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섬(纖纖)
【정견망】
당시(唐詩)는 흔히 모두 기세가 대단히 호방한데 특히 산천하류(山川河流)를 묘사한 것이 더욱 그렇다. 명대(明代) 시인 왕부지(王夫之)의 《문중자를 읽다 그 첫 수》의 기세는 이백이나 두보에 못지 않은 아주 좋은 시로 안에 담긴 뜻은 더욱 심원(深遠)하다.
칠언절구로 총 28글자다.
천명을 알고 즐기니 무슨 근심 있으리오.
몸이란 매이지 않은 배와 같음을 어찌 모르랴!
만 리 큰 산도 평야를 따르며 다하고
달이 솟아오르니 큰 강물이 흐르네
樂天知命夫何憂
不道身如不系舟
萬折山隨平野盡
一輪月湧大江流
1. “천명을 알고 즐기니 무슨 근심 있으리오
몸이란 매이지 않은 배와 같음을 어찌 모르랴!”
이 구절의 의미는 사람은 마땅히 낙관적이어야 하는데 사람이 만약 천명(天命 하늘의 명)을 안다면 또 무슨 근심걱정이 있겠는가? 설마 사람 몸이란 본래 ‘매이지 않은 배(不系舟)’처럼 자유로움을 모른단 말인가? 라는 뜻이다. 시인의 견해는 확실히 남 다는 데가 있는데 하늘은 본래 사람마다 좋은 길을 배치해 주었으니 인간 세상의 뜻대로 되지 않는 그 몸이 아니다.
2. “만 리 큰 산도 평야를 따르며 다하고
달이 솟아오르니 큰 강물이 흐르네”
이 구절은 기세가 굉장히 클 뿐만 아니라 배후에 담긴 함의 역시 심오한다. 표면적인 함의는 만 리나 이어진 고산(高山)일지라도 망망한 평야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며, 높은 곳에 있는 밝은 달도 큰 강의 세찬 파도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담긴 의미는 사람 마음속의 그런 불평불만이 설사 높은 산처럼 없애기 힘들지라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서서히 사라질 것이며, 가장 아름다운 것(밝은 달)이라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서서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내려놓지 못하는가?
사람은 인간 세상의 은혜와 원한을 내려놓아야지만 비로소 시야가 깊고 넓어질 수 있으며, 세간의 연유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은혜와 원한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호한(浩瀚)한 역사의 장하(長河) 속에서 응당 서서히 사라지기 마련인데 이 장하(長河)를 따라서 멀리까지 본다면 어쩌면 자신이 온 곳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파룬궁(法輪功)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대사의 《왜 중생을 구도하려 하는가》가 발표된 후 많은 사람들이 비로소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각종 은혜와 원한의 진정한 목적은 사실 중생에게 법(法)을 얻어 하늘로 돌아갈 기회를 창조해준 것으로 단순히 윤회속에서 업을 갚는 것만이 아님을 분명히 알려주셨다. 사람은 관건적인 순간에 모두 자신의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다. 대법을 선택해 하늘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사악을 따라가 악을 행할 것인지 모두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결과 역시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진정으로 천명을 앎이란 사실 은혜와 원한을 내려놓아야 함을 아는 것이다. 오직 내려놓아야만 총명해질 수 있고 법을 얻을 기회가 있으니 모든 것은 다 조물주의 가장 좋은 배치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4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