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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수련에 가는 곳마다 신적이 나타나

작자/ 중국 산동 대법제자 산야

【정견망】

나는 산동성 삼현 경계의 농촌에 사는 농민으로 금년 나이는 환갑을 넘었다. 1998년 8월 동수의 소개로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내가 대법에 입문한 그날부터 신기한 기적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비록 다른 공간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 이 공간에 나타난 신기한 일만 보아도 감탄을 금할 수 없다.

1. 만성기관지염이 하룻밤 사이에 깨끗이 사라져

나는 만성기관지염을 오랫동안 앓았다. 중의, 양의, 각종 기공도 다 시도해보았으나 제거되지 않았다. 특히 겨울이 되어 한번 발작했다하면 숨을 쉴 수 없어 정말 괴로웠다. 처음 대법수련을 시작했을 때 전 마을에 《/span>중국파룬궁한권밖에 없었다. 배울 책이 없어서 나는 먼저 다른 사람을 따라 동공을 배웠다. 뜻밖에 밤에 잠잘 때 사부님께서 신체를 정화해주셨다. 한 가닥 힘이 흉부에서 칼로 할퀴는 것 같더니 갑자기 전신이 가볍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다년간의 기관지염으로 숨쉬기가 불편해 힘든 일은 할 수 없었지만 파룬궁을 배우기만 했는데도 병이 나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껏 나는 한번도 약을 먹지 않았다.

2. 죽어가던 돼지가 살아나다

우리 지역의 주요 수입원은 양돈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모두 돼지를 키운다. 1999년 말 어느 상인이 새끼돼지를 한차 가지고 와서 우리 마을에서 팔았다. 뜻밖에 이 어린돼지들이 돼지 콜레라에 걸렸을 뿐 아니라 마을에서 산 돼지는 거의 다 죽었다. 내가 산 녀석도 돼지우리에 누워 흰거품을 물고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끌어내어 묻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게는 오래된 낡은 방이 하나 있는데 부모님의 신주를 모셔놓았다. 그날 밤 나와 아내는 그곳에 가서 청소를 했다. 동쪽 방을 열고 등을 켜보니 벽에 족제비의 위패가 걸려 있었다. 나는 사부님께서 《/span>전법륜에서 말한 법이 생각났다. “과거에 당신이 모셨던 그런 여우 족제비의 위패를 어서 던져버려라, 다 청리 해주었으며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런 저령(低靈)한 것들을 모시면 안돼.”하면서 찢어버렸다. 아내는 대법을 배우지 않았으므로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결단코 찢어버렸다.

잠시 후 나는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지만 날이 어두워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문득 울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어떤 것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쳐다보니 그 다 죽어가던 그 돼지가 이 집으로 뛰어 들어온 것이 아닌가? 우리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질렀다. 돼지는 대야의 물을 몇 모금 마시더니 떠났다. 잠시 후 또 물을 마시러 왔다, 아내가 “너무 신기하네요, 돼지가 어떻게 저절로 나았을까요?”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것은 내가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했기 때문이야. 그 위패를 찢어버리고 저령한 것을 제거했기에 돼지가 저절로 나은 거야.”

나중에 이 돼지는 자라서 큰 돼지가 되었으나 다른 집에서 산 새끼 돼지는 다 죽었다.

3. 진상 플래카드가 신기하게 감춰지다

한번은 내가 오토바이를 타고 동수와 함께 진상 플래카드를 걸었다. 산길이 험하여 운전이 매우 힘들었다. 우리는 사부님 가지로 인해 산꼭대기를 넘어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막 플래카드를 전봇대에 걸었는데 경찰차가 다가왔다. 동수는 경찰이 온 것을 보고 어둠을 틈타 얼른 숨었다. 나는 오토바이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고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진상 플래카드에 강대한 정념을 내보냈다. ‘얼른 숨어서 경찰이 안보이게 하라.’

차에는 3명의 경찰이 있었는데 내게 물었다. “뭘하고 있소?” 나는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하며 길을 물었다. “어느 곳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경찰은 어디로 가라고 상세한 길을 알려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말했다. 진상플래카드는 세 사람 머리 위에 흩날리고 있었는데도 그들은 보지 못했다.

이때 이미 밤 11시가 되었는데 경찰이 떠나고 나서 동수를 찾지 못했다. 부근에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마음이 급해져서 생각했다. ‘경찰에 잡혀갔나? 아니면 집으로 돌아갔나?’ 얼른 집으로 돌아가보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또 급히 원래 장소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이미 새벽 한시였다. 겨울밤은 매우 추운데 산바람이 불어와 매우 떨렸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사부님께 동수를 찾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원래 있던 곳에 거의 도착했을 때 진상플래카드는 잘 나부끼고 있는 것을 보았고 잠시 후 동수를 찾았다.

이날 밤 표면적으로 매우 평온했지만 마음속에서는 큰 파도가 일었다. 경찰을 만나 두려운 마음, 플래카드가 숨은 환희심, 동수를 찾지 못한 조급함, 동수를 찾은 후의 감사. 이것이 대법 수련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을 구하라 하시고 그 과정 중에 우리의 각종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게 하여 성취하게 하신다.

4. 지하에 묻은 수도관이 새다

대략 2008년 어느 날 집에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불안해졌다. 속으로 옛집에 가보고 싶어졌다. 부모님이 안계시기 때문에 옛집은 비어 있고 보통 보름 정도에도 한번 가보기 어렵다. 이번에는 어제 방금 갔었는데 오늘 집에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옛집에 가보니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다. 어제 왔을 때는 수도가 괜찮았는데 어째서 물이 나오지 않을까? 이웃에 가서 물어보니 자기는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럼 분명 지하의 관에 누수가 있을 것이다. 수압이 낮아서 집에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옛집에 기보고 싶어진 이유를 알았다. 그래서 수리하는 사람을 불러 수도관을 고쳐 달라고 했다.

사람이 왔는데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우리 지역은 모래토질이라 수도관에 누출이 얼마나 있든지 다 지하로 흘러가 버려 지표면에서는 물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웃집에서 우리집까지 100미터이니 어디가 누수 지점인지 찾을 수가 없었고 사람들도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나는 대법 수련생이고 사부님이 있으니 반드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하면서 곡괭이를 들고 아무데나 파보았다. 몇 번 파 보니 누수된 곳이 눈앞에 나타났다. 수리하러 온 사람들이 놀라서 물었다. “어떻게 찾았소? 당신은 어떻게 여기 새는지 알았소?” 나는 “당신들은 내가 파룬궁 수련하는지 알지 않소, 사부님께서 도우신 거죠.” 우리는 시골이라 서로 간에 다 알고 있었으며 우리는 다함께 대법의 신기함을 보았다.

5. 사부님께서 오토바이 기름을 넣어주시다

2012년 어느 겨울밤 나는 동수와 함께 다른 산골에 플래카드를 걸러 갔다. 그곳은 매우 멀었는데 돌아올 때 이미 새벽 2시가 넘었다. 산길이 험한데다 오토바이 기름이 얼마 없었다. 그래서 오토바이를 동수의 집에 두고 다음날 가져오기로 했다.

다음날 동수 집에 가서 오토바이를 타고 주유소로 가서 기름을 넣으려고 했다. 주유소 직원이 연료통을 열어보니 기름이 가득했다. 그래서 물었다. “당신 오토바이에 기름이 가득 들어있는데 어떻게 주유합니까?” 내가 보니 확실히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동수 집에 두었던 것이니 동수가 넣은 것인가? 그럼 기름 값을 줘야지 그래서 돌아가서 확인했다. 동수는 “난 기름을 넣지 않았어요, 게다가 난 기름이 떨어진 줄도 몰랐는데요.” 그 말을 듣자 동수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때 사부님이 기름을 넣어주신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나와 동수는 허스하며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6. 찐빵집 이야기

17년 전 우리 식구는 7명이었다. 위로는 80대 부모님, 아래로는 학교 다니는 아이가 셋이었다. 나는 기관지염을 오래 앓았으므로 농촌의 힘든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마을 정부주재지에 주점을 열었다. 주점에 와서 밥을 먹는 사람들은 다 마을의 공무원들이었다. 그들은 배불리 먹고 마신 후 다수는 현금을 지불하지 않고 외상장부만 적었다. 시간이 길어지자 외상장부로 돈을 걷을 수 없었고 자금이 돌지 않았다. 주점은 중공 관원들에 의해 망해버렸고 주점을 찐빵집으로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대법이 박해를 받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진상자료가 없었다. 그래서 대련(對聯)의 형식으로 “파룬따파 하오”등의 내용을 적어 전봇대에 붙였다. 이렇게 하는 것은 수량에 제한이 있었다. 2001년이 되자 우리 이곳에 마침내 자료점이 생겼다. 하지만 수량이 적어 여전히 부족했다. 나는 찐빵 팔아 번 돈으로 시내로 가서 복사점에 가서 대량으로 자료를 인쇄했는데 한 페이지당 5전이었다. 우리 이곳은 가난한 농촌이어서 동수들이 다 가난했다. 나의 빵집은 그 때 진상자료에 많은 공헌을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나는 사악에게 잡혔다. 간수소에서 경찰은 나를 철문에 걸어놓고 전기 곤봉으로 내가 쇼크로 쓰러질 때까지 고문했다. 많은 동수들은 혹형을 견디지 못하고 타협하거나 전향했으나 나는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속에 걱정되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찐빵집이었다. 평소 나와 아내가 경영했는데 내가 체포된 후 아내 혼자 어떻게 유지한단 말인가? 특히 아내는 기기 유지보수를 해본 적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마지막에 마음을 굳게 먹고 사부님께 맡기고 안배를 따르기로 했다. 나는 단지 대법표준에 따라 하면 된다.

나중에 내가 “삼서”를 쓰지 않고 전향도 하지 않자 불법으로 노동교양 3년을 받았다. 내가 노교소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찐빵가게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장사도 잘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잡혀간 후 둘째 딸이 공부를 그만두고 장사를 도왔던 것이다. 그동안 몇 사람이 우리 집이 장사가 잘 되다 내가 잡혀간 것을 보고는 이 기회를 이용해 찐빵집을 차려 경쟁했다. 이상하게도 새로 생긴 찐빵집은 오래지 않아 다 문을 닫았고 우리 가게만 굳건했다. 나는 아내의 설명을 들은 후 줄곧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이것은 틀림없이 사부님께서 도와주신 것이었다.

찐빵집에 가서 나는 먼저 기계를 조사해보았다. 아내 말에 의하면 이 찐빵기계는 삼년간 한번도 고장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기계를 열어보고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원래 손목 굵기 만했던 축이 엄지 굵기 정도만 남아 있지 않은가? 이 상태로 전기가 통하면 끊어지지 않겠는가? 아내에게 “이런 상태로 계속 사용했다는 말이요?”라고 묻자 아내는 “그래요. 이렇게 썼어요.”라고 했다.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감사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사제는 정을 따지지 않거니 부처의 은혜가 천지를 이루노라”《/span>홍음2-사도은

제자는 오직 정진하여야만 사부님의 보호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다.


원문위치
: http://www.zhengjian.org/node/155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