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夏禱)
【정견망】
“땅에 구멍을 파서 지구 반대편까지 계속 뚫고 들어가면 중국에 도착한다.”——서양 속담
광풍이 몰아치기 전야
“리슐리외의 말년부터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난 후의 한 시기 동안, 우리의 정체(政體)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예술, 정신, 풍습 방면에서 전면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볼테르, 『루이 14세의 시대』)
우리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가 인류 문명의 방향을 강력하게 뒤튼 두 시대라는 점을 알고 있으며, 루이 14세의 시대는 바로 이 둘 사이에 위치한다. 문명의 교차로에 서서 이 위대한 세기는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 16세기에서 17세기, 태양왕이 즉위할 전후로 유럽은 전방위적인 충격을 경험했다. 그가 처한 시대를 역사의 큰 배경 속에 놓아본다면, 우리는 루이 14세 시대의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기원하여 유럽 전역으로 퍼진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의 고전 예술과 문화를 인류의 지평선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러나 동시에 르네상스가 강조한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와 이성 정신은 인류의 향후 발전 과정에서 생명력이 왕성하고 되돌리기 어려운 인자를 심어놓았다.
독일에서는 마르틴 루터가 당시 경직되었던 가톨릭에 대해 개혁을 추진하며 개신교를 설립했다.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뿌리 깊은 알력 아래 유럽은 장기간의 종교 분쟁을 겪었으며, 이는 유명한 30년 전쟁을 촉발했다.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이 전쟁은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

30년 전쟁 백산 전투 (위키백과 공유 영역)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이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고 입헌군주제를 수립했다. 이른바 ‘무혈 전쟁’이라 불린 이 사건의 대가는 사실 적지 않았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개신교를 신봉하며 경계를 넘어 왕위를 찬탈한 윌리엄 3세에 격렬히 저항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군주제를 시행하며 가톨릭을 신봉하던 프랑스가 제임스 2세를 강력히 지지함으로써 유럽 대동맹 전쟁의 전장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천체 운행에 대한 인지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태양왕 즉위 100년 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표하며 지동설을 제기했다. 그의 학설은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발명해 더 많은 천상을 관측하고, 케플러가 타원형 운행 궤도와 행성 운동의 3대 법칙을 제시한 후 강력한 증거를 얻게 되었다. 이후 과학 혁명은 불길처럼 번져나갔고, 인류의 세계관에는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끝없는 천주의 신비가 과학 혁명 속에서 한 걸음씩 열리며 인류를 미지의 길로 인도했다.
천궁(天穹)에 대한 탐사와 동기화되어 인류는 자신이 거주하는 터전을 점차 인식해 나갔다. 지리상의 대발견에 있어 1492년에서 1503년 사이 콜럼버스는 희망봉과 아메리카로 항해하여 신대륙을 발견했다. 1519년에서 1522년 사이 마젤란이 이끄는 선단은 대서양을 횡단해 지구를 한 바퀴 돌며, 지구가 둥글다는 대담한 가설을 증명했다.
상상해 보라.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늘은 둥글어 덮개 같고 땅은 네모나 바둑판 같다’는 견고한 대지 위가 아니라, 둥글고 회전하는 구체 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발견했을 때의 충격을 말이다. 인류 전체에게 이 발견이 가져다준 충격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후 항해 열풍이 시작되었다. 유럽인들은 새로 발명된 라틴식 범선을 몰고 광활한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하며 바다 위의 더 많은 신대륙과 대지 위의 생소한 인종들을 목격했다.
자신이 생존하는 세계에 대해 인류가 일단 탐사를 시작하자, 이 탐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천체의 운행은 끝이 없는 신비였으나, 상대적으로 지구는 좀 더 단순해 보였다.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발견함과 동시에, 자신과 함께 이 구체 위에서 살아가며 똑같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졌으나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다소 야만적이며 기이한 말을 내뱉고 이해하기 어렵거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항해를 끝마치지 못한 마젤란에게 이 낯선 이들은 치명적이었다.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이 가져온 금과 보석, 향료는 유럽인들의 위험한 욕망을 자극했다. 수년 동안의 고된 노동과 생존의 땅을 떠나, 인류는 거대한 돛을 펼치고 바다를 건너 또 다른 생존 방식을 찾아 나섰다. 무역풍을 타고 해난 사고가 빈번하던 그 시절, 신식 세 개의 돛대를 지닌 범선들은 미지의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즉, 16세기 전체에 걸쳐 유럽의 사상과 생활에는 전방위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모든 것이 발효 중이었으며 진정한 격변이 다가오고 있었다. 과장 없이 말하자면, 인류는 격렬한 광풍의 전야에 처해 있었다. 이 고비에서 루이 14세 시대는 마치 고요한 태풍의 눈처럼 풍성한 문화적 결실을 헌사하는 동시에, 최대의 힘으로 파도를 막아내며 다가올 거친 파도를 되돌려 놓았다.
정확한 한 장의 세계지도
1671년 제작된 판화 『과학원』 속에서 태양왕은 수많은 과학자와 천체 궤도 의식, 천문 탐측기, 지구본, 거대한 지도와 골격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의 등 뒤로는 천문 망원경이 큰 창밖의 먼 천공을 향하고 있다. 창밖에는 건립 중인 파리 천문대가 보인다. 이 그림은 그 시대 사람들이 대자연을 탐구하는 모습과 이성적 지식에 대한 경의를 보여준다.
17세기 유럽은 이미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에 의해 천체 운행에 대한 충격적인 발견을 경험했으나, 상당 부분 천문학자들은 여전히 신에 대해 뿌리 깊은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당시 많은 천문학자에게 천문 망원경을 무한한 별이 빛나는 밤하늘로 돌리는 것은 조물주의 가장 깊은 신비에 대해 드리는 경건한 문안과도 같았다.
1665년, 루이 14세는 건의를 받아들여 근대 과학 간행물의 선구자인 주간지 『박학자보(Le Journal des Sçavans)』를 창간했다. 디드로 등이 『백과전서』를 편찬하기 훨씬 전부터 태양왕은 시대의 거대한 변화가 다가오고 있음을 간파했고, 자신은 시간과 경주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 변화의 전야에 출판 사업, 특히 과학의 최신 발견을 파악하는 간행물이 수행하는 역할은 과소평가할 수 없었다. 훗날 그의 또 다른 출판 사업은 인류 문명에 더욱 심오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667년 루이 14세의 왕립 예술 아카데미 회원들 (위키백과 공유 영역)
이듬해 루이 14세는 재무대신 콜베르의 건의에 따라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이탈리아의 도메니코 카시니, 덴마크의 뢰메르,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호이겐스 등 유럽의 일류 과학자들을 거액의 보수를 주고 초빙했다. 태양왕은 국경을 허물고 유럽의 인재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1667년, 태양왕은 거액을 들여 파리 근교에 천문대를 건립하여 과학 아카데미의 중심이 되게 했다. 훗날 탁월한 공헌을 하게 될 이 천문대에서 카시니는 토성의 위성 4개를 발견하고 월면도와 월식 시각표를 발표했다. 1679년 파리 천문대는 세계 최초의 천문 연력(年曆 1년 달력)을 출판했다. 오늘날까지도 이 천문대는 의연히 서 있으며, 현재까지 운영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중 하나이다.
파리 천문대는 유럽 과학계의 리더가 되었다. 군사 및 무역상의 필요에 따라 루이 14세의 요구로 천문대장 카시니는 정확한 세계지도를 제작할 준비에 착수했다. 카시니는 각국 과학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최신 탐측 방법에 근거해 자오선을 획정하는 일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퀘벡, 희망봉, 베이징을 포함한 세계 40여 곳에 흩어져 있던 천문학자들은 각기 다른 탐측 분대를 형성하여 자국 곳곳으로 출발했다. 그들은 천문 망원경을 목성과 그 주위를 회전하는 4개의 위성으로 향하게 했고, 카시니가 개발한 측정법에 따라 정밀하게 자오선을 획정했다. 카시니는 각국 과학자들로부터 수백 개 도시와 마을의 데이터를 얻었다. 이렇게 해서 지구라는 거대한 퍼즐이 조각조각 맞춰지게 되었다.
유럽의 수도인 파리의 주도하에 각국 과학자들은 손을 잡고 이전의 그 어떤 지도보다 훨씬 정확한 새 세계지도를 그려냈다. 파리 과학원은 자오선 관측의 난제를 해결했고, 인류는 처음으로 지구에 대한 정확한 인지를 갖게 되었다. 훗날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험한 바다를 건너 중국에 도착하여, 그 고대의 대지 위에서 세계의 과학자들과 합류해 천문 망원경을 목성의 위성들로 향하게 하고 동방의 자오선을 획정함으로써 중국을 세계지도 위에 정확히 올려놓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유럽 과학 혁명
프랑스 과학원 이후, 라이프니츠의 건의에 따라 빈, 페테르부르크, 베를린에서 잇따라 과학원이 설립되었다. (파리에 왔던 철학자이자 외교관 라이프니츠를 기억하는가?) 유럽의 과학자들은 지식의 성채 사이를 오갔고 신흥 지식의 유통은 가속화되었다. 이성적인 사상이 문화계를 주도했으며, 각계 인물들은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며 분투했다. 모든 위대한 시대와 마찬가지로 온갖 기이한 사상과 학설이 쏟아져 나왔고, 학자들은 자신들이 생존하는 세계에 대해 선조들이 보기에는 불경하기 짝이 없는 생각들을 품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영불해협 건너편의 영국 왕립학회와 그리니치 천문대는 파리의 가장 까다로운 적수였다. 그곳에서 뉴턴은 만유인력을 발견했고(1687년), 같은 해 역학(力學) 즉 운동의 3대 법칙을 제시하며 인류의 우주관을 신의 창조론에서 기계적 우주론으로 강력하게 돌려놓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옮겨놓은 후, 뉴턴이 아무리 신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표명했을지라도 기계적 우주론은 창조주를 우주의 운행에서 한 걸음 더 멀어지게 했다.
한편으로 만유인력의 가설은 사람들을 지구의 중력에 굴복하게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신의 손은 뒤로 물러나 인류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주와 자신의 생명에 대해 인류는 전통 신학의 인지와 점차 멀어졌다. 수천 년 동안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가져왔던 세계관에 대해 과학 혁명은 더욱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전복을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상호 경쟁하고 협력하는 지식 공화국이 이미 형성되었다. 에우로파(유럽)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또 다른 세계로 진보했다. 동시에 생활과 지식의 이성화에 따라 전례 없는 자신감을 품고 새로운 프랑스가 탄생했다. 그녀는 세계 무대로 뛰어올라 세계사를 새로 쓸 준비를 마쳤다.
“보라! 중국인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으로 항해한 이후, 기기묘묘한 이 지구에 대해 서양인들은 더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나침반과 지남침을 챙기고 짐가방에는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를 갖춘 채, 원항 능력이 뛰어난 아라비아식 고범선(高帆船)에 올랐다. 한 해리 한 해리씩 지구는 야심만만한 유럽인들의 발아래 펼쳐졌다. 동시에 대지 위에 거주하던 인류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를 건너 고향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생소한 곳에 도착했다. 황색, 흑색, 백색 등 피부색이 다른 인종들이 눈을 크게 뜨고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1684년, 루이 14세의 궁정에 멀리서 온 귀한 손님이 나타났다. 그의 의복은 유럽 패션을 선도하던 태양왕의 궁정을 크게 놀라게 했다. 그의 두툼하고 푸른 비단 용 무늬 자수 도포는 땅에 닿을 듯 길었으며, 걸을 때마다 도포 자락이 가볍게 흔들리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품을 풍겼다. 그의 용모는 단정했고 눈매는 완만하여 마치 도자기 같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묶어 올린 머리카락이었는데, 그의 아몬드 같은 두 눈과 더불어 모두 검은색이었다.
태양왕 앞에서 그는 커다란 붓을 들고 중국의 서예와 기이한 상형문자를 선보였으며, 이 고대 국가 문명의 내포를 설명했다. 그는 성인 공자의 초상화를 제시하고 생루이 궁에서 중국 비단그림을 전시했다. 또한 『대학』, 『중용』, 『논어』의 라틴어 번역본을 루이 14세에게 증정하며 프랑스에서의 출판을 요청했다. 이튿날 연회에서 그는 프랑스 귀족들에게 상아 젓가락 한 쌍을 사용하는 법을 시연해 보였다.
이는 베르사유 궁전에 처음으로 나타난 중국인이자, 프랑스 국왕이 처음으로 접견한 중국인이었다. 그는 외모와 거동이 뛰어난 태양왕의 여러 신하 사이에서 고대 문명 특유의 지혜와 침착한 기품을 보여주었다. 이 중국인의 초상화는 신문에 실려 파리의 큰 뉴스가 되었고 온 도시에 퍼졌다.
이 청년의 이름은 심복종(沈福宗 Michael Alphonsius, 1657–1692 남경 출신의 중국인으로 세례명은 미카엘 알포시우스. 17세기에 유럽에 중국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으로, 벨기에 예수회 선교사 필리프 쿠플레를 따라 로마에서 교황을 알현하러 가는 길에 있는 예수회원이었다. 파리에 나타난 이듬해, 그는 런던에서 제임스 2세를 알현했다. 제임스 2세는 특별히 화가에게 그의 실물 크기 전신 유화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자신의 국왕 침실에 걸어두었다. 지금까지도 이 초상화는 윈저성에 걸려 있다.
그전까지 유럽인들은 오직 『마르코 폴로 여행기』를 통해서만 이 머나먼 동방 고대의 사적을 읽었을 뿐이었다. 서구 전체에 이 신비한 나라는 하늘 끝처럼 멀게 느껴졌거나, 혹은 지구의 반대편처럼 느껴졌다. “땅에 구멍을 파서 지구의 반대편까지 계속 뚫고 들어가면, 당신은 중국에 도착할 것이다.”
이제 어떤 기연이 지구 반대편의 고대인을 가발을 쓴 프랑스인들 앞으로 데려왔는가? 동양의 고대 도포를 입은 중국인이 전 유럽이 부러워하는 베르사유 궁전을 가로질러 위엄이 혁혁한 태양왕 앞에 섰을 때, 그가 본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그 당시 지구 사방에 흩어져 살던 인류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아직 없었다. 먼 곳의 민족에 대해 사람들은 가장 기이한 상상력을 발휘하거나 깊은 오해를 품고 있었다. 동양에서는 『산해경』이 흥미로운 사례이며, 서양에서는 마르코 폴로가 받은 대접이 또 다른 사례이다.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서 원나라 대도(大都), 서역의 여러 도시 및 항저우 등 각 도시에 대해 마르코 폴로는 보기 드물게 명확하고 조리 있는 스타일로 자신의 견문을 구술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아라비안 나이트와 같은 이야기로 여겼고 마르코 폴로는 심지어 ‘허풍쟁이’의 대명사가 되었다. 비록 훗날 사람들이 마르코 폴로의 기록을 여행의 길잡이로 삼았을지라도, 그의 조우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지구상의 사람들이 서로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음을 설명해 준다.

쿠빌라이 칸을 접견하는 마르코 폴로, 중세 후기 익명의 화가 (위키백과 공유 영역)
머나먼 제국으로부터 생기 넘치는 한 젊은이가 걸어왔다. 기발한 생각이 가득했던 태양왕에게 이 젊은이의 등장은 어떤 화학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멀리 세계의 다른 한편,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성한 제국인 중화제국은 바로 강희성세를 맞이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아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고대 제국과 유럽에서 가장 강성한 신흥 왕국이 조우하게 될 것이다. 동서양의 역사상 재위 기간이 가장 길고 문치와 무공이 서로 빛나던 두 제왕은 시간 속에서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5/12/3/n4587018.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