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입자(粒子)
【정견망】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모두 부면(負面)사유를 배제하고 부면사유의 뿌리를 캐내야 하는데, 어떤 집착심이 표현되어 나온 것인지 보고 그것을 제거하고 시시각각 정념을 유지해야 함을 알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이 부처인가? 여래(如來)란 진리를 딛고서 여의롭게 왔다는 이런 하나의 세상 사람의 호칭이지만, 진정한 부처인 그는 우주의 보위자(保衛者)이다. 그는 우주 중의 일체 바른 요소를 책임질 것이다.”[1]
만약 우리 사상 속에 부면적인 것이 있다면 어떻게 정(正)의 요소를 위해 책임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반드시 사상이 순정(純正)한 생명이 되어야지만 정(正)의 요소를 강화할 수 있고 부면적인 것을 정면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정의 요소를 위해 책임질 수 있다.
자신의 일사일념을 내려놓지 말고 부면(負面)적이고 법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을 움켜잡거나 심지어 집착심의 뿌리를 단번에 캐내 소각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 법리는 명백한 것으로 정확한 생각과 정확한 행동이 무엇인지 안다. 하지만 내겐 줄곧 한 가지 곤혹이 있었는데 좋지 않은 일에 직면해 마땅히 어떤 사유를 사용해서 어떤 각도에서 사고해야만 정면으로 문제를 보는 것일까? 왜냐하면 표현되어 나온 사상염두가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한 후 다시 그것을 제거하는 이것이 결국 피동적이기 때문인데 우리는 주동적으로 법에 동화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과 직접 관계가 있으며, 이 좋지 못한 것을 제거해 버리려면 우선 당신의 이 마음부터 바로잡아야 한다.”[2]고 알려주셨다.
내 층차에서 이해한다면 오직 부정확한 사유방식을 개변해야지만 근본적으로 좋지 않은 요소가 생성을 두절할 수 있고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법의 표준에 부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사유방식을 정면으로 변화시키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한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신이 문제를 봄에 그는 총체적으로 보고, 입체적으로 보나, 사람은 단지 표면상에서 본다. 어떤 때 대법제자가 내 곁에 있으면, 당신의 일사일념, 당신의 표현에 대해, 나는 아예 당신의 표면, 당신의 행위를 보지 않고, 나는 당신의 진정한 그 동기를 보며, 나는 당신의 진정한 사상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본다. 이 과정 중에서, 표면상 표현되어 나오는 것, 비록 그것이 당신의 행위이고 당신이 책임져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의 근본을 본다.”[3]
사부님께서는 또 어떤 수련생이 차하게 한 것을 보고 이렇게 일깨워주셨다.
“어떤 수련생들은, 역시 마찬가지로서, 그가 아주 차(差)하게 한 것을 보았는데, 심지어 사악과 함께 다른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데에 참여했다. 그러나 나는 사악의 엄혹한 박해 중에서 사람마다 수련상태는 같지 않으며, 인체가 감당하는 것 역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말했듯이, 모두 사람이 수련하고 있으며, 신이 수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수련하고 있으면 곧 사람의 사상이 있고, 사람의 사상이 있으면 곧 잘못할 수 있으며, 잘못한다면 작게 잘못할 수 있고 크게 잘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이 결속되지 않은, 이전에는 아직도 그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고, 그가 수련하려고 생각하면 그래도 마땅히 그를 동수(同修)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4]
내 생각에 아마 많은 대법제자들이 이렇게 생각할 텐데, 당신이 나를 때리거나 욕하는 것은 따지지 않을 수 있지만 사부님과 대법을 비방하거나 대법제자를 박해하는데 참여한 그것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사람을 마주한다면, 내 생각에 설사 자신이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할지라도 역시 관용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발정념으로 그가 계속해서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을 제지하고 이로부터 그를 멀리할 수는 있겠지만 더 이상 그를 만나려하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하지만 현재 내 층차에서 이해하기에 사부님께서는 우리더러 처지를 바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하셨으니 다른 사람의 각도에서 문제를 사고해 봐야 한다. 매 사람의 상태가 다 다르고 감당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수련 중의 사람이 사람의 사상이 있으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또 그의 동기가 꼭 의도적으로 대법제자를 박해하려던 것이 아니라 아마 단지 박해받는 고통에서 도피할 생각에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나는 깨달은 것은, 내 눈으로는 단지 표면의 이 사람과 표면적으로 그가 한 좋지 않은 일만을 볼 수 있을 뿐이며 그렇다면 내 마음속에 드러나는 것은 오직 오점뿐이고 다른 것이 없으니 마치 쓰레기와 같고 당연히 그것을 멀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흉금을 넓히고 시야를 멀리까지 내다본다면 그는 역사상 천만 년간 온갖 고생을 겪으며 법을 얻기 위해 온 생명인데 생생세세 늘 아주 잘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내 마음속에 드러나는 그는 흠집이 있는 백옥(白玉)과 같은데 누가 이 백옥에 흠집이 있다고 해서 소중히 여기지 않겠는가? 우리가 만약 대법제자를 박해하는데 참여한 사람을 모두 정확하게 대할 수 있다면, 그럼 또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에 대해서든 정면으로 대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다른 사람의 각도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 문제의 표면만을 보지 말고 동기를 보아야 하며 그 사람의 생생세세를 보아야 한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제적이라는 관념의 영향과 무신론의 독해로 지금 눈에 보이는 한때와 일세(一世)만을 보지는 말아야 한다. 이것이 현재 내가 깨달은 나의 문제가 소재한 곳이다.
나는 명혜라디오에서 방송하는 《사부님은혜(憶師恩)》란 프로를 가장 좋아하는데 사부님의 은혜에 흠뻑 빠진 동수의 회억을 따라가노라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동시에 사부님의 언행(言行) 역시 우리더러 어떻게 남을 위해 생각하고 처신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신다.
설법에서 사부님께서는 또 수련생이 제출한 첨예한 부면(負面) 문제를 회피하지 않으셨다. 사부님께서 어떤 각도에서 문제를 고려하고 문제를 해결하시는지 자세히 체험해보고 자신 역시 이런 사유를 따라 배우려고 노력하는데 이는 잘 다져진 한 갈래 광명대도(光明大道)다.
나는 제대로 사정도 모르면서 화를 자초한 말썽꾸러기와 같았으면서도 이렇게 많은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이 점을 인식할 수 있게 된 자신을 뼈아프게 후회한다. 수련이야기에서 보면 과거에 수도하던 사람은 사부가 설법해주지 않았고 모든 것을 다 자신의 깨달음에 의거해야 했다. 단 한 차례라도 깨닫지 못하거나 잘하지 못하면 곧 수련의 기연(機緣)을 잃어야 했다. 그러나 대법제자인 우리는, 사부님께서 이렇게 분명하게 설법해주셨으니, 단지 마음을 써서 법을 공부하고 마음을 써서 실천하기만 하면 되는데 이 얼마나 쉽고 또 이 얼마나 행운인가!
개인의 작은 심득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비평과 시정을 바란다.
주:
[1] 리훙쯔 사부님 저작: 《도항》〈미국서부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대법홍전 25주년뉴욕법회설법》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대법홍전 25주년뉴욕법회설법》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2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