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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고 나쁨은 일념에서 나옴”을 깨닫다

일본 대법제자

【정견망】

최근 두 차례 수련체험을 통해 나는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좋고 나쁨은 일념에서 나옴”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관(關)을 넘거나 마난(魔難)중에서 만약 이 법리를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다면 더 빨리 관과 난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를 통해 우리가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데 교란과 장애를 조성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전에 밖에 나가서 자료를 배포하는데 울퉁불퉁한 길을 가다가 실수로 발목을 삐끗했는데 즉시 뼛속까지 아픈 것을 느꼈다. 이때 내 머릿속에서 반영되어 나온 것은 구세력의 교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고 또 가령 다음에 자료를 배포하러 갈 때 영향을 주진 않을까 등과 같은 그 어떤 사람의 의념도 없었다. 당시 나의 첫 일념(一念)은 바로 “좋고 나쁨은 일념에서 나온다”는 사부님의 법이었다.

그 후에 나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했다.

“발목은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였다. 이렇게 몇 번을 말하자 불과 1분도 되지 않아 다리가 정말로 처음처럼 좋아졌다. 내가 신체에 대한 관을 넘기면서 이번이 가장 빨리 관을 넘긴 것이다.

오늘 아침에는 또 알러지 증상이란 가상(假相)이 나타나 끊임없이 재채기와 콧물이 났다. 그때 나는 이미 포륜(抱輪)을 하고 있었는데 몸이 아주 피곤함을 느꼈고 다리도 불안정했으며 온몸에 힘이 없었다. 사람의 관념이 올라왔고 버틸 수 있을지 의심했다.

바로 이때 나는 단번에 며칠 전에 발생했던 발목이 아플 때 일념의 차이로 좋아진 일을 떠올렸다. 이에 곧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괜찮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사람의 관념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비록 알러지 증상이 내가 세 가지 일을 하는데 영향을 끼치진 않았지만 수시로 나타났고 또한 최근 들어 빈도가 좀 많아졌다. 나는 당장 사라질 것 같지 않았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증상은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서 습관적인 사유와 눈으로 본 것만이 확실하다는 관념이 나로 하여금 곧바로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에 생각했다. 갑자기 생긴 발목 통증(관념이 일시적이라고 여김)과 비교하면 알러지 증상은 늘 금방 좋아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전형적으로 사람의 관념으로 사물을 판단한 게 아닌가? 신(神)이라면 이렇게 생각하겠는가? 또 수련 중에서 나는 법리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했을 때 매번 늘 다른 문제에도 응용할 수 있었는데 이런 것을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발목 통증 가상과 알러지 가상은 또 무엇이 같지 않은가? 내가 이해하기에 “좋고 나쁨은 일념에서 나옴”은 수련의 관(關)마다 다 운용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곧 더욱 명석해졌다. 사부님께서는 《각지설법 15》〈2019년 뉴욕법회설법〉에서 “당신이, 얼마나 높게 수련하고 싶으면, 당신은 과감히 하기만 하면 된다!”라고 알려주셨다.

나는 우리가 과감히 하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신(神)의 일면이 과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후천관념에 장애되어 과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런 종류의 과감히 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것은 모두 사람 중에서 형성한 완고한 관념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경고하는 말〉에서 말씀하셨다.

“만약 당신들이 사람마다 모두 내심에서 법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위력이 끝없는 법의 체현 ― 인간 세상에서 강대한 불법(佛法)의 재현(再現)이다!”

대법은 이렇게 크고 불가능이란 없다. 대법이 우리에게 현현(顯現)해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심에서 법(法)의 무한함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사람의 생각[人念]이 신의 생각[神念]으로 전변되는 중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사상관념과 불신(不信)이 있는지 발견했다. 나는 곧 정념을 견정히 하고 나는 괜찮으며 또한 더는 그런 견디기 힘들다는 느낌이 없으며 그 힘든 느낌을 따라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힘이 없고 견디기 힘들다고 느끼면 곧 습관적으로 그렇게 견디기 힘든 것을 따라가고 신체 역시 틀어진다.)

바로 이런 견정한 정념 때문이었는지 내가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 기적이 발생했다. 속인이라면 포륜(抱輪) 시간이 길어지면 뒤로 갈수록 더욱 힘들어야 하는데 나는 포륜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가뿐해졌다. 방금 전까지 심했던 알러지 증상이 단번에 사라졌고 나는 다시 가장 좋은 상태를 회복했다.

과거에 “좋고 나쁨은 일념에서 나온다”는 이 단락 법에 대해 나는 그저 교통사고나 갑작스레 위험이 닥쳤을 때만을 겨냥한 것으로 아주 편협하게 인식했다. 사실 법은 너무나 큰 것으로 내가 보기에 이 법은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

좋다고 하는 이 일념을 생각할 수 있으려면 완전히 좋아졌음을 믿지 못하는 그런 사람마음의 잡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대다수는 다 눈으로 본 것만이 확실하다고 여기며 소위 증상으로 표현된 가상과 사람 속에서 형성한 각종 습관적인 인식과 관념 때문에 좋아지긴 힘들다는 그 일념을 만들어낸다.

내가 이해하기에 우리가 좋아졌다고 여길 때면 사실 자신에게 정념을 더해주는 것으로 바로 초상적이다. 사람이라면 곧 병이 있게 마련이고 병이란 주기(周期)를 거치게 되며 병의 표현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큰 법을 수련하며, 사부님께서는 우리의 수련은 점차적으로 사람에서 벗어나 신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럼 우리가 사람의 생각에서 신의 생각으로 전변할 때면 그럼 사상에서 초상적으로 된 게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또 《전법륜》에서 “물질과 정신은 일성(一性)”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그것이 좋아졌다고 생각할 때면 다른 공간에서 이런 좋아진 물질이 형성되지 않겠는가? 이 물질이 우리에 의해 끊임없이 강화될 때면 정념이 형성한 이런 물질장(物質場)이 강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신념(神念)으로 전변될 때면 대법은 자연히 우리에게 그의 위력과 초상성을 펼쳐낼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상 상태가 그 한 층 법의 표준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신의 일념이 한 우주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시간에 속박당하고 믿지 못하는 관념, 사람의 습관 등등의 요소에 장애되어 사람에서 걸어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뿌리를 캐다〉에서 말씀하셨다.

“수련 중에 사람의 어떠한 것을 섞든지 모두 극히 위험하다.”

우리는 자신의 그런 완고한 사람의 생각 때문에 수련중의 관과 난을 만들고 가상 속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데 어떤 이는 심지어 소중한 사람 몸까지 잃는다. 만약 이런 사람의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정말로 지극히 위험하다!

아마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아직 그 층차까지 수련하지 못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수련은 예전의 개인수련과는 다르다. 우리가 닦는 것은 우주대법(宇宙大法)이며 우리는 모두 부동한 천체의 주(主)와 왕(王)이 사부님을 따라 세상에 내려왔기에 심원(深遠)한 근기를 지니고 있다. 아울러 우리는 또 주불(主佛)께서 직접 구도해주신 큰 행운을 얻었는데 사부님께선 창궁의 우주중생을 구도하시기 위해 이미 우리에게 무량한 신통과 지혜를 주셨다.

우리는 단지 일체 사람마음과 관념을 내려놓기만 하면 되며 오로지 한마음으로 중생을 구도하려고만 하면 된다. 육신(肉身)에 나타나는 이런 가상이 어찌 신우주(新宇宙) 미래의 대각자를 구속할 수 있겠는가! 내 기억에 명혜망에도 이런 문장이 올라오지 않았는가? 설사 신수련생이라도 감옥에서 박해받을 때 그에게 오직 정념만 있다면 그럼 유암화명(柳暗花明)이 되는데 이런 예는 아주 많다.

이 법이 아주 큰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사부님께서 《홍음 2》〈사도은〉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제자에게 정념이 있으면 사부는 회천력이 있노라.”

아울러 사부님께서는 거듭해서 우리가 구비한 그런 초상적인 능력은 모두 우리의 본능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본능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해하기에 바로 자신이 원래 마땅히 지녀야 할 능력과 상태가 아닌가? 다만, 우리가 신(神)의 사유 및 초상적인 상태에 습관이 되지 않아 사람의 일부 습관화된 상태를 당연하게 여겼을 뿐이다. 때문에 사람이 고수하는 사유에서 벗어나 신(神)의 사유로 전환하려면 우리는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서야만 도달할 수 있다.

지금은 이미 정법(正法) 최후 단계에 도달했다. 우리는 시간과 정력을 모두 중생구도에 써야 하며 자신의 사람 관념에 장애받아 소중한 시간을 지연시켜선 안 된다. 또한 소위 병업 가상의 소용돌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중생구도에 전력을 다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 명혜 라디오에서 최근 〈사람에서 걸어나오다〉를 방송했는데 이 역시 우리에 대한 사부님의 요구이자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직 정념을 확고히 하기만 하면 되는데 사람과 신의 구별은 바로 그 일념(一念)사이에 달렸다.

나는 “좋고 나쁨은 일념에 달렸다”(《전법륜》)는 것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천기(天機)이자 법보(法寶)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이 법리를 운용해 우리 수련의 관난(關難) 중에서 사람생각을 철저히 신의 생각으로 바꾸는 것을 통해 크고 작은 관난을 넘어가게 할 수 있다. 뼛속까지 형성된 사람의 이치가 본래 구비한 선천 본성을 가로막지 못하게 해야 하며, 진정으로 사람에서 걸어 나와 신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상은 내 층차의 깨달음으로 법에 없는 부분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16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