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월(明月)
【정견망】
42세 때, 이백은 당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경성(京城 장안, 지금의 서안)에 들어가 공봉한림(供奉翰林)이 되었다. 그러나 3년도 채 못 되어 장안을 떠나 하남, 산동 및 동남부 여러 지역을 떠돌았다. 현종 천보(天寶) 14년(755년)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날 당시 이백은 여산(廬山)에 은거하고 있었다.
756년 12월 이백은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기병한 영왕(永王) 이린(李璘 역주: 현종의 아들이자 숙종의 동생)의 막료로 초빙 받았다. 그러나 영왕이 부친을 대신해 제위에 오른 숙종을 분노하게 만들어 반역 혐의로 피살당한 후 이백 역시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얼마 후 당조(唐朝)의 전설적인 명장 곽자의(郭子儀)가 앞장서서 이백을 구명했고 결국 사형을 면한 이백은 야랑[夜郞 지금의 귀주 동재현桐梓縣 일대]으로 유배를 떠난다.
여기서 잠시 곽자의에 대해 알아보면 안사(安史)의 난이 발발한 후 삭방(朔方) 절도사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낙양과 장안 두 수도를 회복했으며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중서령(中書令 재상에 해당)에 이르고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다.
숙종의 아들 대종(代宗) 때 곽자의는 또 위구르의 반란을 평정했고 위구르 추장을 설득해 함께 토번(吐蕃)을 물리쳐 조정을 안심시켰다. 곽자의는 이처럼 평생 전쟁터를 누비며 여러 차례 뛰어난 공을 세웠고 대당(大唐)은 덕분에 20여 년의 평화를 얻었다. 때문에 역사에서는 그를 가리켜 “천하를 기울일 정도로 권력이 강해도 조정의 의심을 받지 않았고 공(功)이 세상을 뒤덮어도 주군의 의심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만큼 겸손하게 처신했다는 뜻이다.
숙종 건원(乾元) 2년인 759년 이백은 귀양가던 도중에 사면을 받았고 이때 나이가 이미 59세였다.
안사의 난은 8년이 지나서야 겨우 평정되었다. 《구당서(舊唐書)》 기록에 따르면 이백은 유배 가던 도중에 사면되었지만 도중에 지나친 음주로 숙종 보응(寶應) 원년(762년) 선성(宣城 지금의 안휘성 선성현)에서 술에 취해 사망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이백은 만년에 금릉(金陵)과 선성 일대를 오갔으며 당도(當塗 지금의 안휘성 당도현)에서 사망했다고도 한다. 어느 설을 따르든 이백은 향년 61세였다.
이백의 일생은 한 마디로 위대한 시인의 일생이었다. 중국 고인(古人)들은 책을 읽어 벼슬하는 것을 중시했는데 이백은 이 길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발군의 시가(詩歌) 재능을 지녔고 또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품었지만 정치의 어둠은 감당하지 못했고 관직에 올라 재상이 될 운명은 타고나지 못했다.
그는 61년을 살면서 42세에 비로소 조정에 나아가 관리가 되었지만 수도인 장안에 머문 시간은 다 합해도 3년이 채 못 되고 현종이 “황금을 하사해 돌아가게 했다.” 그가 장안에 오래 머물지 못했고 나중에 이린(李璘) 진영에 가담해 죄를 지은 것을 보면 이백이 관료사회와 잘 융합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백의 시(詩)는 웅장하고 표일(飄逸)하면서도 호방해서 예술적인 성취가 아주 높다. 주지하다시피 당조(唐朝)는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중국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조대다. 당조는 문화, 정치, 경제, 외교 등 여러 방면에서 모두 휘황한 성취를 이뤘으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였다.
이 당조에서 가장 주목받은 문학적 성취가 바로 당시(唐詩)다. 진자앙(陳子昂)과 ‘초당사걸(初唐四傑)’로부터 시작해 당조에서는 역대로 저명한 시인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성당(盛唐)시기에는 이백, 두보(杜甫), 잠참(岑參), 왕유(王維)가 있었고 중당(中唐) 시기에는 이하(李賀),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가 있었으며 만당(晩唐) 시기에는 이상은(李商隱), 두목(杜牧) 등이 있었다.
후세에 송(宋), 명(明), 청(淸) 시기에도 걸출한 시인들이 나타나긴 했지만 율시(律詩)와 고시(古詩)의 전반적인 수준은 당조에 미치지 못했다. 당시는 중국 고시에서 뛰어넘을 수 없는 최정상이었다. 이백은 특히 당조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으로 불리는데 그는 중국 낭만주의 시가를 최정상까지 밀어 올렸다. 그와 두보를 흔히 ‘이두(李杜)’라 병칭한다.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이백의 천여 편 시문(詩文)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을 꼽자면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 《월하독작(月下獨酌)》, 《정야사(靜夜思)》, 《촉도난(蜀道難)》, 《행로난(行路難)》, 《몽유천모음유별(夢遊天姥吟留別)》, 《장진주(將進酒)》 등이 있고 또 《이태백집(李太白集)》이 전해진다.
2. 시가 평론
이백은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의 하나로 흔히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이백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당조 시인 하지장(賀知章)은 이백을 조정에 천거하면서 그를 ‘적선(謫仙 역주: 인간세상에 귀양온 신선이란 뜻, 사람의 능력으로 쓸 수 있는 시가 아니라는 극찬임)’이라 불렀다.
송대(宋代)의 저명한 시 평론가 엄우(嚴羽)는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사람들은 이백은 신선의 재주가 있고 장길(長吉 이하)은 귀신(鬼)의 재주가 있다고들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태백이 천선(天仙)의 글이라면 장길은 귀선(鬼仙)의 글에 불과할 뿐이다.”라고 했다.
또 명대(明代) 시(詩)의 대가 양신(楊愼)은 《승암시화(升庵詩話)》에서 “이백은 시의 신(神)이고 두보는 시의 성인(聖)이다.”라고 했다.
이백은 한평생 수많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고시, 율시 및 악부시(樂府詩)를 남겼는데 그중 이백에서도 절구(絶句)는 유독 뛰어난 평가를 받는다. 평론가들은 흔히 이백과 왕창령[王昌齡 성당 시기 저명한 변새시인으로 ‘칠언절구의 성수(聖手)’, ‘시가(詩家)의 천자(天子)’로 불린다.]의 절구를 가장 높이 평가한다.
청조(淸朝) 강희(康熙) 연간 조인(曹寅)이 책임을 맡고 편찬한 《전당시(全唐詩)》에는 이백의 오언절구 86수가 실려 있다. 명대(明代) 고병(高棅)이 편찬한 《당시품휘(唐詩品彙)》에는 이백의 오언절구 23수를 수록해 이백을 오언절구의 정종(正宗)시인으로 나열했다. 이외에도 유명한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에는 이백의 오언절구 3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백의 오언절구(五言絶句)는 정교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절륜(絶倫)한 예술의 꽃으로 역대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백의 많은 오언절구는 부녀나 아이를 막론하고 인구에 널리 회자될 정도다.
아래 시가 감상을 통해 계속해서 이백 시가에 대한 평론을 언급해보도록 하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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