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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능으로 법을 실증하는 길을 엄숙하고 바르게 걷자

글/ 중국 대법제자 소련(小蓮)

【정견망】

나는 수련을 시작한 이래 줄곧 공능을 사용해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오늘까지 20여 년이 지났는데 여기서 간단히 총결해 동수들과 함께 격려하고자 한다.

1. 공능의 유무는 모두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

공능에 대해 사부님께서는 여러 차례 설법에서 모두 명백히 말씀하셨다. 관건은 우리 스스로 진정으로 자아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 진정으로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할 수 있는가 여부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개개인은 모두 대법제자가 마땅히 걸어야 할 부동한 길을 걷고 있는데, 당신들이 걸어온 길은 우주의 미래에 대하여 모두 영향이 있다. 만약 어느 대법제자에게 공능을 지니고 수련하라고 했다면 그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는 것이며, 반드시 미래의 생명에 무엇을 다져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법제자는 바로 이렇게 큰 책임이 있으며, 바로 몸에 이렇게 큰 중임(重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1]

거의 대부분의 동수들은 닫혀서 수련하는 상태에 있는데 그것 역시 그들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다. 나는 최근에야 한 생명이 어떤 방식으로 수련하든 모두 신성하고 장엄한 일임을 깨달았다. 모두 기타 생명을 존중하고 이해해야 하며 결코 자신의 상태로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 자체가 대법에 대한 불경(不敬)이거나 심지어 모독이다. 이것은 마치 닫혀서 수련하는 동수가 “내가 열려서 수련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하는 것처럼 열려서 수련하는 동수는 “열려서 수련하는 과정 중에 다른 공간과 다른 동수들에게서 오는 교란을 만날 바에야 차라리 닫혀서 수련하는 게 낫다.”고 하는 것과 같다. 나는 이는 모두 사람 마음으로 수련을 가늠하고 사부님의 안배를 가늠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 자체가 불경하고 안에 사람 마음이 있다.

한 수련인이 열려 수련해야 하는지 닫혀 수련해야 하는지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 마음이 있는가로 결정하는 게 아니며 모두 사부님께서 질서 있게 안배하신 것이다. 절대 우리 스스로 어떻게 수련해야 한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또 다른 방면이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소위 일부 공능이 있는 사람이 수련과 법실증에 많은 교란을 가져와 닫혀서 수련하는 동수들이 이에 대해 많은 관념을 낳게 했다. 사실은 이것도 옳지 않다. 공능을 사용해 법을 실증하는 길은 질서있게 안배된 것이다. 그 속에서 생명이 잘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것은 개인이 파악할 문제이지 이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 중요한 개념은 절대 뒤섞지 말아야 한다.

2. 공능에 대해 파악하는 문제

공능 방면에 대해 내가 알게 된 것은 자신의 능력을 중하게 봐선 안 되며 절대 자신에게 집착해선 안 된다. 동시에 다른 동수의 수련 상태에 대해 일종 깊은 존중과 경외가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이 능력이 아무리 크다 해도 전반 우주 중에서는 아주 미미한 것이다. 내 기억에 한번은 어느 공능이 있는 동수가 자기의 그 점을 중하게 보았다. 나는 매우 높은 층차의 신이 그의 눈빛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는 것을 보았다. 아마 이 신이 나에게 경계하라는 뜻으로 생각했다. 더 높은 경지의 신은 어떻게 신통을 내보이는가를 나타내 주는 것이리라. 그리고 나서 더 높은 경지의 신이 나타나 그들이 어떻게 자기 능력을 드러내는가 보는 것이다. 사실 그런 신들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낮은 층차의 생명에겐 모두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동수에게 말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중하게 보아서는 안 되며 우리의 이 작은 것은 정말이지 신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중시하면 신은 우리 이런 것을 집착이라 여깁니다. 그럼 바로 집착을 버릴 기회나 환경이 있어야 합니다. 인위적으로 난을 증가하면 얼마나 고생입니까?”

사부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어떤 공능이 있는 일부 수련생들은 오히려 중대한 사명을 저버리고 잘 걷지 못했다. 자신에게 자그마한 재주가 좀 있다고 여기고 득의양양해하며 심지어 과시하는 문제에만 그친 것이 아닌, 심지어 아주 크게 굽은 길을 걸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오(邪悟)하고도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 당신은 우주가 당신에게 한 중요한 부탁(重託)을 저버렸는데,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법제자로 말하면 각 방면에서 모두 주의해야 한다.”[2]

공능이 있는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능력이 좀 있다고 여겨 동수 중에서 온 사방에 그의 그것을 선전한다. 이렇게 자기와 동수에게 많은 교란을 만든다. 심지어 보충할 수 없는 손실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 방면의 교훈은 실제로 너무나 많고 너무나 많았다.

그렇다면 공능에 대해 흥취가 있는 동수들은 한번 잘 생각해보라. 당신들의 길은 사부님께서 안배한 것인데 누가 당신에게 보여주었다면 실질을 볼 수 있는가? 만약 미혹을 타파했다면 당신이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게다가 언제든 우리는 사람을 따라 배우고 법을 배우지 않아서는 안 되며 결코 공능이 있는 사람을 따라서 도처로 교류하면서 동수의 제고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도처로 다녀선 안 된다. 그러면 사악에게 이용당하고 대법제자 수련환경을 교란한다.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던지 우리는 법으로 가늠해야 하며 이 점은 사부님께서 분명히 하셨다.

“나는 일찍이 말했다. 사람을 가늠하는 표준은 제자의 心性(씬씽)을 보아야 한다고. 아울러 나는 절대 어떠한 개오(開悟)하지 못하고 원만하지 못한 사람이 내 제자의 진실한 수련상황을 똑똑히 보게 하지 않을 것이다.”[3]

또 한 가지, 소위 공능이 있는 사람은 말할 것인데 구절마다 사부님의 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이성이 부족한 동수를 미혹할 수 있다. 사실 이런 것에 대해 우리는 먼저 그 동수가 비록 온 입으로 법에 있는 말을 한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일을 만날 때 그가 진정으로 안으로 찾는지 아닌지, 일에 봉착했을 때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지 아닌지, 명리정(名利情)을 내려놓는지 보아야 한다. 만일 이런 수련의 기본적인 것을 내려놓지 못하면 다른 것을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공능이 있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다른 공간을 접촉할 수 있고 다른 공간에서는 인간세상의 일체는 무상(無常)함을 볼 수 있다. 그러면 그의 심성은 닫혀 수련하는 사람보다 더 높아야 한다. 자기의 수련 중에 대한 요구가 더욱 엄숙하고 엄격해야 한다. 적어도 일부분은 이래야 한다. 그러면 이런 능력을 만약 인간의 무슨 표현에 사용한다면 (혼인의 인연을 보거나, 풍수를 보거나 작명 등등에 사용한다면) 그건 극히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사람의 것에 집착하고 놓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만약 사람의 것에 집착한다면 그의 능력이 어디까지 높이갈 수 있겠는가?

3. 나의 구체적인 방법

(1) 무엇을 보았든 모두 법으로 가늠해야 한다

수련 과정에 나는 무엇을 보든, 무엇을 알든 모두 법으로 가늠한다. 왜냐하면 공능 자체가 제한성이 있고 게다가 사람 몸이 있고 사람 몸이 있으니 관념이 있고 이러면 공능으로 일종의 장면이나 사정을 볼 때 사람의 대뇌를 통해 “편집과 번역”(사람의 언어로 표현해낸다)을 하게 된다. 그럼 관념과 변이된 요소가 들어가기 쉬우며, 심지어 거짓과 왜곡된 반영일 수도 있다. 그래서 무엇을 보거나 알거나 모두 법으로 가늠해야 한다.

법으로 가늠하는데 관해 나는 늘 한 가지에 주의한다. 그것은 바로 일을 만나거나 무엇을 알게 되었을 때 속으로 그것의 옳고 그름을 묵인하거나 또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 어떤 관념과 사람 마음을 지닌 정황에서는 법공부를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이 일에 대한 정념과 하는 방법이 비로소 진정으로 법 위에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일종의 방법이나 생각이 옳다고 먼저 “속으로 정해놓고” 그 후 유의적으로 법속에서 답안을 찾게 된다. 그러면 이런 전제하게 도출한 결론은 모두 잘못된다. 모두 법을 이용해 자기의 집착에 대한 구실을 찾는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대법에 대한 모욕이자 불경이며 자기와 동수에게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2) 다른 공간 요소의 ‘가변성’ ‘복잡성’을 간파한다

한번은 병업에 처해 있는 시간이 오래된 동수가 다른 사람을 통해 나를 찾아왔다. 그의 목적은 명확했다. 도대체 어떤 요소가 그를 교란하는지 보아달라는 것이었다. 나의 대답도 명확했다. “내가 만일 당신에게 개가 당신을 교란한다고 알려주면 당신은 정념을 발하여 개를 청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변하는 것이다. 다른 모습으로 변하면 당신은 누락이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첫째고 둘째로 만일 한 수련인이 무슨 일을 만났을 때 다른 사람이 답안을 안다면 그럼 이 사람은 어떻게 제고하는가? 이 길을 끝까지 걸어 심성이 승화되지 않으면 내가 크게 나쁜 짓을 한 게 아닌가? 하물며 내가 아는 일 역시 극히 제한적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공간의 많은 교란 요소는 각종 형상으로 환화(幻化)하고 각종 형상으로 화성(化成)하는데 또한 공능이 있는 사람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그로 하여금 그중 어느 한 영상을 이 사건에 영향을 준 근본 요소로 여기게 한다. 그래서 사악이 한 겁(劫)을 슬쩍 지나가게 한다. 그래서 사악을 청리할 때 우리는 명혜망의 요구에 따라서 해야 한다. 물론 구체적으로 공능을 어떻게 응용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파악하는가 그것은 구체적인 문제이다. 보편성이 없기에 여기서는 더 말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근신, 엄숙하고 지혜롭게 대해야 하며 사악에 미혹되어서 사악이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3) 동수들과 지낼 때는 곳곳마다 낮은 자세로 한다

내가 공능이 있고 또 오랫동안 사이트에 글을 썼기 때문에 많은 각지 동수들이 나를 만나거나 연락하고 싶어한다. 이런 것에 대해 나는 기본적으로 다 거절한다. 이유는 다른 사람을 교란하거나 이끌지 않기 위해서이다.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데는 법에서 교류할 뿐 절대 공능으로 다른 사람에게 병업이나 인연을 봐주지 않는다. 교류할 때 자기는 늘 자세를 낮추고 말을 적게 한다. 진정으로 자기를 동수와 같은 높이에 둔다. 일체 사람 마음을 버리고 자아를 내려놓고 동수와 협력하며 정체로 원용한다.

4. 엄숙하게 동수간의 ‘예의상 왕래’를 대해야

내가 접촉하는 동수는 드물다. 하지만 필경 사람 속에서 수련하므로 한 사람도 접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접촉하는 중에 ‘예의상 왕래’ 하는 문제가 있다. 이런 경우 나는 늘 동수에게 말한다. “매 사람이 가는 길이 다르고 설사 당신들이 부유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수련하더라도 그건 당신의 길입니다. 고생 중에서 난(難) 속에서 수련하는 것이 나의 길입니다. 비록 여기에 구세력의 안배가 있어도 이런 곤경을 바꾸는 방식은 당신들에 의지해 물질이나 돈 방면에서 도움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법 중에서 수련하며 더 순정하고 더 바르게 얻는 것입니다. 만일 제 곤경을 도와 생활환경을 바꾸고 싶으시다면 더 적합한 일을 찾도록 도와주시면 제가 안심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동수들도 알게 되었고 물질적으로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지 않는다.(매우 잘 알기 때문에 어떤 경우 이런 경향이 있다).

나중에 어떤 동수는 정말 나에게 적합한 일을 찾아주었다. 이렇게 하여 내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나 자신은 많은 경우 동수가 제공한 좋은 일과 환경 속에서 각별히 절약하며 자신의 명리정(名利情) 방면 요구에 대해 매우 매우 엄격히 대하며 절대 이런 것들에 오염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능이 있는 동수는 반드시 엄격하게 이 길을 대해야 한다. 비단 바르게 걸어야 할뿐만 아니라 동수를 교란하는 어떤 작용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그중 반드시 자아를 내려놓고 진정으로 사부님의 요구대로 해야 한다. 닫혀 수련하는 동수와 교류할 때 가능한 법리상에서 교류하며 공능에 대해서는 적게 말해야 한다. 우리가 동수를 도와 나쁜 요소를 청리할 때는 묵묵히 해야 하며 해당 동수가 알게 할 필요가 없다. 만일 안다면 더욱 큰일이며 주변 동수들에게 선전할 필요가 없다. 가장 좋기는 글을 써서 인터넷에서 교류하며 사람들에게 주의하도록 일깨우는 것이 좋다.

수련인으로서 우리는 명확히 아는데 우리의 수련목적은 사람 속에서 다른 사람의 칭찬과 긍정을 얻자는 게 아니리 진정으로 대법에 동화해 사명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일을 다른 사람이 알게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묵묵히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기타 상태에 처한 동수가 공능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거나 숭배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피하게 할 수 있다. 만일 일부 대표적인 일을 안다면 글로 써서 인터넷에서 사람들에게 주의하도록 일깨우는 것이 좋다.

우리 사부님의 당부를 명심합시다.

“수련의 엄밀함은, 한 고리 한 고리 연결되어 있으며, 설사 매 시각, 매 일보마저 교란을 받아서는 안 된다.”[4]

우리의 수련과 법 실증의 길을 반드시 바르게 잘 걸어야 한다.

이상은 개인의 이 방면의 인식에 대한 얕은 견해이다. 부족한 점은 지적을 바란다.

주:
[1],[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4》〈2004년 시카고 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가늠하는 표준을 다시 논함〉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다시 방할하노라》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60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