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우리 지역의 한 동수가 외지(外地)로 일을 하러가다가 정류소에서 경찰에게 제지당했다. 경찰은 그의 가방을 뒤져 대법서적과 2개의 USB를 꺼냈다. 경찰이 USB에 든 내용이 무엇인지 묻자 동수는 업무용이라고 대답했다. 경찰이 곧 컴퓨터로 확인해보니 하나는 업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법의 내용이었다. 그러자 경찰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다니 당신은 수련을 잘하지 못했군.”이라고 말했다.
들어보면 이는 경찰이 한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우리 동수 사이에 법학습과 교류할 때 교란과 마난(魔難)을 언급할 때면 우리는 모두 그것이 모두 고험(考驗)임을 알고 있다. 수련과정 중의 마난은 물론 확실히 심성의 고험이다. 그러나 누가 우리를 고험하고 있는가, 구세력인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법의 제자이기 때문에 우리를 고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부님뿐이다. 구세력이 아무리 층차가 높다 해도 역시 정법 중에서 바로잡혀야 할 생명에 불과한데 그것이 어찌 대법제자를 고험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단지 그것들이 사부님의 우주정법(宇宙正法) 중에 한 발을 들여놓은 것에 불과하다. 사부님께서는 장계취계(將計就計)로 그것들의 행위를 이용하고 계신다. 오직 이 배후의 진상을 우리가 볼 수 없기 때문에 비로소 또 ‘마난’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내가 이해하기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법리는 구세력(舊勢力)에 대한 전반적이고 철저한 부정이다. 심지어 그것들의 존재 자체마저도 우리는 다 승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위 마난의 배후 또는 소위 구세력 배치의 배후를 말하자면 이는 학습 중에서 우리에 대한 사부님의 시험이다. 관을 넘는 가운데 사악의 그 어떤 지시와 요구에도 협력하지 않는 것이 바로 구세력을 부정하는 체현이다. 구세력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마치 여래불 손바닥 안의 손오공처럼 사부님께선 그것들의 소란을 지켜보실 뿐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장부를 결산해야 한다.
다른 방면에서 우리는 정법(正法) 수련 중에서 업력을 갚아야 한다. 업을 갚는 중에는 또 사람마음의 집착이 있기 때문에 고생을 낙으로 삼지 않으면 두려움과 원망이란 집착이 가중된다. 관을 넘지 못하거나 또는 관을 잘 넘지 못하면 다시 말해 소위 구세력에게 틈을 타게 된다.
우리의 수련은 미혹 속에 있는 것으로 의지하는 것은 ‘깨달음(悟)’이란 글자다. 왜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면 수련할 수 없다고 하는가, 미혹이 없으면 수련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법을 직접 본 것처럼 믿고 뜻이 금강과 같으며 의지가 반석과 같다면 그럼 수련이 아마 훨씬 쉬워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근기가 부동하고 오성 역시 부동하며 믿음의 정도 역시 부동하기에 관을 넘는 가운데 잘 넘긴 것이 있고 잘 넘기지 못한 것도 있다. 하지만 수련 중에서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법을 잘 배우고 진정으로 닦고 착실히 닦을 수 있다면 끊임없이 우리의 정념을 강화할 것이며 우리의 오성이 제고될 것이다. 마난이 닥친 때에도 곤두박질치는 것이 줄어들고 손실도 감소할 것이며 또한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음을 덜 졸이시게 할 것이다.
개인 수련 층차에서의 작은 깨달음이니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시정으로 함께 제고하길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6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