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동 대법제자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어떤 심태(心態)인가? 바로 관용(寬容)인바, 매우 홍대(洪大)한 관용으로서, 다른 생명을 용납할 수 있고 진정으로 입장을 바꾸어서 다른 생명을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많은 사람들이 수련과정 중에서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점차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도달하려 하고 있다. 어떤 신(神)이 방법을 제출했을 때, 그들은 급급히 부정하거나, 급급히 자신의 것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방법이 가장 좋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다른 신이 제출한 방법의 최후 결과가 어떠한지를 먼저 본다.”[1]
그러나 나는 수련 중에서 교류에서나 또는 문제를 처리할 때나 종종 자신의 관점을 표현하기에 급하고 상대방을 부정하기 급하거나 심지어 아예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출발점은 무엇인지 들으려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된다. 어떤 때는 아직 상대방이 하는 말의 전체 내용과 표현하려는 의사를 다 듣기도 전에 중간에 말을 자르고 중단시킨다. 법리적인 교류에서도 이렇게 했는데 만약 동수가 자기 견해를 견지하면 쟁론이 일어날 것이다.
속인도 남의 말을 잘 들으면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수련인이 한 말은 필경 수련인이 위치한 층차와 경계의 한가지 표현으로, 필경 진선인(眞善忍) 우주특성의 요소가 안에 있으며 물론 또 선(善)을 권하는 부분이 있다. 더욱 깊은 층에서 말하자면 이는 사부님께서 동수의 입을 빌려 점화하시는 게 아닌가?
한번은 동수 언니에게 말했다.
“저는 다만 제가 책임진 기술업무만 하면 된다고 봐요. 하루 종일 이렇게 바빠서 어쩔 줄 모르는데 다른 일은 아예 상관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자 그 언니가 말했다.
“그러면 안 돼, 동수가 기왕에 너를 찾아왔고 또 할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네가 해야지.”
의미는 나더러 주동적으로 일부 일을 감당하고 좀 더 지불하란 것이다. 나는 한번 생각해보았다. ‘수련에 우연한 일이란 없다. 어떤 일은 저들이 하려면 확실히 어느 정도 어려움이 있지만 나는 바쁘긴 하지만 저들이 배우는 것에 비하면 좀 더 쉽고 빠르게 할 수 있지 않은가.’
사실 책임을 더 많이 지려 하지 않는 그런 사심(私心)과 자아의 마음이 이렇게 건드려진 것이다. 나중에 나는 이렇게 일하는 태도와 방법을 개변했다. 동수의 요구라면 오직 시간과 조건이 허락하고 순조롭게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받아서 했다. 어쨌거나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았고 가급적 많이 했으며 묵묵히 다른 사람을 원용했다. 또 자신에게 하나의 표준을 정해 말은 적게 하고 일은 많이 하며 일을 하면서 말을 하지 않도록 했다. 비록 이 표준을 지키기란 아주 어려운 것임을 알고 또 꼭 그리 잘하진 못했지만 노력해서 하면 된다. 자신의 것을 적게 생각하고 남과 정체의 것을 많이 생각하니 일을 하는 것이 아주 순조롭고 마음도 밝아졌다.
또 한 번은 교류할 때 나는 동수들이 모두 듣고 싶어 하는 좋은 말과 좋은 일면을 말하길 좋아하며 다른 사람이 내게 좀 자비롭게 하길 좋아하면서 위엄(威嚴)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수 앞에서 나의 표현이 바로 일종의 ‘위엄’이라 일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실 때로는 말을 할 때 자신도 모르게 비난과 원망의 성분이 끼어 들어간다. 말을 하는 어투와 리듬과 힘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그렇게 강하고 도도한 매서움이 상대방에게 압력을 조성하게 되는데 그것의 미명(美名)이 바로 ‘위엄’이다.
그런데 비난과 원망은 사람마음의 표현이자 당문화(黨文化)이고 마성(魔性)이다. 반대로 법의 위엄은 자비의 한가지 표현으로 선을 권하는 것이고 불성(佛性)이니 어찌 함께 논할 수 있겠는가? 이런 정(情)은 정말 좋은 것이 아니며 비난과 원망 역시 좋은 것이 아니다. 모든 집착심은 전부 좋은 것이 아니며 모두 정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모두 수련인이 제거해야 할 것들이다.
Y동수가 나와 교류하면서 내게 말했다.
“사부님의 《미술과 음악창작회의 설법》 중에 이런 한 단락 법이 있는데 바로 평화를 말씀하셨어요. ‘평화로운 상태야말로 바로 선(善)한 것이고 사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람의 상태이다. 평화 속에도 고조기복(高潮起伏)이 있지만 완전히 이성적인 것이며, 평화 속에도 휘황한 펼쳐짐이 있지만 평화를 기초로 한 것이다.’[2]”
그러므로 교류 중에 남보다 말이 더 많거나 목소리가 좀 크거나 기세가 더 강하다고 해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며 심태가 상화롭고 평온해야만 자비와 위엄이 동시에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상화한 심태와 평화로운 말투로 일의 이해관계를 분명히 말하고 상대방에게 만약 이렇게 하면 후과가 어떻게 된다고 분명히 말하며 법에 있지 않는 엄중성을 분명히 말하면서, 문제를 더욱 잘 설명하고 해결할 수 있다면 그럼 상대방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예전에 나는 아주 고집스런 사람이었다. 동창이나 동료들이 보기에 나는 아주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사회에 진출한 후에야 서서히 매끄럽게 변했지만 약아졌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약다’는 것은 우리 이 우주 중에서 볼 때 이미 그릇된 것이다”[3]
다년간의 수련을 거쳐 그런 약음이 서서히 원용(圓容)하게 변했다. 만약 우리가 모두 원용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약음을 많이 없앤다면 모순의 상대방도 원용할 수 있게 되고, 그럼 정체 수련이 제고되지 않겠는가? 그럼 바로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게 아니겠는가?
작은 수련 체험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롭게 시정해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2》〈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음악과 미술창작회 설법》〈음악창작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4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