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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과 일의 관계를 바로 놓다

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나는 90년대에 출생한 청년 대법제자다. 아주 일찍 법을 얻었지만, 학창시절에 한때 속세에 빠져 있다가 최근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착실한 수련을 알게 되었다. 이 기회를 빌려 최근 수련과 일의 관계를 바로잡은 심득체험을 사부님께 보고 드리고 여러분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나는 승부욕이 아주 강한 사람으로 매사에 늘 돌진하여 남을 뛰어넘고자 했다. 다년 간 사당(邪黨)의 세뇌를 받아 태도가 강경하고 독선적이며 남을 무시하고 남의 감정은 고려하지 않았다. 진화론이 주입한 인류의 생존경쟁에 관한 관념 때문에 현대 교육은 무슨 일을 하든 1등이 되도록 다툴 것을 격려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자 강렬하게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 허영심, 명리심, 질투심을 형성해 마치 검투사처럼 훈련시켰고, 사적(私的)인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만들어 최종적으로 사람을 훼멸로 몰아간다.

이렇게 강한 쟁투심(爭鬪心) 때문에 나는 오로지 학업에만 전념했으며 장기간 수련과 일의 관계를 바로잡지 못했다. 이 기간에 수련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상태에 놓였고 늘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전념할 수 없다고만 느꼈다. 지금 보면 이러한 관념은 본질적으로 명리(名利)에 집착하는 구실에 불과하며, 그 속에는 유물론의 독해(毒害) 작용도 포함되어 있다.

1. 명예심, 체면심, 허영심

나는 많은 때 자신이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죽어라 애쓰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완전히 자신의 명예심, 체면심,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제자: 우리에게 허영심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습니까?

사부: 정(情)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이 당신을 좋다고 하면서 칭찬하는 것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이 당신을 존중하는 걸 좋아하는데, 당신의 형상에 손상을 주는 어떠한 일이든 당신은 모두 두려워한다. 이러한 심리상태가 생기면 바로 허영심인 것으로서 집착이다. 사람이 체면을 차리기 좋아하는 마음 역시 매우 강하다. 사실 마음을 내려놓고 그렇게 많은 보따리를 지니지 않는다면 더욱 빨리 수련하게 된다.”[1]

다른 사람의 찬양과 칭찬 및 존경은 나에 대해 말하자면 일종의 중독과 욕망에 비유할 수 있다. 마치 고기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이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욕망과 마찬가지로, 나는 영예를 얻는 느낌을 좋아해서 줄곧 그 느낌에 끌려 다닌 것이다. 이는 매우 위험한 것이자 또한 이용당하기 쉬운 것이다. 체면을 위하여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과시하고 실증하고 일부 자신의 부족한 점이나 잘못은 덮어 감추는데 이는 진(真)이 아니다. 또 뒤따라온 질투심으로 남에게 선량하지 못한 표현을 드러낸다. 또한 체면심은 변이된 소위 강한 자존심으로 나타나 억울함이나 수모를 당했을 때 “대인지심(大忍之心)”[2]을 갖기 어렵게 한다. 그러니 이러한 명예심, 허영심은 진선인(真善忍)을 완전히 위배한 것이다.

속인 중에서든 수련인 중에서든 명리에 미혹되어 하루아침에 망친 사례는 아주 많다. 수련인은 세상의 득실(得失)을 구하지 않고 자연스러움에 따름을 중시한다. 나는 반드시 명리, 허영이라는 이런 더러운 욕망 때문에 이 만고(萬古)의 기연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에게 공을 준 목적은 그로 하여금 수련하여 위로 제고하라는 것이었다. 좋은 일을 하는 동시에 자신의 공능을 개발하여 자신의 공을 자라게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이치를 모른다.”[2]

2. 속인의 가늠하는 관념을 제거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에서 어떤 제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제자: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과학연구를 잘하려면 전심전력으로 몰입해야 합니다. 하지만 또 법 공부를 해야 하고 진상을 알려야 할 뿐만 아니라 연공도 해야 하므로 늘 시간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사부: 아직도 이 문제를 제기하는가. 사부는 이미 매우 많이 해답했다. 내 생각에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당신들은 여전히 대법을 제일위(第一位)에 놓아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또한 당신의 일에 책임져야 하며 되도록 잘해야 한다.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여전히 당신 자신이 배치해야 한다. 당신이 너무 바빠서 책을 볼 수 없다고 한다면 그건 수련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완전히 자신의 일에만 정력을 쏟겠다고 한다면 당신은 바로 속인이다. 단지 이런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할 따름이 아닌가? 그럼 당신은 잘 배치하도록 하라. 이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사실 나는 『전법륜』 중에서 이미 아주 똑똑하게 말했다. 법 공부를 잘한다면 수련 중에서 절대 당신의 무엇에 영향 주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일을 하거나 공부하는 데 효율이 훨씬 높을 것이다.”[3]

나도 과학기술계통에 종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한 제자가 말한 “과학연구를 잘하려면 전심전력으로 몰입해야 한다”는 말을 잘 이해한다. 전에는 사부님의 해답을 보고도 줄곧 똑똑히 알지 못했는데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이는 마땅히 아주 간단한 일로 내가 배치를 잘하면 된다. 그런데 왜 나 여기서는 이것이 아주 어려운 일이 되었는가? 내가 이 일을 잘 배치하고 평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속인의 관념이 형성되는데 특히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많은 관념과 표준으로 한 사람을 가늠한다. 그의 사회계층, 학력, 직업 등등인데 등급(等級)이 높을수록 더 대단하고 각고의 노력을 거쳐야만 보다 높은 등급을 얻을 수 있다.

속인들에게 있어 계층이 다르면 마치 무대가 다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층 생명이 보기에 이런 무대들은 모두 같은 층차에 있는 것으로 상, 중, 하의 구별이 없다. 한 수련인으로서 해야 할 것은 속인의 가장 높은 무대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그런 역할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선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하는 것이다. 그 어떤 무대에서 그 어떤 역할이 주어진든 모두 그 역할을 잘 만들어내야 한다. 특정한 어떤 일이나 어떤 등급을 겨냥해 “전심전력으로 몰입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사존께서 알려주신 것과 같다.

“사람은 세상에서 많은 관념을 양성했으며, 관념에 이끌려 동경하는 것을 추구한다.”[4]

많은 경우, 나는 늘 관념에 근거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이 노력할 방향을 유도하곤 하는데 흔히 늘 결과로 행동을 결정한다. 끊임없는 법 공부를 통해 나는 알았다.

“눈앞의 성공과 이익에만 급급하다. 이런 사상은 사당(邪黨)이 주입한 당문화(黨文化)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을 잘하라. 하는 과정 중에서 당신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것이지 당신의 성공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하는 과정 중에서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는 과정은 당신이 수련 제고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중생을 구도하는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당신이 그 일을 달성해야만 중생구도의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5]

지금 나는 늘 스스로에게 겉으로 드러난 득실만 보고 행동 방향을 이끌면 안 된다고 일깨워준다. 과정에서 자신의 심태가 가장 중요한데 속인 중에서 형성된 관념과 가늠하는 표준을 제거해야 한다.

“인류의 도덕표준이 어떻게 변화하든지 이 우주의 특성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그는 좋고 나쁜 사람을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그렇다면 한 수련하는 사람으로서는 곧 우주의 이 특성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하며, 속인의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2]

3. 극단으로 가지 않기

당문화(黨文化) 교육 체제 하에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학습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입을 받아왔다. 부모, 학교, 사회의 이념은 곧 “네가 공부만 잘하면 그만이고 다른 것은 상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학습에 담긴 의미는 주로 성적과 석차를 뜻한다. 이런 이념에 따라 여러 차례 단맛을 본 나는 이 관념을 더욱 인정하게 했다. 오직 가장 중요한 그 일만 잘하면 나머지는 못해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역주: 원문은 일백차삼추(一白遮三醜)로 피부가 희기만 하면 못생긴 3가지는 가릴 수 있다는 뜻. 이렇게 특정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다른 것들은 모두 희생시키는 이런 관념도 당문화의 일종이다.]

나중에 서서히 명예와 이익을 다투는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면서 수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나는 스스로 세 가지 일을 잘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덧 또 다른 극단으로 들어갔다. 속인의 일에 점차 흥미를 잃게 되었는데 특히 곤란(困難)에 부딪혔을 때나 병목에 부딪혔을 때 그랬다. 실질적으로 이것은 자신의 안일한 마음을 감추고 곤란을 피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다른 동수들은 하루 종일 진상을 알려, 하루에 여러 사람을 구할 수 있지만, 나와 같은 이런 상황에서는 중생을 구하는 수량이 아주 적다. 이렇게 소극적이고 불평하는 마음을 품고 일을 하니 매번 메일함을 볼 때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고, 책임자가 새로 무슨 메일을 보낼까 두려웠고, 새로운 메일이 없으면 속으로 슬며시 기뻐했다. 이렇게 할수록 부면(負面)적인 요소가 끊임없이 이런 소극적인 심태를 강화시켜 자신의 능력을 끊임없이 부정하게 했다. 이 임무는 너무 어려워서 나는 그것을 완성할 능력이 없다고 여기게끔 했다.

나는 곤란이 닥쳤을 때 또는 모종의 상황에 갑자기 부닥쳤을 때, 부면(負面)적인 사고가 늘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해서 내가 자상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게 했고 그 어떤 일에도 늘 인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내 수련의 길이며, 아울러 틀림없이 내게 가장 적합한 수련의 길일 것이다. 이런 곤란은 꼭 이런 형식으로 나타나지 않고 다른 형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데, 내 할 일이란 바로 이 어려워 보이는 길에서 대법의 요구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해서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어느 날 새벽 비몽사몽간에 한 가지 염두(念頭)가 치고 들어왔다. 그 의미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는 일이 아주 어려워 보이지만, 내가 실제로 했을 때는 내가 합류했기 때문에 이 일의 구조에 곧 변화가 생겨 더는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깨어난 후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았고 부면적인 사유를 다 쓸어버려 정념(正念)이 충족해졌고 사존(師尊)의 점오(點悟)에 감사드린다.

결론

얼마 전 나는 중간평가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논리도 명쾌하게 정리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안으로 찾음에 따라 곧 아주 평범한 오전이 되었고 나는 자신도 모르게 좋은 문장과 생각이 솟구쳐서 답안지에 명확한 개요를 나열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내가 끊임없이 소재를 축적하고 맥락을 정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이 과정은 바로 내가 끊임없이 이 한 층의 법리를 깨닫는 과정이었다.

명예와 이익을 다투는 소용돌이 속에서 나를 일깨워주신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제자는 반드시 이 만고의 기연(機緣)을 소중히 여겨 자신의 서원(誓願)을 실천하겠습니다!

주:
[1] 리훙쯔 사부님 저작: 《오스트레일리아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 2》<원만을 향해 나아가자>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16년 뉴욕법회설법》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