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열(欣悅)
【정견망】
소나무 아래 정자는 오월에도 서늘하고,
물가 모랫벌과 구름 속 나무들은 저물녘에 푸르스름하네.
나그네는 가을바람 속에 끝없는 그리움 품으니,
물 건너 푸른 산은 고향 같아라.
松下茅亭五月涼
汀沙雲樹晚蒼蒼
行人無限秋風思
隔水青山似故鄉
대숙륜(戴叔倫, 732~789)은 당조 시인으로 자는 유공(幼公)이며, 윤주 금단(潤州金壇) 사람이다. 신성령(新城令), 동양령(東陽令), 무주자사(撫州刺史), 용관경략사(容管經略使) 등을 지냈다. 말년에 상소를 올려 스스로 도사가 되기를 청했다. 그의 시는 대부분 은일(隱逸) 생활과 한가로운 정조를 드러내며, 시론(詩論)에서는 “시인의 경치는 마치 남전(藍田)에 해가 따스하게 비치어 좋은 옥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과 같아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눈썹이나 속눈썹 앞에 둘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시는 체재가 매우 다양하다.
이 시 《제치천산수(題稚川山水)》는 얼핏 보면 풍경을 묘사한 것 같지만, 실제 목적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데 있다. 시인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마음을 시 속에 담아냈는데, 겉보기에는 구름과 안개처럼 맑고 가벼워 보이지만 그 속에는 천 근의 무게가 담겨 있다.
“소나무 아래 정자는 오월에도 서늘하고,
물가 모랫벌과 구름 속 나무들은 저물녘에 푸르스름하네.”
오월은 본래 무더운 때이지만, 사람이 소나무 아래의 정자에 있으니 유독 시원하게 느껴진다. 정자는 햇빛을 가려줄 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바람이 통하니 과연 더위를 피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며, 게다가 커다란 소나무까지 가려주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멀리 저물녘의 모랫벌 위로 나무들이 마치 구름 속에 있는 것처럼 보여 유독 그윽하고 신비로워 보인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인은 저 멀리 신비로운 구름 속 나무를 보고는 자연스럽게 끝없는 상념에 젖어든다.
“나그네는 가을바람 속에 끝없는 그리움 품으니,
물 건너 푸른 산은 고향 같아라.”
여기서 ‘나그네’는 아마도 시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때의 시인은 마땅히 정자에 앉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인은 오고 가는 나그네들을 바라보며 가을바람 속에서 고독감을 느끼고, 그로 인해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멀리 있는 모랫벌이 똑똑히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상상의 여지가 생겨나는 것이며, 그것을 고향처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는 ‘오월’이라 했는데 뒤에서는 ‘가을바람’이라 했으니 계절상으로 조금 맞지 않는 듯하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가을바람은 아마도 일종의 비유일 뿐이니 지나치게 따져 물을 필요는 없다. 사실 시인은 정말로 모랫벌에 찾아가 구경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은 그곳이 진정한 고향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며, 진정한 고향은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 일종의 그리움이자 향수이기 때문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한 영원한 소망이다. 비록 어떤 사람이 평생토록 자신의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늙을 때가 되면 일종의 공허함을 느끼게 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사람이 이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있으면 그것을 고향 그리움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 세상의 고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수련인들이 말하는 천국이다.
오늘날의 사람들 대부분은 천상의 신(神)들이 법을 얻기 위해 멀고 먼 천국에서 이곳으로 내려온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비현실적인 느낌을 품고 있고, 항상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는 것이다. 돌아가고자 한다면 오직 법을 얻고 원만(圓滿)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