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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유라시아 교류를 확대한 통일 왕조 원조(元朝) (3)

(1206년—1368년)

심연(心緣)

【정견망】

쿠빌라이의 원조(元朝) 건립

쿠빌라이는 뭉케의 부고를 들었을 때 대칸의 지위를 다투기 위해 남송과 잠시 화친하고 군사를 철수하여 북쪽으로 돌아갔다.

쿠빌라이는 먼저 자신의 대본영인 개평(開平)으로 돌아가 일련의 배치를 마친 뒤 전통적인 대칸 선출 형식을 거부하고 1260년 3월 개평에서 스스로 대칸의 자리에 올랐음을 선포했다(원 세조). 같은 해 4월 뭉케의 막내동생 아릭부케 역시 카라코룸에서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마침내 쿠빌라이는 한족 귀족과 일부 몽골 귀족의 지지에 힘입어 1264년 아릭부케를 격파하고 몽골의 제5대 대칸이 되었다. 곧이어 쿠빌라이는 연호를 지원(至元)으로 고치고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도읍을 정했으며 한인(漢人)이 황태자를 미리 세우는 방식을 모방하여 제위 계승자를 확정했다.

원나라가 개국한 후 모든 정치 제도와 국가 기관 조직은 대체로 요나라와 금나라의 옛 제도를 답습했다. 1272년에는 또 연경 옛 성의 동북쪽에 신성을 쌓고 궁전과 아서(衙署)를 건설했다. 수도의 이름을 대도(大都)라 명명했다. 이후 원나라의 정치 중심지는 완전히 중원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또 중원의 전통에 따라 《역경(易經)》의 “대재건원(大哉乾元)” 학설을 채택해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쳤고, 쿠빌라이는 원 세조가 되었다.

쿠빌라이의 신세와 문치무공(文治武工)

쿠빌라이는 칭기스칸의 손자이자 툴루이의 아들이다. 툴루이는 모두 11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장자인 뭉케, 쿠빌라이 및 아릭부케는 동모(同母)형제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쿠빌라이의 용모 또한 평범하지 않았다. 쿠빌라이의 용모에 관해서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서 대략적으로 엿볼 수 있다. “대칸은 풍도가 당당하고 보기만 해도 사람으로 하여금 호감을 느끼게 한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키이며 근육과 사지의 배치가 적절하고 얼굴은 불그스름하면서도 희며 눈은 검고 코는 바르다.”

재치와 지혜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쿠빌라이 역시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는 사람을 알아보고 등용하는 데 능숙했고 유술(儒術)을 신임하였으며 법도를 세우고 기강을 펼쳐 그 규모가 원대했다. 젊은 시절에 늘 한인들과 접촉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적지 않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당 태종은 그가 숭배하는 대상이었다. 아울러 많은 중원 한인들을 초빙해 본받으려 했다.

1251년 뭉케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후 쿠빌라이가 한지(漢地) 사정에 가장 익숙했기 때문에 쿠빌라이에게 맡겨 다스리게 했다. 쿠빌라이는 금련천(金蓮川)에 막부(幕府)를 설치하고 적극적으로 인재를 규합하여 한지를 재건하는 사업을 기획하고 집행하게 했으며 관대한 정치를 시행해 분란이 다스려지지 않던 상황을 개선했으니 그의 재주와 지혜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275년 쿠빌라이는 군사를 보내 남송을 정벌했다. 1279년 남송이 멸망했다. 이에 이르러 쿠빌라이는 대몽골 제국의 대칸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황제였으며, 더욱이 후자를 ‘실(實)’로 삼고 전자를 ‘명(名)’으로 삼았다.

쿠빌라이의 문치무공은 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1. 대외적인 무력 팽창

몽골은 호전적인 민족으로 군사적 팽창에 거의 끝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대표한다고 여겨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죄인들을 정복하고 응징하였으며 세상을 통치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젊은 시절부터 각지를 정벌하였고 대원 제국을 건립한 후에는 군사적 규모를 계속 확대했다. 고려를 항복시키고,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동정(東征)했으며, 네 차례에 걸쳐 안남(安南)을 남정(南征)하고, 다섯 차례 미얀마(緬甸)와 란나왕국(八百媳婦)을 남정했으며, 동중국해와 남양 군도 등에 군사를 동원했다.

그중 일본 원정은 출사(出師)가 순조롭지 못해 유명한 일본의 “가미카제(神風)” 전설을 낳기도 했다. 일본은 두 차례나 쿠빌라이의 사신을 참수했고 또 두 차례 그 원정을 실패하게 만들었기에 쿠빌라이는 본래 세 번째 원정을 통해 명성을 유지하려 했으나 결국 대신들의 권고 및 안남 정벌로 인해 원정을 포기했다. 이 외에도 안남 정벌은 34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나 결과적으로 많은 병사를 잃고 장수를 다치게 했으며 하나의 번속을 얻은 것 외에는 손해를 보고 얻은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으며, 란나 왕국은 시종일관 정복하지 못했다. 쿠빌라이의 대외적 무력 발전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은 상황 속에서 점차 포화점에 이르렀다.

2. 개국건제(開國建制)

몽골 대제국의 완성 및 원조의 모든 개국 규모와 각종 정치 제도는 다 원세조 때 이루어진 것이므로 원세조는 원조의 개국건제 시기에 속한다. 대신 요추(姚樞)의 영향을 받아 원세조는 한인의 문물교화를 상당히 흠모였으며, 두묵(竇默), 허형(許衡), 류병충(劉秉忠), 왕문통(王文統), 장문겸(張文謙)을 비롯한 많은 한족 유학자들을 초빙해 중국형 정치 제도를 제정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연호와 국호 제정

원세조가 개평에서 즉위한 원년을 기점으로 연호를 중통(中統) 원년으로 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호는 류병충의 건의를 채택하여 대원(大元)으로 이름 지었다. 과거 역대 왕조들은 모두 당초의 봉읍 이름으로 국호를 삼았으나, 《역경》에 나오는 “대재건원”의 뜻으로 명명한 것은 또한 몽골 통치자가 중국의 문화 전통을 받아들인 후에 도리어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을 자처했음을 설명해 준다.

② 도읍 건설

당·송 제도를 모방하여 건립한 정치 체계의 계속 추진. 1272년 원세조는 정식으로 연경을 대도(大都)로 삼고 개평을 상도(上都)로 삼았다. 또 상도를 하도(夏都)로 삼고 대도를 동도(冬都)로 삼아 황제는 봄·여름에는 하도에 있고 가을·겨울에는 동도에 있었다. 그러므로 지리적으로 볼 때 대도는 중국 대본토를 통제하는 정치 중심지였고 상도는 북쪽의 몽골 본토를 통제하는 책임을 맡았다.

뭉케 통치 시기 몽골 제국은 당·송의 제도를 모방하여 각급 정부 기구를 건립하였고 수도에 6부를 설치하였으며 중앙 권력을 행정, 군사, 감찰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동시에 또 금나라 제도를 모방해 추밀원(樞密院)에서 직접 각 성을 주관하게 했다. 쿠빌라이는 이어서 상술한 정치 체계를 계속 추진하고 완성했다.

③ 전례를 성대히 거행함

몽골은 장기간 제사 예법이 단지 희생의 고기를 베고 말의 젖으로 제사하며 몽골 무당의 축사로 치렀을 뿐이다. 원세조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제사 전례를 성대히 거행하기 시작하였으며 칠묘(七廟) 제도와 일체의 제사 전례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황조(皇祖)와 고비(考妣)의 존호와 묘호를 추존했다.

④ 문자 제정.

몽골인은 원래 언어만 있고 문자는 없었으나 후에 점차 위구르의 표음 글자를 사용했다. 나중에 원세조가 토번의 승려 파스바(八思巴)를 국사(國師)로 모시고 토번 문자를 운용하여 몽골 새 글자 1,000여 자를 따로 만들었으며, 또 한인의 영향을 받아 서식은 직서(直書)를 채용했다.

⑤ 국교(國敎) 확정.

몽골은 장기간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종교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 통일을 완수하려면 반드시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깊이 느꼈다. 그러므로 원세조는 중국을 통일한 후 종교에 대해 방임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수많은 교파 중에서 불교의 라마교가 가장 존중을 받았다. 쿠빌라이 본인은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도 아주 존숭했다. 그의 제창 아래 전국의 불교 사원은 4만 2천 곳에 달했다.

⑥ 역법 제정.

원세조는 천하를 통일하자 곧 역법을 고쳐 수리하였고, 지원(至元) 17년에 ‘수시력(授時曆)’을 반포했으니 이는 당·송 이래 가장 완벽하고 정확한 역법이었다. 그 후 또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곽수경(郭守敬)이 수정을 완료할 때까지 80여 년간 틀린 적이 없었으니 원조의 일대 큰 사건이라 이를 만하다.

⑦ 행초법(行鈔法) 제정.

사회에서 유행하던 동전은 송, 요, 금을 거쳐 원나라에 이르러 이미 매우 혼란스러워져 은실(銀絲)의 간편함만 못하였기에 실은(絲銀)을 바탕으로 삼아(지폐가 실은의 대체물이 됨) 화폐 가치를 유지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그리고 원세조의 본래 의도는 지폐 정책을 힘써 다지려 하였으나 백성들이 습관에 젖어 있는 탓에 점차 그만두게 되었다.

⑧ 수리 교통.

원세조 때 수리 교통의 중요 건설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운하를 개통한 것으로 회통하(會通河) 및 통혜하(通惠河)르 개통해 개평을 포함하는 남북 운하를 전면 개통함으로써 강소·안휘 일대의 조운(漕運)이 대도에 직접 이르게 했다. 이는 남북 간의 교류를 강화했다. 다른 하나는 해운(海運)을 통하게 한 것으로, 해운이 원조 때 정식으로 국가의 조운 항로가 되도록 했다.

⑨ 참적(站赤, 역참) 제도 완성.

원조는 광대한 구역을 통치하고 전국적인 정치, 군사, 경제 및 교통의 연계를 유지하는 데 의지한 것은 바로 “참적 제도”였다. 몽골인들이 말하는 참적 제도는 곧 역참인데 중국에서 유래가 오래되었으나 원조에 이르러 이를 확충하였고 원세조 때에 이르러 마침내 완성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국의 참적은 총 1,400곳에 달했는데 이 숫자는 변방 지역과 대륙의 네 칸국 간의 역참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역참과 나란히 행해지며 긴급 문서를 전달하는 데 전용되는 기구를 급체포(急遞鋪)라고 불렀다. 10리 혹은 15리, 25리에 한 포를 설치하고 각 포마다 포정(鋪丁) 5명을 두었다. 포정은 주야로 400리를 가는데 도보로 질주하여 군정 기밀 문서를 릴레이로 전달했다.

원대의 역전(驛傳) 제도는 당시의 페르시아, 러시아, 이집트 및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모두 영향을 미쳤으며 러시아에서는 무려 수백 년 동안이나 그대로 이어져 사용되었다.

⑩ 농사(農社) 제도 건립.

원세조는 한인의 풍토와 인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농업을 제창하고 ‘농사 제도’를 제정했다. 그 제도는 상당히 주도면밀했으며 국가가 감독하는 농민의 사단(師團) 조직으로 그 목적은 농전과 수리를 진흥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정치적인 조직 훈련의 작용도 겸하여 그 군정 제도와 서로 배합되게 했다.

3. 반란 평정 및 변강에 대한 관리 강화

카이두은 오구데이의 손자로 대칸의 자리가 툴루이 계통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 줄곧 불만을 품었다. 아릭부케가 실패한 후 그는 오구데이 칸국의 영지를 차지했고 1268년(지원 5년) 반란을 일으켰다. 격파된 후에도 그는 또 차가타이 칸의 손자인 두아(篤哇)와 결탁해 화주(火州, 투르판 지역)를 소란스럽게 했다. 1287년 카이두는 또 동부 제왕의 후예인 나얀(乃顏), 시드루(勢都兒), 카다단(哈丹) 등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원세조는 소식을 접한 후 친히 두 갈래 대군을 거느리고 토벌하러 가 반란 세력을 소멸했다.

원세조는 동북 제왕의 반란을 평정한 후 요양행성(遼陽行省)을 설치하였고 반란을 일으킨 왕의 봉지 내에 만호부(萬戶府)를 두어 번왕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사용했다. 이때 카이두가 서북에서 여전히 소란을 피우자 1289년 7월 세조는 이미 74세의 고령임에도 여전히 군사를 거느리고 친정하기로 결정했다. 카이두가 이 소식을 듣고 멀리 도망쳤다. 세조가 서거할 때 카이두는 이미 알타이산 북쪽으로 쫓겨나 있었다. 1302년 카이두가 패사했다. 1306년 카이두의 아들 차파르(察八兒)가 항복했고 서북 제왕들의 반란은 이로써 모두 평정되었다.

쿠빌라이 통치 시기에는 또 변강에 대한 관리를 강화했다. 원조 정부는 티베트에 우스(烏斯), 장(藏), 나리스·구루·손(納裏速·古魯·孫) 등 3로(路)의 선위사사도원수부(宣慰使司都元帥府)를 설치하였고 도원수, 선무(宣撫), 안무(按撫), 초토(招討) 등의 사(使)를 두었다. 우스는 전장(前藏)이고 장은 후장(後藏)이며 나리스·구루·손은 아리(阿里) 삼부이다. 당시 전후장을 나누어 13개의 만호로 삼았고 만호장 이상의 관리는 중앙에서 직접 임명했다. 이 외에도 티베트에 역참을 설치하고 호구를 조사하며 조세를 거두고 군대를 둔전(屯戍)시켰다. 요컨대 원조부터 시작해 티베트 지역은 이미 정식으로 중국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지방 행정 구역이 되었다.

원조는 또 운남에 행성을 설치했다. 행성 아래에는 또 로(路), 부(府), 주(州), 현(縣)을 설치했다. 또 여러 개의 군민총관부를 설치했다. 이후 운남과 내지(內地)의 연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이 외에도 원조 정부는 대만 지역에 정식으로 행정 권력 기구, 즉 팽호순검사(澎湖巡檢司)를 건립했다.

원나라의 대통일과 관련 조치는 변강 각 민족과 중원 지역의 경제, 문화 연계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각 민족 간 연계의 강화는 다시 전무후무하게 통일된 국가를 공고히 했다. 당시 대량의 한족이 변방으로 파견되어 개간에 나섰고 변방 각 민족 또한 대량으로 내지로 이주해 정착하였으므로 송, 요, 서하, 금 시기의 각 소수민족들이 한구석에 치우쳐 지키던 상황에 점차 변화가 생겨 서로 간에 소통과 연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쿠빌라이는 또 공자를 높이고 도(道)를 중시했으며 어진 인재를 임용하고 학교를 설립했다;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유민들을 구휼했다. 그는 또 “조세를 회복하고, 부역을 균등하게 하며; 형전(刑典)을 분명히 하고, 적체된 옥사를 다스렸다.”

쿠빌라이 통치 시기의 경제 번영

쿠빌라이 통치 시기에 취한 상술한 조치들은 경제의 발전을 유리하게 추동했다.

농업 방면에 있어서는 농상(農桑 농업과 양잠)을 중시하는 정책을 관철하였기 때문에 각지의 농업 생산은 모두 부동한 정도의 회복과 발전을 거두었다.

농업 발전의 표현은 첫째로 수리 관개업의 발달이었다. 원나라 초기에 안에는 도수감(都水監)을 설치하고 밖에는 각처의 하거사(河渠司)를 설치하여 수리를 일으키고 하천의 제방을 수리했다. 송, 금 시기 수리 공정은 원조에 이르러 점차 모두 회복되었다. 왕정(王禎)의 《농서(農書)》에 소개된 관개에 사용되는 물레방아만 해도 7종이 있었는데 그중 고전통차(高轉筒車)는 물을 200여 척의 고지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둘째로, 식량 생산량도 비교적 크게 향상되었다. 원세조 시기에 관중(關中) 지역의 밀은 “천하에 성행(盛行)”하였고 관(關), 농(隴), 섬(陝), 낙(洛)에 “해마다 곡식이 풍성하고 번창하며 백성들이 평안하고 즐거운” 현상이 나타났다. 장강 이남 지역의 생산량은 더욱 높았는데 오직 강소와 절강 한 성의 연간 식량 생산량만 해도 전국 연간 식량 생산량의 3분의 1이 넘었다. 소수민족 지역의 농업 생산 또한 큰 발전을 이루었는데 당시는 북쪽으로는 오늘날의 예니세이강 상류 일대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사천 남부, 운남에 이르기까지 모두 둔전(屯屯)이 있었다.

이 외에도 남방 농업의 발전으로 인해 남도의 면화 생산지역이 비교적 빠르게 확대되었다. 이와 동시에 면화는 북쪽의 섬감(陝甘) 일대에도 보편적으로 재배되었다. 당시 대다수의 중국에는 이미 면화가 널리 재배되고 있었다.

상업 방면에 있어서도 번영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원 대도는 “칸발릭”으로 불렸는데 당시 대칸의 도읍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제 중심지 중 하나였다. 동유럽, 중앙아시아에서, 아프리카 해안에서, 일본, 고려에서, 남양 각지에서 상단(商團)과 사신단이 모두 대도로 찾아왔다. 국내에서는 티베트의 라마들이 매번 왕래할 때마다 수많은 화물을 운송하였는데 종교 단체이면서 상단의 성격을 겸하고 있었다; 동남 연해에서 톈진으로 직항하는 바다 배들도 민(閩), 광(廣), 강(江), 절(浙)의 비단, 도자기와 남양의 향료를 가져왔다. 대도 성 안에서 유통되는 상품은 식량, 차, 소금, 술, 명주 비단, 보주(寶珠) 등이었으며 또 단일 상품을 집중 경영하는 시장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쌀 시장, 철 시장, 모피 시장, 마우(馬牛 말과 소) 시장, 낙타 시장, 진주 시장 등이었다. 상업 행회(行會)의 조직 중에는 “행로(行老)”가 있어 대내외 사무를 책임졌다.

그리고 북쪽의 중요한 도시는 육로 교통 간선을 따라 탁주(涿州), 진정(真定), 대동(大同), 태원(太原), 핑양(平陽), 봉원(奉元, 서안), 개봉, 제남 등이 있었다; 다시 북쪽으로 나아가면 상도, 카라코룸, 진해(鎮海) 등의 도시가 있어 수많은 한족과 서역 상인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조주(肇州, 흑룡강 조원肇源 서남부) 역시 동북의 중요한 도시였다. 서남 방면에는 성도(成都), 곤명(昆明), 대리(大理) 등의 도시가 있어 서남 소수민족의 생활까지도 전국의 상업망에 포함시켰다. 다시 서쪽으로 티베트의 시가체(日喀則) 사자사(薩迦寺) 일대까지 연결되었고 네팔과도 무역 연계가 있었다.

운하와 장강을 따라 어떤 옛 상업 도시들은 더욱 융성하게 발전하였는데 항주, 평강(平江), 진강(鎭江), 집경(集慶, 지금의 남경), 양주(揚州) 등의 도시가 비교적 유명했다.

이 외에도 연해 도시는 광주, 천주(泉州), 복주(福州), 온주(溫州), 경원(지금의 영파), 감포(澉浦), 상해 등이 있었는데 그중 복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박사(市舶司)와 제거사(提舉司)를 설치한 대외 개방 무역 항구였다. 천주 같은 곳은 이미 대외 무역의 최대 항구가 되어 수출 상품은 도자기, 비단 등이었고 수입 상품은 정향, 백두구, 후추, 다이아몬드, 보주 등이었다. 원나라 사람 왕대연(汪大淵)의 《도이지략(島夷志略)》에는 일찍이 천주와 왕래가 있던 국가와 지역이 100여 곳에 가깝다고 언급한 바 있다.

1270년(지원 7년) 국내 상세(商稅)는 “은 4만 5천 정을 액수로 삼고 액수를 넘는 것은 따로 증여(增餘)로 처리했다”, 1289년(지원 26년)에 이르러 상세는 이미 “중서성 관할지역인 복리(腹里)에서 20만 정, 강남은 25만 정”으로 늘어나 총 45만 정에 달했다. 20년도 되지 않아 10배나 늘어났다. 상세의 성장은 당시 상업의 번영을 반영했다.

말하자면 쿠빌라이 통치 기간 동안 원조는 전무후무한 통일을 실현하였고 경제는 번영하였으며 사회는 안정되고 국가는 매우 강성했다. 원조의 번영과 부유는 우리가 마찬가지로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서 엿볼 수 있다.

쿠빌라이는 20년 동안 대칸에 있었고 나중에 중국을 15년 동안 통치하여 재위한 지 총 35년이었다. 지원 31년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80세였고 사후 묘호는 세조(世祖)이다.

쿠빌라이에 대한 평가

상술한 쿠빌라이의 문치무공으로 말하자면 쿠빌라이는 몽골에서 칭기스칸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제왕이며, 특히 그의 통치 기간(1260년~1294년)을 몽골의 전성기로 삼아 몽골 제국에 있어서는 시대의 분수령이 되는 시간이었다. 이때로부터 몽골인들이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를 통제하던 국면은 14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끝났다. 그리고 그의 영토는 아시아와 유럽 동부를 포함했으니 강역의 광대함이 전무후무했다.

《원사(元史)》가 쿠빌라이에 대해 내린 평가는 다음과 같다.

“그 도량이 웅대하고 넓었으며 사람을 알아보고 등용하는 데 능숙하고 유술(儒術)을 신용하였으며 이로써 중화(夏)로 오랑캐를 변화시키고 법도를 세우고 기강을 펼쳤으니 일대(一代)의 제도를 만든 까닭에 그 규모가 웅대하고 원대했다.”

이 위대한 황제 쿠빌라이에 대해 외국인인 마르코 폴로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이렇게 썼다.

“쿠빌라이 대칸은 여러 군주들의 대군주 혹은 황제”이며 “인류의 원조 아담(Adam)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상에서 일찍이 백성과 토지, 재화를 널리 소유한 강대한 군주를 본 적이 없다”라고 하였고 아울러 “그는 실로 이 명칭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또 다른 외국인이 저술한 《몽골원류(蒙古源流)》에서 쿠빌라이에 대한 평가는 “대국(大國)의 무리를 다스리고 사방의 나라를 평정하였으니 네 모퉁이에 괴로움이 없고 팔방에 장애가 없으며 천하를 정연하게 하여 뭇 서민들로 하여금 다 같이 평안을 누리게 했다.”

페르시아의 역사학자 와사프(Wassaf)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국경(페르시아)에서 몽골 제국의 중심에 이르는 곳까지, 복된 황제이자 공정한 카안(可汗)께서 이곳에 머물고 계신다. 비록 거리가 1년이나 걸릴 정도로 멀지만, 그의 위대한 공업과 훌륭한 업적은 멀리 퍼져 우리들이 사는 곳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제도와 법률, 깊고 예리한 지혜, 현명한 판단력, 그리고 탄성을 자아내는 치적은 유명한 상인이나 박학다식한 여행가 같은 신뢰할 수 있는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볼 수 있었던 그 어떤 위인보다도 뛰어나다.”

이를 보면 마르코 폴로 여행기와 중국 역사가들이 쿠빌라이에 대한 평가가 서로 상호 검증될 수 있으며, 쿠빌라이는 정말 훌륭한 대칸이자 황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쿠빌라이 대칸은 정말로 “이름에 걸맞은 실권을 가졌던 것일까?” 우리는 마르코 폴로의 평가가 결코 근거 없는 말이 아니라고 본다. 당시 원(元) 왕조는 전례 없는 통일을 이룩했고, 경제는 번영했으며, 사회는 안정되었고, 국가는 매우 강성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원 제국이 개방적인 국가로서 중국을 찾는 외국인들을 환영하며 심지어 일정한 우대 조치까지 베풀었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와서 쿠빌라이 대칸의 총애와 중용을 받았으며, 스스로 여러 차례 각지로 파견되어 사신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자처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로 하여금 대칸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만들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의 광활한 영토와 사회의 번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가 유람하며 거쳐 온 유럽, 서아시아 등의 국가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쿠빌라이 대칸이야말로 “오늘날 세상에서 일찍이 본 적 없는, 인민과 영토, 재화가 가장 풍부한 강력한 군주”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살고 인식했던 서구 세계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당시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분열되어 있었고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가 고향인 베니스(Venice)로 돌아왔을 때, 그는 제노바(Genova) 도시와의 해전에서 그만 패배해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의 《여행기(동방견문록)》은 그가 감옥에서 구술한 것을 다른 죄수가 기록한 것이다. 로마 교황은 명목상으로는 서유럽의 공통 군주였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위신(威信)이 없었고, 유럽 각국은 끊임없이 분쟁을 벌여 대일통(大一統)을 이룬 원 제국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의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그러므로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대칸을 찬양한 말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