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션윈을 따라 상도(商道)를 배우자

션윈을 따라 상도(商道)를 배우자

작자: 종고루(鐘鼓樓)

[정견망]

사부님의 정법을 돕고,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최근 몇 년간 대법제자들은 자발적으로 많은항목들을 만들어, 다양한 형식으로 진상을 알리고 대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아주 큰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대법제자가 만든 매체는 국내외에서 모두 영향력이 아주 커서 많은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사악이 두려워 떨게 했다.

사부님께서는 따지웬(大紀元)회의에서의 설법에서 “어떻게 하면 잘 관리하고, 정말로 그것이 속인사회에 입각하고 양성순환 하도록 할 수 있는지, 내가 생각하건대 이 방면에서 당신들은 이 회의를 빌어 잘 연구하고 연구하도록 하라. 정말로 그것을 하나의 견고한 실체로 만들고 경영을 아주 잘할 수 있으며, 게다가 참여한 대법제자가 여기에서 생활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한 전력을 다해 여기에 투입할 수 있으므로 해서, 그것으로 하여금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 더욱 유력하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이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것이 따지웬뿐만 아니라 대법제자들이 만든 모든 매체에 대한 사부님의 요구임을 깨달았다. 법공부를 통해 나는 오직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용(圓容)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조사정법임을 깨달았다. 기왕에 사부님께서 “속인사회에 입각하고 양성순환”하라고 제기하셨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속인 사회에 입각하고 어떻게 양성순환 할 것인지 우리 모든 매체와 매체에 참여한 매 수련생마다 사고하고 추진하며 해내야 한다.

개인적으로 “속인사회에 입각한다”는 것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나는 매체의 내용이 속인사회를 향하고, 대중들이 즐겨해야지 대법제자 이 단체에 제한해 우리끼리만 감상하는 내부 간행물이나 혹은 너무 고상해서 보는 사람이 없는 학술 간행물로 만들면 안 된다. 때문에 매체는 반드시 통속(通俗)노선을 걸어야 하며 남녀노소에게 모두 적당한 “삼국연의(三國演義 소설 삼국지)” 노선을 가야지 너무 수준 높은 “삼국지(三國志 정통 역사서)” 노선을 가지 말아야 한다. 이에 대해 나는 “통속의 의미”라는 글에서 상세히 서술했다.

두번째는 매체의 경영이 속인사회에 발을 붙여야 한다. 매체 자체의 수입으로 매체의 정상적인 운영을 유지하고 참여한 대법제자들의 생활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 매체가 돈을 벌어 스스로 먹여 살리고, 정상 경영을 하며, 수입과 지출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매체가 되어야 하며 줄곧 수련생의 기부에 의지해 유지해서는 안 된다.

“양성순환”에 관해 나는 또 적어도 두 층의 함의를 깨달았다. 하나는 물질의 양성순환으로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자금의 양성순환이다. 마치 사회의 정상 기업처럼 자금의 회전을 통해 더 많은 자금을 벌어들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신의 순환이다. 다시 말해 매체의 내용을 통해 사회의 온갖 진상과 정견(正見 바른 견해)을 세인들에게 가져다주고, 장차 대법제자의 정면적인 정신을 주류사회의 정신유통 영역에 주입하여, 우리 매체가 명실상부한 사회 주류매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 매체의 물질순환과 정신순환은 동전의 양면으로 상보상성(相補相成)하여 공동으로 하나의 주천(周天)순환을 구성해 인류사회 및 우주 중에서 모두 정면적인 작용을 일으킨다. 우리가 만약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양성순환을 이룰 수 있다면 우주 정법 중에서, 이런 종류의 주천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중에 갈수록 중요한 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반대로 자금을 양성순환하지 못하면 매체에 참여한 수련생들의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수련생이 전력으로 투입하는데 영향을 주며 또한 정신적인 양성순환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수년간 대법제자들이 매체를 꾸리면서 대량의 인력과 물력 자원을 투입했으나, 일부 매체는 아직도 속인사회에 입각해 독립경영을 하지 못해, 여전히 대법제자들이 끊임없이 인력과 물력을 투입해야 한다. 나는 이것은 당연히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속인사회에 입각하여 매체를 꾸리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돈을 버는 것이 바로 경영이다. 경영을 하려면 상도(商道)를 따라야 하는바 상도의 배후는 바로 법리(法理)다.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전체 우주에서 어떤 일이든 성사시키려면 모두 “도(道)”에 부합해야 하는데 다시 말해 법리에 부합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주대법이 모든 것을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벌지 못한다면 이는 상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 경영 방식이 법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비록 다년간 구세력이 교란하는 요소가 있었지만 우리 대법제자들은 어떤 일에 부딪히든 안으로 찾아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왜 교란할 수 있는가, 여전히 우리의 틈을 탄 것이 아닌가? 지금 세간(世間)의 모든 것은 법을 위해 왔고 법을 위해 쓰인다. 길마다 대도(大道)로 원만(圓滿)으로 통한다. 오로지 우리가 이 상도를 바르게 걷기만 하면 사악은 교란하지 못하며, 우리는 이 상도를 통해 조사정법하고 원만으로 나아갈 수 있다.

대법은 일체를 포함하는데 사실 사부님께서도 설법에서 이미 언급하신 적이 있다. 현재는 대법제자가 조사정법하고 위덕을 건립하며 원만을 향해 나아가고, 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생명인 정법시기 대법제자를 성취하는 단계다. 많은 일은 사부님께서 하실 수 없으며 제자들이 해야 한다. 어떤 말은 사부님께서 투철히 알려주실 수 없으며 마땅히 제자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일을 잘할 수 있는지는 제자가 깨달을 수 있는지 봐야 한다.

나는 우리 매체가 속인사회에 입각하고 돈을 벌려면 상도를 잘 걸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런데 상도는 바로 사부님의 설법 중에 있다. 션윈 표 값을 말씀하실 때 사부님께서는 “서방사회에서는 한 푼의 돈이면 한 푼어치 물품이다”(대법제자는 반드시 법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한 푼의 돈이면 한 푼어치 물품이다(一分錢一分貨)” 이것이 바로 상도(商道)이고 또한 법리(法理)다.

사부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서방사회에서는 한 푼의 돈이면 한 푼어치 물품이라, 우리 이처럼 고급적인 쇼인데, 당신은 기어코 노점상처럼 팔려고 한다. 사부는 이렇게 하려 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주류사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려주겠다.”

똑같이 옷을 파는데 왜 어떤 옷은 노점에서 팔고 어떤 옷은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백화점에서 파는가? 가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생명인데 왜 수련 원만한 대법제자는 그렇게 높고 아름다운 경지에 배치하고, 대법을 파괴한 생명은 지옥으로 떨어뜨리거나 심지어 소각하는가? 생명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주 중의 중생 만물도 모두 그것의 가치가 있으며 그 자신의 가치에 따라 다른 위치에 놓는데 이것이 바른 법리다. 정법은 우주 중의 매 생명이 대법에 대한 태도에 따라 각자의 위치를 배정하는 것이 아닌가? 가령 어떤 제자가 부처로 수련되었는데 나한이 되라고 하면 분명히 싫다고 할 것이다. 션윈은 그렇게 높은 가치가 있는데 왜 노점상처럼 팔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는데도 듣지 않으며 심지어 사부님의 생각을 개변하려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을 천상의 뭇신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나중에 또 어떻게 생명의 위치를 배정하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이미 “상유심생(相由心生)”의 법리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악의 힘이 대량으로 소멸된 지금 아주 많은 일들에서 국면을 제대로 타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속인 마음이 자신의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가격전쟁을 하고 쇼핑 할인하여 판매를 촉진하는 것은 상도가 패괴된 후 생겨난 것이다. 과거에는 절대 이렇지 않았다. “한 푼의 돈이면 한 푼어치 물품이다”는 서방사회뿐만 아니라 인류의 정상사회에서는 모두 이러하며 과거 중국에서도 이랬다. 이백(李白)이 술에 취해 낙양(洛陽) 양원(梁園)의 담벼락에 “양원음(梁園吟)”을 적자, 재상을 지낸 종초객(宗楚客)의 손녀가 이를 발견했다. 그녀는 이백의 필적(筆跡)을 보호하기 위해 천금을 치르고 담벼락을 샀다. 사실 그녀는 1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에 담벼락을 살 수 있었지만 왜 천금을 썼을까? 그녀는 이렇게 해야만 이백이란 천재의 가치를 승인하는 것이며 그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조가 높은 품격으로 예의를 차리고 관우를 대한 것 역시 관우에 대한 존중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관우의 가치고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신전문화(神傳文化)이지만 지금의 중국인은 알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물건에 아무리 낮은 가격을 붙여도 그는 비싸다고 하며 공짜로 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러나 “한 푼의 돈이면 한 푼어치 물품이다”를 법리로 가늠해보면 할인은 경영의 정도(正道)가 아니며 공짜로 주는 것은 상도가 더욱 아니다.

대법제자의 매체는 꾸린지 수년이 되었지만 왜 국면을 여는 것이 지지부진하고 아직까지도 속인사회에 입각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정말 마땅히 이 방면에서 원인을 찾아봐야 한다. 우리 자신이 걸은 이 상도가 바른가, 법리에 부합하는가, 조사정법의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가? 매체에 참여한 우리 수련생들은 모두 이런 것들을 안으로 잘 찾아봐야 한다.

법공부를 통해 정법은 바르지 않은 모든 것을 바로 잡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한 푼의 돈이면 한 푼어치 물품이다” 이것은 상도일뿐만 아니라 법리다. 사부님께서는 친히 션윈을 이끄시며 우리에게 션윈이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셨으며 다른 항목의 본보기가 되게 하셨다. 션윈의 표값이란 이 문제에서 사부님께서는 이미 주류사회를 하고 할인을 하지 않는 길을 결정하셨다. 그렇다면 이 길은 마찬가지로 속인 사회에 발을 붙여야 하는 매체 경영에 대한 본보기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할인에 의지하거나 심지어 무료로 경영한다면 “한 푼의 돈이면 한 푼어치 물품이다”는 법리에 부합하지 않고 상도의 바른 길이 아니다.

나는 사부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데는 이미 바르지 못한 상도를 되돌리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정법시기 인간세상의 일체는 전체 우주에 대응되며 대법제자가 한 모든 것은 아주 큰 범위, 아주 높은 층차에 관련 된다. 때문에 우리가 길을 바르게 가는지 여부는 극히 중요하며 상도 역시 그중의 하나다. 만약 길을 바르게 가지 않는다면 구세력은 구실을 찾아 교란할 것이며, 그렇다면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일에 정말로 영향을 줄 것이다. 매체를 잘하려면 전업화의 수준을 제고하고 매체의 품질을 높여야지, 함부로 할인하거나 심지어 무료로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외에 불교 중에 “법집(法執)”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이해하기에 어떤 수련자가 자신이 깨달은 고만한 법리를 놓지 않음으로써 더 높은 층차로 돌파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부님께서 하시는 것을 일부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이해한 고만한 법리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대법은 무변(無邊)한데 어찌 우리가 이해한 고만큼이겠는가?

옛날에 유가(儒家) 역시 성인의 말씀을 강조했는데, 일부 유학자들은 옛것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성인의 말씀에서 자신이 이해한 고만한 것을 완고하게 고수한다. 나중에 송명(宋明) 시대에 도학(道學)이론이 갈수록 많아졌으나 도리어 실제와는 더욱 멀어졌다. “평소에는 손을 놓고 심성을 말하다가, 위난에 처하면 죽음으로 군왕에게 보답(平時袖手談心性,臨危一死報君王)”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진정한 성인의 제자는 마땅히 도리를 실천에 운용해 지행(知行)이 하나가 되어 일반인보다 더 잘해야 된다. 자신이 인식한 고만한 도리에 얽매여, 이론만 이야기하며 실제 생활에서 번거로움에 부딪히면 속수무책인 그런 책벌레가 되지 말아야 한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 안회(顔回)를 가리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고 했으니 이 한 점에서 투철한 사람이었다. 안회는 필경 속인이며 오늘날 대법제자는 그보다 못하지 말아야 하며 적어도 한 가지를 알려주면 세 가지는 알아야 한다. “전법륜”은 모든 제자들이 다 배우고 있고 법리 역시 매 제자들이 다 괜찮게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법무정법(法無定法)이라 우리가 아무리 높게 수련되어도 대법의 무한한 내포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책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어려운 것은 구체적인 문제에서 어떻게 법리를 운용해 바르게 대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공부(工夫)다.

일부 일은 제자가 법리에 따라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오히려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저렇게 하셨다. 이때는 반드시 자신이 대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해야지, 절대 사부님을 의심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하시려는 것은 반드시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지는 법속에서 반드시 답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이때가 바로 자신의 차이점을 찾는 좋은 기회다. 왜 그런지 많이 묻고 법리를 결합해 사부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깨닫는다면, 우리의 제고에도 분명 좋은 점이 있을 것이다.

이상은 개인의 인식이니 참고로 제공하는 바이다.

발표시간: 2011년 8월 20일
정견문장: http://zhengjian.org/zj/articles/2011/8/20/7676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