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풍(淸風)
【정견망】
법공부를 하다 “과거에 수련하는 사람은 밧줄을 타고 들어간 후, 밧줄을 끊어버리고 동굴 속에서 수련했는데, 수련해 내지 못하면 그 안에서 죽어야 했다. 물도 없고 음식도 없는, 바로 이처럼 극히 특수한 환경하에서 그가 채용한 특수한 수련 방법이었다.”[1]라는 부분을 읽고 나는 문득 일종 아주 강한 공명(共鳴)을 느꼈는데 신사신법에 대한 한 층의 깨달음이 생겼다.
한 사람이 세간의 모든 것을 버리고 동굴에 들어가 벽곡(辟穀)이라는 아주 특수한 방법으로 수련하는 것은 자신의 퇴로를 완전히 막아버리는 것이다. 사찰에서 수련하다 수련할 수 없다고 여기면 환속할 수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것은 이 한 문(門)의 사부에 대해 매우 강한 바른 믿음이 있어야만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최후에 그의 수련성공 여부를 막론하고 이 일념 자체가 너무나 대단한 것이다.
천고 이래 수련을 믿는 사람들은 아주 많았지만 진정으로 수련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아주 적었고 마지막으로 수련 성취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매우 드물었다. 이러한 현상을 조성한 원인은 아주 많지만 사부님과 법에 대하여 백 퍼센트 바른 믿음을 갖지 못한 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사람은 미혹 속에 있기 때문에 진상을 볼 수 없고 눈으로 본 것만이 확실하다는 이치에 의해 큰 제약을 받는다. 그러므로 설사 근기가 아주 좋은 사람일지라도 수련에 대한 의혹과 흔들림이 전혀 생기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열려서 수련하는 사람이 보는 것 역시 제한적이니 닫혀서 수련하는 사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것이 바로 수련이 어려운 부분이고 또한 어렵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신사신법(信師信法)을 말하지만 왜 신사신법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본 사람은 적은 것 같다. 이는 마치 생각할 필요 없이 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고, 빚을 졌으면 돈으로 갚아야 하는 것과 같이 불변의 진리처럼 여긴다. ‘신사신법하지 않고서 또 무엇을 수련하는가?’라고 생각한다.
좀 거친 비유를 하나 하자면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길에서 어떤 장애물을 만나면 당연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지 위에 있기에 이 일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높은 곳에 서 계시면서 아주 똑똑히 보시기에 우리더러 어떻게 가야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신다. 이것이 바로 법(法)과 유사하다.
하지만 우리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자신의 경험이나 실제로 부딪친 상황과 들어맞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때가 바로 우리의 바른 믿음을 고험할 때이다. 진정으로 신사신법하고 이 난을 걸어 지날 때면 곧 사부님께서 모든 것을 장악하고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되지만, 이런 믿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지금 수련은 최후의 관건적인 시기에 도달했고 이럴 때일수록 ‘믿음(信)’이 더욱더 관건적이다. 법속에서 우리는 아는데 정법제자로서 우리에겐 퇴로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 그 어떤 퇴로도 남겨 두어선 안 된다. 과거에 벽곡하던 사람들이 닦은 법문은 우리보다 작았지만 그들은 자신의 퇴로를 철저히 끊을 수 있었다. 속인 중에도 “사지(死地)에 몰린 후에야 살 길을 찾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마땅히 이보다 더 잘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4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