 나부끼며 하늘로 오르네. 나를 구름 위에 오르라 부르고, 위숙경(衛叔卿)에게 읍하네. 아득히 그와 함께 떠나가니, 기러기를 타고 자줏빛 명명(冥冥)을 넘네. 낙양의 물가를 내려다보니, 아득하게 오랑캐 병사들이 달아나네. 흘린 피는 들풀을 적시고, 이리와 승냥이가 모두 갓끈을 맸구나
(西岳莲花山,迢迢见明星。素手把芙蓉,虚步蹑太清。霓裳曳广带,飘拂升天行。邀我登云台,高揖卫叔卿。恍恍与之去,驾鸿凌紫冥。俯视洛阳川,茫茫走胡兵。流血涂野草,豺狼尽冠缨).” (《고풍(古風)》)
한 가지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이 시가 이백이 44세 때 지은 것이라는 점이다. 즉 도록을 수여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백이 무려 11년 전에 안사(安史)의 난의 참혹한 광경을 미리 보았던 것이다.
이때의 대당(大唐)은 일찍이 없었던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것은 세상사람들의 겁난이기도 했지만, 또한 수행인이 세상을 구제하고 중생을 구도하며 동시에 자신을 수련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왕(永王) 이인(李璘)이 사람을 보내 이백을 초청했다. 이때의 이백은 노산(廬山)에서 도를 닦고 있었다. 이백은 이것이 천명이며, 수련이요, 나아가 창생을 구제할 절호의 기회이므로 조금도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영왕의 막부(幕府)에서 이백은 단숨에 열한 수의 《영왕동순가(永王東巡歌)》를 지어 자신의 뜻을 밝혔다.
“잠시 군왕의 옥채찍을 빌려, 오랑캐를 지휘하여 경사스러운 잔치에 앉으리라. 남풍이 한 번 쓸어 오랑캐 티끌 가라앉히면, 서쪽으로 장안에 들어가 해가 뜨는 곳에 이르리라(试借君王玉马鞭,指挥戎虏坐琼筵。南风一扫胡尘静,西入长安到日边).” (《영왕동순가》 11)
그는 마침내 때가 도래했다고 여겼다.
이백은 너무나도 많은 수련 이야기를 보았다. 황제(黃帝), 강자아(姜子牙),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 어느 한 사람도 입세(入世)하여 창생을 구제하고, 출세(出世)하여 도를 얻지 않은 모범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도 이미 이러한 청사진이 구축되어 있었다. 반란을 평정하고, 공을 이루고, 이름을 날리고, 물러나서, 도를 얻는 것.
“마침내 사직을 편안히 하고, 공을 이룬 후 오호로 떠나리라(终与安社稷,功成去五湖).” (《증위비서자춘(贈韋秘書子春)》)
이때의 이백은 이미 57세였다. 보통 사람에게라면 이미 분발하여 앞으로 나아갈 나이를 훌쩍 지났겠지만, 수련인은 이러한 관념에 가로막혀서는 안 된다. 다만 수련의 길이란 그대로 베끼고 모방하는 것이 아니며, 수련인마다 집착이 다르고 난관의 크기도 저마다 다르기에 거의 참고할 만한 전례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가장 어렵고 가장 엄숙하며 시험이 가장 많은 길이기 때문이다. 정답을 베끼는 것은 수련이 아니며, 수련해 낼 수도 없다.
이백은 장량이 되지도 못했고 강자아가 아니었으며, 적군 속에서 무기를 꺾은 것도 아니었고 도리어 스스로 ‘반군’이 되었다. 영왕이 모반을 일으켰고, 이백은 그렇게 얼떨결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주장은 참소와 의심을 품고, 왕의 스승은 문득 배반하네(主將動讒疑,王師忽離叛)” (《남분서회(南奔書懷)》),
“새가 들판의 풀을 물고, 잘못하여 마른 뽕나무 속에 들어갔네(鳥銜野田草,誤入枯桑裏).” (《수중초(樹中草)》)
이러한 안배를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하옥된 후 이백은 사방으로 구원을 요청했다. 그의 아내, 명장 곽자의(郭子仪), 강남선위사(江南宣慰使) 최환(崔渙) 및 어사중중(御史中丞) 송약사(宋若思)가 그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억울함을 씻어주었다. 마침내 그는 가을에 석방되었다.
“오랑캐는 장차 베어질 것이고, 고래는 곧바로 주륙당하리라. 스스로 극맹(劇孟)이 아님을 가련히 여기니, 무엇으로 좋은 도모를 도우리오(戎虜行當剪,鯨鯢立可誅。自憐非劇孟,何以佐良圖).”
그러나 호사다마라, 조정이 말을 바꾸어 한 장의 칙서로 이백은 야랑(夜郎)으로 유배되었다. 하늘은 줄곧 이백의 이 마음을 단련하고 있었으니, 수련인이 겪는 고생이란 정말로 속인이 상상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하에 대사면령이 내려졌지만, 사면 명단에서 유독 이백만 빠져 있었다.
“홀로 장사국(長沙國)에 버려져, 삼 년이 지나도 돌아감을 허락받지 못하네(獨棄長沙國,三年未許回).” (《방후우은부점(放後遇恩不沾)》)
하옥된 이래로 3년 동안의 시험은 거의 모든 관문에서 그의 한계를 시험했다. 비극적인 고통이었지만, 사실 그것은 또한 수련이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무산(巫山)으로 유배되어 올 때, 이백은 “삼 년 만에 야랑에서 돌아오니, 이로써 금골(金骨)을 단련하네(三載夜郎還,於茲煉金骨).” (《억추파도화구유시竄夜郎》)라는 시를 지었다. 이 3년이란 세월은 부지런히 행하는 상사(上士)로 하여금 상전벽해와 같은 탈태환골을 겪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취주(夔州) 봉절(奉節)의 백제성(白帝城)에 이르렀을 때, 이백은 이 겁난의 마지막 단계를 걸어 마쳤다. 그의 마음속 집착이 닦여 나갔기에 시험은 자연스럽게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때 조정에서 또다시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고, 이번에는 그 명단에 이백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참으로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을 읽는 수많은 이들 중에 이 시의 배경을 생각한 이는 드물며, 심지어 이것이 이백이 젊은 시절 의기양양할 때 지은 작품으로 여긴다. 사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시는 표면 아래에 이백이 평생 동안 수련해 온 과정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침내 응축되어 《조발백제성》이 되었고, 시선의 대표작이 되어 수천 년 동안 세상사람들을 일깨우고 고무해 왔다.
천 년 전을 돌아보면, 이백은 가벼운 배를 타고 풍파를 헤치며 하루에 천 리를 달렸다. 이것은 바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반본귀진(返本歸真)의 길이니, 원숭이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고 도깨비와 요물들이 요괴 짓을 부릴지라도 모든 장애는 다 수련의 성과로 화하였다. 이러한 정경을 마주하고 보니 이백이 어찌 크게 읊조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양쪽 강둑의 원숭이 울음소리 그치기도 전에, 가벼운 배는 이미 만 겹의 산을 지나갔네(兩岸猿聲啼不住,輕舟已過萬重山)!”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천년 뒤에 이 시를 읽을 우리를 위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