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대법 속에서 수련한 지 여러 해가 되었고, 또한 항목 협조 업무를 맡은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많은 동수들이 항목 속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모습은 감동을 주지만, 동시에 좋지 않은 현상들도 보게 되며, 이러한 현상들은 자신에게도 똑같이 존재한다. 여기서 법리(法理)적인 차원에서 한번 정리해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하니, 법에 부합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자비롭게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1. 본말전도: 항목을 너무 높이 추켜세워
정법수련이 최후 단계로 걸어 나아감에 따라, 많은 동수들이 각기 다른 법을 실증하는 항목에서 책임을 맡고 있다. 항목은 대법제자가 중생을 구도하는 형식이며, 동시에 수련에서 제고하고 대법에 동화하는 환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항목을 오랫동안 해오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항목을 너무 높이 추켜세워 하나의 거대한 ‘자아(自我)’로 변질시키기 쉽다.
처음에는 오직 법을 실증하기 위해 하나의 항목을 설립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그것은 자신만의 운영 방식, 자신만의 항목 문화를 갖추게 되고, 장기간 투입된 한무리 동수들도 생겨난다. 더 나아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공동의 마음이 형성될 수 있다.
“우리 이 항목은 특수하다.”
“우리에게는 자신만의 사명이 있다.”
“우리는 일반 항목과는 다르다.”
원래는 사람이 대법의 항목을 하던 것이, 점차 모두가 힘을 합쳐 항목 자체를 수호하는 것으로 변한다. 원래는 항목이 법을 실증하기 위해 복무하던 것이, 서서히 법을 실증하는 것이 항목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마치 속인이 종교를 수호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무슨 종교라는 것이 없고, 속인들이 자아를 수호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실수(實修)하지 않은 채, 모두가 함께 수호하여 그것이 점점 더 강해지고 점점 더 변이되는 것이다. 항목 역시 마찬가지다. 항목 자체에는 잘못이 없으며, 관건은 사람이 닦는 곳에 있다. 그 속에 있는 동수들이 항목을 수호하는 것을 핑계 삼아 자아를 수호하는 데 익숙해진다면, 이 환경은 점차 변이된 인심에 의해 오염되어 법에서 이탈하는 변두리로 향하게 될 것이다.
나 자신에게서도 이러한 것들을 본 적이 있다. 서로 다른 의견에 직면했을 때, 마음속에서 맨 먼저 튀어나오는 염원은 “내가 안으로 찾아야 한다”가 아니라, “저 사람들은 우리의 실제 상황을 모른다”라는 것이다. 이 염두는 어찌나 자연스럽고 또 그렇게 빨리 나오는지.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그 ‘나’가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며, 단지 수호하는 것이 개인의 ‘나’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이 항목’일 뿐이다.
사부님께서는 《대뉴욕지역법회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떤 모순이 나타나든지, 어떤 상황이 나타나든지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 자신에게 누락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다. 만약 누락이 없다면 누구도 이 틈을 탈 수가 없다.”
항목이 의심을 받고, 누군가 의견을 제기했다면, 설마 자신이 문제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지금 수호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법인가, 아니면 ‘우리 이 항목’인가?
2. 우월감과 공자랑: 하늘의 공을 가로채어 자신의 것으로 삼기
쉽게 싹트는 또 다른 문제는 바로 우월감입니다. 어떤 항목의 분위기 자체는 본래 사람으로 하여금 우월감을 낳기 쉽고, 오래 머물렀던 동수일수록 더욱 이러한 염두를 품기 쉽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이룩해 낸 것이다.”
“우리는 최전선에 있다.”
“외부 동수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일전에 한 동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 이 항목이 이렇게 수년 동안 걸어온 것은, 아무나 와서 두어 마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당연하다고 여겼으나, 나중에야 그 말속의 ‘우리들이 걸어왔다’라는 것은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항목을 자신의 것으로 여겨버린 것임을 보게 되었다.
매 사람은 그저 대법 속의 한 입자에 불과할 뿐이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법이며, 이 모든 것을 성취시킨 것은 오직 사부님이시고, 대법의 위덕과 사부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수련하고 사람을 구할 기연(機緣)을 주신 것이다. 만약 대법이 하사한 지혜와 성과를 ‘우리 이 항목의 특수한 자본’으로 바꾸어 버린다면, 어찌 법을 실증하는 것을 ‘우리를 실증하는 것’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마음이 일단 자라나면, 표면적인 떠들썩함을 추구하기 쉽고, 형식상의 성과와 영향력을 중시하면서도 정작 착실하고 견실한 수련과 정체적인 협력은 소홀히 하게 된다. (외국과 비교하고, 현지의 다른 항목과 비교하는) 비교심이나, 혹은 공치사를 좋아하고 조급하게 성과를 탐하며, 자신을 실증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노력은 실수(實修)와는 정반대로 가는 것이니, 만약 개변하지 못한다면 헛되이 기연을 낭비하는 것이며 진상이 크게 드러날 때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 사람은 군중 정서와 오만(自傲)에 의해 가려지기 쉬우며, 문제의 본질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된다. 평소에 비교적 수련을 잘하던 일부 동수들도 그 속에 처하면 함께 미혹되어, ‘우리 항목’의 운영을 수호하는 것을 정법(正法) 형식으로 오인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향이 빗나간 곳으로 이끌려 가게 되니, 이야말로 진정한 손실이다.
대법제자는 어느 항목도 진정으로 누구에게 속하는 것이 없으며, 우리는 단지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책임을 맡도록 안배되었을 뿐이다. 진정으로 성숙한 항목은 오래 할수록 자신의 특수성을 강조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점점 더 겸허해지고, 원용(圓容)하며, 정체와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
3. 분별심이 깊어질수록, 정체를 분열시키기 쉬워
항목을 너무 높이 추켜세우면,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강한 분별심을 형성하게 되고, 나아가 정체의 분열을 야기한다.
하나의 항목이 장기간 운영되면, 자신들만의 소모임을 형성하기 쉬우며, 이것 자체는 꼭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외부의 동수들은 우리의 실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인식이 점점 더 깊어질수록, 항목 외부로부터 오는 어떠한 의견이든 모두 ‘간섭’이나 ‘이해 부족’으로 쉽게 오해받는다.
이때는 법이 우리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소모임 안에서 형성된 공동 인식이 외부의 동수들을 가늠한다. 모두가 점점 외부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는 능숙해지지만, 점점 자신의 문제를 보는 것은 어려워진다. 책임자의 조율이 어디가 미흡한지, 다른 동수의 집착이 어디에 있는지, 다른 항목이 어디가 우리보다 못 한지는 아주 빨리 지적할 수 있으면서도, 정작 조용히 모여 함께 묻는 일은 드물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기가 이렇게 힘든가?
왜 우리는 항목이 조정되는 것을 이렇게 두려워하는가?
왜 우리는 점점 더 우리의 특수성을 강조하는가?
하나의 항목이 오직 자신만을 중시하고 곳곳에서 정체 조율의 피드백과 배치를 거부할 때, 표면적으로는 항목을 수호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미 정체 협력에 심각한 간격과 분열이 나타난 것이다. 어떤 동수들은 심지어 “음양(陰陽)의 평형, 일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이를 견제하는 저항력이 있어 균형을 잡는다”라는 말로 현재의 국면을 이해하기도 하는데, 이는 심각하게 잘못 깨달은 인식이다. 협력하는 방향의 표준은 오직 하나뿐이며, 하나의 국가에는 정체의 조율과 책임을 맡는 하나의 불학회(佛學會)가 있을 뿐이다. 더욱이 “우리 이 항목에는 우리만의 특수한 상황이 있다”라는 것이 정체와의 협력을 거부하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부님께서는 《각지 설법 11》〈무엇이 대법제자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일부 수련생들은 서로 협력함이 매우 부족하다. 그냥 조금 부족한 게 아니라 심지어 일을 무너뜨린다. 내가 당신에게 알려주는데, 어떤 마음이었든지 대법제자의 항목이고 혹은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당신이 일을 무너뜨리는 작용을 일으켰다면 당신은 곧 마의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대법제자의 정체는 그 어떤 항목에 의해서도 잘려 나갈 수 없다. 한 사람이 안으로 찾을 수 있듯이, 한무리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안으로 찾을 수 있으며, 한 항목 역시 안으로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전체 항목이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여길 때야말로 진정으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진정으로 닦기 어려운 것은 흔히 한 사람의 ‘나’가 아니라, 일군의 사람이 공동으로 형성한, 더욱 은폐되어 있고 보기 힘든 ‘우리’이기 때문이다.
4. 진정한 정념정행이란 무엇인가
법을 실증하는 데는 당연히 정념이 필요하다. 그러나 또한 불안감을 주는 현상도 보게 된다. 한 항목이 장기간 “저항에 부딪히면 무조건 뚫고 나가야 한다” “위험을 고려하는 것은 정념이 없는 것이다” “안전상의 우려를 제기하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무거운 것이다”라는 관념을 형성했을 때, 무모함은 ‘정념’으로 포장되어 버린다.
대법제자는 속인 사회 속에서 수련하며, 속인 사회의 미혹과 이 한 층의 법을 깨뜨리지 않는다. 상인 사회 속에서 법을 실증할 때일수록 더욱 올바른 길로 걸어야 하며, 이지적이고 청성하게 법률 법규, 안전 세부 사항 및 전체 구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지, 개인의 열정이나 단체의 격정에 치우쳐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된다. 법률 절차를 준수하는 것은 속인 사회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며, 안전상의 영향을 고려하는 것은 정념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모든 규범을 무시하는 것”을 정념정행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바로 위험한 인심의 팽창이다.
다수의 맹종과 부화뇌동은 맹목적인 돌진을 정념으로 바꿀 수 없다. 진정한 정념은 법에 대한 바른 깨달음과 이해에 기초를 둔 것이며, 청성하고 이지적이며 정체를 원용하는 것이지, 한 무리 사람들이 함께 휩쓸려 앞으로 돌진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한 항목이 “구도의 기치를 내걸기만 하면 속인 사회의 모든 규범을 돌파할 수 있다”라는 집단 공식을 형성했다면, 그것은 신성한 수련과 구도를 극단의 변두리로 밀어 넣는 것이다.
5. 수련에서 이지적이지 못함: 꿈과 사명감이 법을 대신할 순 없다
어떤 동수들은 자신의 사명에 대해 매우 강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일찍이 일부 꿈이나 다른 공간의 감응을 겪기도 했다. 우리는 이에 대해 남을 대신해 정의를 내리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수련 길은 자기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다. 이러한 개인 인식이 항목 전체의 공동 신념으로 변질되고, 심지어 조정을 거부하는 근거가 되어 “우리가 사부님과 맺은 약속은 바로 이것을 하는 것이다” “그 누구든 이 항목을 조정하려는 것은 사부님의 안배를 파괴하는 것이다”라고까지 이르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부동(不同)한 층차에는 부동한 이해가 있으며 부동(不同)한 층차에는 부동한 현현(顯現)이 있다.”(《전법륜 2)》〈불(佛)과 도(道)〉)
다른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결국 자기 층차의 제한을 받는다. 설령 진정으로 일부 것들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본 것이 전부임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며, 법을 대신할 수는 더욱 없다. 사명과 서약이 한 항목이 정체 위에 군림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나 자신에게도 이와 유사한 마음이 있었고, 자신이 하는 방향이 틀림없이 옳으며 근거가 있다고 여겼다. 나중에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그 ‘틀림없이 옳다’라는 것 속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법이고, 또 얼마나 자신이 내려놓지 못하는 집착인지 진정으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진정으로 물어야 할 것은 “이 항목이 다른 공간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가 아니라, 다음의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항목에 대한 이해를 이미 우리 자신에 의해 절대화시켜 버린 것은 아닌가?
6. 나아갈 방향
이러한 문제들을 알았으니,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는 근본상에서 안으로 찾는 것이다. 자신에게 장기간 형성된 부정확한 관념과 빗나간 인식을 찾아내어, 법에서 바로잡고 마음의 매듭을 풀며, 정체로 복귀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동수이고, 그다음이 정체 항목 속의 한 입자일 뿐이며, 서로 간에 순정(純正)한 수련의 초심으로 서로를 대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신경문 《각성하라(驚醒)》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한 가지 일을 평론할 때, 마땅히 일이 좋고 나쁨만을 논해야지 개인에 대해 평론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에게든 慈悲(츠뻬이)하게 할 수 있고, 누구에게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이것은 정말로 일반인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특히 무슨 일을 하든 모두 중생에게 慈悲(츠뻬이)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어렵다. 하지만 대법도(大法徒)는 반드시 해내야 한다!”
마음속에 사념(私念)이 없고, 오직 법을 수호하기 위해서이며, 정체와 동수를 위하는 마음뿐일 때, 문제를 지적하는 어투는 반드시 평화롭고 선의로 가득 찰 것이며, 듣는 이 역시 그것을 느낄 것이다.
둘째는 법에서 진정으로 교류하는 것이지, 각자 할 말만 하거나 표면적으로는 화기애애하면서 마음속은 닫아두어서는 안 된다. 많은 항목 내부의 모순은, 결국 모두가 마음을 내려놓고 법에서 깊이 있게 교류하지 않은 채, 단지 사람과 사람의 차원에서 부딪히기만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한 가장 근본적인 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는 것이다.
“이 항목 속에서 나의 기점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중생을 구도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우리’나 ‘항목 자체’를 수호하기 위함인가?”
사부님께서는 《2004년 뉴욕국제법회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만약 당신이 법을 실증한다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당신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당신의 의견에 충격(衝擊)을 주고 당신의 목소리를 눌러 당신이 기분 나쁘다고 느끼거나, 만약 다른 사람이 당신의 어떤 문제를 견주어 당신에게 반대 의견을 제출하거나,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당신이 불편을 느낄 때면, 당신은 일어나서 반대하고 변명한다. 그리하여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마저도 꺼리지 않는데, 가장 선의적인 변명이라 할지라도 당신은 모두 자신을 실증하는 것이다. (박수) 왜냐하면, 당신이 대법을 제1위에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당신이 제일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다.”
정법 수련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항목은 우리의 수련 환경이지 우리의 신분이 아니며, 사명은 법을 실증하기 위함이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지켜야 할 것은 영원히 법이며, 자신의 수련이지, 그 어떤 항목이 아니다. 원컨대 우리 모두 법을 스승으로 삼고, ‘나’를 내려놓으며, 또한 특수한 ‘우리’도 내려놓고, 묵묵히 착실하게 최후의 수련 길을 걸어 나갑시다.
이상은 현 단계에서 개인의 작은 인식이니, 법에 부합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자비롭게 바로잡아 주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