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영화 《우리는 원래 신이었다》가 동수들 사이에 적지 않은 진동을 일으켰다. 많은 동수들이 영화 속 다른 공간의 표현을 보고 진감(震撼) 받았고 아울러 더 정진하려는 마음이 생겼다.
이것은 본래 아주 좋은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중 일부 동수들은 또 미묘한 사람 마음이 뒤섞여 영화를 어느 정도 현실로 여기거나 심지어 대법에 불경한 언사가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모른다.
얼마 전 한 1인 미디어 동수가 생방송에서 나쁜 사람들이 대법제자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대응하면서 문화적인 각도에서 예수 시대에 발생한 일을 언급했다. 그중 도마라는 한 제자는 오직 예수 부활을 직접 보고, 못 박힌 자국을 직접 만져보고 나서야 믿었다. 예수는 그에게 “보지 않고도 주를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다. 이 동수는 한 가지 견해를 제시했는데 신적(神跡)은 잊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일은 내게 한 가지 일을 생각나게 한다. 해외에서 법을 얻은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얼마 후 교통사고를 당했다. 혼수상태에 있는 동안 그녀는 아주 선명한 꿈을 꾸었다. 사부님 앞에 절을 올린 후 줄곧 삼계(三界)까지 몸이 날아서 내려왔는데 최후에 병원 침대에 떨어져 온몸에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
깨어난 후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모두에게 생생하게 설명했고 매우 격동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녀는 점차 대법제자 단체를 떠났다.
그렇다면 그렇게 진실한 경험을 했던 그녀는 왜 계속 정진하지 못했는가? 왜냐하면 신적은 잊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당신이 “본 것”이지 당신 자신이 아니다.
수련 중에서 우리는 “물질과 정신은 일성(一性)”(《전법륜》)임을 안다. 대법제자들의 ‘정념’ 역시 물질 형식을 갖고 있다. 이 물질은 어디서 오는가? 오직 사부님만이 우리에게 연화(演化)시키실 수 있다.
“당신들의 정념(正念), 당신들이 한 일체가 모두 법 중에서 오기 때문에 여러분은 더없이 다망하더라도 법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2002년 미국필라델피아법회 설법》)
나 개인의 수련체험에서 말하자면, 정념(正念)은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공부하고 법에서 지혜와 깨달음을 얻거나, 수련 과정에서 관을 넘거나 마난 속에서, 사람 마음과 관념을 없애는 과정에서, 법에서 부처님의 호탕한 은혜를 깨닫고, 법에서 우주의 보다 높은 진기(真機)를 깨닫고, 이를 통해 정념을 확고히 하고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믿음이 더욱 커진 것에서 온다.
이 과정에서 오직 사부님만이 나쁜 물질을 제거해 정념(正念)으로 전화(轉化)시키실 수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곧 수련할 마음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기고 마음을 써서 법을 공부하는 것이다. 후천적인 관념이 갈수록 적어지고 정념이 갈수록 강해지면 대응하는 것은 자신이 대법에 더 많이 동화되며 진아(真我)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적인 물질로 드러나는데 동화한 매 하나의 입자는 모두 대법에 부합한다. 이런 미시적인 물질은 삼계(三界)라는 이 층의 입자보다 훨씬 더 위력이 강하기 때문에 “잊혀질 수 없는데” 바로 이런 개념이다.
어떤 동수들은 영화를 보고 법을 더 깊이 공부하고 법 공부에서 더 많은 수확이 있었다. 이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는 정념은 법에서 오는 것이지 영화에서 온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영화를 제작한 사람도 동수지만 영화가 아무리 높아도 그들 자신의 수련 층차(이것 역시 동수가 대법에서 수련해서 얻은 것이다)에 예술적 가공을 더한 것보다 높을 수는 없다. 나는 가슴에 손을 얻고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영화에 나오는 내용은 사부님의 대법과 경문 내용에 비해 훨씬 못한데 왜 우리는 기어코 정념을 강화하기 위해 애니메이션을 눈으로 봐야만 하는가? 왜 법 공부에서는 얻지 못하는가?
수련 중의 많은 것들은 아주 오묘해서 형언할 수 없다. 여기서 “형언할 수 없다”는 것은 흔히 사람의 표현 방식으로는 형용하거나 드러낼 수 없음을 뜻한다. 그것은 인류 층차를 초월하는 더욱 미시적인 물질 존재로서 오직 진수제자(真修弟子)만이 자신이 있는 층차에서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반대로 눈으로 봐야만 믿을 수 있다면 이는 자신의 수련에 어려움을 더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여전히 한 마음으로 대법 속에서 바른 믿음[正信]에 의지해 착실히 수련할 수 있는 동수만이 비로소 가장 착실하게 수련하고 가장 대단한 것이 아닌가? 당신이 영화 속의 애니메이션을 어느 정도 현실로 여겼다면, 이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수련을 방해하고 현실이 그런 거라 여긴 것이 아닌가? 아울러 다른 공간의 광경은 분자 이 층의 입자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매 제자가 본 것 역시 단지 자신이 있는 그 층차 경지의 표현일 뿐 우주의 진상은 아니다.
대법제자 중에서 어떤 대면적인 파동(波動)이든 모두 불필요한 마난을 가져올 수 있다. 과거 십수 년 동안 사부님께서는 ‘파동’이 발생한 후 우리에게 이미 여러 차례 설법하고 바로잡아 주셨다. 그러나 일단 사부님께서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설법하셨다는 것은 표준이 높아진 것을 의미하며 그 후 이 방면에서 수련의 길이 더 어려워진다. 비슷한 예로 《소설 『창우겁(蒼宇劫)』에 관하여》를 들 수 있다. 여기서 사부님 경문의 마지막 두 단락을 인용해 여러분들과 함께 격려하고자 한다.
“하지만 소설은 바로 소설로서, 대법제자가 각종 방식을 이용해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원하는 한 가지 형식이다. 그중 대법제자의 수련 소득이 있지만 역사로 간주할 수는 없다. 정법의 과정은 내가 말하지 않으면 신(神)마저도 단지 그중의 한둘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당신들은 혹독한 시련을 거쳐 걸어온 것으로 절대 마음이 바람만 불면 따라서 흔들리는 부평(浮萍)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7733
