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명(宇明)
【정견망】
시끄럽고 소란한 속세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내심의 감정은 통제하기가 가장 어려운데 특히 화가 날 때면 종종 마음이 뭔가에 걸린 것처럼 어지럽거나 분노를 발산하기에 급급해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쟁투(爭鬪)에 빠져 들어가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렇게 복잡한 심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인(古人)은 ‘구심두각(鉤心鬥角 직역하면 갈고리로 마음을 후비는 것처럼 심하게 다투고 싸운다)’이란 네 글자를 사용해서 이런 내심의 상태를 생생히 표현했다. 또한 이를 통해 다른 공간에서 발생한 사태의 본질을 이미지화했다. 사실 전통문화 속에는 이에 대한 생생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이 있다.
《서유기》 제53회 〈삼장이 자모하의 물을 마셔 귀태(鬼胎)를 임신하고 황파가 물을 길어 사태(邪胎)를 해결하다〉 편에서 파아동(破兒洞)의 도인은 우마왕(牛魔王)의 친척으로 조카인 홍해아(紅孩兒)의 복수를 위해 우물을 지키면서 대성(大聖 손오공은 원래 제천대성을 자칭했다)이 물을 긷지 못하게 방해한다.
공교롭게도 대성 역시 우마왕과 과거 의형제를 맺은 적이 있으니 이번 만남 역시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마성(魔性)을 건드림과 동시에 심원(心猿 역주: 마음원숭이란 손오공을 가리키는 동시에 원숭이처럼 변화무쌍한 마음을 의미한다)의 화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가 대성과 싸울 때 사용한 무기 역시 아주 특이한데 바로 ‘여의 금갈고리[如意金鉤子 여의구(如意鉤)라고도 함]’였다. 그렇다면 이 갈고리로 어떻게 오공을 상대했을까?
바로 대성이 두레박을 찾아 막 물을 길으려고 하면 도인이 앞으로 달려가 여의구(如意鉤)로 대성의 한쪽 발을 걸어 바닥에 넘어지게 했다. 그는 대성이 기어일어나 쇠몽둥이(여의봉)를 휘두르자 슬쩍 옆으로 피하면서 여의구를 잡고는 말했다.
“네가 어디 내 물을 떠갈 수 있는가 보자!”
대성이 말했다.
“덤벼봐! 덤벼보라구! 이 못된 놈아, 내가 너를 때려죽일 테다!”
그러자 도인도 덤벼들지는 못하고 그저 대성이 물을 길어가지 못하게 막기만 했다. 대성은 그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왼손으로 여의봉을 빙글빙글 돌리며 오른손으로 두레박을 잡고 줄을 풀어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도인이 또 여의구를 들고 달려들었다. 대성이 한손으로 막아내지 못하자 다시 여의구로 다리를 걸어 잡아채자 대성이 휘청하더니 두레박과 함께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심원은 비록 대성(大聖)임에도 갈고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수련인의 마음 역시 이런 것으로 오직 구체적인 일에서 마련(魔煉)야만 지혜가 생겨날 수 있다. 나중에 대성은 오정(悟淨)과 협력해 결국 교묘하게 물을 얻는데 성공한다.
그러므로 모순에 직면해 초조한 가운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지, 먼저 자기 마음에서 갈고리와 같은 매듭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이지(理智)를 회복하는 관건이며, 마음이 풀어지는 동시에 화도 자연히 해결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 화가 나서 쟁투하면 마음 역시 갈고리에 걸려 넘어져 좋은 기연을 놓칠 수 있다.
사람의 일생을 생각해 보자. 어릴 때는 내면이 텅 비고 부족해서 종종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이것저것 시도해보지만, 청년이 되면 마음속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많은 경우 용감하게 쟁투하고 또 멈추고자 해도 멈출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중년이 되면 인생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을 담담히 내려놓음을 배우기 시작한다. 젊을수록 경망스러워 내심이 청정해지기 어렵고 여전히 기세등등하지만 노년에 이르러 문득 뒤돌아보면 생명의 끝이 바로 생명이 온 곳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결국에는 모든 집념(執念)을 버리고 내심이 평온하게 되돌아간다.
정말이지 생명의 윤회란 마치 한 바탕 수련과 같다! 마음이 차분하고 느긋하며 경박해지지 않아야 하는데 어쩌면 ‘오공(悟空)’은 또 우리 매 사람의 심원(心猿)일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마음이 텅 빈다면 그 갈고리가 또 명예와 이익을 다투는 각축장이 될 수 있겠는가? 바로 “함이 없지만 여전히 함이 있고 가서 이기지 않음이 없게 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4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