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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근본집착을 제거하다

끊임없이 근본집착을 제거하다

작자:대륙 대법제자

【정견망 2007년 6월 16일】
나는 『원만을 향해 나가자』란 경문을 늘 공부하는데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체득이 있다.

처음에 이 경문을 공부할 때 어떤 법리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아주 어려웠으나 나는 진정으로 대법을 수련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사존께서 말씀하신 법리는 모두 옳으며 모두 우리와 중생을 위한 것이다. 내가 잠시 명백하지 않거나 잘 이해하지 못해도 어떤 좋지 못한 생각이 산생될 수 없다. 일단 사존과 법에 대해 불경한 생각이 나오면 진정한 나의 생각이 아니며 그것은 업력의 표현이므로 그것을 부정하고 제거했다. 그 후 한번 또 한번 학습하자 잠시 알지 못하던 것들이 반드시 모든 것이 명백해졌고 이해가 되었다. 사존께서 말씀하신 법리는 깊이를 알 수 없으며 이해한 바가 있어도 자신이 당시 존재하는 층차나 환경에서의 고만한 인식이며 더욱 제고하려면 끊임없이 법을 보아야 하며 진정하게 수련해야 한다. 그럼 더욱 깊은 법리를 깨달을 것이다.

실제로 나의 이런 일념은 법을 공부하고 마음을 수련하는 중에 얻은 것이다. 나는 법을 비교적 일찍 얻었고 시작하자마자 대법이 좋음을 인정했으나 진정하게 대법에서 수련하려고 결심하지 않았고 그저 수련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상태에 처해 있었다. 비록 이랬지만 사존의 자비는 나로 하여금 이런 상태 중에서 명백해지게 하셨고 대법 속에서 수련하는 마음을 견정하게 하셨다.

『원만을 향해 나가자』에서 사존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다.
“집착을 가지고 법을 공부하는 것은 진정한 수련이 아니다. 하지만 수련 중에서 자신의 근본적인 집착을 점차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 그리하여 수련인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근본적인 집착인가? 사람은 세상(世間)에서 많은 관념을 길렀는바, 관념에 의하여 이끌려 가기까지 하면서 동경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은 인연에 의해 인생의 길과 인생중의 득실(得失)을 결정하고 있는데, 어찌 사람의 관념에 의하여 인생의 매 한 과정이 결정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이른바 아름다운 동경과 소원 역시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고통스럽고 집착하는 추구로 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대법 수련 중에서 사존의 이 단락 가르침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의 과정이 있었다.

사악의 박해가 시작되기 전 나는 수련하여 위대한 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별로 많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몸에 나타난 신기한 변화는 다른 기공을 연마하던 중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점에 비추어 나는 사존께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사악의 박해가 시작된 후 나는 수련에 관한 많은 책을 보았는데 진정한 수련은 큰 마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중공 사악 역시 대법과 사부님의 위대함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이 속에는 누락이 있는데 진정한 수련은 마난이 있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은 바로 세간에서 양성된 일종의 관념이며, 모양을 바꾸어 사악이 박해할 이유를 승인하고 박해를 추구하며 사부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진정한 이 한 단락의 법리를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대법을,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바 어떠한 사람이든지 그를 검증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은 우주 속의 일체 생명을 포함하여 모두 그가 개창(開創)한 것이며, 그가 창조하고 육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를 고험(考驗)할 자격이 없다.” (『도항』 「미국서부법회 설법」)

정념으로 노교소를 나온 후 나는 이미 몇 차례 생사관을 넘었으며 생사를 내려놓아 아무 두려움도 없었고 근본적인 집착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사실 이런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 우주 생명의 기점은 사(私)적인데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집착을 산생한 근본이며 이 근본집착을 산생한 근원을 완전히 제거하기 전에는 자신에게 근본적인 집착의 문제가 없다고 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본 집착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으며 부동한 형식으로 때로는 두드러지며 때로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수련 중에 층차를 제고할 때 넘어야 하는 관이며 제거해야 할 장애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한 수련하는 사람은 당신의 수련과정 중에서 줄곧 최후의 한 걸음에 이르기까지 모두 당신에 대한 근본적인 고험(考驗)이 떠나지 않는다.”(『도항』 「미국서부법회 설법」)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장래의 사람은 오늘날 정법시기 대법제자처럼 위덕이 크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늘날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부딪친 이러한 마난(魔難)이 있을 수 없으며 물론 또 역사적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은 오늘날 그처럼 크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전법륜』의 매 한 글자의 배후에는 끝없는 불도신인데 장래에는 그처럼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법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며 그렇게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법제자들이여, 당신들이 지금 위덕을 세우는 가운데서 나는 당신들에게 얼마나 높이 수련하던지 제한을 두지 않을 것이다.” (『2003 정월대보름 설법』)

대법 수련 중 층차를 제고할 때 청성하게 인식해야 할 것은 모든 근본적인 집착의 기점은 사(私)를 위한 것이며 자신이 당시 직면했던 근본적인 집착이 무엇인지 쉽게 인식하면 쉽게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진정으로 이 점을 잘하려면 매일 전심으로 책을 보고 법공부를 하며 세 가지 일을 잘하여 착실히 수련해야만 비로소 진정하게 “원만으로 나갈” 수 있다.

이상의 깨달음에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발표시간:2007년 6월 16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7/6/16/444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