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대법제자
【정견망】
얼마 전 북송 시기 소강절이 지은 《어초문대(漁樵問對)》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았다.
“천하가 다스려지려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실천을 숭상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려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말만 숭상한다. ……말로 하는 것은 몸으로 실천하는 것만 못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것은 마음을 다하는 것만 못하다.”
반복해서 음미할수록 전통문화 속에 내포된 철리(哲理)와 우리 대법제자들의 오늘날 착실한 수련이 서로 뗄 수 없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특히 우리 각 항목이나 각 지역의 협조인, 책임자들의 수련 상태와 대조해 보면 이 대목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고 안으로 찾게 만든다.
1. ‘실천을 숭상함(尚行)’과 ‘말을 숭상함(尚言)’: 협조인은 솔모수범하여 실천해야 하며, 탁상공론하지 말아야
《어초문대》에서 말하기를 “실천을 숭상하면 돈독하고 성실한 풍조가 유행하고, 말을 숭상하면 궤휼하고 거짓된 풍조가 유행한다”고 했다. 이는 실무적인 행동을 숭상하면 사회에 착실한 기풍이 돌고, 말만 앞서는 공허한 담론을 숭상하면 허위와 교활한 기풍이 유행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수련 환경에 대입해 보면, 어느 지역이나 항목의 전체적인 상태가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대개 협조인의 상태와 직결된다. 어떤 협조인들은 평소 교류할 때 법리를 아주 명백하게 말하고 말하는 것이 이치에 정연하며, 아주 높은 기준으로 남을 가늠하곤 하는데 이것이 바로 고인(古人)이 말한 ‘말을 숭상함’이다. 그러나 막상 구체적인 모순이나 항목 추진의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동수가 협조하지 않을 때면 안으로 자신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동수를 탓한다. 이러한 ‘말을 숭상하는’ 방식은 대개 동수들로 하여금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며, 심지어 팀 내에 겉으로만 번지르르하고 착실한 수련이 없는 불량한 풍조를 형성하게 된다.
진정으로 바른 길을 걷는 협조인은 반드시 ‘실천을 숭상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공허한 담론을 숭상하지 않고 묵묵히 보충하며 몸소 실천한다. 어려움에 부딪히면 자신이 먼저 나서고, 모순에 부딪히면 자신의 무엇이 법에 부합하지 않는지 먼저 찾아본다. 협조인이 묵묵히 ‘실수(實修)’할 수 있을 때 전체 항목의 장(場)은 순정해지며, 자연스럽게 동수들과 함께 비학비수하면서 착실히 수련하고 ‘독실한’ 수련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2. ‘의를 숭상함(尚義)’과 ‘이익을 숭상함(尚利)’: 자아를 내려놓고 중생 구도를 기점으로 삼기
글은 이어서 논한다. “천하가 다스려지려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의를 숭상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려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이익을 숭상한다.” 세속 사회에서 의(義)와 리(利)는 도덕의 시금석이다. 반면 우리의 수련에서 이 ‘의’는 대법에 책임을 지고 타인을 위해 무사(無私)한 정념(正念)으로 이해할 수 있고, ‘리’는 감춰진 명리심, 과시심, 자아를 실증하는 사심(私心)이다.
항목의 책임자로서 우리는 손에 약간의 자원을 쥐고 있거나 동수들 사이에서 약간의 위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일할 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는 마음이 섞이거나 동수들 사이에서 ‘책임자’로서의 체면과 지위를 유지하려 한다면, 이것은 사실 ‘이익을 숭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를 실증하는 사심이 일단 팽창하면 동수들 사이에 간격과 논쟁(글에서 말하는 ‘서로 다투는 풍조’)을 유발하게 된다.
반면에 협조인이 자아를 완전히 내려놓고 공을 탐하지도 명예를 구하지도 않으며, 어떤 결정을 내리든 법을 실증하는 데 유리한지, 중생을 구도하는 데 유리한지를 기점으로 삼는다면(‘의를 숭상함’), 천하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고 각 방면의 동수들을 원용(圓容)할 수 있으며 항목 환경을 화목하고 겸양하는 ‘청렴하고 양보하는 풍조’로 채울 수 있다.
3. ‘마음을 다하기’: ‘마음의 과오’를 닦아내고 사람 마음을 직시하여 안으로 찾기
이 문장에서 가장 정화인 부분이다. “말로 하는 것은 몸으로 실천하는 것만 못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것은 마음을 다하는 것만 못하다.…… 몸의 과오가 없기는 쉬워도 마음의 과오가 없기는 어렵다.”
이것은 수련의 실질이 바로 심성을 닦는 것임을 깊이 있게 지적해 주었다. 어떤 협조인은 겉보기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말의 과오가 없음), 행동으로도 대법의 일을 매우 적극적으로 하며 매일 바쁘게 뛰어다니며 심지어 많은 개인적인 시간까지 희생하기도 한다(몸의 과오가 없음). 하지만 만약 내면으로 어떤 동수에 대해 여전히 원한을 품고 있거나, 어떤 배치에 대해 여전히 억울함과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마음의 과오’가 있는 것이다.
고인들도 오히려 “마음을 다하면 신이 아신다”는 것을 알았는데, 온 하늘에 가득한 신불(神佛)들께서 우리를 볼 때 보시는 것은 바로 그 일사일념(一思一念)이다. 만약 심성이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속의 집착을 품고 신성한 일을 한다면 겉으로는 아무리 거창하고 대단할지라도 실질적인 위덕은 매우 제한적이다. 우리의 수련은 바로 ‘마음에 과오가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 즉 근본적으로 대법에 동화되어 완전히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모든 집착, 원한, 질투를 닦아낼 때 이것이 비로소 진정으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맺음말
문장의 마지막 탄식은 “이미 마음의 과오가 없는데, 어찌 어려운 난관이 있겠는가!”이다. 협조인의 책임은 중대하다. 이것은 세속에서의 벼슬이 아니라, 동수를 위해 봉사하고 자신의 용량을 넓히는 수련의 기연(機緣)이다. 우리가 자세를 낮추고 입으로만 하는 고담준론을 줄이며, 묵묵하고 착실한 실수(實修)를 더 많이 하고, 모순 앞에서 남의 표면적인 과실을 보지 않고 오직 자신의 ‘마음의 과오’만을 닦는다면, 조율하지 못할 무슨 난관이 있겠는가?
약간의 개인적 깨달음으로 층차에 한계가 있다. 법에 부합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동수들이 자비로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