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전에 나는 수구(修口)에 문제가 많아서 동수들과 함께 있을 때면 늘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말하곤 했다. 이렇게 하는 게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최근에야 수구를 잘하지 못하는 것은 ”남을 말하는” 배후의 생명이 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이는 구세력이 배치한 것으로 말한 것은 모두 구세력이 배치한 기제 위에 있는 대사다. 이는 마치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가 담배중독이란 이런 생명이 사람을 조종해 담배를 피우게 하는 것과 같다. 즉 수구하지 못하게 하는 이런 배후 요소가 사람을 조종해 수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한다. 사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그는 정확한 사상을 지도로 삼지 못해서 그렇게 끊어버리려 해도 그리 쉽지 않다. 수련인으로서 당신은 오늘 그것을 집착심으로 간주하여 제거해 보라. 당신이 끊을 수 있는가 없는가 보라. 나는 여러분에게 권한다. 정말로 수련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부터 시작하여 당신은 담배를 끊도록 하라. 보증코 당신은 끊을 수 있다.”(《전법륜》)
“한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것을 마땅히 끊어버려야 하지 않는가?”(《전법륜》)
담배중독이란 이 생명은 당신이 담배를 피워야 편안해지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수구하지 못하게 하는 이 생명 역시 마찬가지로 당신이 말을 해야만 그것이 기뻐하고 강력해질 수 있다. 배후의 그 생명이 당신더러 남을 의론하게 하고 남을 비방하게 하는 것으로 만약 주의식(主意識)이 강하지 못해서 배후의 요소를 제거하지 못하면 그럼 영원히 수구하지 못하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단전을 내시하면 그 단(丹)이 반짝반짝 빛나 대단히 좋게 보이다가, 잠깐 사이에 이 단(丹)이 변하는데, 곧 집으로 변해버린다.”(《전법륜》)
이 단락의 법을 배울 때 나는 배후의 이익심(利益心)이란 생명이 발버둥 치며 집을 가지려 하며 당신더러 생각나게 하는데 그것이 당신의 정념보다 강해진 것임을 깨달았다. 오직 주의식을 확고히 하고 법으로 자신을 단속하며 모질게 제거해야만 배후요소를 닦아버릴 수 있다.
나는 또 수구하지 못하면 심각하게 덕을 잃고 업을 짓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 한 점을 깨달았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정견망에 발표한 한 문장에서 어떤 동수가 길에서 짙은 눈 화장을 한 여자를 보고 속으로 “꼭 팬더같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곧장 한 덩이 덕이 날아갔다. 하지만 동수 상호간에 남을 말하는 것은 이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가령 어떤 동수가 병업으로 입원하자 어떤 동수는 말했다.
“그녀는 성격이 좋지 않은데 그러고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리 있겠어?”
또 어떤 이는 말한다.
“전에 그녀는 색(色) 방면에서 잘못을 범했는데 고치지 못한 게 아닐까?”
어떤 이는 말한다.
“그녀는 자식에 대한 정이 너무 중한데 결국 마음을 써도 소용없다니까.”
또 어떤 이는 말한다.
“그녀 집안에서 모순이 끊이지 않았는데 분명 이게 원인이야.”
또 어떤 이는 자신이 많이 안다고 과시하면서 이 동수의 좋지 않은 일에 대해 폭로하는 등등이다.
이 과정에 정면(正面)적인 말은 적고 난(難)중에 있는 동수에 대해 함부로 결점을 지껄이는데 동수를 존중하거나 동수를 돕는 게 아니라 대화 속에서 얼마간 동수를 폄하하고 불경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때로 법 공부 소조에서 어떤 동수는 모(某) 동수가 세상을 떠났다고 말할 때 늘 의론을 이끌어내는데 어떤 개별적인 사람은 또 세상을 떠난 동수에게 전에 남들이 모르는 결점이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면 구세력을 대신해 박해구실을 찾는 것이다. 동수가 병업관으로 세상을 떠나면 사부님께서 원만하도록 정하셨다는 말씀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동수의 부면(負面)적인 것을 말하면 사부님과 대립하는 것이 아닌가? 수련인은 양성(良性)정보를 강조하는데 수구하지 못하면 하는 말이 온통 검은 기로, 이는 동수를 돕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동수를 해치는 것이다. 남과 자신에 대해 좋은 점이 하나도 없다.
수구하지 못하면 정말로 동수에게 덕을 주는 것이다. 당신이 남을 한번 흘겨보거나 좋지 않은 말을 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인상을 쓰거나 심지어 속으로 좋지 않은 생각을 내보내기만 해도 모두 상대방에게 덕을 주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을 대신해 업력을 감당해야 하는데 이는 바보 같은 짓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어리석은 일을 예전의 나는 줄곧 재미있어 했고 자신이 얼마나 많은 덕을 잃고 얼마나 많은 업력을 얻는지도 몰랐다. 이것이 또 얼마나 많은 번거로움을 가져다주는 일인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로 부끄럽고 후회막심이다.
나는 갈수록 수구가 시급하다고 여겼다. 이를 인식한 후 나는 동수들(속인 포함)과 접촉할 때 수구에 아주 주의하며 사부님 말씀을 명심한다.
“수련인으로서 당신은 오늘 그것을 집착심으로 간주하여 제거해 보라. 당신이 끊을 수 있는가 없는가 보라.”(《전법륜》)
매번 입을 열어 말할 때면 주의식을 강하게 하고 이지적으로 하자 올라오는 그런 염두들을 제어하고 억제할 수 있다. 또 동수가 다른 사람에 대해 뒷말을 할 때면 맞장구치거나 함께 말하지 않으며 가급적 좋은 방면으로 인도한다. 이렇게 하자 점차적으로 수구에서 뚜렷한 돌파가 있었다.
현재 층차에서 작은 견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9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