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源馨)
【정견망】
중국 고대 아동 계몽서 《유학경림(幼學瓊林)》에 “물건을 보내어 경의를 표할 때, 감히 헌폭(獻曝)의 정성을 본받겠노라 말한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남에게 선물을 줄 때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어 헌폭이라 칭함으로써 성의를 표시한다는 뜻이다.
이 ‘헌폭’이란 단어는 ‘부훤지헌’(負暄之獻)이라고도 하는데, 《열자(列子)·양주(楊朱)》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한 농부가 스스로 햇볕을 쬐고 나서 기분이 너무 좋아지자, 이 햇볕 쬐는 방법을 임금에게 바쳐 상을 받고자 했다는 내용이다.
“송(宋)나라에 한 농부가 있어 늘 거친 베옷을 입고 간신히 겨울을 났다. 봄이 되어 들일을 나갔다가 스스로 햇볕을 쬐었는데, 천하에 넓은 집과 따뜻한 방, 솜옷과 여우 털옷이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이에 아내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등으로 햇볕의 따스함을 느끼는 이 즐거움은 아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 임금님께 바치면 장차 큰 상을 주실 것이오’라고 했다.”
원문에서 이 이야기를 인용한 의도는 제쳐두고, 이 짧은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인상 깊은 것은 농부의 가난함과 순박함, 그리고 햇볕의 따스함과 널리 비춤이다. 농부가 햇볕을 쬘 때의 느낌은 아마도 백거이(白居易)가 시에서 묘사한 것과 같다.
“몸이 녹아서 풀리고 모든 뼈가 활짝 펴지며
마음 가운데는 한 생각 밖에 없네.
밝음으로 장소와 존재를 잊고
마음은 허공과 더불어 온전하여라.
外融百骸暢
中適一念無
曠然忘所在
心與虛空俱”
햇볕은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차별 없이, 당신이 농부든 문호든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똑같은 따스함과 빛을 선사한다.
[이 시는 백거이의 시
〈부동일(負冬日)–겨울 햇빛을 쬐다〉 중의 일부이다. ]
그런가 하면 나는 또 이상은(李商隱)의 《무제(無題)》에서 “봄 누에는 죽어서야 실 뽑기를 멈추고, 촛불은 재가 되어야 눈물이 비로소 마르네[春蠶到死絲方盡,蠟炬成灰淚始幹]”라며 정(情)에 갇힌 고통을 쓴 대목을 읽었다.
끊으려 해도 끊기지 않고 다스리려 해도 어지러운 고뇌와 몸부림을 읊은 것인데, 이를 대비해 보면 햇볕의 선량함과 포용력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봄 누에는 죽을 때에야 비로소 실을 다 뽑지만 그 결말은 고작 스스로 만든 고치에 갇힐 뿐이며, 촛불은 마지막까지 타올라 눈물을 다 흘리지만 결국 남는 것은 정신과 힘을 다 고갈하는 것이다.
이는 《홍루몽》의 임대옥이 눈물로 은혜를 갚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데, 모두 정이라는 글자 하나 때문이다. 예전에는 사심없이 바치는 것을 가리켜 “자신을 태워 남을 밝히는” 촛불에 비유하곤 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좁은 소견이었다. 돌고 돌아 정망(情網)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정을 구하기 위해 혹은 정을 갚기 위해 한 번 갚고 한 번 받는 일이 끝이 없다. 그리하여 늘 번뇌에 처하고 비애와 고통에 빠지며, 잎 하나에 눈이 가려 천지의 광대함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에 나는 햇볕이 왜 이토록 커다란 선(善)을 나타낼 수 있는지 더욱 명확히 알게 되었다. 햇볕 속에는 사(私)와 정(情)이 없고, 오직 사람에 대한 신(神)의 자비와 자연의 사심 없는 베풂만이 있기 때문이다. 부훤지헌 이야기 속의 농부는 가난했기에 천하에 솜옷과 따뜻한 방이 있는 줄 몰랐으나, 바로 그랬기에 햇볕의 좋은 점을 알았고 자연과 더욱 친해졌으며 천지를 더욱 경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이 가장 좋은 햇볕을 자신의 임금님께 바치려 한 것이니 참으로 일편단심의 성심이 아닐 수 없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8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