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소경(小敬)
[정견망]
1. 고난의 소년시절
나는 섬서(陝西)성 한중(漢中)에서 출생했으며 집이 매우 가난했다. 철이 막 들었을 때 기억에 의하면 아버지는 매일 새벽마다 나무를 지고 나가 팔았으며 저녁에 쌀 두 근과 채소 한단을 갖고 오셨으니 바로 우리 일가 6명의 양식이었다. 셋째 이모는 언니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그때 현(縣)의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연세가 많았으며 외할머니는 늘 아프셨고 외숙부는 오빠와 같은 나이였으며 셋째 이모는 매주 일요일 우리집에 와서 일주일 쓸 용돈과 양식표를 좀 가져갔다. 또 아침 저녁을 우리집에서 먹었다.
셋째 이모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빠가 또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매주 쌀 6근과 생활비 5각(角), 절인 짠지를 한 단지 가져가야 했다. 내 기억에 한번은 오빠가 토요일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 쌀이 떨어져 오빠는 일요일에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버지는 다음날 아침 또 땔감을 지고 어머니는 집에 겨우 남은 계란 몇 개를 갖고 쌀을 사서 얼른 오빠에게 보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에 다녔고 어린 동생이 있었으므로 첫째인 언니가 집안일을 했다. 나는 나보다 세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는데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키울 수 없자 두 살 좀 넘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 보냈다.
내가 5학년 다닐 때 오빠는 생산부대 콩밭에서 뿌리는 농약에 중독돼 거의 죽을 뻔 했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병사가 되어 싸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전쟁 중에 늘 산에서 노숙했으며 높은데서 떨어져 다리에 병이 들었다. 어느 여름날 갑자기 두 발로 걸을 수 없었는데 다행히 제때 치료해 불구가 되지는 않았다. 내가 9살 될 때 우리 마을에 가로등을 설치했는데 아버지가 전봇대를 잡아당길 때 전봇대에 발가락이 깔려 1년을 치료한 후에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갑자기 머리 한쪽이 아프며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학업 성적은 날마다 떨어져 선생님에게 몇 번 꾸지람을 들었다. 어머니는 매우 걱정하셨고 나도 겁이 났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닐 때 동창인 개개(改改)가 편두통에 걸렸을 때 집에 치료할 돈이 없어서 뇌종양이 자라 머리 피부가 갈라졌고 나중에 고통스럽게 죽은 일이 있었다. 학교 오고갈 때마다 그의 묘지 앞을 지나야 했는데 혼자서 지날 때는 머리조차 들지 못했다. 두통이 심할 때는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으며 이렇게 힘들게 중학교를 졸업했다.
2. 걱정과 근심의 청년시절
중학교 졸업 후 중매로 나와 동갑인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 후 사이가 좋지 않아 기회만 있으면 그 집을 떠나려 했다. 1986년 여름, 나는 그와 한중시에 양피를 팔러갔다. 양피를 사는 처녀가 내 남편의 인품이 너무 형편없는 것을 보고 함께 하북(河北) 지역으로 도망쳐서 살자고 했다. 나중에 우리 둘은 떠났다. 기차간에서 눈물을 비오 듯 흘렸다. 두 살 난 딸을 어머니에게 남겨 두었는데 내가 떠날 때 얼굴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나중에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알지 못했다.
91년에 집에 돌아와 호적을 정리할 때 딸과 아이 할머니가 나를 보러왔다. 할머니 말에 의하면 딸은 늘 계모에게 맞아 머리에 피가 났다고 한다. 한번은 계모가 혁대로 머리에 때려 혁대의 금속 부분이 머리에 큰 상처를 남겨 5,6바늘 꿰맸으며 깊은 상처가 남았다. 아이 할머니는 나에게 딸을 위한 돈을 좀 주길 원했지만 나는 그럴 돈이 없었다. 이번에 고향에 돌아온 것도 지금 남편에게 여비를 빌려온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할머니는 딸을 데리고 돌아간 지 며칠 후 아이 할아버지가 딸을 600위안에 팔았다. 다른 사람이 딸을 데리고 갔는데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다.
우리 둘은 차를 타고 하북 심현(深縣)에 그녀 친척집에 도착해 사람의 소개로 나는 현재의 남편과 결혼했는데 그때 24살이었다. 원래 그는 현 중학교에서 임시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정규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그의 월급은 60위안이어서 우리는 살기가 매우 힘들었다. 결혼한 다음해 나는 편두통이 빈번히 발작했으며 아들은 낳은 후 또 두 다리에 관절염이 더해져 매년 가을 겨울에는 두 다리에 고약을 발라야 했다. 89년 여름, 밭에 나가서 면화에 농약을 뿌리다 잘못해 중독이 됐고 병원에 데려가 이틀 후에야 겨우 깨어났다. 혼수상태 동안에 나의 원신(元神)은 내 몸을 떠나 지옥으로 갔다. 지옥에서 많은 귀신을 보았는데 그들은 2,3장 높이였고 어떤 것은 봉두난발을 하고 혀를 한척 이상이나 길게 뽑은 것도 있으며 어떤 것은 송곳니가 톱니처럼 생겼고 울긋불긋한 장포를 입었다. 그들은 각자 무기를 들었는데 긴 창, 철추 등을 들고 두 줄로 서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나는 겨우 4,5촌 높이라 그들 다리 앞에서 왔다 갔다 했는데 가끔 머리를 들어 그들을 보고 매우 무서워했다.
사흘째 아침에 눈을 희미하게 떴을 때 전등 속에서 선녀가 날아왔는데 하얀 치마를 입었고 머리에서 침을 하나 꺼내 내 머리 위를 한번 긋고 작은 배(船)를 그었는데 배 위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나도 그 작은 배에 타고 싶어 필사적으로 따라갔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내가 먼저 갈테니 너는 뒤에 따라오렴.” 말을 마치자 배는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수련 후 알았는데 그것은 사부님이 보살을 연화해내 나를 구하신 것이었다. 이때 나는 이틀간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는데 남편에게 본 것을 말했다. 남편은 내가 처음에 마구 고함을 지르다가 나중에는 움직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내 말을 믿지 않았고 헛소리 한다고 했다.
92년 나는 온몸에 병이 들어 있었고 두 아이는 어렸다. 시어머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했으며 밭에 심은 면화를 도둑을 맞아 나는 여기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학교에서 겨우 방 한 칸을 얻었는데 일가족 네 식구가 방 한 칸에서 북적대며 먹고 자고했다. 당시 아들은 네 살 딸은 두 살이었다. 몇 년 후 아이들은 모두 유아원과 학교에 들어가고 나와 남편은 상의해 각자 일을 찾기로 했다. 나는 외지인인지라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교장을 찾아갔다. 나중에 학교 청소와 학생 기숙사 안전 사무를 맡겨주었다.
3. 법을 얻은 후 수련의 굴곡
96년 편두통이 또 발생했다. 치료 기간에 학교 미술 선생님이 같은 병실의 이웃 사람에게 파룬궁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듣지 않았고 나는 옆에서 들었는데 연분이 닿아서 나는 즉시 연마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내게 “전법륜”을 빌려주었는데 그때가 1996년 가을이었다. 내가 제 4강을 보았을 때 나는 알았다. “사람은 원래 병이나 마난이 없구나. 다만 사람이 세세생생 나쁜 짓을 하여 지은 업력 때문에 병이나 마난이 있는 것이로구나.” 나중에 내가 보면 볼수록 이 책은 불도(佛道)를 닦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수련해 성불하겠다고 남 몰래 결심했다.
나는 법공부를 하면 머리가 아프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머리가 아파서 매일 3강을 읽었다. 연공한지 두 달도 안 되어 천목이 열렸다.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처음에는 끊임없이 꽃이 뒤집히더니 나중에 자동차처럼 달려도 끝에 닿지 않았다. 책을 볼 때 책이 모두 온통 붉은 색이었다. 이어서 몇 년 수련 중에 층차의 제고에 따라 나는 자기가 윤회한 상황을 보았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지구에 온지 5천년이 되며 다섯 번째 생부터 업을 짓기 시작했다고 알려주셨다.
내가 지구에 가장 처음 왔을 때 나무를 문질러 불을 취하는 방법을 발명했다. 그때 머리는 금빛을 내뿜었고 천상에서 천천히 내려왔는데 매우 늙은 노인으로 8,90세 되는 모습이었다. 2500년 전 당시 석가모니의 제자가 됐으며 큰 나무 아래에 방석을 깔고 가부좌를 했다. 그때 나는 40여세의 남자였다. 당나라 시기에 사부님께서 황제로 계실 때 나는 황궁에서 공주로 태어나 연을 맺었다. 북송시기에는 조광윤(송태조)의 비가 됐다. 사실은 마땅히 양녀가 됐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일이 있다. 이것을 말해야겠다.
조광윤이 강호를 다닐 때 5,6세 되는 여자 아이를 주웠는데 그가 강호에서 다니므로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가 불편해 그녀를 시씨 가문(柴家)에 맡겼다. 시영(柴榮)은 조광윤과 의형제를 맺은 사람이라 아이를 자기 친딸처럼 키웠다. 그래서 이 아이는 시가에서 친부모와 같은 관심을 받고 자랐다. 조광윤이 천하를 타도하고 황제가 된 후 시가에 가서 이 아이를 찾아왔는데 그때 소녀가 자라서 18,9세의 아름다운 처녀로 자란 것을 보고 그는 정이 움직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아이에게 말했다. “내가 너를 비로 삼겠다.” 아이는 말했다. “당신께선 제 삼촌이신데 이는 난륜(亂倫)이 아닙니까?” 바로 이 일 때문에 조광윤의 복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청나라 건륭 연간에 나는 절에서 승려가 됐고 또 한 번은 황후가 됐다. 당시 황제였던 사람은 현재 현 검찰원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그의 현재 아내는 당시 내가 데리고 있던 시녀였다. 당시 그들 둘이 서로 좋아했으므로 나에게 황제의 비로 거두어 달라고 부탁했으나 나는 승낙하지 않고 한번 훈계를 하며 내세에 부부가 되게 허락한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이번 생에 동창이 되었고 또 부부가 됐다. 애석하게도 당시 황제는 이번에 법을 얻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몇 번 나를 점화해 그를 구하라고 하셨는데 내가 만약 그를 구하지 못하면 희망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진상자료를 몇 번 부쳤는데 보았는지 모르겠다.
4. 전생의 원한이 이번 생에 오다
2002년 여름 내가 노동교양소에서 집으로 돌아오자 남편의 직장에서 끊임없이 나를 교란했다. 학교에서는 방금 교장이 두 명으로 바뀌었는데 그들은 매일 사람을 파견해 나를 감시했다. 더욱이 사악은 민감한 날, 예컨대 4.25, 7.20 등이면 교장이 남편을 찾아 이야기를 했으며 남편에게 나를 잘 관리해 학교 밖을 나가지 않도록 했다. 한번은 이 두 교장과 무슨 인연관계인지 보고 싶었다.
밤에 꿈을 꾸자 사부님께서는 나와 그들의 관계를 보여주셨다. 그 둘은 한때 한 쌍의 부부였는데 연대가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다. 큰 교장 류(劉)모씨는 나의 시아버지였고 부 교장 리(李)모씨는 시어머니였다. 그들 집은 매우 부유해 부부는 늘 비단 옷을 입었다. 우리 집은 무술을 연마했는데 부친은 주변 백여 리에서 무술고수여서 어려서 부친이 무예를 가르쳐 주셨다. 그들 집 둘째 아들은 서생이었으며 내가 매일 아침 조용한 곳에서 무예를 연마하면 그는 그곳에서 책을 읽었다. 시간이 길어지자 우리 둘은 몰래 장래를 약속했다. 나중에 그 부모가 알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우리집이 무림 출신인 것을 싫어했다. 내가 17,8세 됐을 때 부친은 나에게 어느 여 사부를 찾아 무공을 가르쳤다. 그녀는 산에서 수도하며 무예를 연마했는데 8,90세 됐으며 무술이 매우 높았다. 내가 산에 들어가는 그날 그들의 아들이 나를 먼 곳까지 배웅했는데 산 아래 도착하여 내가 그에게 돌아가라고 했으나 그는 섭섭하여 미련이 남아 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다. “돌아가세요, 더 이상 오지 말고.” 머리를 휙 돌려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고 보검을 멘 채 산꼭대기로 바로 올라갔다. 나의 무공이 완성된 후 집에 돌아오니 집에는 가슴 아픈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변변치 못한 제자 하나가 소송을 당했는데 지은 죄가 비록 크진 않았지만 관아에서는 그를 석방하지 않았다. 부친은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상의해 미래의 시어머니 시아버지에게 부탁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관부와 가깝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애걸했으나 그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부친과 상의해 그날 밤 나와 부친은 그들 집 담장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혈도를 찍어 밧줄로 묶은 후 마당을 나와 산비탈 아래에서 그들의 혈도를 풀어주며 그들 면전에 무릎을 꿇으며 도와 달라고 청했다. 어쩔 수 없자 시아버지는 승낙을 했고 부친은 그들의 밧줄을 풀어주었다. 시어머니는 끊임없이 주절거렸다.
“시집을 오기도 전에 이러니 시집을 오면 우리를 아주 잡아먹겠구나.” 나는 이런 것을 보고 원한의 마음을 비로소 알았다.
그 때 내 남편은 현재 북경 부대 총부에서 운전을 하고 있다. 어느 날 밤 원신이 몸을 떠나 아들을 데리고 그를 보았는데 만난 후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우린 전생에 부부였어요. 금생에 우린 서로 모릅니다”하고는 떠났다. 금생의 내 아들은 바로 그때의 나와 그의 아들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총무주임은 당시 시부모의 큰손자가 태어난 것이며 당시 그는 나를 숙모라고 불렀다.
금년(2012) 3월 어느 날 사부님께서 이 지방에 역사상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 삼십만 명이 있어서 내가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 길을 막을 정도로 많다고 알려주셨다. 이 현에 60여만 명의 인구가 있는데 나와 연을 맺은 사람이 반이나 되니 내가 사람을 구하는 사명이 매우 크다. 또 두 생애가 더 있는데 쓰고 싶지 않다.
5. 업을 짓고 소원을 빌다
1997년 여름, 학교에서 갑자기 나보고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 학생 기숙사의 6,7명이 나 한 사람을 쫓아냈다. 나는 대법을 수련하므로 마음속으로 원망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일을 찾으러 갔다. 다른 지방으로 가서 출근하는 첫날에 누군가 내 자전거를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전혀 탈 수 없었다. 퇴근해 돌아오니 딸이 나를 때리며 난리를 쳤는데 집에서 밥을 안 해주니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나는 학교 입구에 가서 간단한 음식을 팔았다. 다른 사람의 밥은 곧 다 팔렸는데 내 것은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어서 이 일도 성공하지 못했다. 8월 15일이 거의 다 되어 남편 전우의 아내가 말하기를 매년 8월 15일 전 5,6일 동안 만두를 팔면 300위안을 벌수 있으니 함께 가서 팔자고 했다. 그래서 돈 450위안 어치 만두를 샀으나 나흘 동안 겨우 30위안어치 밖에 못 팔았다. 나는 8월 15일이 지나면 아무도 사지 않을까 겁이 났고 또 만두를 물릴 수도 없으므로 원가로 팔았더니 15일 당일에 거의 다 팔았다. 집에 돌아와 돈을 세어보니 바로 450위안이 됐고 남은 만두 13개는 아이에게 주었다. 그 때 이후 나는 다시는 물건을 팔거나 일을 하거나 직장에 출근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 나는 수련을 느슨해 했으며 법공부 장소에 가고 싶지 않았으며 혼자 집에서 연마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늘 제고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사부님께서는 조급하셔서 매일 밤 꿈에 나를 점화하셨다. 나는 그래도 줄곧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경문 “시간과의 대화”가 나왔다. 나는 “최후에는 사람조차도 되지 못할까 걱정이다” 부분을 읽었을 때 비로소 마음은 정말 급해졌다. 자신이 죽어 사람조차로도 태어나지 못할까 걱정됐다. 이날부터 나는 정전하여 수련하기 시작했으며 가부좌를 트는데 다리를 올리지 못하면 끈으로 묶어 모래주머니로 누르고 매일 견지해 음악이 다 끝날 때 비로소 내려놓았다. 매번 할 때마다 아파서 눈물을 온통 흘렸으며 특히 사상업이 올라와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이 함께 휘저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듯 괴로웠다.
6. 정법의 길에서의 마난
99년 7.20 새벽, 나와 동수가 함께 거리에서 연공을 하는데 가부좌하고 있을 때 주위에 많은 선녀와 동자들이 있어서 어떤 사람은 북을 치고 어떤 사람은 나팔을 불며, 또 춤을 추며 모두 내 주위를 돌고 있었다. 나는 이전에 이런 장면을 본적이 없었다. 그날 오전 9시가 좀 지나 어느 동수가 급히 나를 찾아와 말했다. “어젯밤 많은 보도원이 잡혀 갔어요. 어떤 사람이 석가장(石家莊)시에 가서 청원을 하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요?” 나는 가겠다고 말했다. 하던 일을 내려놓고 동수를 따라갔다.
우리 여덟 명은 차를 한 대 빌려 석가장에 있는 하북성 정부 입구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동수들이 와 있었다. 경찰은 입구에서 우리를 못 들어가게 막으면서 말했다. “여기에서는 만나주지 않으니 북경으로 가시오.” 그래서 사람들은 각각 나뉘어 북경으로 가는 차를 찾았다. 나와 우리 현의 7,8명은 한 차량에 올랐는데 차가 떠나자마자 석가장 시내에서 모두 가로막혔다. 많은 차가 막혀 있었는데 모두 북경으로 가는 동수들이었다. 우리는 임시로 어느 큰 정원에 갇혀있었다. 경찰이 부주의한 틈을 타서 나와 한 동수가 빠져나와 도보로 북경에 가기로 결정했다. 가는 중간에 또 우리 현의 여자 동수 네 명을 만나 우리 여섯 명이 함께 걸었다. 나는 슬리퍼를 신었으므로 오래 걷자 발이 아파 아예 신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날이 저물어 밤이 깊었다. 길목 입구에는 모두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경찰이 끊임없었다. 그러면 옥수수 밭, 샛길, 길 옆 등으로 빠져 경찰의 검문을 피했다. 다음날 오전 11시 경 보정으로 가는 길에서 공안에 가로막혀 돌아왔다.
이해 겨울 각지 동수들이 북경에 가서 법을 실증했는데 강마두(강택민)가 우리 파룬궁을 사교(邪敎)로 규정했기에 동수들은 모두 나가서 바른 말을 하려 했다. 나는 마음이 급해 쩔쩔 매며 “어떻게 하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동수 아주머니가 북경에 가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새벽 3시에 일어나 그녀의 집 입구에서 기다렸다. 그녀가 일찍이 가버리면 나는 북경에 가 본적이 없어 길을 모르기에 같이 가려고 한 것이었다. 새벽 5시에 그녀 집문이 아직 열리기도 전인데 남편이 깨어나 내가 없는 것을 알고 나가서 나를 찾으러 오는 바람에 되돌아갔다. 집에서 밥을 먹어도 맛이 없었고 법공부를 해도 집중되지 않았으며 한마음으로 북경에 가려고 생각했다. 갑자기 어느 날 어느 동수가 찾아와서 그들이 북경에 가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얼른 가겠다고 했다. 다음날 우리는 틈을 내어 갔다. 당시 직접 천안문으로 가지 않고 북경에서 6,70리 떨어진 어느 마을에 갔는데 그 마을은 OO하(河)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백여 명의 동수가 법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많은 수련생들은 무엇 때문에 걸어 나와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전국 각지에서 온 대법제자와 함께 교류했다. 사람들은 심성이 제고됐고 두려움을 제거한 사람만 북경 천안문에 갔으며 뚜렷한 인식이 없는 사람은 계속 공부했다.
내가 막 가던 그날 밤 통지가 왔는데 다음날 북경 팔보산(八寶山) 중급 법원에서 대법제자 왕치문(王治文), 이창(李昌), 기열무(紀烈武), 요결(姚潔)의 재판이 있다고 알려왔다. 누가 법원에 가려고 하는지 알고 싶어 했으며 갈 때 각자가 무리를 만들어 가되 너무 많으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어느 동수와 짝을 이루었는데 길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동수가 지도를 그려주었다. 그곳에 도착했는데 처음에 아무도 없더니 잠시 후 동수들이 속속 도착하더니 입구, 길 옆, 수풀 속에 모두 가득 찼다. 우리는 재판을 방청을 요구했는데 입구에서 경찰이 못하게 했다. 잠시 후 매우 많은 경찰이 버스 두 대를 몰고 와서 이유 불문하고 사람을 붙잡았다. 나는 잡혀 매우 큰 체육관에 끌려가서 이름을 적었다. 또 사진을 찍고 내 이름을 적을 때 나는 “이경(李敬)”이라고 했다. 경찰은 눈을 크게 뜨더니 말했다. “당신네 사부가 성이 이씨인데 당신이 이경이라고 하면 사부를 존경한다는 뜻이 아니오?”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후 5시 경 형수(衡水)시에서 우리를 데리러 사람이 왔으며 우리 7명을 북경 주재 하북 사무처로 데리고 갔다. 날이 매우 추웠고 눈이 약간 내렸는데 우리를 복도에 서 있게 했다. 나중에 화장실 가는 틈을 타서 나는 빠졌다. 저녁 7시 경이었는데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어서 택시를 잡았다. 기사에게 버스정류장으로 가자고 해서 버스를 타고 어제 왔던 OO하(河)로 돌아왔다.
법공부하는 곳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밀짚을 깔고 바닥에서 잠을 잤는데 4,5명이 함께 이불을 덮었다. 매일 두 끼 밥을 먹었는데 식사는 만두 두 개와 야채국 한 그릇이었다. 당시 환경이 매우 공포스러웠기에 시간이 며칠 지날 때마다 장소를 바꾸었는데 나는 두 번이나 장소를 바꾸었다. 당시 수련생은 모두 전국 각지에서 왔으며 우리는 법공부와 교류하며 제고되면 북경 천안문에 가서 법을 실증했는데 그곳에도 모두 유랑하는 수련생이었다. 나는 그 상황을 알고 몇 명 동수와 상의해 그곳을 떠나 천안문으로 가기로 했다. 마음속 말을 하려면 나는 당시 두려움이 심했다.
천안문 광장 변두리에 도착하자 우리는 곧 경찰에게 발견됐고 차속에 갇혔다. 가두는 곳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후 보니 작은 집에 1백여 명이 갇혀 있었다. 맞은편에는 수련생을 심문하는 사무실이 있었는데 실내에서 처참한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전해져 나왔다. 나는 우리 현의 어느 여자 동수를 보았는데 17세 정도 됐다. 악한 경찰은 그녀의 한손을 등 뒤에서 위로 당기고 다른 손은 등 뒤 아래로 당겨 수갑으로 채웠다. 경찰은 손에 손가락 정도 굵기에 길이가 2척정도 되는 고무호스로 그녀의 머리를 때리면서 물었다. “말할래 안할래?” 그녀 손목은 수갑에 긁혀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사악한 경찰은 때리는 한편 수시로 등 뒤 수갑을 위로 잡아 당겼다. 그녀의 처참한 비명은 듣는 사람으로 모골이 송연하게 했다.
또 한 사람은 부성(阜城)현의 여자 동수인데 경찰이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독하게 때려 처참한 비명을 냈다. 나는 한 젊은 남자 경찰이 귀를 막고 복도 먼 곳으로 달려가며 말하는 것을 들었다. “진향련(秦香蓮)의 비명 소리는 너무 처참해, 얼마나 무서운지.”
밤이 되자 우리 심현(深縣) 공안국의 진화(陳華) 부국장이 우리를 차에 태워 북경주재 형수 사무처로 데리고 갔다. 다음날 우리는 심현으로 보내져 심문이 끝나자 간수소에 갇혔고 이렇게 한번 갇히자 반년이 지나갔다.
한 달이 안 되어 속속 북경에서 수련생 80여 명이 압송되어 와서 간수소가 가득 찼다. 나는 기억에 당시 여자 동수가 두 반을 차지했는데 큰방은 40여 명, 작은 방은 20여 명이 있었다. 중국은 신년 전에 수련생들은 식구들이 사람을 구하러 와서 보증을 서서 대부분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집에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간수소에서 연말을 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2000년 봄이 되어 간수소의 교도관이 일을 시켰다. 먼저 배나무 포대를 자르는 일이었고 나중에는 성냥갑을 붙이는 일이었다. 나는 범죄자가 아니므로 우리는 무고하게 여기 갇혀있는 것이라고 느껴 일을 하지 않았다. 소장 진옥랑은 우리가 연공하는 것을 보면 늘 때렸고 때린 후에는 손과 발에 수갑과 족쇄를 채웠으며 동수가 갖고 들어간 “전법륜”을 빼앗아 태웠다.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 때문에 동수들 간에 이견이 벌어졌고 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을 주장했으며 몇 명은 마땅히 일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유는 어디에 가든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면 나가서 되어야지 결코 여기에서 사악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했다. 법공부를 할 때 나는 책에서 영롱한 오색 빛이 나는 것을 보았고 사부님께서 내가 한일이 옳다고 격려하신 것을 알았다. 일을 하지 않고 연공을 견지했으므로 우리 몇 명 동수는 늘 수갑과 족쇄를 차야 했다. 나는 간수소에 반년 머무는 동안 105일 동안 족쇄를 차고 있었다. 가장 잔인한 것은 내가 막 들어갔을 때 나이든 언니와 연공을 했는데 경찰이 우리를 수갑을 채웠는데 두 손으로 다리를 안게 하고 수갑을 채웠으며 게다가 발에도 족쇄를 채워 하루 종일 구부려 지냈으며 화장실과 밥을 먹는데도 동수의 도움을 얻어야 했고 잠을 자거나 옷을 벗을 수도 없어 웅크린 채 잤다. 장장 3개월 동안 세수는 물론 옷도 벗을 수 없었다.
나는 천목이 열려있어 초과나한, 정과나한, 대나한, 보살과위, 부처과위를 모두 똑똑히 보았다. 2000년 봄 나는 이미 부처 과위로 수련됐다. 때로 꿈에서 연꽃잎이 하나씩 흩어져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사부님께서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금빛이 번쩍이는 “전법륜”을 내게 주시는 것을 보았다.
5월 1일 전 사부님께서는 내가 나갈 것이라고 점화해주셨다. 그러나 소장은 나보고 “보증서”를 쓰라고 핍박했다. 나는 “돌아가 아이를 볼 것이며 북경에 가지 않겠다”고 썼다. 지도원 왕이희는 이것을 보고 안 된다고 하며 다시 쓰라고 했다. 그래서 달라고 하여 찢어버렸다. 그들은 나를 돌려보내지 않았으며 나를 “세뇌반”에 보냈으며 남편으로부터 1200위안을 갈취했다.
세뇌반에서 5,6명 동수와 함께 낮에는 법공부, 밤에는 연공을 했다. 그곳에는 “전법륜”이 있었다. 어느 날 밤 우리 몇 명이 그곳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었는데 건물 밖에는 전등이 없었다. 갑자기 사부님께서 밖에서 연공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사부님의 온 몸은 투명한 빛이어서 전체 옥외를 환하게 비추었다. 다른 동수에게 보라고 했으나 그들은 보지 못했다. 또 어느 날 밤 내가 가부좌하고 있을 때 내 머리 위에 한 장정도 떨어진 곳에 천안문 성루가 보였는데 채색이 되어 있었다. 내가 세어보니 9층이었으며 창문조차도 매우 뚜렷하게 보였다.
세뇌반에 한 달 정도를 머문 후 세뇌반 두목이 표를 한 장 채우라고 하며 남편에게 돈 400 위안을 내라고 하더니 나를 집에 돌려보냈다. 돌아온 후 나는 문서에 기입한 것은 옳지 않은 일임을 알았고 어쨌든 매일 법공부와 연공을 했다.
가을이 되어 내가 밥을 먹기만 하면 배가 불러 22일간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이 기간에 수시로 피나 고름 같은 것을 토했다. 남편은 병원에 가라고 다그쳤고 병원에 가니 의사는 내가 사람 꼴이 아닌 것을 보고 포도당 수액을 맞히려 했는데 바늘을 여섯 번이나 찔러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돌아가서 먹으라고 약을 주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꿈속에 나는 회전의자에 앉아 해변으로 갔는데 바닷물이 푸르고 침침하더니 갑자기 매우 커다란 음성이 들렸다. “타타(坨坨 아들의 이름)야, 네 어머니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려고 해.” 나는 꿈에서 놀라 깨었는데 다시는 잠을 들 수 없었다. 다음날 나는 약을 불속에 집어넣어 태워버렸다. 그리고 남편에게 오늘은 수액을 맞으러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남편은 별 말이 없었다. 또 며칠이 지나 밍후이왕에 “엄숙한 교훈”이라는 글이 발표됐고 동수들이 상의해 북경으로 법실증을 하러 가기로 했다. 나는 같이 갈 동수를 찾으려고 했으나 동수들은 안전을 위해 모두 각자 가자고 했다. 그래서 나도 혼자서 북경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다음날 천안문에 도착하여 한 바퀴 돌고 나와서 감히 연공하지 못했다. 가다가 대법제자 같은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아니라고 했다. 마침 경찰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당신 파룬궁 연마하는 사람 아니요?” 나는 그렇다고 했으며 곧 바로 경찰차로 끌려갔다. 차에서 내 옆에 여자 동수가 경찰에게 진상을 말해주었으나 경찰은 듣지 않았고 곧 한 척이 넘는 고무호스(속에는 쇠사슬이 있으며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수련생을 때리기 위한 흉기)로 있는 힘을 다해 그녀를 때렸는데 특히 일부러 머리를 때렸다. 당시 나는 매우 두려웠다. 몇 번이나 저지하려다 용기가 없어 그저 서 있었다. 나중에 남자 동수가 그 악경에게 권했으나 듣지 않고 계속 때렸다.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이것은 나의 두려움을 향한 것임을 알았다. 나는 반드시 말로 제지해야 한다. 일어서서 한마디 했다. “때리지 마시오.” 두 번째 구절을 기다리기도 전에 경찰은 손을 멈췄다. 나는 그 동안 내가 잘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차에서 내린 후 나는 그녀에게 아프지 않은 지 물었는데 그녀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했다. 모두 나의 두려움이었으며 사부님께서 나를 대신해 감당하고 동수가 나를 위해 감당했다.
북경 공안국에서 우리는 작디작은 지하실 속에 갇혀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미 북적거렸으나 여전히 밀어 넣었다. 어느 모 지역 공안국 사람이 와서 대법제자를 데려갔다. 그 사람은 특히 잔혹해 그들 지역 파룬궁 수련생을 보면 모질게 때려 맞은 동수들은 코피를 흘렸는데 동수들이 못 때리게 막자 그들은 필사적으로 사람을 끌어냈고 동수들이 함께 몰려들어 한참이나 실랑이를 한 다음에야 끌고 갔다.
우리 누구도 주소를 말하지 않았으므로 날이 저물 무렵 우리는 북경 여러 파출소로 나눠져 심문을 받았다. 나와 20여 명의 동수들은 마치 전문 파출소 같은 곳으로 나뉘어 갔는데 그 경찰이 한편으로는 악한 말을 했다가 또 한편으로 착한 척했으며 동수들을 핍박해 주소와 성명을 대라고 했다. 시간이 길어지자 우리는 모두 자기의 이름과 주소를 말했으며 그 후 북경주재 형수 사무처로 나를 데려갔고 가족에게 2천 위안의 돈을 내야만 나를 심주(深州)로 돌려보낸다고 협박했다. 가는 또 간수소로 되돌아갔으며 그때가 2000년 12월 말이었다.
당시 간수소는 많은 대법제자가 감금되어 있었다. 우리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연공했으며 낮에는 법을 외웠다. 신년이 지난 2월 어느 날, 머리가 갈라지는 듯 아팠고 또 매일 그랬다. 새벽 연공시 충관을 할 때 손은 얼굴까지 올라가 더 지나갈 수 없었다. 코뼈가 이마에 닿은 것처럼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마치 어떤 물건이 막혀 있는 것 같았다. 4장 공법에서 두 손이 기를 따라 내려갈 때 쪼그리면 일어서지 못했고 일어서면 쪼그리지 못했다. 매일 연공이 끝나면 크고 큰 핏덩어리를 토했는데 시커먼 핏덩이였다. 이렇게 2주간을 괴로웠다. 마침내 어느 날 콧구멍에서 찐득찐득하고 5,6척 길이의 어두운 노란 플라스틱 같은 것을 빼냈는데 그 순간부터 다시는 아프지 않았다.
간수소에서 나는 매우 큰 심성관을 겪었다. 당시 어느 여동수가 늘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했는데 때로는 매우 듣기 힘든 말로 나를 욕했다. 나는 정말 그녀가 수련인 같지 않았다. 또 그러나 생각해보니 어쩌면 이전 세에 빚진 것일지도 모를 일이니 그녀와 더 따지지 않고 원망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2001년 봄, 20여 명의 동수가 노동교양 형을 판결 받고 석가장 노동교양소로 보내졌다. 간수소에는 또한 수십 명의 동수들이 불법적으로 갇혀 있었다. 당시 우리는 간수소의 보고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장 조은학(趙恩學)은 늘 우리를 때렸다. 사람마다 코나 얼굴이 퍼렇게 멍이 들고 팔다리에 모두 상처였다. 한번은 조씨 성을 가진 악독한 경찰이 두 손으로 (수련생) 손염은(孫艶恩)의 코를 방안에서 밖으로 당겨 빼내 손염은은 졸도했고 10여분 후에 겨우 깨어났다.
7.20일 나와 10여 명의 동수는 석가장 노동교양소로 보내졌다. 교양소측은 신체검사 후에 말했다. “당신은 폐암과 위암이 있소.” 당시 나는 매우 두려웠다. 왜냐하면 간수소에서 매일 피를 토하고 가끔씩 귀에서 “당신은 폐암, 위암이 있소”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늘 정념으로 그것을 배제하며 교란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정말 의사로부터 그 말을 듣고 나니 두려움이 생겼다. 오성도 올라오지 못했다. 공안국 사람은 또 사람을 보내 나를 검사했는데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 두 동수가 고혈압 때문에 돌아갔으나 나는 오히려 남았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알고 보니 사부님께서 연화해낸 병이었던 것이다. 나는 마땅히 노동교양소에 있지 말아야 했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7. 검은 소굴의 사악한 기운
나는 석가장 노동교양소 4대대에 나뉘어 배치됐다. 그날 밤 그들은 교육원을 배치해 나를 지켜보라고 시켰으며 전향하지 않은 수련생과 말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혼자서 화장실을 가거나 나 혼자 밥을 받거나 등등 조금도 자유가 없었다. 이어서 매일 우리 현에서 온 전향된 수련생인 왕운자, 가신난 등을 시켜 전향 공작을 했다. 어느 남자 경찰은 매우 위협적인 말을 했다. 세수할 때 한번은 많은 대법제자의 둔부에 푸르스름한 색이 있고 중간에는 고름이 나거나 진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내가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녀들은 전기봉으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어떤 동수는 머리 한 부분에 머리카락이 없고 중간에 상처가 있었다. 물어보고서야 악경들이 전기봉으로 충격해 벽에 부딪혀 생긴 것임을 알았다. 또한 핍박당해 건물에서 뛰어 내린 사람, 미친 사람도 있었다. 이것은 내가 2001년 석가장 노동교양소에서 직접 본 것이다.
하루는 악독한 경찰이 나에게 얼굴을 벽에 붙이고 두 시간 동안 서 있으라고 해서 나는 어지러워 거의 쓰러질 뻔했다. 간수소에서 반년 있는 동안 신체는 매우 약해졌고 노동교양소에서 전향시키느라 24시간 잠을 못 자게 했기는 나는 정말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과는 달리 전향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펜을 들자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져 내려 한글자도 써내려 가지 못했으며 사흘 밤낮을 앉아 있었다. 그 경찰은 내가 전향서를 쓰지 않는 것을 보고 전향된 두 수련생을 데려와서 나 대신 쓰라고 했다. 그녀들은 다 쓴 후 나보고 서명하라고 했다. 그렇게 “4가지 전향서(四書)”를 쓴 날 밤 나는 매우 가슴이 아팠으며 비몽사몽간에 신체가 아래로 떨어지더니 다른 공간의 두려운 장면을 보았다.
2002년 봄 어느 날 밤 또 꿈을 꾸었다. 꿈에서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노동교양소 이층 복도에 졸도해 있었는데 사부님이 황색 용포를 입고 내 옆을 지나가셨다. 나는 큰소리를 질렀다. “부황(父皇), 저를 끌어주세요.” 사부님은 고개를 돌려 매우 가슴 아픈 듯이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딸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네가 쓰러졌으니 네가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말을 마치고는 몸을 돌려 떠나셨다. 깨어나서 나는 온 얼굴에 눈물범벅이 됐다. 내가 잘못해 사부님께서 너무 상심하셨다. 그해 여름 나는 집으로 돌아와 매일 밤 꿈에서 사부님께서 나를 점화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질질 끌며 책을 보지 못했으며 가족의 정에 가로 막혀 남편과 두 아들에게 면목이 없다고 느꼈다. 99년부터 2002년까지 온통 3년을 설날조차 집에서 지내지 못했다. 남편은 두 아들을 위해 월 200 위안을 덜 벌더라도 고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직장을 옮겼다.
8. 다시금 정법의 길을 걷다
노동교양소에서 집에 돌아온 지 1개월, 나는 마침내 “전법륜”을 들고 보았다. 또 마침 그 이틀간 동수가 찾아와 그녀들은 내게 사부님의 최근 2년 설법을 가져다주었다. 며칠 후 또 어떤 동수가 주간과 자료를 갖다 주었다. 사부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고 나도 시간을 다그쳐 법공부를 하며 정법 노정을 따라 잡으려 했다.
내가 처음으로 나가서 자료를 돌릴 때 매우 두려워 밤에 많은 곳을 다녔으나 겨우 자료 몇 개만 놓았다. 그 때 우리 현에서는 아직 자료점이 없었고 동수들이 매주 외지에서 가져왔다. 우리 현은 박해가 가장 심한 곳 중 하나였는데 2000-2001년 동안 100여명의 동수가 노동교양소로 잡혀갔다. 돌아온 후 사오한 사람이 수십 명이었으며 나에게 법을 알려준 미술 선생도 그 중에 있었다. 돌아온 후 학교에서 그녀를 몇 번 마주쳐 수련을 권했으나 그녀는 매번 매우 듣기 곤란한 말로 욕했으며 나중에는 나를 피했다. 금년은 2012년인데 그녀는 아직 깨닫지 못했으니 매우 애석하다.
9. 세 번째로 간수소에 갇히고 두 번째 노동교양소에 끌려가다
2004년 섬서성 한중 고향에 진상자료를 나눠주다가 고발을 당했다. 한중의 자칭 안전국 사람이 우리 친정집을 뒤졌으며 그들은 또 하북 형수 지역에 가서 형수 안전국 사람이 심현 중학교에 와서 조사했다. 그때 나는 아이를 낳으러 간 직원을 대신해 교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교장 유모씨가 나를 찾아와 면담했는데 내가 진상을 알려주자 그는 한마디도 안 듣고 시 공안국에 전화를 걸었다. 다음날 오전 부교장 이모씨가 정치보위과의 악독한 경찰 장원상, 장우초, 양소주 등 세 사람을 데리고 와서 우리집을 뒤져 온 집안을 뒤집어 놓았으며 “전법륜” 한 권, 명혜주간과 진상 표어 몇 장을 찾아냈다. 그날 2004년 3월 9일인데 나는 세 번째로 불법적으로 간수소에 갇혔다.
내가 간수소에 갇힌 지 77일 동안 매일 밤 3시에 우리를 일어나라고 하면서 면도칼로 콩을 썰라고 했다. 사람들은 엄지와 검지에 벤 상처가 수도 없이 많았다. 테이프로 감고 일을 해야 했다. 나는 늘 피를 토하고 먹지 못해 신체가 갈수록 허약해졌다. 경찰은 연공, 법공부를 못하게 했고 방마다 카메라를 설치해 나는 매일 앉아 발정념을 했다.
이번에 내가 또 노동교양소 행을 판결 받았는데 고양(高陽)노동교양소였다. 그곳은 하북의 “마삼가(馬三家-요녕성의 노동교양소. 파룬궁수련자들을 가장 혹독하게 박해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음)”로 불리며 가장 사악한 노동교양소 중 하나다. 우리 현의 여자 대법제자는 전향을 거절했기 때문에 석가장 노동교양소에서 고양노동교양소로 전향토록 보내졌다. 그곳에서 전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독한 경찰이 전기봉으로 몇 번이나 혼수상태로 만들었다.
동수 자신의 말에 의하면 가장 심할 때는 경찰은 전기봉 세 개를 하나로 묶어 그녀를 감전시켰으며 그녀는 세 번이나 기절해 쓰러졌다. 세 번째 경찰은 그녀가 한참동안 깨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정말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마당 밖 풀밭에 던져놓았다. 그날 밤 그녀가 깨어났는데 그때 그녀는 런닝과 짧은 바지 밖에 입지 않았다. 깨어났을 때 눈은 흐리멍덩하게 주위에 몇 개의 눈이 파란 빛을 내뿜는 것을 보았는데 애를 써서 눈을 바로 뜨고 보았더니 늑대 5,6마리가 주위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음산한 공포였는지 모른다. 다행히 늑대는 그녀를 물지 않았다. 날이 밝자 경찰이 나와서 그녀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 또 건물 안으로 끌고 들어가 계속 시달림을 주며 믿음을 포기하라고 강요했다.
고양노동교양소에 가기 하루 전날 밤 꿈을 꾸었는데 우리집에서 사람이 와서 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이 꿈이 나는 마땅히 집으로 돌아가야 함을 점화하는 것임을 알았다. 다음날 아침밥을 먹을 때 어느 동수가 자기가 어젯밤 꿈을 구 꾸었는데 많은 나쁜 사람이 대문을 밀었고 그녀는 나무 상자로 버텼는데 결국 버티지 못했고 그녀 집에서 많은 사람이 와서 모두 서서 크게 울어서 자기도 따라서 울었다고 했다. 내가 들어보니 이 꿈이 좋지 않았으며 어쩌면 그녀를 노동교양소에 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이 막 떨어지자마자 두 여자 경찰과 두 남자 경찰이 들어오더니 나와 그녀에게 물건을 수습해 떠날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너희들이 오늘 아무리 끌고 다가더라도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동수에게 “발정념 하세요. 저 사람들 말을 들을 필요 없어요”라고 말했다. 막 간수소 대문을 나서자 그녀의 남편, 시누이, 친정오빠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 명은 그녀를 보자 울음을 터트렸고 우리집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가는 길에 그녀에게 말했다. “반드시 돌아올거야, 절대 그곳에 있을 수 없어요.” 그러나 내가 그녀의 얼굴을 보니 정념이 없었다.
고양에 도착하여 신체검사를 할 때 의사가 물었다. “무슨 병이 있소? 왜 이렇게 수척해졌죠?” 나는 폐암, 간염, 빈혈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의사는 나를 받지 않았고 공안국 사람은 내가 거짓말한다고 야단쳤다. 의사가 또 물었다. “체중이 몇Kg죠?” “30Kg입니다.” 의사는 공안국 사람에게 나를 고양병원에 보내 검사하라고 했다. 신체가 건강하다는 증명이 있어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나를 고양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했는데 마침 병원이 교대시간이어서 먼저 밥을 먹기로 했다. 그들은 나에게 먹겠느냐고 물어 나는 안 먹겠다고 했다. 그들 몇 명은 음식점에 들어갔으며 나를 차에 남겨 두었다. 그때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보니 차에 지갑이 하나 있는데 그 속에 380위안이 들어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가려고 했다면 시간도 있고 돈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구세력의 안배이며 나는 (도망가서) 떠돌아다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정당당하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3시쯤 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했는데 마침 기계가 고장이 나서 그저 초음파 검사만 했다. 결과는 배에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공안국 사람이 병원의 검사결과를 듣고 “차에 타시오, 집으로 돌아가시오”했다. 이렇게 나는 되돌아왔다. 사부님의 보호에 감사드린다.
돌아온 후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또 세뇌반에 하룻밤 머물게 하고 다음날 남편에게 통지해 데리고 가라고 했다.
집에서 교장들은 매일 나에게 신체가 어떠냐고 물었다. 좀 많이 먹으라고 하며 늘 검사를 했다. 그들은 내가 위암, 폐암 그런 것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성격이 갈수록 나빠져 늘 나를 욕하고 때렸다. 대법자료를 보기만 하면 찢고 불태웠다. 나갔다 돌아왔을 때 내가 업으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나를 붙들고 때렸다. 머릴 잡고 벽에 부딪혔으며 나는 “사부님 구해주세요”라고 고함을 질러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내가 대법을 굳게 수련하는 결심을 바꾸지 못했다. 나 역시 선의적으로 그에게 진상을 알렸는데 나중에 많이 좋아졌다.
2005년 사악 때문에 자료점이 파괴되어 나는 스스로 붉은색, 녹색, 노란색 종이를 사고 여러색 물감으로 진상 표어를 만들어 나가서 붙였다. 도시 거리 구석에 거의 다 붙였는데 이런 일을 거치며 나의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다. 어느 날 밤 꿈에서 사부님이 나를 데리고 나가서 표어를 붙이셨는데 나는 풀을 바르고 사부님께서 붙이셨다. 나는 사부님이 나를 점화하심을 알았다. “나가서 대법의 일을 하라, 사부가 옆에 있으니 두려워 할 것 없다.”
2006년 여름 자료점이 정상으로 회복됐다. 나오는 동수도 갈수록 많아졌다. 나와 어느 동수가 함께 날마다 표어 전단지를 붙였다. 그때 매일 밤 경찰이 순찰을 돌았다. 그러나 여태껏 우리의 법실증을 가로막은 적이 없었다. 나는 내 세계 속의 중생, 엄마, 언니가 모두 연꽃에 앉아있고 아빠는 붉은 색의 가사를 걸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꿈에 비행기를 몰았는데 사람을 가득 태우고 날았다. 사부님께서는 내게 “너는 이미 원만의 표준에 도달했다”고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 색깔을 고르라고 하셔서 나는 자색을 골랐다. 그때 이후 늘 자색과 황색을 보았다. 밤에 나가 스티커를 부치고 자료를 돌렸다. 앞에는 늘 한 갈래 금빛이 길을 비추어 주었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적어도 현관(玄關)을 세 번했고 매번 똑똑히 보았다. 또한 역사상 이미 수련 원만하기를 두 번했는데 물론 그때는 부원신이었다.
2007년 가을 나는 시누이 집에 가서 추수를 도왔다. 그녀 마을에는 수련인이 없어서 내가 매번 갈 때마다 많은 대법자료를 갖고 가며 가끔은 시누이도 나를 도와 자료를 나눠 준다. 나흘 째 사부님은 나에게 돌아가라고 점화해주셨다. 그러나 아직 자료를 다 돌리지 못했으므로 이틀을 기다려야 했다. 시누이 집 옥수수도 수확이 끝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시내에 5,6명 동수가 잡혀갔으며 분위기가 매우 긴장했다. 시골에도 도처에서 사람을 붙잡았다. 나는 일주일 간 진상을 알리지 않았는데 어느 날 꿈에 사부님의 음성이 알려주셨다. “이번 시험에 네 명만 합격인데 네가 네 번째다.”
불법으로 간수소에 갇힌 동수들을 구하기 위해 전 시내 동수들이 모두 매일 공안국 주위에 가서 발정념을 했다. 어느 날 오전 내가 공안국 옆 광장에 가서 발정념을 했다. 잠시 후 30 여세 남자가 손에 휴대폰을 들고 내 앞에 서 있었다. 당시 나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발정념 하러 오는 동수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나는 집으로 가서 밥을 먹으려 했으므로 10시 반에 나는 떠났다. 내가 막 50여 미터를 떠났을 때 사람들이 떠들썩하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내가 원래 서 있던 곳에서 몇 명 경찰이 쫓아가 동수를 체포하는 중이었으며 순식간에 광장은 매우 혼란해졌으며 29명의 동수가 체포됐다.
2008년 올림픽 전날 나와 다른 한명은 늘 “9평”을 배포했다. 거의 모든 건물에 다 갔다. 그 때 우리 둘은 광고 신문을 돌리는 일을 할 때였는데 광고회사에서는 우리를 아파트 건물에 돌리도록 배치했으므로 우리는 지형에 매우 익숙했다. 나중에 중복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장소를 나누어 각지로 돌렸다.
10.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배포해 사람을 구하다
나중 어느 동수가 늘 아이를 데리고 한손으로 자전거를 밀고 한손으로 사람들에게 CD를 나누어주며 진상을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동수가 할 수 있다면 나는 왜 안 될까? 나도 천상에서 내려온 왕이 아닌가.” 그래서 사람들을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고 CD를 나눠주기로 결심했다. 한번은 45개를 들고 나누어 주었는데 2시간도 안되어 다 나가버렸다. 나는 세인들이 진상을 얻으려고 갈망하는 절박한 심정을 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날마다 나가서 일대일로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배포한다.
물론 일하는 과정 중에 구하기 어려운 사람, 욕하거나 때리려는 사람, 전화로 신고하려는 사람 등 각종 사람이 다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내가 수련해 마음을 버리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마음을 향해 온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부터 나는 거의 매일 나가서 진상을 알린다. 때로는 동수와 짝을 이루는데 도대체 몇 명이나 구했는지 기억도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이 최후의 기회에 가능한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11. 맺음말
이렇게 곤두박질치며 비틀거리며 이 일보까지 걸어왔는데 이는 사부님의 자비와 보호 덕분이다. 사부님과 대법이 없다면 나의 일체가 없다. 현재 가장 큰 소원은 마땅히 구할 사람을 다 구해 사전서원을 완성하는 것이다.
윤회 오천년 고생 중 마난을 겪고 불법을 기다리느라 고생하며 시달렸네
금생에 원한을 풀고 마난이 달콤하게 변하니 원만하여 날아올라 사부님 따라가리.
발표시간: 2012년 7월 4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node/1115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