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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성연(聖緣)’에 대한 감수와 깨달음—명혜라디오 《밀레르빠전기》를 듣고

자해(子海)

【정견망】

‘성연(聖緣)’이란 신성한 연분을 말한다. 생명이 오직 ‘정(情)’에 물들기만 하면 성결(聖潔)로 돌아가기 어렵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어렵다. 또 금세(今世)에 정과(正果)를 이루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쉽지 않다고 해서 수련을 하지 않겠는가? 한 ‘생명’으로서 수련을 하지 않는다면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인간의 생활을 향수하는 것은 모두 막다른 길임을 알고 있다. 결국 생명은 되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되돌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타락하게 되고, 타락하면 반드시 도태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정’이 무거웠지만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일찍이 당신과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 정이 진했는데 또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수행(修行)을 해서 모두 승화하면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을 수 있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정’이 무거울수록 더 깨끗해질 수 없고 남을 해치며 또 자신을 해친다. ‘친정(親情)’은 ‘성연(聖緣)’이 아니며 ‘성연’에는 반드시 ‘정’이 없어야 한다. 믿지 못하겠다면 내 말을 한번 들어 보라.

나는 개인적으로 수련하기로 정해진 연분이라야만 ‘성연’이라 부를 수 있고 비로소 함께 선과(仙果)를 맺을 수 있다고 본다. 만약 ‘성연(聖緣)’이 아니라면 필연코 타락하기 마련이고, ‘정연(情緣 정의 연분)’이 꼭 악업(惡業)을 낳진 않을지라도 언제 다시 ‘성연’을 만날 수 있겠는가, 너무나 어렵다. 윤회전생(輪迴轉生)하는 생명 중에서 생생세세 늘 성연과 연결되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설사 사찰 속에서 도를 닦는 사람을 포함한다 해도 아주 드물다. 업력이 다르고 인과가 다르며 미래의 길이 다르기 때문인데 지금 현재를 소중히 여기는 것만이 밝은 지혜다.

‘복수’는 생명의 가장 큰 타락인데 밀레르빠(密勒日巴)는 과연 어떤 ‘선근(善根)’이 있었기에 일세(一世)에 도를 얻어 성취할 수 있었는가? 여기서 간단히 묘선[妙善 역주: 《묘장왕 딸의 수련전기》에 나오는 묘선을 말하는 듯] 및 그녀의 속세 친구들을 말해보자면,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에 묘선과 불연(佛緣)을 맺어 수련인이 되었고 ‘성연’을 맺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큰 환희이고, 슬픔과 기쁨 및 이별의 고통을 멀리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밀레르빠 부처의 도제(徒弟) 중에는 그의 친족이 아닌 사람들이 많다. 이야말로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고 늘 선한 사람과 함께 한다(天道無親常與善人)”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친연(親緣)’이며 이는 ‘친정(親情)’이 아니다. 때문에 ‘성연’을 맺고 진정한 ‘친연(親緣)’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희(聞喜 수련하기 전 밀레르빠의 이름)는 왜 ‘복수’를 했을까? 이는 모두 인류의 ‘명리정(名利情)’ 때문이다. 즉 돈 때문이고, ‘친정’ 때문인데 모친의 더 큰 원한이 어린 문희에게 무거운 압력을 등에 짊어지게 했고, 악업(惡業)이 그를 에워쌌기 때문이다. 이에 문희는 즐거운 노래마저 일종의 죄가 되었고, 어머니는 문희를 억지로 절에서 귀부(鬼府)로 끌어들여 그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고통 받는 것만이 효도라고 여기게 했다. 대체 무슨 문(門)의 ‘효(孝)’이고 무슨 문(門)의 ‘자(慈)’이기에 아들더러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하는가?

속어 중에 ‘실심풍(失心瘋 미쳐서 정신이 나갔다는 뜻)’이 있는데 어떤 사람의 선량이 마귀에게 집어삼켜져 죽이고 싸우는 것을 표현한다. 무엇 때문에 남의 목숨을 아이들 장난으로 여기는가? 오직 인간 세상의 ‘명리정’이 뜻대로 되지 않아,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미안한 일을 하면 자신도 복수하려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든 누명을 문희에게 뒤집어씌우고, 그를 벼랑 끝으로 밀어버렸다. 그 때 그의 모친은 단지 자기만 생각하고, 문희가 장차 짊어질 인과응보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우선 ‘친정’을 이용해 복수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버린다고 핍박해 문희를 도덕으로 납치해 사람을 죽이는 주술(呪術)을 배우게 한다. 한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이 모친의 도리란 말인가? 이후에도 아들에게서 손을 떼지 않고 더욱 나쁜 마음으로 자신의 생존욕망을 채우고 점차 자신과 문희를 물러날 곳 없는 궁지에 몰아넣어, 마도(魔道)로 들어가게 하고 더 악독하고 사악한 마음을 내어 무고한 사람들에게까지 똑같이 악랄한 주술을 써서 계속 폭풍을 내리라고 문희를 강요한다. 이는 권력과 이익을 다투는 현대인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아직 그들 가족 간의 윤회와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모르며, 그들 모자 사이의 인과관계도 모른다. 아마 이 모든 것은 더 이전의 인과를 맺기 위한 것이거나 또는 밀라레빠를 성취시키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 그는 이렇게 큰 시달림을 거치면서, 심령(心靈)에서 신체에 이르기까지, 악(惡)을 행하던 데에서 스스로 희망이 없음을 자각했고, 최후에 바른 도(道)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지녔.

문희는 감당할 수 없을 때 자살을 생각했지만, 오직 과거에 지은 업력이 너무나도 커서 쉽게 갚기 어려웠고, 결국 억지로 관문을 넘겼다. 최후에 밀레르빠가 열반할 때, 한 생명이 하늘로 돌아가는 어려움과 고생을 말했다. 사실 그때는 부원신(副元神) 수련이라 아무리 근기가 좋은 생명이라도 수련하려면 아주 어려웠다.

생명이 정법(正法)을 얻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으로 얻고 나서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이는 자신을 망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는 제자들이 진흙을 완전히 제거하고 이에 물들지 않기란 역시 아주 어려우니 오직 더욱 정진할 뿐이다.

사부님, 제자는 그 어떤 언어로도 이 과분한 은혜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 생명의 근본으로도 이렇게 큰 은혜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 구우주의 나 자신이든 신우주에서 있을 이후의 나든, 업력으로 가득한 나를 정결하고 새로운 나로 환골탈태하게 해주셨으니 이는 제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저는 예전에는 몰랐던 많은 일들에 대해 이미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티베트 민중들이 큰 절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사존 앞에서 이런 큰 절을 올리고 싶다. 생명의 회귀(回歸)는 선량을 되찾고, 복수하지 말아야 하며, 선량을 지키는 데 달려 있다.

한 걸음에 한 번의 절, 한 걸음에 한 송이 연꽃, 한 걸음에 하나의 회귀, 한 걸음에 하나의 감사, 오직 이렇게 해야만 사존 곁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