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내가 옳고 남은 틀렸다고 여기면 남이 못마땅해 보이고 남이 눈에 거슬린다. 불만을 품고 원망하는데 이는 오만이자 또한 질투심의 표현이다. 하지만 제거하기란 아주 어렵다. 나는 20여 년을 수련하면서 비틀거리면서 일부 법리를 깨닫고 나서야 서서히 내려놓을 수 있었고 처음으로 질투심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층차에 한계가 있고 단지 얕은 인식에 불과하지만 내 의견을 말해 여러분들에게 참고로 제공하고자 한다.
법무정법(法無定法)이라 옳고 그름은 없고 오직 다름만 있다.
많은 일들은 사실 표면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수련인이 문제를 보는 것은 법속에서 닦아낸 지혜와 진안(真眼)으로 보아야 하며, 현상을 보지 말고 동기와 본질을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야외단체연공에 대해 말해보자. 복장을 통일할 필요는 없는데 그렇다면 날씨가 추울 때 장갑과 모자를 착용하고 따뜻하게 껴입고 연공할 필요가 있는가?
층차 1: 필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추워서 견디기 힘들고 잘못하면 감기에 걸리거나 동상에 걸릴 수 있다.
층차 2: 필요하지 않다. 연공인이 고생을 겪는 것은 좋은 일이며 소업하고 심성을 제고할 수 있다. 또 수련인은 병이 없으니 감기나 동상에 걸리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층차 3: 필요하다. 비록 수련인이 추위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속인이 본다면, 연공하면 옷을 껴입지 못한다고 오해해 추위가 무서워서 감히 연공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선 안 되며 남을 위해 생각해야 하며 홍법(洪法)을 중시해야 한다.
층차에 한계가 있어 나는 단지 이상 3가지 부동한 층차의 인식만을 예로 들었다. 하지만 법리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은 수련자는 아마 보다 많은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의 순서는 아마 이럴 것이다.
층차 4: 필요 없다.
층차 5: 필요하다.
가령 나의 인식이 층차 2에 머물러 있다면 그럼 남들이 필요하다고 말해서 내 인식과 다르다면 그럼 남이 틀렸고 자신이 옳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아주 천박하고 무지한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자신과 다르게 “필요하다”고 여기는 그것 역시 보다 높은 층차와 법리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설사 남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 나보다 층차가 낮은 층차 1에서 나왔다 해도 내가 그를 틀렸다고 여기며 무시하는 마음과 불만족스런 마음이 나타난다면 이 역시 내가 옳은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틀린 것도 아니다. 왜 그런가?
1. 만약 내가 내 인식을 고수하지 않는다면 곧 명백해지는데, 만약 자신이 법에서 좀 더 제고할 수 있다면 자신이 제출할 답안이 바로 “필요하다”가 되기 때문이다. 비록 상대방과 동기도 다르고 내포도 다르지만 표면행동은 오히려 같아진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제고해 올라간 후 곧 상대방의 행위와 같아진다면 그럼 나는 왜 지금 불평불만의 마음을 가지는가? 이것이 자신의 제고를 가로막고 자신이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2. 층차 1은 속인의 인식이다. 안일을 추구하고 고생을 두려워하는데, 속인에 대해 말하자면 틀린 것이 아니며 이 한 층의 이치에 부합한다. 사람 이 한층 공간이 비록 낮긴 하지만 역시 법(法)의 일부분이다. 그런데 내가 만약 속인의 행동을 무시하고 원망한다면 이는 이 한 층의 법을 무시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속인 그 한 층차로 떨어진 것이 아닌가? 이는 법에 대한 불경이자 자신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3. 안일을 추구하지 않고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수련인의 심성표준으로 속인보다 높다. 만약 상대방을 층차 1에서 층차 2로 제고시키려 한다면 오직 평화적으로 부드럽게 선을 권해야 한다. 상대방이 따르려 하면 따르는 것이고 따르지 않으면 억지로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수련이 승화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셨다.
“당신이 수련하려 하지 않으면 누구도 당신을 강제로 수련하게 할 수 없는데, 그렇게 하면 나쁜 일을 하는 것과 같다.”
속인이 다른 사람을 강요하며 자기 의견을 따르게 할 때면 흔히 말투가 격렬하고 때리거나 욕을 하거나 심지어 총칼을 사용한다. 수련인이 비록 이렇게 하진 않아도 상대방을 무시하고 저촉하며 불만을 갖고 원망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강요하는 것으로 정도는 다르지만 본질에서는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수련인은 에너지가 있어서 바르지 못한 사상과 행위는 다른 공간에서 살상력이 아주 강해서 속인이 총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더욱 해롭기 때문이다.
정견망에 발표된 문장 《나의 수련과 윤회이야기(하)》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전에 책을 읽을 때 등뒤에서 칼로 한번 찔리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니 동수가 내게 나쁜 말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젊은 남자가 천목이 열렸다 하며 사람을 속이느냐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쳐다보니 그의 칼이 거두어졌다.”
여기서 사람을 해친 동수는 자신의 관념 때문에 다른 동수를 의심했는데 다른 공간에서는 이렇게 큰 상처를 조성한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현실생활 속에서 우리는 이보다 더 심한 말도 하지 않는가?
4. 사부님께서는 《도항》〈미국서부법회설법〉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여래(如來)란 진리를 딛고서 여의롭게 왔다는 이런 하나의 세상 사람의 호칭이지만, 진정한 부처인 그는 우주의 보위자(保衛者)이다. 그는 우주 중의 일체 바른 요소를 책임질 것이다.”
내가 있는 제한된 층차에서 깨달은 것은 우리 머릿속에는 마땅히 그 어떤 부면(負面)적인 사유나 생각도 없어야 하며, 우리의 행위와 사상을 포함해서 일체가 다 정면(正面)적이어야 한다. 그럼 우리가 있는 환경 역시 따라서 변하는데 오직 이렇게 해야만 바른 요소를 위해 책임질 수 있다.
반대로 머리에 부면적인 생각이 가득하다면 사람에 대해서나 일에 대해 불평불만이 가득하게 되고, 그럼 바른 요소와 대립하는 것으로 마(魔)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을 대하든 오직 부면적인 사상과 정서가 나오기만 하면 반드시 자신이 틀린 것이며 그 어떤 구실도 찾지 말아야 한다.
5. 왜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여기는가? 왜냐하면 속인이 형성한 관념에 따라 누가 옳으면 곧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명(名)을 구하는 마음이 아닌가? 자아[가아(假我)]에 대한 집착이 아닌가?
집착심은 또한 아주 교활해서 패거리 짓기를 좋아한다.
지난 주 동수와 함께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우편함에 진상자료를 넣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동수는 자신의 질투심에 대한 인식을 말했는데 나는 일부 관점은 찬성했지만 일부는 그다지 옳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깊은 토론을 하진 못했다.
그 후 나는 생각했다. 동수는 왜 내게 이런 말을 했을까? 이는 내가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질투심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평소 이 방면에서 아주 주의했고 동수와 함께 하든 아니면 가정 안에서든 질투심으로 모순을 일으킨 일이 아주 적었으니 마땅히 이 방면에서 문제가 나타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어떤 일이든 모두 우연은 아니며 안으로 찾아보는 것이 필수다. 이 일념을 움직이자 문득 내가 최근 확실히 다른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이나 행동을 한 적은 없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에 대해 원망했음을 알았다. 이 집은 지은 지 수십 년이 된 아파트라 건물이 낡아서 자연히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어서 사는 게 그리 쾌적하지 않았다. 나는 수시로 원망하는 말을 했는데 이것 역시 질투심이 아닌가?
다시 자세히 생각해보니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왜 원망을 품었음에도 나는 몰랐는가? 왜냐하면 내가 그것(건물)을 아예 생명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물은 모두 영(靈)이 있으니, 수련인은 세간 만물에 대해, 고의로 대법을 파괴한 것을 제외하고, 모두 마땅히 자비심을 품고 선의적으로 정면으로 대해야 한다. 또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선하게 대하면서 그것의 장점과 우수한 점을 보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것의 단점만을 보았다.
내가 그것을 생명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무신론(無神論)의 독소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또 “눈으로 봐야만 진실”하다는 관념의 영향을 받아 육안으로 본 것만을 진짜로 여기고 중시했기 때문이다.
남에게 질투심을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할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자신의 집에 대한 집착심을 느슨히 한 데는 또 한 가지 원인이 있다. 바로 자신이 남에게 좋지 않은 생각을 품으면 모순이 따라서 오고 자신을 해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에 대한 원망은 오히려 아주 안전해서 그것이 반발하며 나를 비난하거나 또는 나를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느슨히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질투심을 제거한 목적이 완전히 대법에 동화하는데 있지 않았고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하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위사(爲私)한 염두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깨끗이 제거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그렇다면 자신을 보호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편안히 지내려고 하는 것으로 이는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어떤 나를 보호하는가? 물론 관념과 업력으로 구성된 그 자아 즉 가아(假我)다. 이 일체 바르지 못한 배후는 바로 사(私)이며 바로 이 자아였던 것이다.
겉보기에 간단하게 보이는 몇 마디 불평 배후에 이렇게 많은 것들이 있었던 것이다. 무신론의 독해, 눈으로 본 것만이 진실하다는 관념, 상처 받길 두려워하는 마음,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 및 그것들 배후에 숨어서 일체를 지휘한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 등이다. 그것들은 패거리를 지어 나타났는데 서로가 서로를 엄호하면서 서로 결탁하고 서로 도우면서 사람의 사상과 행위를 통제하려 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안으로 찾지 않으면 그것들의 본래 면목을 똑똑히 보기가 아주 어렵다. 안으로 찾음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상(無上)한 법보(法寶)로 그가 있으면 일체 바르지 못한 모든 것은 다 숨을 곳이 사라진다.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대법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07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