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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호탕(佛恩浩蕩)’은 진실로 존재한다

작자/북경대법제자 광명(光明)

【정견망】

나는 1996년 법을 얻은 노제자로 사존의 보호하에 오늘까지 걸어왔다.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고 우리 집은 행복으로 가득 차있으며 직장환경은 상화로움에 가득 차 있고 친구들도 대법의 덕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진정으로 수련하는 사람이 되었고 ‘불은호탕’은 내 생명에서 단지 하나의 구절이 아니라 진실한 존재이다. 아래에 여러분과 22년간 수련한 아름다움과 수확을 말해보겠다.

1 법을 얻고 홍법하는 행복

(1) 가정의 아름다움

그때는 1996년 1월 14일이었다. 남편이 저녁에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첫마디가 바로 “우리 동료가 파룬따파를 연마하는데 아주 좋다고 해. 오늘 저녁 이웃에서 파룬궁 비디오를 튼다고 하니 일단 당신이 먼저 가봐.” 내가 아이는 어떻게 할까요 했더니 남편은 자신이 데리고 있겠다고 했다. 당시 아이는 세 살이었다. 나는 밥을 먹고 비디오를 보러갔다. 이웃집에 들어가자 큰 아주머니가 열렬히 차를 따라주고 분위기가 아주 상화로웠다. 비디오를 볼 때 나는 온 전신이 녹아 들어갔다. 사부님의 자상을 얼굴을 보고 나는 정말 이것이 내가 찾으려는 것이었으며 생명의 진정한 의의를 안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속으로 말했다. ‘오늘이야말로 진정한 내 생일이다. 오늘 날짜를 반드시 적어놓아야지!’ 필기구를 찾아 집에서 한 바퀴 돌았는데 어디에 적어야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또 일념이 생겼다. ‘써놓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기억하고 잘 수련하면 된다. 전 세계인이 다 수련하지 않더라도 나 혼자라도 하겠다.’ 나는 격동한 심정을 가라앉히고 시어머니가 계신 방으로 들어갔다. 당시 나는 서쪽 방에 거주했고 시어머니는 북쪽 방에 계셨는데 들어가서 말씀드렸다. “유씨 아주머니가 파룬궁 비디오를 들어주었는데 오늘 가서 봤어요. 내일 둘이 같이 가요. 좋아요.” 시어머니도 가겠다고 답했다.

다음날 나는 시어머니와 함께 비디오를 보러갔다. 돌아온 후 나는 고열에 설사가 났으나 정신은 또렷했다. 나는 말했다. “정말 좋구나, 사부님께서 나를 돌보시는구나!” 밤이 되자 우리는 또 비디오를 보았고 돌아온 후 시어머니도 좋아졌다.

며칠 후 시어머니는 또 두 이웃을 우연히 만나 함께 비디오를 보러갔다. 그녀들도 법을 얻었다! 우리 세 사람이 수련하여 이익을 보자 남편의 형수, 여동생 그의 남편, 모두 법을 얻었다. 시어머니의 집에 자연히 법공부조가 형성 되었고 남편은 보도원이 되었다. 그때우리는 아침에 모두 단체로 연공했고 매주 월수금 저녁에 법공부를 했으며 화목토에는 공원에서 연공했다. 연공하는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우리 집 부근 백화점 건물에 새 연공장이 생겼다.

그때부터 고부관계 시어머니와 올케 사이, 동서 사이가 모두 잘 융합되었고 집안에는 웃음소리가 충만했다. 나중에 시어머니는 《/span>전법륜을 갖고 남편의 삼촌, 외삼촌, 이모댁에 가서 파룬궁을 연마하도록 추천했다. 북경 시내의 숙모와 하북 농촌의 이모도 모두 법을 얻었다.

남편의 삼촌은 시로 대법을 찬송했으며 서예하는 사람에게 부탁해 글씨를 썼다. 우리 친정에서는 정식 연공하지 않았지만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가족들도 서로 화목하고 조화롭게 되었다.

(2) 상화로워진 직장

법을 얻은 후 나는 작은 아이를 낳을 때 생겼던 산후병이 다 좋아졌고 온몸에 힘이 넘쳐났다. 나는 유아원에서 일을 했는데 직장 동료들 모두 내가 파룬궁을 연마하는 것을 알았다. 나는 상사, 동료, 학부모들과의 관계가 다 좋았고 일하는데도 가리지 않아 그들도 나의 이런 변화를 보아냈다. 또 몇몇 동료도 법을 얻었다. 상사도 대법을 지지하고 파룬궁 비디오를 틀도록 장소를 제공했다. 연공하지 않는 동료도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었다. 당시 유아원에는 건물이 두 동 있었는데 나는 한 동의 조장이 되었다. 나는 2년간 우수 직원으로 뽑혔다. 나는 업무란 모두 함께 하는 것임을 알았다. 한번은 유아원 입구의 길을 수리하는데 길옆에 돌들을 처리하지 않아서 학부모가 아이를 보내는데 불편했다.

파룬궁을 수련하던 두 동료가 나를 찾아와 상의했고 우리는 사람들이 떠난 후 함께 다 처리했다. 다음날 동료들이 출근하다 보고는 모두 분명 파룬궁을 하는 사람들이 한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업무지도도 잘해서 유아원이 상화롭게 되었다. 이 일체는 사부님이 주신 영광이다.

(3) 고향에서 홍법

당시 매주 토요일 오전이면 우리 현(縣) 전체 동수들이 시내 공원에서 단체 연공과 홍법 활동을 거행했다. 배우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보도원이 가르쳤다. 우리는 온가족이 법을 얻은 후 보도원과 상의해 주일에 각자 고향에 가서 무료로 홍법하고 공을 가르쳤다. 열심히 하는 동수는 그곳 촌 위원회와 연락해 미리 준비하고 마을의 스피커 광고로 마을 사람들이 와서 보고 배우도록 했다. 시간이 있는 동수는 자발적으로 홍법에 참가했다.

한번은 현성 근처 어느 촌에서 홍법할 때의 일이다. 연공을 시작한 후 얼마 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비가 갈수록 세어져서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상점으로 뛰어 들어가서 비를 피했다. 동수들은 가지런히 연마했으며 제2장 공법을 연마할 때 포륜을 하는데 한 사람도 움직이지 않았다. 옆에서 또 보도원이 진지하게 신수련생에게 동작을 가르치는데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연공이 끝난 후 비는 아직 내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야기꽃을 피우며 돌아갔다. 저녁에 단체 연공 체험을 교류할 때 사람들 모두 몸은 가뿐했다. 당시 법을 얻은 한 동수는 자기 집에 법공부 팀을 만들어 현재도 여전히 매일 법공부를 견지하고 있다. 내 기억에 그때는 토요일만 되면 동수들이 물었다. “내일은 어느 촌에 가서 홍법하나요?”

나의 고향은 현성에서 백리 떨어진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부모님이 시내로 이사 오신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 남편 집은 현성에 있었고 그는 전에 현지 초등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다. 결혼 후 우리는 현성에 살았으며 아이가 겨우 5살이라 줄곧 고향에 가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 사람들을 깊이 사랑했다. 우리는 대법을 고향 사람들에게 전해주려는 소원이 있었다. 1998년 후반기 우리는 고향에 연락하여 홍법하러 갔다.

홍법하는 그날 동수들은 먹을 것과 물을 가지고 버스 두 대를 세내어 거의 두 시간 걸려 우리 고향에 도착했다. 우리 고향에는 5개 마을이 있는데 그날 우리는 두 마을에 널리 알렸다. 우리가 대대(大隊)에 가니 대대 간부가 열정적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우리 부모님은 매우 선량해서 고향 분들과 특히 관계가 좋았다. 고향 사람들은 나를 몹시 친절하게 대하며 부모님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대대장 할아버지는 남편더러 자기 촌의 사위라고 했다. 스피커 전원을 켠 후 나는 큰 소리로 광고했다.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누구누구인데 고향에 왔습니다. 파룬궁을 배우고 싶은 분이 있다면 대대로 와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무료로 공법을 가르쳐 드립니다.”

많은 사람이 왔는데 그들은 나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물었다. “이 사람들이 모두 파룬궁을 연마해요?” 나는 그렇다고 했다 이웃 아주머니와 언니는 우리를 집으로 불러 식사를 하라고 했으나 나는 폐를 끼치기 싫다고 하면서 우리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다 가져왔다고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연마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span>전법륜을 구해달라고 했으며 보도원에게 공을 배웠다. 정말로 불법의 소식을 듣고 마음이 활짝 열린 것이다! 보도원은 상의하여 다시 시간을 정하여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틀기로 했다.

1998년 말, 현성의 노제자가 사람을 찾아 텔레비전과 비디오플레이어를 가지고 차를 몰고 가서 세조로 나뉘어 세 마을에 가서 틀었다. 동수들은 매일 백리 산길을 왕복하여 1999년 설날 전에 파룬궁 설법 비디오를 한번 다 틀었다. 남편은 설 휴가 기간에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법공부하며 서로 격려했다. 법을 얻은 동수는 현재 아직도 진선인을 견지하고 있다. 한 노인은 올해 79세인데 아직도 집에서 일을 한다. 산에 오르고 농사도 짓는데 완전히 장년처럼 일을 한다. 법을 얻은 후 현재까지 그녀는 매일 《/span>전법륜한 강을 읽는데 한번도 중단한 적이 없다. 정말 사람을 감동시키는데 이는 모두 대법의 힘이다.

사부님 진선인의 종자를 고향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2. 박해 중에 더욱 성숙

나와 남편은 1999년 4.25 중남해 평화 상방을 직접 겪었고 대법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7월 21일 연속 이틀간 우리는 또 평화 상방을 나갔다. 이 몇 년간 사악의 박해 중에 남편은 여러 번 잡혀 구류, 노교소, 판결도 받았다. 나는 세 차례 상방하다 두 번 구류 당했고 직장을 잃었다. 19년 정법의 길은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했으며 나의 동료 가족과 친구들은 대법을 인정하여 모두 복을 얻었고 어떤 친구는 진수하는 대법제자가 되었다. 경찰도 진상을 알고 박해에 참여하지 않으며 자기를 위해 좋은 미래를 선택했다.

(1) 가족의 선택

사악의 박해 중에 남편이 감옥에 있을 때 아버지가 내게 돈을 버는지 물었다. 내가 돈을 벌지 못한다고 하자 아버지는 “돈을 못 버는데 어떻게 전심전력하겠느냐?”라고 했다. 내가 이것은 사람노릇을 하는 거라고 하자 아버지는 “내 딸 답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한때 내가 대법서적을 보호하는 것을 도와주셨고 온가족이 진선인에 띠라 좋은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는 “파룬따파하오 쩐싼런 하오”를 성심껏 외웠는데 사부님이 세 차례 목숨을 구해주셨다. 2014년 말 어머니는 뇌혈전 후유증이 있어 두 다리에 감각이 없어 걸을 수 없었고 휠체어를 타야 했다. 의사는 나무가 늙으면 썩는 것과 같다며 치료를 포기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착하니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몇 년간 우리가 늘 잡혀 들어갔기에 놀라서 정기가 부족해져서 그래요. 진선인은 잘못이 없으니 내심에서 한마디 ‘파룬따파하오 쩐싼런 하오’를 성심껏 외우시면 반드시 일어설 수 있을 거에요.” 어머니는 마음 깊은 곳에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 하오”를 외쳤고 마침내 일어설 수 있었다. 연말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서 밥을 해주었고 집안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2015년 여름 어머니가 피를 토하여 병원에 갔다. 그때 나는 곁에 없었는데 구급실로 보낼 때 언니가 어머니에게 9자 진언을 기억하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무 일 없이 10일만에 퇴원했다. 2017년 말 80세의 어머니가 대 퇴골절이 되었다. 온가족이 “파룬따파하오 쩐싼런 하오”를 외웠고 한 달 후 걸을 수 있었다. 현재 어머니는 머리가 까맣게 변하고 마치 아이로 돌아온 것 같다.

식구들은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교란을 받지 않고 모든 것이 갈수록 좋아진다. 시어머니 집의 법공부 팀이 살아나 일주일에 두 번씩 공부하며 화기애애하다.

(2) 동료의 선택

2000년 말 남편이 아직 노교소에 있을 때 위에서 압력을 넣어 내게 일과 대법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둘 다 하겠다고 했고 원장이 몇 차례 나 대신 가서 말을 전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법을 선택했고 직장을 잃었다. 내가 퇴직 수속을 마치자 학부모가 내 이야기를 듣고는 유아원 벽에 대자보를 붙여 나와 반의 담임선생을 칭찬하며 원장을 찾아가 말했다. “나는 그녀가 어떤 공을 연마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선생님을 원합니다.” 결과적으로 원장은 나를 임시직으로 남겨놓아 직장을 그대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대우가 낮아졌다. 나는 이 기회를 통해 그녀에게 박해진상을 알렸다.

원래 대법이 박해받았는데 유아원의 교사들도 일부는 믿지 않았다. 현재 남편은 진상자료를 나눠주다 불법으로 노교소 행을 당했다. 그들은 억울하다고 느꼈다. 그들도 정부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날 나와 같은 반 선생이 조용히 말했다. “원래 당신이 일을 잘했으므로 당신이 간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그렇게 적게 돈을 받고도 아직도 이렇게 하니 저는 정말 승복했어요! 내가 당신을 보니 내가 돈을 얼마나 많이 받는지 알겠어요.” 나는 웃음으로 그녀를 신임한다는 것을 표시했다. 그때부터 선생들은 진상자료를 보았고 또 이렇게 말했다. “보고 싶으면 보고 보기 싫으면 안보면 되지만 신고하는 사람은 덕을 잃을 겁니다.”

1년 후 위에서 또 압력이 내려와 나는 유아원을 떠나야 했다. 나는 어디를 가든 진선인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갔다.

(3) 경찰의 선택

박해 중에 경찰이 집을 수색하려 할 때 내가 문을 열지 않아 손을 다쳤다. 경찰은 반창고를 사주었다. 경찰이 불법적으로 집을 뒤져 컴퓨터를 가져갔고 대장이 나중에 돌려주었다. 한번은 직장 선생이 경찰을 보고 말했다. “당신은 그녀가 좀 편히 쉴 수 있도록 그 집을 건드리지 마시오.” 이런 접촉을 통해 경찰은 진상을 알게 되었다. 작년 또 새로 경찰이 와서 문을 두드리는 행동에 참가했다. 우리 집에 도착하자 우리는 마치 친구처럼 이야기 하며 그들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말해주었다. 그들은 떠날 때 폐를 끼쳤다고 말했다.

2000년 6월, 우리 현의 대법제자 6, 70명이 현 공안국 마당에서 연속 일주일간 상방하며 시위했다. 동수들은 자신이 연공하여 수익을 얻은 사례 및 대법제자가 하려는 말 “사부님의 청백을 돌려다오, 대법의 청백을 돌려다오” 등의 호소문을 써서 함께 바쳤다. 공안국 정보과장과 경찰은 함께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으며 이지적으로 처리했다. 결과적으로 대법제자를 구류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얻기 어려운 단체 평화 상방이었다.

2003년 남편이 유리실소하는 기간에 4~5명의 경찰이 내가 일하는 유아원에 찾아와서 나를 차 트렁크에 밀어 넣고 파출소로 연행해 갔다. 어떤 경찰은 우리 남편이 하는 일이 옳은지 아닌지 물었고 나는 그에게 대법이 얼마나 좋은지 말해주었다. 그는 말했다. “대법에 대해 잘 알 수 있었소.” 나는 말했다. “당신이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나는 가야하고 늦으면 시어머니가 조급해 할 것입니다.” 그는 경찰차를 불러 나를 보내주었다. 차에 탄 후에야 나는 비로소 그가 부국장임을 알았다.

이 몇 년을 거치며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려 많은 경찰들도 가급적 대법제자를 보호하고 자기를 위해 좋은 미래를 선택했다. 대법제자가 진상을 말하는데 보답을 바라지 않고 어딜 가든 진선인을 널리 알리고 가는 곳마다 선량한 사람을 감동시키며 세인을 각성하고 있다. 사존께 더 없이 감사드린다. 대법이 세계 100여 개 국가에 널리 전해지고 있고 대법은 경계가 없다! 중공의 거짓말은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멸한다.

자비로운 대법제자는 매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감옥의 죄수들도 각성하고 있고 감옥 경찰도 더 대법을 이해하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대법을 대하든 모두 자신을 위해 좋은 미래를 선택하기 위한 것이다.

2000년 4월 25일 나는 천안문에 상방하러 갔다가 불법으로 구류 당했다. 간수소의 일반 죄수들은 진상을 알았고 우리는 상의하여 “5월 13일” 세계 파룬따파의 날에 대법제자는 밥을 먹지 않는 것으로 사부님께 경의를 표시했다. 옥졸도 대법제자에 대해 매우 탄복하여 지지하고 그녀는 또 외쳤다. “펜을 들고 종이를 가져와라. 내가 당신들이 사부님 생일을 축하하는 글을 쓰는데 도와주겠다.” 내 기억에 당시 그녀가 쓴 것은 “5월 13일이 그들 사부의 생일이니 그들에게 시간과 장소를 주십시오.” 신청하여 허가를 얻었다. 불법적으로 잡힌 우리 제자들은 5월 13일 이날 하루 밥을 먹지 않고 사부님의 《/span>홍음을 외우고 단체 연공을 하며 파룬따파의 날을 경축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사부님께서 정법하신 지 26년이 되었고 내가 수련한 지 22년이 되었다. 대법은 나를 행복하고 즐거운 새생명으로 만들었고 나의 일체를 성취시켰으며 나의 가족, 동료, 친구 모두 불은호탕에 푹 빠져 있다. 매 대법제자의 수련의 길은 모두 한편의 서사시다. 우리 진선인의 종자를 함께 수확하고 함께 파종하여 우리가 지나간 한편의 대지에 퍼지기를 바라고 진선인의 음성이 끝없는 창우의 매 공간마다 울려퍼지길 바란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06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