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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명작 시해(試解) 1

곡우(穀雨)

【정견망】

문학(文學)은 인류 문명의 중요한 매체이고 소설(小說)은 사람들이 더욱 즐겨보는 예술 장르다. 그중에서도 수천 년 문명의 세례를 거치며 풍부한 역사적인 풍모와 문화의 정수를 품은 중국 고전소설 4대 명작[《수호전》, 《삼국연의》, 《서유기》, 《홍루몽》]은 더욱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인생이란 한 편의 연극이다. 사실 인간세상 역시 한 편의 연극이다. 전체 인류의 역사, 온갖 우여곡절 및 꽃이 피고 지는 것, 자연은 그대로지만 사람이 변하는 것, 세사(世事)의 갱신과 조대(朝代)의 교체, 전쟁과 평화 역시 모두 한 편의 연극이다. 다만 사람들은 연극 속에서 종종 자신의 배역을 잊고 진짜 나를 망각하고 ‘연기’할 뿐이다. 오직 몸은 연극 속에 있어도 마음만은 연극 밖에 있는 사람의 ‘정관(靜觀 조용히 관조)’만이 이것이 확실히 연극임을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 일보에 도달하려면 오직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수련하거나 “도를 닦지 않아도 도(道)속에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그들은 세속을 멀리 벗어나 홀로 몸을 닦거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오히려 마음이 담담하다. 이 일보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사를 꿰뚫고, 생사를 꿰뚫고, 인생을 통달한 대덕지사(大德之士)라야 한다. 동시에 그들은 세상을 제도하고 사람을 구도하려는 큰 뜻을 품고 있지만 세인들에게 용납되지 못한다. 천기(天機)를 통찰했음에도 이를 설파할 수 없으니 오직 ‘야사(野史)’에 속하는 소설에 마음을 담아 ‘말법(末法)’ 시대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가어촌언[假語村言 직역하면 거짓말과 허튼 소리인데 비슷한 발음의 賈雨村言 즉 가우촌(賈雨村)이 하는 말(言)로도 해석할 수 있다.]’을 빌려 말한다.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가? 또 어디로 가는가? 왜 지금을 ‘말법(末法)’ 시기라 하는가? 얼핏 간단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무궁무진한 함의를 담고 있다. 또한 우리가 대법(大法) 법리의 지도하에 사대 명작을 새롭게 다시 풀어본다면 아마 그 속에서 일부 답안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 우선 사대 명작 각각의 작품이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부터 분석해보자.

먼저 《삼국연의(三國演義)》부터 말해보자면 《삼국연의》에서는 ‘의(義)’란 한 글자로 천고(千古)를 관통한다.

《삼국연의》속에는 신전문화(神傳文化)의 흔적이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천상의 변화, 세상일의 변화, 기인(奇人)의 신기묘산(神機妙算). 작가 나관중은 고금을 꿰뚫고 백가(百家)를 두루 섭렵했으니 이에 대해서는 자연히 아주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취지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삼국연의》가 오묘한 계책으로 유명하고 제갈량, 조조, 주유, 사마의, 육손, 강유 등이 모두 귀신도 예측할 수 없는 신묘한 지모(智謀)를 갖고 있고, 이들 고인(古人)의 지혜 역시 책 속 주제 중 하나라고 할 수는 있지만 책에서 표현하려 한 것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책은 삼국의 역사 이야기를 말하는 것인가? “사실 칠에, 허구 삼”이란 말이 있듯이 이것도 아니다. 이것은 소설이지 역사는 아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역사 이야기는 작가가 이를 빌려서 표현하는 운반체일 뿐이다. 작가는 이야기를 더욱 다채롭고 풍부하며 생동감 있게 만들어 사람이 지닌 특질인 ‘의(義)’를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연의(演義)’란 ‘의’를 연기한다는 뜻이다. 책 제목에서 이미 표시하고 있다. 물론 ‘연의’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일종의 소설 장르로 알려진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책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상호 작용을 이용해 ‘의’의 내함을 풍부하게 한 것이다. ‘의’가 표현하는 내함은 이야기 및 등장 인물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의’를 언급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단지 한 글자의 표면적인 의미뿐이 아니며, 그 어떤 정의로도 ‘의’의 내함을 규정할 순 없으며 단지 약간의 표현만 할 뿐이다. 《삼국연의》를 통해 사람들이 얻는 것은 오히려 영원한 생명력과 참조를 지닌 내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삼국연의》는 인류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숭고한 품성을 포용한다.

이 점을 분명히 알면 삼국의 흥망성쇠나 은혜와 원한은 이미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인물의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충효패역(忠孝悖逆) 역시 모두 ‘의’를 둘러싸고 서서히 진행된다. 물론 고대에 수많은 ‘연의’ 소설이 있었지만, 《삼국연의》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책속에는 확실히 ‘의’에 대한 정밀한 묘사가 많다. 조조 진영에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서서(徐庶)가 단 한 마디 말로 조운(趙雲 조자룡)을 구한 것은 유비에 대한 은의(恩義)였고, 조조가 원소에게 울면서 제사를 올린 것은 간웅(奸雄)의 ‘의’에 대한 이해와 행위를 드러냈으며, 맹획(孟獲)이 ‘칠종(七縱)’의 은혜에 감동해 귀순한 것은 제갈량의 ‘의’에 탄복하는 성분이 있다.

또 의박운천(義薄雲天)한 관우는 ‘의’를 극한까지 연기했다. 조조가 사흘마다 작은 연회, 닷새마다 큰 연회를 베풀어주고 적토마를 선물하며 정후(亭侯)에 봉해 주었음에도 형인 유비를 찾아가려는 뜻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조가 내려준 은혜를 갚지 않고는 떠날 수 없다며 의사(義士)의 본색을 드러냈다. 형님을 찾아가기 위해 그는 ‘다섯 관문을 지나며 여섯 장수의 목을 베고’ ‘단기필마로 천리 길을 갔다.’ ‘의’가 이에 이르러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을 울렸다고 할 만하다.

필자는 어릴 때 화용도(華容道) 부분을 읽을 때마다 왜 제갈량이 관우 대신 조운이나 장비를 대신 보내지 않았는지 늘 이상하게 여겼다. 만약 장비더러 화용을 지키게 했다면 조조를 분명히 죽일 수 있지 않았을까? 나중에 수련한 후에야 알게 된 것인데, 모든 것에는 다 정해진 수(數 운명) 가 있다. 제갈량의 이런 배치는 하늘의 뜻에 따라 사람의 일을 실천한 것이다. 관우가 조조를 그냥 보내준 것은 관우의 ‘의’를 더욱 완벽하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나관중의 저서는 정말로 ‘의’의 현오(玄奧)함을 깊이 얻었다.

필자가 이런 인식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사존이신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다. 사존께서는 《북미순회설법》에서 《삼국연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삼국연의』는 하나의 ‘의(義)’를 말하였다. 한 조대(朝代)를 지나면서 세 개의 세력이 서로 겨루는 중에서 충분히 ‘의(義)’의 내포를 표현해 냈다. 더욱이 한 조대(朝代)라는 이렇게 기나긴 세월을 경과하면서 이 ‘의(義)’의 심층문화를 표현해 냈지만, 오늘날 법을 전하게 되어서야 인류는 비로소 ‘의(義)’에 대해 깊은 인식이 있게 되었는데, 무엇이 의(義)이고, 의(義)의 표면 뜻과 내포에서 파생된 상호관계와 심층에 반영된 뜻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단지 이 글자의 표면 뜻만 알 것이 아니라 내포된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 물론 『삼국연의』 중에서는 사람의 지모(智謀) 등의 내포도 표현하였다.”

인류는 여러 차례 문명의 교체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는데, 어떻게 조금씩 완벽해졌을까?

리훙쯔 사존께서는 《북미순회설법》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어떠한 내포도 없으며, 그 어떠한 감당능력이 없고, 이 공간의 일체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완전한 사유개념이 없었다. 그렇다면, 사람은 곧 기나긴 세월을 경과하면서 사람의 사상이 점차적으로 풍부해지고, 그의 내포와 감당능력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표현은 일에 부딪혀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고 냉정하며, 이지적으로 사고하고, 심지어 창조능력도 있다. 사람이 이러한 사상, 정상적인 사유상태를 구비할 수 있는 이것은 기나긴 역사의 세월 속에서 신(神)이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만들어 준 것이다.”

사람의 매 한 걸음은 모두 신(神)이 배치한 것이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오늘날까지 “사람의 명은 하늘이 정한다”고 말한다. 사실 어찌 사람의 명(命)뿐이겠는가, 세상 모든 배치에는 또 모두 신의 의도가 있다. 이는 사람의 사상을 풍부하게 한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3/8/7/2777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