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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돌아가는 길

정호(征好)

【정견망】

1. 속세로 떨어져 내려온 두 가지 일을 이해

어릴 때 《서유기》를 보면서 나는 매번 사승(沙僧 사오정)을 위해 불평하곤 했다. 등장인물들 중에서 가장 가벼운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가 받는 징벌은 오히려 무거웠기 때문이다. 사승은 단지 옥황상제의 유리잔을 깨뜨렸을 뿐인데 8백대 매를 맞고 하계로 쫓겨 내려갔다. 뿐만 아니라 7일마다 비검(飛劍)으로 가슴과 옆구리 백여 곳이 관통되는 벌을 받아야 했다.

당시 나는 생각했다.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천계(天界)에는 무슨 보패(寶貝)든 다 있는데 유리잔 하나 깨뜨렸다고 이렇게 심한 징벌을 받는단 말인가?’

나중에 정견망에서 한 이야기를 보니 천계에 한 동자가 있었다. 어느 날 보살의 법기를 실수로 떨어뜨려 속세로 쫓겨 내려왔고 생생세세 윤회했다. 당시 나의 첫 일념 역시 징벌이 너무 과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련 중에 집착심을 내려놓음에 따라 서서히 자아(自我) 이 층의 면이 건드려지면서 나는 문득 이 두 가지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당신이 누가 정행(正行)하지 않았음을 보았다면, 사실 그는 정념이 부족한 것이다. 사상이 사람의 행동을 지도하기 때문인데, 당신의 정념이 충족할 때면 당신의 행위는 틀림없이 단정하다. 정념이 부족하다는 말은 행위가 단정하지 않다는 것이다.”[1]라고 하셨다.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천계 부동한 층차의 생명은 그의 사상이 모두 그 한 층 법(法)의 표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그의 행위는 일반적으로 잘못이 있을 수 없다. 행위의 잘못은 사상에 변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가령 자아(自我)관념이 생겨나 법기(法器)를 왜 반드시 그렇게 놓아야 하는가 이렇게 놓으면 더 좋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해 유리잔을 깨뜨리고 법기를 잘못 놓은 것이 이 생명이 속세로 쫓겨 내려간 진정한 원인이 아니며, 이 생명이 더는 순정(純淨)하지 않고 그 한 층 법의 표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만약 단지 표면적인 행동만 바로잡는다면 그럼 다음에 깨뜨린 것은 유리잔이 아니라 비취잔이 되었을 수 있고 이미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수련 중에서 우리는 종종 어느 구절 말을 잘못하거나 어떤 일을 잘하지 못해서 마난을 초래한 것으로 오해하는데 사실 그런 것이 아니다. 말을 틀리게 하거나 일을 잘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표면적인 원인이다. 이때 마땅히 대법으로 대조해서 이 구절을 틀리게 말하거나 이 일을 틀리게 한 배후의 변이된 사상을 찾아내 자신을 바로잡아야 한다. 대법에 동화하는 것만이 비로소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2. 경사신법(敬師信法)과 마음 닦아 집착 제거

수련 중에서 내가 겪은 한 가지 고생은 바로 집착심을 찾는 고통이었다. 사상이 틀린 것을 발견한 데서부터 정확하게 이 집착심 배후의 뿌리를 찾음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 아주 간고한 사고과정을 거쳐야 했다. 찾는데 고생했으니 제거하는 것 역시 진지해야 한다.

나는 매번 진지하게 집착심을 찾아서 집착심을 없앨 수 있는가 여부는 자신이 정말 경사신법(敬師信法)했는가 여부로 가늠한다. 내가 이해하기에 진정한 경사신법은 바로 사부님 말씀에 따라 하는 것이다.

가령 나는 병에 관한 관념을 이렇게 제거했다.

나는 일찍이 아주 심각한 결벽증이 있어 매일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세균 때문에 수없이 자주 손을 씻었다. 이 문제 때문에 가족들과도 모순이 심각해졌고 수련하고 사람을 구하는데 사용할 나의 소중한 시간과 기회를 낭비했다. 이에 나는 자신을 개변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진정으로 안으로 찾고 안으로 닦기 시작하자 사부님께서 내게 주신 수련계통(修煉系統)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는 바이러스와 세균이 사람에게 병을 생기게 한다는 것은 과학의 관점임을 떠올렸다.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바, 이 과학, 그것 역시 하나의 종교이다. 그것은 대단히 완벽한 종교이다.”[2]라고 하셨다.

우리는 수련을 통해 사람에게 병이 생기게 하는 진정한 원인은 업력임을 모두 안다. 나는 대법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과학을 믿을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만약 내가 과학이란 이 종교를 믿기로 선택한다면 그럼 불이법문(不二法門)이란 이 문제를 엄숙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더 심각한 것은 내가 만약 바이러스와 세균이 내게 병을 초래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사실 사부님께서 나를 도와 신체를 정화해주셨음을 불신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이 대법이 진짜인가? 사부님 말씀이 진짜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배후에는 바로 사부님에 대한 의심이 있는 것으로 이는 사부님에 대한 큰 불경이다.

이 집착을 철저히 찾았으니 또한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나중에 역병이 가장 심각하던 때에도 나는 사람을 구하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해낸 후에야 나는 비로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당신들은 이미 상생상극(相生相剋)의 법리(法理)를 알고 있는데, 두려움이 없다면 당신을 두렵게 하는 요소도 존재하지 않음”[3]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정말 우리를 위하시는데 병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면 설사 구우주의 이치에 따르더라도 구세력 역시 박해할 구실을 잡지 못한다.

나는 원한심을 이렇게 제거했다. 이 마음은 아주 오랜 시간 나를 따랐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나중에 그것이 점점 커져서 심지어 나를 조종해 법을 공부하지 못하게 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때 사부님께서 나를 구해주셨다. 사부님의 한 구절 법이 내 사상 깊은 곳에 들어왔다.

“사람은 마치 하나의 용기(容器)와도 같아 무엇을 담으면 곧 무엇이다.”[4]

나는 청성해졌다. 내가 머릿속에 원한을 담으면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오래 닦았는데 내가 어찌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것과 진정한 자신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이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에 단번에 깨끗이 제거할 순 없었지만 나중에 끊임없는 수련 속에서 그것이 점점 더 약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 이후 나는 그것이 형성되기 전에 일부 난잡한 사유 속에서 직접 그것을 잡아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또 질투심을 이렇게 제거했다. 한동안 나는 연공을 많이 해서 번티(本體)의 번화가 잘된 동수를 부러워했는데 특히 일부 연세가 많은 동수들이 검은 머리를 한 것을 보면 늘 그의 모근을 살펴보곤 했다. 만약 모근이 흰색이면 이는 염색한 것을 의미하니 한시름 돌렸고 만약 모근이 검으면 그가 수련을 잘한 것이니 자신이 뭔가 뒤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것이 질투심임을 알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제거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사부님께서 우리를 제도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수련 성취할 수 있기를 원하신다. 그럼 만약 우리가 동수의 부족한 점을 보았다면 마땅히 방법을 생각해 완전히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자 질투심이 서서히 녹아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원래 질투를 녹여내는 것은 자비였다.

집착심을 점점 더 많이 제거함에 따라 나는 모든 집착심이 다 하나의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自我 즉 私我)였다.

사부님께서는 “그러나 검은 기는 병을 조성하는 근본원인이 아니며, 더욱 깊은 한 공간 중에 그런 영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내보낸 이 장(場)이다.”[5]라고 하셨다. 나는 사아(私我)가 집착을 파생시키는 것을 깨달았다. 반대로 말해 집착은 또 사아를 자양할 수 있다.

3. 불순을 더 없애다

수련의 제고에 따라 경사신법의 표준 역시 제고된다. 일부 쉽게 관찰할 수 없는 불순(不純)이 폭로되어 나왔다. 나는 자신의 무지와 오만을 발견했는데 일부는 이미 자연스럽게 사상배후로 형성되었는데, 모두 하나의 오만한 자아가 있었다.

가령 “내가 무슨 집착심을 제거했다”는 말을 살펴보자. 나는 미혹 속에서 수련하는 사람인데 내가 무슨 힘으로 천백 년간 형성되어 마치 화강암처럼 완고해진 물질을 제거할 수 있는가? 나는 그저 산을 옮기려는 생각을 품고 한 삽 한 삽 흙을 나른 우공(愚公)과 마찬가지일 뿐이다. 사부님께서 나의 진심과 결심을 보시고 결과적으로 나를 도와 이 큰 산과 같은 집착을 이동시켜 없애주신 것이니 이는 사부님께서 하신 것이다.

가령 “나는 진상을 알려 몇 사람을 구했다.”라는 말을 보자. 나 자신은 사부님께 의지해 구한 것이지 내가 누구를 구할 수 있는가? 나는 그저 가장 표면의 아주 작은 일을 한 것에 불과하며 진정으로 본질상에서 이 생명을 구하신 것은 사부님이시다.

또 “나는 무슨 법리를 깨달았다”고 하는데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파룬궁은 법이 사람을 연마한다.”[6]고 하셨다. 이는 대법(大法)이 내가 어느 집착심을 닦아야 하는지 보고 나더러 제고하게 한 것으로 내가 있는 층차에서 마땅히 알아야 할 법리를 내게 펼쳐준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는 다 사부님께서 하시고 대법이 한 것이다.

그럼 우리가 닦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닦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부님에 대한 공경과 대법에 대한 믿음이다.

바로 이 하나의 공경과 이 하나의 믿음에 의지해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로 이끄시는 것이다.

만약 사부님에 대한 공경과 대법에 대한 믿음을 잃는다면 그럼 스스로 사부님을 떠나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걷는 것이다. “길은 자신이 걷는 것이다.”[5] 이때 사부님께서는 그저 마음 아프게 당신을 바라만 보시는데 당신이 돌아올 수 있다면 곧 사부님께서 관할하신다. 반대로 미혹이 너무 심하거나 너무 큰 잘못을 한 이들은 심지어 구세력에게 끌려가 육신을 잃을 수 있다.

4. 우리의 초심을 되찾자

어느 날 동수와 함께 문을 잠그러 가기로 약속했다. 나는 길가에 서서 동수를 기다리면서 법을 들었다. 이때 이런 한 구절의 법을 들었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수련은 아래에서 위로 수련하며 줄곧 개공(開功)하여 원만(圓滿)에 이를 때까지 수련한다. 반수(返修)라고 하는 것은, 나이가 많아 아래에서 위로 수련하기에는 늦었으므로 그가 위에서 아래로 수련하면 빠른데, 역시 당시에 조성된 현상이다.”[5]

나는 그곳에 고정되었고 한 가닥 뜨거운 흐름이 온몸을 관통했는데 마음속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마치 아주 멀고 아주 먼 길을 걸은 것 같고, 때로는 빨리 걷고 때로는 느리게 걸었으며 늘 잘못 걸었고 때로는 또 길을 잃었다. 사부님과 대법이 줄곧 내게 길을 알려주었고 대법은 일체 미혹의 장애와 망념을 타파해주었다. 갑자기 쾅 하고 문이 열렸고 이때 나는 마치 미시적인 나와 합해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나는 깊고 멀며 아득히 먼 세계를 보았는데 그곳은 내가 최초에 왔던 곳이다.

마치 션윈 개막작품처럼 우주 말후(末後)에 하늘가에서 주불(主佛)의 자비롭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전해오는 것 같았다. 우리는 중생을 위해 의연히 신(神)의 광환을 버리고 신의 생명으로 사부님을 따라 아래로 걸어 내려가 조사정법하기로 주불과 서약했다.

사실 그때부터 우리는 이미 대법을 선택한 것으로 대법에 의해 선택된 생명이 된 것이다. 또 그때부터 우리는 구세력과 근본적인 구별이 있게 된 것이다. 진정으로 사부님께 불경하고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바로 구세력이다.

내가 경사신법(敬師信法)이란 이 일념을 지니고 층층 아래로 내려오는 과정 속에 층층 우주에 수많은 먼지에 파묻혔지만 당초의 이 일념(一念)은 주불의 가지(加持) 하에 내 생명 깊은 곳에서 창궁(蒼穹)의 위에서부터 줄곧 불멸하는 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당초 이 일념을 지켜 위에서 아래로 수련하지 못하는가?

내가 이해하기에 아래에서 위로 수련하는 것은 하나하나의 집착심을 닦아버리는 것으로 마치 모든 검은 기를 움켜잡아 최종적으로 검은 기를 만들어낸 영체(靈體)인 자아(사아)가 모습을 숨길 곳이 없게 하는 것과 같다.

반면 위에서 아래로 수련하는 것은 자신의 신(神)의 일면이 주도해 자아(사아)를 단번에 손안에 잡아 쥐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가 패멸(敗滅)을 시작할 때부터 사아는 줄곧 뼛속까지 달라붙어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 진아(真我)의 본성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구별이 아주 어려워서 우리는 늘 그것을 자신으로 간주해왔다. 심지어 그것도 수련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수련하는 것은 자신의 원만을 위한 것이다. 그것도 진상을 알리지만 그것이 진상을 알리는 것은 자신이 뒤떨어지지 않기 위한 것이다.

나는 정법수련의 한 층 함의는 사존의 가지하에 깨달은 진아(真我)본성으로 대법 중에서 닦아낸 금강불괴의 정념(正念)을 사용해 탄연하고 두려움 없이 직접 손을 써서 사아(私我) 및 그것과 관련된 일체 불순한 요소를 폭파하고, 강철을 녹여낼 수 있는 자비로 구세력이 이런 불순한 요소를 이용한 변이된 배치 및 구세력 그 자체와 그것과 관련된 일체 중생을 해탈시키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근본적으로 구세력을 부정할 것인가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사부님께서는 “나의 뿌리는 모두 우주에 박혀 있으므로 누가 당신을 움직일 수 있다면 곧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5]라고 하셨다.

내가 이해하기에 진정한 나는 줄곧 사부님 옆에 있었으며 이는 구세력이 근본적으로 건드릴 수 없는 곳이다. 아울러 구세력의 사아(私我)에 대한 일체 변이된 배치는 모두 구우주의 해체에 따라 해체된다.

사부님께서는 “지금까지 해오면서, 중생들도 구세력이 하려고 하는 일체는 모두 풀 수 없고 뿌리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보았다.”[5]라고 하셨다.

내가 깨달은 것은 구세력은 단지 그것들의 배치에만 집착하며 이 일의 결론이나 얼마나 많은 생명을 훼멸시킬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 사부님만이 우주를 위하여 또 중생의 미래를 위해 책임지신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동시에 우리 이 한 문(門)이 넣어주는, 수천, 수만도 넘는 것을 전부 당신의 主元神(주왠선)에게 넣어주며, 진정하게 당신 자신이 공을 얻게 한다.”[5]

나는 마침내 나 자신을 찾았고 자비하신 사부님께서는 나를 제자로 삼아 이렇게 다년간 이끌어주셨지만 나는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사존의 제자가 되었다. 발정념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구세력의 박해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법이 육성한 제자로서 사존께서 부여하신 불법신통으로 대법을 견정하게 수호하고 사부님과 대법에 불경한 생명을 제거하는 것이다. 진상을 알리는 것도 자신의 신(神)의 일면을 동원하기 시작했고 강대한 신념(神念)으로 중생 생명의 가장 본원과 소통한다. 대법 속의 한 입자로서 나는 대법에서 유래한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신의 힘을 지니고 있다.

이제 다시 과거 자신의 수련과정을 돌아보니 줄곧 사부님에 대해 공경하고 대법을 믿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또한 불순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불경했기 때문에 공경을 닦았고 불신했기 때문에 믿음을 닦은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대법(大法)은 창세주(創世主)의 지혜이다. 그는 하늘과 땅을 열고(開天闢地), 우주를 만든(造化宇宙) 근본으로, 내포가 지극히 크고 미세하며, 부동(不同)한 천체 층차(層次) 중에 부동한 펼쳐보임(展現)이 있다.”[5]라고 하셨다.

이 우주 중의 생명에 불과한 내가 감히 어떤 담으로 하늘과 땅을 열고 우주를 만든 근본인 대법에 대해 믿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감히 무슨 담이 있어 무량한 대궁을 만드신 만왕(萬王)의 왕이자 무상(無上)의 왕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사부님과 대법에 의해 만들어진 미미하기 그지없는 한 생명으로서 사부님을 찬송하고 대법을 찬송하는 것만이 내 생명의 진정한 소원이다.

5. 소중히 여김

나는 자신이 사부님의 요구와는 아직도 차이가 너무나 먼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매 진수제자(真修弟子)마다 수련 중에 필요한 완전한 한 세트를 주셨지만 우리는 아직 착실한 수련 중에서 실천하고 있으며, 나는 어떻게 해야 강철을 녹여낼 수 있는 이런 자비를 닦아낼 수 있는지 모른다.

사부님께서 내게 제고하려는 소원이 있는 것을 보시고 곧 한 쌍의 혜안(慧眼)을 주시어, 나로 하여금 사부님께서 뭇제자를 이끌고 개창하신 오천년 전통문화 가운데 담겨진 천기를 보게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또 내게 혜심(慧心)을 주시어 나로 하여금 여기에 담긴 천기 속에서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를 느끼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

가령 소동파의 한마디 “이 몸이 내 것 아님을 늘 한탄하나니 공명을 추구하는 삶 언제나 잊으려나?(長恨此身非我有,何時忘卻營營)”가 있고 또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不由自主)”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사람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사람은 늘 미혹되어 길을 잃고 진정한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기에 사람을 일깨워 진정한 자기를 찾게 한 것이다.

가령 ”마음을 내려놓는다(放心)“란 이 단어는 사람에게 인연관계와 업력의 크기에 따라 인생의 행복과 득실이 결정되기에 사람이 집착하고 추구하는 것은 대부분 헛되이 마음을 쓰는 것이며 이렇게 지은 업력은 오히려 스스로 갚아야 한다고 알려준다. 사람더러 일체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줄곧 나를 일깨워준다.

사부님께서는 “당신은 대법제자의 원만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알고 있는가? 당신 앞뒤의 모든 일을 모두 사부가 당신에게 책임져 주고 있는데 당신이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는가?”[7]라고 말씀하셨다.

이 단락의 법을 생각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마음이 아팠다. 역대 조대(朝代)와 동서고금에 어느 사부가 제자에게 이런 정도까지 말씀하실 수 있는가, 내게 아직도 내려놓지 못할 마음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떤 집착심을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는가?

사부님께서는 “대법은 창세주의 지혜”[5]라고 말씀하셨다. 크기로는 천체우주에서 작기로는 인간세간의 한 단어에 이르기까지 창세주의 지혜와 심혈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사부님께서는 “전통으로 돌아가면 길이 하늘로 통하리니”[8]라고 하셨다.

원래 오천년 신전문화 속에서는 글자 하나 구절 하나 단어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늘로 돌아가는 비밀을 품고 있고, 주불(主佛)의 은근한 기대와 호소 및 길을 잃은 중생이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기를 바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내가 이해하기에 자비(慈悲)의 한층 함의는 바로 중생을 위해 하늘로 돌아갈 길을 까는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소중히 여김을 이해할 수 있었고, 이 천지 사이의 만사만물을 소중히 여기고, 세상에 온 매 하나의 생명을 소중히 여김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는 자기 인체(人體)를 소중히 여기고 말법(末法)말겁(末劫)의 때에 사람 몸으로 주불께 친히 제도 받는 것을 포함한다. 이는 사부님께서 주신 하늘만큼 큰 복이 아닌가!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만이 비로소 이 사람 몸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각지설법 3》<대뉴욕지역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유럽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정진요지 2》<마지막 집착을 제거하자>
(4) 리훙쯔 사부님 저작:《정진요지》<법 중에 용해되자>
(5) 리훙쯔 사부님 저작:《전법륜》
(6) 리훙쯔 사부님 저작:《파룬궁》
(7) 리훙쯔 사부님 저작:《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8) 리훙쯔 사부님 저작:《홍음 5》<다시 만들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7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